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72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묵지가 불쑥 물었다.
그때, 열운자가 고개를 번쩍 쳐들어 대전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묵지도 이내 대전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이옥지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순간, 강력한 작열감이 밖에서부터 훅 끼쳐왔고 그 기운에 이끌린 대전 안의 불 속성 원력이 형태 없는 소용돌이를 형성하며 사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마치 지능을 가진 것처럼 경배하듯 사방으로 퍼져 길을 만들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느긋하게 다가오는 한 남자에게 꽂혔다. 붉은 갑옷에 얼굴은 전부 가려져 있었는데 하얀 머리카락만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는 소매가 없는 하얀 피풍(披風)이 나부꼈는데 갑옷에 새겨진 하얀 주작 문양과 어우러져 엄청난 위엄을 내뿜었다.
남자는 대전의 세 사람을 본 척도 않은 채 지나쳐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에서 뿜어진 상상을 초월하는 열기가 대전을 가득 채웠다.
대전 내부의 모든 원력이 끓어오르듯 붉은 갑옷의 사내 주위를 맴돌며 화염 소용돌이를 형성해 묵직한 위압감을 풍겼다.
대전 안의 불 속성 원력이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수련성의, 이 성역의 모든 불 속성 원력이 그 남자에게로 응집되었기 때문이다.
쇄열기 수준의 노인 넷이 따라 들어와 붉은 갑옷의 사내 곁에 섰다.
사내는 몇 걸음 나와 자리에 앉았다. 화염이 이글거리는 듯한 그의 눈빛이 투구 너머로 뿜어져 나와 세 사람에게 닿았다.
강력한 원력이 신식의 침투를 가로막아 누구도 그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실수
대전 안은 고요했다. 그만큼 사내의 등장은 무척 충격적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불 속성 원력에 이옥지의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꼭 아궁이 속에 들어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사내의 등장으로 불 속성 원력의 중심이 된 이곳의 열기를 견뎌내기는 벅찼다.
“시음종의 이옥지라 합니다. 주작성황을 뵙습니다.”
열운자 앞에서도 고고함을 유지하던 그녀는 묵직한 위압감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치 시음종 선배에게 하듯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묵지의 눈빛은 기이하게 변했다. 그러나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던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출운국 묵지, 주작성황을 뵙습니다.”
갑옷의 사내는 시선을 묵지에게 돌렸다가 이내 열운자에게로 옮겼다.
열운자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침착하게 포권을 했다.
“나천성역 전가의 열운자입니다. 나천성역 뇌선전을 대표하여 주작성황의 제위를 축하드리러 왔습니다.”
한제의 시선은 열운자에게 제법 오래 머물렀다.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웃고 있는 듯했다. 다만 그 웃음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열운자는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새로운 성황의 눈빛에 그는 어째서인지 불안해졌다. 더구나 그 곁의 쇄열기 수준 노인들도 전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운자라⋯⋯.”
갑옷의 사내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투구 안에서 울리면서 흘러나와 불 속성의 회오리에 흩어져 사라졌다.
불안함이 더욱 짙어진 열운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를 아십니까?”
사내는 열운자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묵지를 바라보았다.
묵지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의심을 애써 억누르며 포권을 했다.
“성황이시여, 저는 출운국을 대표해 새로운 주작성황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습니다. 제 스승님께서 선물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는 허공을 움켜쥐어 균열을 만들어냈다. 허나 그 균열은 대전을 가득 채운 원력 탓인지 무척 불안정해 보였고 심지어 무너져 내릴 조짐을 보였다.
갑옷의 사내가 손을 들어 균열 근처의 원력을 살짝 흩은 후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광경에 곁에 있던 이옥지와 열운자의 눈빛이 살짝 굳었다.
묵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균열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단약과 선보 등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자 주작성종 사람들이 다가와 받았다.
묵지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것은 남색과 녹색이 어루어진 작은 깃발이었다. 깃발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주위로 음산한 기운이 퍼져 나가더니 대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 속성 원력마저 멈칫하게 했다.
갑옷의 사내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깃발을 바라보았다.
“이 깃발에는 스승님께서 수백 년 전 제련하여 봉인한 정혼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한제는 손을 뻗어 깃발을 가져가 자세히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나천성역 뇌선전의 대표로 온 열운자도 선물을 꺼냈다. 그것 또한 제법 가치가 나가는 것이었지만 한제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선물을 바친 열운자는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성황 폐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사실 축하를 드리기 위함이기도 하나 개인적인 용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성황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열운자는 말을 이었다.
“3년 전, 주작성종이 청림의 선부에서 한 사람을 데리고 갔다 들었습니다. 이한제라는 자인데 혹시 주작성종에 필요한 게 아니라면 제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갑옷의 사내 곁에 있던 노인들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싸늘한 눈으로 열운자를 바라보았다.
“이한제를 원하느냐?”
갑옷의 사내가 열운자를 향해 느릿하게 물었다.
열운자의 불길함이 더욱 커졌다. 새로운 성황의 목소리에서 언짢은 기색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네 노인의 눈빛에 심장이 덜컥했다.
붉은 갑옷의 사내는 열운자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대전을 가득 메운 불 속성 원력은 급속도로 회전했다. 머지않아 원력 안에는 전광이 줄기줄기 드러나며 파지직 하는 소리까지 울려 펴졌다.
열운자는 주춤주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혹시 이한제가 주작성종에⋯⋯.”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한제라는 자 너희 나천성역의 정뇌선이라 들었다. 네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뇌선전에서 원하는 것인가?”
붉은 갑옷의 사내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열운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자가 우리 나천성역의 정뇌선이기는 했으나 뇌선의 자격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그는 붉은 갑옷의 사내를 힐끔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를 원하는 것은 제 개인적인 일 때문이기는 하나 뇌선전의 뜻이기도 합니다.”
붉은 갑옷의 사내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격하게 웃는지 투구가 들썩일 지경이었다.
“그래? 그자와 너, 그리고 나천성역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열운자는 점점 불길해졌으나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자와 뇌선전은 여러 가지로 엮였던 터라 일일이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와의 관계로 말씀드리자면 그자는 우리 전가의 가보를 가져갔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가만둘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 그렇다면 데려가려 할 만하지.”
붉은 갑옷의 사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의 네 노인은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으나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바라옵건대, 저희 나천성역과 사성종은 같은 적을 두고 있는 만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열운자는 약간 안심하며 포권을 했다. 본래 누구보다도 오만한 그였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를 취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사성종이 쇠락한 상태라고는 하나 얕잡아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한제 그자가 전가의 가보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어찌 나는 모르고 있을까?”
붉은 갑옷의 사내가 돌연 물었고 열운자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내는 투구를 한 손으로 훑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제를 원한다고 했는가? 자 여기 있다!”
투구가 파문으로 변해 사라졌고 그 너머로 한제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 이한제!”
열운자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그답지 않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몇 걸음이나 물러난 그는 당황한 듯 외쳤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네가… 이건 말도 안 돼!”
열운자의 두 눈동자는 바짝 졸아든 상태였다. 그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그에게 한제는 미물 같은 존재였다.
“겁도 없구나! 주작성종 성황의 자격을 따지려 들다니! 이것을 뇌선전과 나천서역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렸다!”
한제 곁의 노인 중 한 명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호통 치듯 외쳤다. 그 순간, 쇄열기 수준의 기운 한 줄기가 곧장 열운자에게로 돌진했다.
“큭!”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열운자는 강력한 힘에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면서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이제야 어쩔 수 없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
“열운자 성황이 된 나를 축하하러 온 것이냐, 아니면 성황을 끌고 가려고 온 것이냐? 나천성역을 대표해 왔다는 자가 이리 나오다니!”
한제의 목소리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이에 대해 확실히 해명하지 못한다면 네놈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내일부로 나천성역 또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나천성역을 대표해 찾아온 네 만행에서 시작되었음을 출운국의 묵지 도우가 증언해줄 테니 어디 발뺌을 해보거라!”
여전히 엄청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열운자는 한제의 불호령과 그 안에 담긴 기운에 또 한 번 왈칵 피를 토해냈다. 그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뭔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묵지가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천성역의 열운자가 방만하게도 주작성종의 성황을 모욕했음을 이 묵지가 출운국을 대표하여 한 치의 거짓 없이 증언할 것입니다!”
그때, 이옥지가 고혹적인 눈을 번득이며 살짝 웃었다.
“소녀도 그리하겠습니다. 이 일은 열운자 선배의 무례한 요구로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겠습니다.”
그 말에 열운자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해내더니 맹렬히 고개를 들어 한제를 노려보았다.
한제는 냉소하며 자리에 앉더니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열운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상대가 무리한 요구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강하게 나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묵지는 수시로 한제를 힐끔거렸다. 스승님이 말한 오랜 친구가 한제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그는 감개무량한 심정이었다.
주작성에서 처음 그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비 오는 날 밤, 낡은 절 안에서 마주했던 당시의 상대는 방금 막 경지를 얻어 화신기에 이른 상태였다. 두 사람은 비록 처음 만난 사이였으나 그날 밤중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제는 묵지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