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usiness RAW novel - Chapter 5
CHAPTER 05. 쓸모없는 일의 즐거움
“나는 수도는 재미가 없지만, 그대에겐 재밌는 것이 있을 거요. 아, 그렇다 해서 그대와 함께 하는 것이 재미없다는 말은 아니오….”
평정심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자카리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횡설수설 알 수 없는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수도에 가면 고티에 왕자의 성에 머무를 거라느니, 그쪽 성은 아르노 성보다 더운 편이라 좀 더 얇은 옷을 입어야 할 거라느니 등등, 굳이 지금 이야기 할 필요 없는, 쓸데없는 말들이었다.
비앙카는 조용히 그의 말을 계속 들어주기는 했으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항상 목적이 있는, 필요한 말만을 건네는 사내였다. 일견 쓸모없는 것처럼 들리는 말일지언정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무슨 의미가 있는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표정관리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점점 비앙카의 미간 사이에 미묘한 주름이 지기 시작했고, 곧은 눈썹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불편한 심기는 바로 얼굴에 드러났다. 더듬더듬 이상한 말을 늘어놓고 있던 자카리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엉뚱한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
입을 다문 그는 몇 번 입을 벙긋이더니, 신음과 함께 침중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밤 되시오.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인사를 건넨 자카리는 도망치듯 뒤돌아섰다. 후다닥 방을 나서려는 그의 발걸음이 빨랐다.
자카리가 자갈돌을 흩뿌리듯 던져둔 말들을 곱씹던 비앙카는 한 박자 늦게 그의 작별인사를 눈치챘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왜 이러는지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렇다 하여 그를 이렇게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건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불렀다.
“여보.”
비앙카의 부름에 자카리의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자리에 우뚝 섰다. 비앙카도 혀끝에 맴도는 어색한 울림에 순간 멈칫했다. 여보라니. 회귀 전에라도 그를 이리 친밀히 불러본 적이 있었는가?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부른 호칭을 두어 번 곱씹어 보았다. 여…, 보. 여보. 여전히 낯설다. 비앙카는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싶은 욕망을 참아 누르며, 용기를 내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수도에 데려가 준다 해서 정말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그녀의 솔직한 진심이었다.
지금까지의 그녀는 고마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면 왠지 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치가 겨우 그 정도에 기뻐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 순순히 인정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항상 비앙카는 자존심으로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자카리와 줄다리기하듯 입을 꾹 다물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었다.
이제는 그것이 부질없는 자존심 싸움이라는 걸 알았다.
자카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녀를 마냥 거부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으니 되었다. 회귀 후 그와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하더라도 기대해본 적 없던 그의 호의가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아 얼떨떨하긴 했다.
그렇다 해도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저 호의일 뿐인 그의 마음의 추를 확고한 호감으로 확 기울여 넘기면 좋지 않겠는가.
비앙카는 잠시 바닥을 보았다가, 슬쩍 시선을 올려 자카리를 응시했다. 그는 망치로 머리를 후려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비앙카는 눈을 휘어 접었다.
그녀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뺨에서 턱 끝까지 이어지는 둥근 선이 초승달처럼 빛났다. 흰 살결은 달빛을 반사하는 눈처럼 희었고, 연분홍빛 입술 사이로 희고 가지런한 이빨이 슬쩍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선명한 웃음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비앙카는 자카리 또한 마주 웃어 줄 거라 생각했다. 어색하게나마. 떨떠름하게나마. 하지만 자카리는 못 볼 거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좋은 밤 되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후닥닥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마치 더 이상 이 방에 있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자카리가 떠나가고 방에 혼자 남은 비앙카는 알 수 없는 그의 태도에 활짝 웃던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환한 미소는 풍화되어 스러지는 돌벽처럼 파스스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비앙카의 손끝이 조심스레 제 입 끝을 매만졌다. 보드라운 뺨을 스치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내 미소가…. 이상했나? 괴물 같은 모습이기라도 했던 거야? 어디서 못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비앙카는 망연자실한 낯으로 자카리가 떠난 방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 그는 내가 웃는 모습을 보기 싫은가 보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비앙카는 이제 앞으로 자카리의 앞에서는 최대한 웃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 * *
밤새 흰 눈이 내렸다. 소복히 쌓인 눈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이렇게 종아리까지 쌓인 눈으로 거동이 힘들어지는 날이면, 종종 마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토로하기 위해 영주를 찾아오곤 했다.
어깨에 노루나 토끼 같은 것들을 짊어지고 찾아온 이들은 마을의 소소한 분쟁거리를 늘어놓았으며, 빈손으로 찾아온 이들은 갖은 안타까운 사연을 늘어놓으며 식량을 빌리려 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며 자카리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영주의 의무다. 자카리는 공명정대한 눈으로 마을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아침부터 밀려오는 영주민들을 상대했다. 오늘따라 일이 많았던지라, 자카리는 오전이 다 지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자카리는 뻐근한 등 근육을 풀어주듯 어깨를 크게 돌렸다. 뱅상은 레몬과 계피, 로즈마리를 띄운 뜨끈한 포도주인 뱅쇼를 자카리에게 내어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급하지 않은 일은 내일로 미루셨어도 되셨을 텐데요.”
“평소 자주 자리를 비우는 영주이니만큼, 일할 수 있을 때 일하는 게 좋지. 게다가 그들도 생업이 있는데, 두 번 발걸음하게 하여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지 않나.”
뱅쇼를 벌컥 들이킨 자카리는 폐부를 채우는 따끈함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성으로 귀환한 지도 벌써 사흘째였지만 자카리는 아직도 자신이 영지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전쟁터의 천막에서 지도를 펼치고 어디에 진지를 구축할지 의논을 나누던 것이 어제 같은데, 이제는 등 뒤에서 날아올 화살 걱정 없이 여유롭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따뜻한 한 잔의 뱅쇼도 곁들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에는….
뱅쇼로 목을 축인 자카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비앙카는?”
“어제와 같습니다. 가스파르 경과 시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셨어요.”
“시녀라면.”
“이본느라는 시녀입니다.”
자카리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본느라는 시녀는 분명 하녀였던 것 같은데, 언제 시녀로 올린 걸까. 죽은 유모가 아닌 다른 사람을 곁에 두는 비앙카라니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 함께 있는 걸 싫어하는 편이었으니까.
가스파르야 그녀 혼자 돌아다니다가 괜한 일을 겪을까 걱정된 자카리가 다소 억지로 붙인 호위였을 뿐이었지만, 이본느라는 시녀는 어떤 연유로 곁에 두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뱅상은 알고 있을까 싶어 자카리가 넌지시 그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뱅상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자카리가 귀환할 때쯤부터 한참 그를 맞이하는데 집중했던 터라 상대적으로 마님에게 소홀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뱅상이 모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본느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뱅상을 질책할 수도 없고. 어쩌다 가까워진 건지는 본인들에게 묻는 것이 제일 확실할 테지만, 굳이 물어볼 정도의 사안은 아니었다.
자카리는 쯧, 혀를 차고는 평소처럼 비앙카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식사는?”
“아침은 올리브 절임 세 알이셨습니다.”
“여전히 조금 먹는군.”
“아침은 입맛 없어 하시니까요.”
“그래.”
자카리의 다물린 입이 못마땅하게 비틀렸다. 자카리는 대식가는 아니었지만 무인답게 매 끼 식사는 꼬박꼬박 챙기는 편이었다. 아침에도 빵 두 덩이와 베이컨 세 덩어리, 계란 두 개 등으로 풍족하게 배를 채운 그가 보기에 올리브 세 알은 새 모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비앙카의 몸이 가늘고 가볍다 해도, 어떻게 그 정도만 먹고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더 먹으라 한다 해서 되는 일은 아닌지라, 자카리는 침중하게 신음을 흘렸다.
“혹시 우리 성의 요리가 입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마님께서 그런 종류의 불만은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는 터라.”
“하긴.”
뱅상의 곤혹스러운 답에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쉐포르 백작은 외동딸인 그녀를 부족함 없이 키웠고, 백작의 뒤를 이어 그녀의 법적 보호자가 된 자카리 또한 하나뿐인 아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비앙카는 불만스러운 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대놓고 말했으며,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아르노 성의 요리가 맛이 없었다면 진즉 맛이 없다며 이런 것도 요리라고 내오는 것이냐, 요리사를 바꾸라 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아르노 성의 요리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는 뜻일 터였다. 자카리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요리사에게 그녀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좀 더 고심해보라 하게. 그리 조금 먹으니 아직도 그렇게 체구가 작지.”
“네. 알겠습니다.”
뱅상은 고분고분 답했다. 그 어떤 진귀한 요리를 가져다 드린다 하더라도 ‘저’ 마님이 양껏 먹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지만, 그의 주인인 자카리가 그리 명하니 그러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의 명이니만큼 한동안은 메뉴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테고, 난데없는 미션에 아르노 성의 요리사가 머리를 잔뜩 쥐어뜯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던 와중 로베르와 소뵈르가 자카리를 찾아왔다. 가스파르의 일이었던 병참 재정비와 마사관리를 떠맡은 만큼 그에 대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로베르가 먼저 운을 뗐다.
“백작님, 왼쪽 성벽의 보수가 끝났습니다.”
“아아. 서쪽 숲에 요새를 짓는 일은 어디까지 진척되었나?”
“석재나 목재 같은 자원 채취는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눈이 내려서 속도가 잘 나지 않습니다.”
“너무 서두르다 사고가 나면 큰일이니 조심하도록. 정해진 대로 일주일에 사흘만 징집하는 것을 꼭 지키고.”
“알겠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는 안식일로 귀족이건 농노건 할 것 없이 전부 쟁기와 펜, 무기를 내려놓고 신의 가호를 기리며 쉬는 날이었다. 그리고 농노의 경우 삼 일은 영주의 일을 돕는데 동원되었고, 농노 스스로의 땅을 경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은 삼 일 뿐이었다.
간혹 어떤 영주들은 욕심을 내느라 삼 일의 기간을 지키지 않고 더 오래 농노를 부려먹곤 했다. 그렇게 되면 농노는 자신의 땅을 경작할 시간이 없게 되고, 그들이 가난해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농노가 가난해지면 의욕이 떨어지고, 병에 더 쉽게 걸리기도 했다. 그러면 결국 영지 자체가 가난해지게 되는 만큼, 자카리는 부하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기간을 지키게 시켰다.
로베르에게 대략적인 보고를 들은 자카리는 대기하고 있는 소뵈르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마사는 어떠한가?”
“저희가 없는 동안 새끼 말이 두 마리 태어났더군요. 노쇠해서 죽은 말은 두 마리고, 한 마리는 부상으로 죽었습니다. 죽은 말은 가죽을 벗기고 고기는 소시지로 만들어 걸어놨답니다. 마사 관리사가 잘 관리하고 있어 제가 처리할 건 저희와 함께 온 군마들의 관리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좋아.”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처리가 막힘없이 매끄러우니 걱정을 다소 덜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돌았다.
소뵈르는 슬쩍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왠지 그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입꼬리 끝이 미묘하게 올라가고, 눈빛이 너그럽다. 원래의 자카리였더라면 꼼꼼한 부분까지 점검하고 캐물었을 텐데, 오늘따라 좋다는 말이 흔쾌히 나왔다. 누가 봐도 명백히 들떠 보이는 모습이다.
뭐, 하루 정도는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리는 날도 있어야지. 소뵈르는 속으로 히히덕거리며 경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작님, 무슨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갑자기 왜?”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요.”
“그런가?”
의뭉스레 대꾸하는 자카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질문한 소뵈르는 물론이거니와 로베르와 뱅상 또한 자카리의 태도에 눈을 깜빡 떴다. 자카리가 기분 좋을 이유가 뭐가 있을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어도 될까,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가신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자카리가 이제야 퍼뜩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보니 어제 비앙카에게 다녀왔네.”
“…네?”
얼마나 자연스레 대화의 흐름이 흘러갔는지, 아무도 자카리의 미소와 비앙카를 연결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자네들 말대로 그녀의 의사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수도에 같이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봤네.”
가신들은 눈만 껌뻑였다.
그들의 주군은 대체로 느긋한 편이었다. 부하들의 자율권을 존중했으며, 호불호가 강하지 않아 대체로 모든 일들을 뱅상을 비롯한 부하들에게 맡기곤 했다. 물론 상황을 항시 꼼꼼하게 점검했으며 꼬박꼬박 보고 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마치 부하들과 소통이 잘 되는 상관 같지만, 스스로 결단을 내린 것에 있어서만큼은 고집불통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주장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행동이 빨라, 타인의 의견이 개입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상황을 정리해버리는 것이었다. 마치 텅 빈 모래사장만을 남기고 휘몰아쳐 사라지는 폭풍처럼.
그는 자기 혼자 일을 결정 내리고 처리한 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통보하기가 부기지수였다. 좋게 말하면 일처리가 빠른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가 정한 것에 있어서는 남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않는 고집불통이었다.
하지만 고집과 자기주장이 강한 모습이 주군으로서의 결단력과 연결되니, 마냥 단점이라 꼽을 수도 없었다. 특히 전쟁터에서 그런 자카리의 통솔력과 결단력은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자카리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만이었다.
그들은 전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도에 가는 것은 내년 봄이다. 장기간의 여정인 만큼 일찍부터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고, 혹여 귀족 마나님이 같이 가게 되면 챙겨야 할 것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미리 동행 여부를 알려주는 쪽이 좋긴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이렇게 빠르게 이야기 하실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백작 마님을 수도로 데려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말한 것이 바로 어제였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자카리의 조급증에 불씨를 틔운 것일까.
자카리의 세 가신들의 눈이 의아함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왜 그리 빨리 일을 처리하셨느냐 물어봤자 돌아올 대답은 빨리 처리할수록 좋은 게 아니냐는, 당연함에 가득 찬 눈길일 게 분명했다.
소뵈르는 뒷목을 긁적였고, 로베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자카리의 주장대로 이런 일은 빨리 처리하는 게 속이 편하다. 귀찮으면 귀찮을수록 더더욱.
어차피 비앙카는 자카리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험난하고 고된 수도 행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유행하는 가구나 의상 등은 제법 매혹적인 것일 테지만, 그 이상으로 비앙카는 폐쇄적인 여자였다. 사교적이지 못한 그녀는 생전 처음 발을 내디딘 공간에서 장신구나 가구 등을 둘러볼 만큼 여유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녀가 거절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괜히 수도의 빠르고 사치스러운 유행에 맛을 들였다가 아르노 가의 재정 상황이 크게 흔들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 문제였다. 지금도 충분히 사치를 부리고 있지 않던가.
좌우지간 그들은 비앙카가 자카리의 제안을 거절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그것이 확신과 소망이 반반일지라도. 로베르는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뭐라 하십니까.”
“가고 싶다 하더군.”
“당연한…. 네?”
당연히 비앙카가 자카리의 제안을 거절했을 거라 생각한 그들은 예상치 못한 자카리의 답에 말문이 틀어 막혔다. 로베르는 말끝을 흐렸고, 소뵈르는 입을 떡 벌렸으며, 지금껏 심기를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자카리의 시중을 들고 있던 뱅상마저도 눈을 크게 홉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분명하다.
비록 주군의 말이었지만, 그들은 불경하게도 의심을 품었다. 그만큼이나 비앙카가 수도 행을 찬성한 것은 모두의 예상을 뒤집은 일이었다.
그들의 눈에 경악이 가득 차올랐으며, 모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자카리는 그런 부하들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무척 고맙다고도 했어.”
자카리의 시선이 멀어졌다. 검은 눈동자는 물먹은 머루처럼 아련했다. 그는 어제의 일을 곱씹는 듯, 했던 말을 조용히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이내 쿡쿡 웃기까지 했다. 소리 내어 웃는 자카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가신들은 자신들이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귀신에 홀린 것이던가.
그만큼 자카리의 행동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가신들은 당혹스러움을 쉽게 감추지 못한 채 입만 뻐끔였다.
먼저 용기를 내어 나선 것은 로베르였다. 그는 눈에서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 여전히 혼란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저, 백작님…. 실례지만, 마님께서 정말 그렇게 답하셨습니까?”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듯한 질문이로군.”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자카리의 대답에 로베르는 재깍 고개를 숙였다. 자카리가 저리 나오는 걸 보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의 주군이 거짓으로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면 정말로 마님이 수도 행에 찬성했단 말인데…. 지금껏 현실 도피하듯 외면했던 일이 사실이라는 것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지 그들은 괜히 뱃가죽을 슥슥 긁었다.
우왕좌왕하는 부하들의 심정을 뻔히 읽은 자카리는 불쾌해하며 혀를 찼다. 이게 그리도 믿기지 못할 일이란 말인가? 자카리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좌우지간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게. 내년 수도 행에는 그녀도 함께야.”
자카리의 말은 확고부동했다. 결과가 뒤바뀔 리 없다는 것을 깨달은 부하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종달새를 잡을 수 있다지만, 그것도 종달새가 눈에 보일 때의 이야기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들은 희망이 없는 현실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르노 성을 지키느라 수도에 가지 않는 뱅상만이 빙긋 웃으며, ‘그럼 저는 혼자 성을 지키게 되겠네요.’라 덧붙였다. 괜히 억울해진 로베르와 소뵈르는 뱅상을 씨근덕 노려보았지만, 뱅상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좋은 여행 되시라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그 미소가 퍽 천연덕스러워, 두 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 * *
로베르와 소뵈르 앞에서 웃어넘기기는 했지만, 뱅상의 속에서도 의심 한 가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카리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보였던 그녀의 이상행동들. 분명 그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언제나와 같았다….
이본느라는 시녀를 곁에 두게 된 것도 그랬다. 앙트의 일로 이본느가 비앙카의 눈에 든 모양인데, 지금껏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던 그녀가 고작 그런 일로 이본느를 전담 시녀로 삼았다니? 그것도 자카리가 돌아오자마자.
딱 봐도 미심쩍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작님에게 보여주기 식의 관계가 분명하다. 뱅상은 잘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시녀를 곁에 두곤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노련한 뱅상이라 할지라도 선뜻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뭔가 꿍꿍이가 있어.’
뱅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얇은 입술이 비틀리며 코밑에 가지런히 난 콧수염이 비틀렸다.
이렇게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백작님은 그녀의 행동이 의심스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기는커녕 심중을 짐작할 수 없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일 뿐이었다. 거기에 호위니 수도니 하는 소리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런 백작님의 행동은 뱅상의 마음에 짐을 한 덩이 더 얹었다.
지금껏 십여 년 동안 한결 같았던 그들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동시에 손바닥을 훼까닥 뒤집어 버렸다. 가신 된 입장에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답답했다.
마님이 바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백작님은 그런 마님에게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하다. 무슨 감언이설로 백작님을 속여 넘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뱅상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뱅상은 그리 생각하며 비앙카의 앞에 섰다.
갑자기 오늘 아침 호출이 있었다. 보통 비앙카가 그를 부르는 이유는 새로운 사치품을 사기 위해서였던 만큼 뱅상은 혀를 찼다. 아르노 가를 위하느니 뭐라느니. 역시 거짓말이다. 언뜻 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녀의 본질은 그대로였다…, 라고 뱅상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뱅상의 생각을 비웃듯, 비앙카가 건넨 말은 뱅상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뱅상은 비앙카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직은 정정하다 생각했는데, 나이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뱅상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네?”
“내가 이제 나이가 찼으니, 아르노 가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나둘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말했네.”
“…….”
비앙카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반복했다. 두 번째 듣는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얼떨떨하다. 뱅상은 자신이 들은 게 맞는가, 혹여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이것저것 재보며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푹신한 쿠션이 얹어진 의자에 앉아 뱅상을 올려다보는 비앙카의 표정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다. 비앙카는 뱅상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물끄럼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로서는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지만, 도통 비앙카를 믿을 수 없으니 쉽사리 그리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뱅상은 비앙카의 가는 어깨를 잡고 탈탈 털어서라도 진실을 듣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불경스러운 행동이지만, 그렇게라도 저 조막만 한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뱅상은 그럴만한 위치가 되지 않았다. 비앙카의 진심을 가늠하듯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뱅상은 결국 혀를 찼다.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비앙카가 지금껏 방치해두었던 의무를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마님께서는 일꾼을 고용한다거나 농사일, 시장의 물가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시니…. 일꾼의 관리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직원들의 봉급을 비롯한 성의 예산에 대해서는 제가 기록한 문서를 드리겠습니다. 문서를 보고 현장의 분위기를 파악하신 뒤에 실권을 잡으셔도 될 것입니다. 어차피 내년에는 성을 비우시니까요. 본격적인 일들은 수도에서 돌아오신 뒤 지휘하셔도 될 것입니다.”
“내 남편이 믿는 그대를 믿네. 그대에게 전부 맡길 테니 부탁하네.”
비앙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 수긍하는 태도는 까탈스러움이 없었지만, 오히려 더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차라리 뱅상의 일에 트집 잡고 못마땅해 할 때가 더 대꾸하기 쉬웠다. 뱅상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에라도 성을 살펴보시겠습니까?”
“좋네. 옷차림을 정돈할 테니 조금만 시간을 주게. 이본느.”
“네, 마님.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방 한 구석에 있던 이본느는 비앙카의 부름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냉큼 그녀에게 달려왔다. 위에 걸칠 외투를 비롯하여 옷가지를 챙기던 그녀는 오도카니 서있는 뱅상을 흘끔 보았다. 뱅상은 항시 냉정하고 단호하여 하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외시되었는데, 오늘은 그런 그답지 않게 멍한 모습에 이본느는 고개를 갸웃였다.
이본느는 꿈쩍도 않는 뱅상에게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저, 집사님. 마님께서 치장하셔야 하는지라….”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뱅상은 뒤늦게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무리 얼떨떨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아서야! 아르노 성을 책임지는 집사답지 못한 노릇이었다. 뱅상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 마님이 안주인으로서의 일을 배우겠다니!
비앙카의 방문 앞에는 가스파르가 기둥처럼 고요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뱅상은 가스파르를 흘끔 보았다. 그러고 보니 호위로 발탁되고 난 뒤, 가스파르는 항시 비앙카의 곁을 지켰다. 혹시 가스파르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뱅상은 넌지시 물었다.
“가스파르 경, 마님께서 최근 심경에 변동이 있을 만한 일이 있었는지요?”
“딱히 없었습니다.”
가스파르의 답은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뱅상도 별다른 기대 없이 물었던 것이지만, 가스파르의 답은 일말의 희망조차 송두리째 뽑아버릴 듯 단호했다. 그러면 그렇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스파르 경에게 유의미한 대답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뱅상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한숨은 아까보다 더욱 깊어져 있었다.
뱅상이 비앙카의 꿍꿍이가 무엇일까 골몰한 것이 우습게도, 비앙카의 속셈은 별것 아니었다.
겉으로는 살랑이는 체 하며 뱅상의 뒤통수를 쳐 골탕 먹이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갑자기 철이 들어 아르노 가를 책임지기 위한 대의를 깨달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자카리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고찰한 결과였을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그녀의 보신(保身)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자카리가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한 발 떨어진 거리를 유지했다. 야심한 시간에 그녀의 침실에 찾아오더라도 사무적인 볼일이 있기 때문이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비앙카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자카리와 거사를 치루기를 바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비앙카로서는 가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자카리를 어찌하겠는가? 마음만 같아서는 그의 목에 줄을 매고 침대로 질질 끌고 와서 엎어트리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체격 차가 크다 보니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비앙카로서는 자카리가 ‘그럴’ 기분이 되도록 꼬드기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역시 자카리의 취향이 되기엔 나는 너무 어린 게 아닐까. 그는 좀 더 풍만한 여인에게 끌리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앙카 자체가 그에게 있어 썩 매력적이지 못한 여자이든가….
비앙카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빈약한 가슴, 딱딱한 입가, 노려보는 듯 또렷한 눈매. 굽실거리지 않는, 직모인 머리카락은 땋아 내리기조차 힘들다. 금방 풀려버리거나, 간신히 땋는다 하더라도 볼품이 없었다. 게다가 머리색은 한겨울의 나무껍질처럼 칙칙하기 그지없는 고동색. 풍성하고 굽이치는 곱슬 어린 금발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치는 만큼, 비앙카의 외견은 부족함이 많았다.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갈 길이 구만리였다.
그래도 정치적 동반자는 될 수 있을 거야. 그가 날 찾아오지 않는 건, 그에게 내가 여전히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이고.
비앙카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입맛이 당기면 식사를 하고, 아니면 거르고. 호위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몸에 걸친 것은 모두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새로 맞춘 것들. 잠이 오면 일찍 침대에 눕고, 보기 싫은 상대는 마주하지 않고.
어떻게 봐도 의무는 모두 뱅상에게 미뤄둔 채 쇼핑이나 자기 좋을 일만 하는 철부지였다. 그렇다보니 자카리는 분명 후계자 운운했던 비앙카의 제안 또한 어린아이의 치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거고.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과거 자신의 행동이 현재 자신의 목을 죄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페르낭과의 일로 발목 잡혔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이런 불유쾌한 찜찜함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찰나 마주친 환영은 비앙카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도리질 쳐 들러붙는 환영을 떨쳐낸 비앙카는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의 자신은 페르낭과의 사랑만을 꿈꾸며 귀족 사회에서 도려내지기를 무력하게 기다리던 과거와 다르다.
창밖으로 주렁주렁 내려온 라푼젤의 머리카락이 마녀의 손에 들린 가짜라는 걸 알게 된 왕자는 가시나무 숲으로 추락하고는 장님이 된다. 비앙카는 그 왕자였다. 페르낭의 사랑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수도원으로 내쫓긴 끝에 죽었지만, 왕자가 시력을 되찾은 것처럼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기적으로 이렇게 어린 시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자카리와 마주하니 괜히 초조해진 것일 뿐이야. 나에겐 아직 기회가 많아. 바꿀 수 있는 일들도 많고. 벌써 달라진 일도 있잖아. 수도에 가는 일이라거나…. 비앙카는 진정하기 위해 스스로를 타일렀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돼.
자카리가 죽기까지 앞으로 6년. 짧지만 긴 시간이다. 자카리의 애를 낳는 것이 그녀의 재산을 지킬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만약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아르노 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무리 새로 옹립된 왕과 자카리의 형인 위그 자작이 그녀에게서 아르노 성과 가문을 빼앗으려 해도 호락호락 그녀를 내쫓진 못하리라.
쇠도 달구어져 있을 때 두드려야 하는 법. 굳게 추가한 비앙카는 바로 뱅상을 불렀다. 그녀가 아르노 성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뱅상만큼 적절한 사람이 없었다. 자주 성을 비우는 자카리나 다른 사람보다 이 성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앙카가 그녀의 일을 모조리 뱅상에게 미뤄두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뱅상은 유능했다.
알고 있다. 비앙카가 직접 영지를 살피게 된다 하더라도 뱅상만큼 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 그녀가 열의를 보여줌으로서 뱅상과 그녀 사이에 있는 감정적 골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솔직히 뱅상과 그녀는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나름 잘 지내온 편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서로를 기꺼이 여긴다는 일은 아니었다. 일례로 전생에서 비앙카가 페르낭과의 일이 트집 잡혀 아르노 성에서 내쫓기게 되었을 때, 뱅상은 그녀를 방관하였다. 비앙카 또한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는데도 희희낙락하는 마님이라니. 그쯤 되면 아마 주인에게 품은 존경심은 다 떨어졌고, 남아있는 것은 환멸뿐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때까지 품고 있을 호의란 게 있을 리도 없었다.
비앙카는 그런 그의 선택을 이해하는 만큼, 뱅상과의 긍정적 관계를 구축하자 결심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아니라도 솔직히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구의 손이라도 빌렸을 것이다. 비앙카가 걱정하는 것은 뱅상이 그녀의 제안을 쳐내는가 여부였지, 한번 그녀의 손을 놓았던 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옳은지 따위가 아니었다.
다행히 뱅상은 비앙카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비앙카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수상쩍어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대놓고 묻진 않았다.
뱅상으로서는 급작스러운 제안이었을 텐데도, 그는 이내 능숙하게 비앙카를 데리고 성을 순회했다. 제빵실과 양조장, 목축장 등. 비앙카가 한 번도 발걸음 해 본적 없는 곳들이었다.
제빵실에서는 장원에서 경작한 옥수수를 갈아 빵을 만들었고, 양조장에서는 술을, 목축장에서 치즈와 버터를 만들었다. 영지는 자급자족으로 운용되는 만큼, 때를 맞춰 물건을 비축해두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영지 살림에 신경 쓰는 이들은 자식보다도 귀하게 비품을 살폈다.
이곳저곳을 순회하던 비앙카가 새로운 곳에 도달한 순간,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주춤했지만 뱅상은 거리낌 없이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은 고기 저장소입니다. 초와 베이컨을 만들죠.”
건물 안 대들보에는 소시지와 도축된 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도살장에서 도살되어 오는데도 불구하고 미처 빠지지 않은 피 냄새, 고기가 마르면서 풍기는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처음 코를 찌른 퀴퀴한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비앙카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지만,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고기 저장소에서 일하는 이들은 뱅상에게 아부라도 하듯 굽실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비앙카를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하는 생각이 그들의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 척 봐도 이질적인 귀한 옷차림, 깨끗하게 정돈된 손끝과 귀 뒤, 목은 가늘고 시선은 곧다. 어딜 보아도 귀족 마나님이었다.
그리고 이 성에서 귀족 여성은 단 한 사람뿐이다.
본성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면 몰라도, 성 가장자리에서 일하는 이들은 비앙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이들이 부기지수였다. 그들로서는 본성에 들락날락할 일이 없고, 비앙카 또한 본성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뒤늦게야 비앙카의 정체를 깨달은 그들은 놀라움과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마님이 여기엔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비앙카에게 밉보인 하녀가 어떻게 쫓겨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과장되고 왜곡되어 번져 있던 뒤였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차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동자에는 심지어 적대심마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비앙카에겐 그런 사용인들의 반응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비앙카는 개의치 않고 꼿꼿이 발을 옮겼다. 제빵실에서도, 양조장에서도. 이와 같은 시선을 이미 몇 번이고 받은 뒤였다. 그렇지만 이본느는 내심 걱정되는지, 불안한 눈길로 비앙카를 흘끔였다.
뱅상 같은 이가 이 미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건만, 그는 모르는 척 발을 옮겼다. 어차피 호위로 가스파르 경이 붙어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큰일은 없을 테고, 비앙카가 겨우 이 정도에 주춤한다면 앞으로 성의 살림을 맡아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용인들이 그녀를 거리끼는 것은 모두 그녀의 업보였다.
고기 저장소를 둘러본 그는 구석에 커다란 소금 통을 가리키며 짐짓 엄하게 말했다.
“겨울에는 사냥감이 줄다 보니 고기를 구하기가 쉽지 않죠. 소금에 절여서 조금이라도 오래 보존해놔야 합니다. 미리미리 고기를 절여두어야 하니 가을부터 소금을 쟁여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겨울 대비가 된 상태입니다만. 만약 마님께서 나중에 일을 맡게 되실 때는 꼭 일찍부터 소금을 구비해두셔야만 합니다.”
“알겠네.”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성의 안주인은 성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만큼, 주방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겨울에 날고기를 내놓지 않는 것은 안주인으로서 당연한 소양이었지만 지금껏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던 비앙카로서는 모든 것이 생소할 뿐이었다.
뱅상은 겨울 여러 달 동안 먹을 고기에 소금뿐만이 아니라 무슨 양념이나 향신료를 넣고, 후추와 설탕은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를 시시콜콜 설명했다.
한 번에 쏟아져 내리는 정보는 너무나 많았다. 비앙카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여 넘겼지만, 오늘 저녁만 되어도 자신이 이 태반을 기억하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사용인들이 있는 곳에서 그런 기색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으니 비앙카는 천연덕스레 입을 딱 다물었다. 큰 줄기만 기억하고, 세세한 것은 나중에 뱅상한테 다시 물어볼 생각이었다. 뱅상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테지만, 그래도 그녀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일이니까.
고기 저장소를 둘러본 그들은 밖으로 나섰다. 이제 양초장을 둘러보고 재봉실으로 갈 거라 덧붙이는 뱅상의 말에 비앙카는 강행군이 따로 없다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양초장은 고기 저장소 바로 앞에 있었다. 양초장에서는 저장소에서 도축하고 남은 수지를 사용하여 초를 만들었는데, 한 사내가 솥에 가득 담긴 묵직한 기름 덩어리를 굳지 않게 휙휙 젓고 있었다. 초장이가 초를 만들 재료였다. 비앙카가 느꼈던 퀴퀴한 냄새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초장이는 되직해진 돼지기름에 나무에 매단 심지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반복하니 심지에 점점 살이 붙으며 초가 만들어졌다.
“지금 만드는 것은 수지를 이용한 초입니다. 성에 보급되는 일반적인 초죠.”
“내가 쓰는 것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데?”
“예. 마님과 백작님, 그리고 식당에 사용하는 초는 밀랍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쇠기름 수지를 이용한 것과 달리 그을음이 없고 깨끗하며 매캐한 냄새가 나는 고급품이지요. 벌이 꿀을 만드는 시기에만 만들 수 있는 데다 그 양이 많지 않은 만큼 무척 귀한 물건이랍니다. 보통은 가문의 인장으로 편지를 봉인할 때나 사용하고, 초로 만들어 사용하는 건 교회 의식, 혹은 왕성에서 정도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어두워도 밝혀 버릇하는 그 초가 그리도 귀한 것이었소, 하고 은연중에 질책하는 뉘앙스의 어투였다.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당사자인 비앙카만큼은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저격이었다.
비앙카는 빈정이 상했다. 자신이 사치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자신이 요구하지 않았던 것까지 안겨주고 질책하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아랫사람들 밑에서 별거 아닌 일로 언성을 높이고 싶지는 않았다. 비앙카는 건방지다 버럭 화를 내는 대신, 그까짓 초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히 물었다.
“그렇게 귀한 것이었나? 난 몰랐네. 누가 그 초를 쓰라 하였는가?”
“백작님입니다.”
“백작님께서 왜 그리 지시하셨나 모르겠군. 하다못해 언질이라도 주던가. 그랬으면 내 아껴 쓰지 않았겠는가?”
비앙카의 입꼬리가 빈정거리듯 씰룩였다. 까짓 초 따위가 비싸 보았자 아닌가. 회귀 전 수도원에서 추위로 달달 떨었을 때, 조금의 온기가 그 무엇보다도 간절하던 시절에도 그녀는 초 한 자루 따위를 얻기 위해 자존심을 굽혀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 와서 이런 초 따위로 한소리 듣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눈에 띄게 불쾌해 보이는 비앙카의 모습에 뱅상은 혀를 찼다. 자카리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일반 초는 냄새가 역하고 그을음이 심하니 그녀가 좋아하지 않겠지. 내 아내가 자주 걸음 하는 곳의 초는 밀랍 초로 바꾸게.’
자카리는 귀족이기는 하였으나 사치품에는 관심이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그랬던 그가 밀랍 초를 사용하라 콕 집어 언급을 했으니, 당연히 비앙카의 입김이 들어갔다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해 가지 않는 일이기는 해도 지금 일은 명백히 뱅상의 실책이었다. 뱅상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백작님께서는 마님이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쓰시지 않길 바랐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공연한 말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물론 뱅상도, 비앙카도 정말로 자카리가 그리 생각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저 듣기 좋은, 허울 좋은 변명. 그런 것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넘어갈 만큼 비앙카가 세상 모든 것에 파르르 예민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남사스럽고 귀찮을 뿐이었다. 비앙카는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를 일단락시켰다.
“되었네. 그래서, 이곳에서 난 무엇을 신경 써야 하지?”
“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초가 몇 개가 만들어지는지 개수를 꼭 기록하고 파악해두셔야 합니다. 특히 해가 짧은 겨울엔 초가 귀한 법이죠. 이곳에서 만드는 양초는 마님이나 영주님께서 사용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만, 초 자체가 귀한 물건이다 보니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죠.”
뱅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초장이는 굽실거리는 비굴한 낯으로 그들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높으신 분들께 차마 말을 걸 수는 없으니, 표정으로나마 신뢰감을 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가늘게 찢어진 눈과 얍삽한 턱 끝, 뾰족한 입술이 썩 믿음이 가는 얼굴은 아니었던지라 그의 의도와는 달리 되레 의심을 살 뿐이었다.
양초장에서는 별달리 기억할 것이 많지 않았다. 지금이 겨울이라 더 그랬다. 겨울엔 고기가 적은 만큼 수지도 적게 나왔고, 수지를 녹이기 위해 가마에 불을 뗄 장작마저도 귀했다. 그렇게 비앙카가 뱅상의 뒤를 따라 양초장을 나서려고 할 때, 그녀의 시선이 양초장 구석진 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통 뒤로 빠끔히 나와 있는 작은 털 뭉치에 닿았다.
동물일까? 아니면 사람의 머리카락? 궁금했던 비앙카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쪼그려 있는 것은 바짝 마른 남자아이였다. 초장이가 뽑아낸 초보다도 가는 팔뚝을 휘두르며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잘 보니 양초에 조각을 새기는 중이었다. 흰 양초가 푹푹 패이며 섬세하고 균일한 무늬가 드러난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넌 뭐하고 있니?”
“히익!”
소년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조각하고 있던 양초를 손에서 놓칠 정도였다. 양초가 허공에서 두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공중에 뜬 양초를 받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비앙카의 뒤에서 큰 호통이 쩌렁쩌렁 울렸다.
“니콜라! 너 오늘도!”
아까만 해도 비앙카와 뱅상의 눈치를 보던 초장이가 씩씩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가는 눈에 확 불이 치솟았다. 초장이의 눈에는 니콜라의 행동은 멀쩡한 초를 못 쓰게 만드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니콜라의 조각 솜씨가 썩 나쁘지 않다는 건 초장이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러면 무얼 하는가. 양초의 살이 푹푹 패인 만큼 초는 금방 타올라 없어질 텐데. 그들에게 있어 양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치품이었다.
니콜라는 평소에도 저런 짓을 일삼아 초장이가 몇 번이나 혼쭐을 내주었다. 차라리 나무 조각에 조각을 하는 게 어떠냐 타이르기도 했다. 어차피 태워 녹는 것에 조각을 해봐야 의미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니콜라는 무슨 영문인지 계속해서 초 깎는 걸 고집했다.
그래도 오늘은 눈에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그 새를 못 참고 구석에서 저러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마님에게 들키기까지 하다니. 초장이는 불안한 시선으로 마님을 흘끔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뱅상이 비앙카를 찾아 되돌아왔다.
“마님, 무슨 일입니까?”
초장이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비품을 빼돌린 것도 모자라 상하게 하다니, 크게 경을 칠 일이었다. 니콜라 혼자 벌을 받으면 모르겠지만, 양초장을 책임지는 자신 또한 관리 소홀로 혼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집사장님의 깐깐한 눈치를 보느라 힘겨운데, 니콜라의 일로 더욱 감시의 눈초리가 더해줄 걸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했다.
그런 초장이의 불안은 금방 현실이 되었다. 비앙카의 손에 들린 초를 발견한 뱅상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뱅상은 비앙카의 손에 들린 초만 보고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방 파악했다.
그는 자카리가 위그 자작가에서 뛰쳐나왔을 때부터 함께였고, 자카리가 아르노 성에 입성했을 당시에도 함께였다. 그때부터 지금껏 십삼여 년 간 아르노 성을 돌봐온 만큼, 그는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탁 튀어나오자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뱅상은 황당한 낯으로 니콜라와 초장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그…, 제가 주의를 주기는 했습니다만….”
초장이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역력했다. 뱅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들이 양초를 만들고 있지만, 이건 자네들 물건이 아니라 영주님의 물건이야! 이렇게 깎여나가는 만큼 양초 사용 시간이 줄어들지 않나! 어째서 진즉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그, 적당히 혼나면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저놈 고집이 쇠심줄이라 저희도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습니다요. 훼손된 초를 성에 비품으로 올릴 수도 없으니….”
뱅상이 소리를 지르자 초장이가 얼른 더 변명을 늘어놓았다. 잘못 대답했다가 자신이 책임을 뒤집어쓸까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대꾸는 뱅상의 속을 뒤집었다. 뱅상은 초장이를 닦달하듯 몰아세웠다.
“이렇게 훼손된 초는 어떻게 처리했지? 지금껏 비품 개수 상에는 비는 수가 없었는데?”
“마구간이나…. 저희 양초장에서 쓰기도 하고….”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한마디로 보고 없이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쉬시하며 몰래몰래 처리했다는 게 아닌가. 초를 훔치는 것이 아닌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니콜라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영지에서 일하는 농노인 이상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뱅상은 초장이의 손에 귀를 붙들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니콜라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이걸 정말 네가 했니?”
그러나 뱅상은 미처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그가 입을 떼기 무섭게 비앙카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집사인 그가 마님의 말을 가로막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뱅상의 입이 자연스레 닫혔지만 그의 눈은 비앙카가 무슨 말을 할까에 대한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니콜라는 모두가 자신을 둘러싸고 추궁하자 눈을 질끈 감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특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비앙카의 초록 눈동자가, 그를 집어삼킬 듯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 같아 섬뜩했다.
니콜라가 일하는 양초장은 아르노 성에서도 변방이었다. 성 중앙의 첨탑에서 거주하는 비앙카와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당연히 풍문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이야기가 니콜라가 아는 전부였다.
니콜라가 아는 비앙카는 정 없고 괴팍한 여자였으며 온갖 사치를 일삼고, 아르노를 위해 항상 전쟁에 나가시는 백작님에게도 쌀쌀맞기 그지없는 분이었다. 최근에는 그녀를 거스른 하녀를 벌거벗겨 매질을 한 뒤 내쫓았는데, 그 꼴이 얼마나 참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농노들 사이에서 자자했다.
그렇게 손속에 자비가 없는 마님인 만큼, 영주님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댔다며 니콜라의 손가락을 뚝뚝 꺾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손톱을 뽑거나. 니콜라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웅크린 채 꽉 주먹 쥐고 파르르 떨었다.
그런 니콜라의 두려움을 모르는 비앙카는 다시 한번 니콜라에게 답을 재촉했다. 그녀의 초록 눈동자는 손에 들린 초에 고정된 채였다.
“정말로 네가 이걸 이렇게 만든 거니?”
차마 마님의 말을 두 번씩이나 무시할 수는 없었던 니콜라는 턱을 달달 떨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었고 목은 긴장으로 뻣뻣했다. 바싹 마른 입이 타들어 가다 못해 따끔했다. 니콜라는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마른 입을 침으로 축였다. 내리깔린 눈은 누가 저에게 다가올까 바닥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사곤 했었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서 힘이 좋지도 않았고, 혼자만의 세상에 골몰하기가 일쑤다 보니 빠릿빠릿하지도 못한 데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도 느렸다. 그런 그가 비품에 손을 대기까지 하니, 화가 난 초장이는 그에게 손을 올리기도 했다.
초장이는 비쩍 마른 사내였지만 어린 니콜라에게는 무시무시한 상대였다. 그는 종아리를 걷어차기도 했고, 니콜라의 머리를 후려치기도 했다. 귓방망이가 호되게 올려붙여지고 나면 머리 골 속까지 띵하니 울렸다.
물론 초장이도 초장이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요 못된 손버릇을 초장부터 꺾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로 번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정말 위험했다. 농노인 그들은 별거 아닌 일만으로도 목숨이 오가는 인생이었고, 손에 들린 이 양초 하나가 그들의 목숨줄을 옭아맬 수도 있었다. 그것이 니콜라의 목숨이든, 양초장을 책임지는 초장이 그의 목숨이든.
그렇게 걱정했건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초장이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초장이는 니콜라를 때리기도 했고 빵으로 꼬드기기도 했고, 갖은 수를 다 썼지만 니콜라는 고집이 셌다. 니콜라는 초에 장난질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니콜라는 ‘조각’한다고 하지만, 조각이라니! 물론 초장이도 니콜라가 나름 솜씨가 있고, 어쩌면 그 재능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초장이였다. 조각을 하려면 조각가의 자식이어야 했고, 비싼 재료비를 대기 위해 귀족에게 후원을 받아야만 했다. 니콜라가 세 살 때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는 초장이의 동료였던 또 다른 초장이였다. 니콜라는 초장이의 자식이었고, 조각가가 아닌 초장이가 되어야만 했다.
니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니콜라는 초를 조각하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초장이는 그 한결같은 고집에 한 발짝 물러서서, 조각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나무에 하라며 나무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니콜라에게는 초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어느 날 밤, 니콜라는 여신이 초 안에 갇혀있는 꿈을 꾸었다. 자애롭게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여신 위로 촛농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더니, 이내 여신의 머리끝까지 밀랍이 차오르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니콜라는 땀이 흠뻑 젖은 몸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저 꿈이었음에도, 니콜라는 초 속에 갇힌 여신을 꺼내드려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건 계시였다.
니콜라는 초에 갇힌 여신을 구해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고, 독실한 그는 초장이의 거친 만류에도 포기하지 않은 채 고집스레 초에 매달렸다.
그리고 먼 훗날, 니콜라는 완벽하게 여신을 조각해 낸 초를 수도원에 진상하게 된다. 그 초를 받아 든 수도원의 사제는 자비롭고 위엄 있는 여신의 모습에 무척 감격하여 그 초를 교황청에 납품하게 된다. 그리고 초를 받아 든 교황 또한 니콜라의 조각에 매료되어, 그를 교단의 정식 조각가로 임명하게 된다.
그리고 니콜라는 제단에 놓을 초를 조각할 뿐 아니라, 대 예배실에 놓일 여신상을 조각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여신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조각들은 하나같이 여신의 자비와 관용, 희생과 경건한 위엄을 드러내는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그렇게 니콜라는 뛰어난 조각가로써 그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나, 지금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지금의 그는 비앙카가 무슨 벌을 내릴지 몰라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농노일 뿐이었다.
초장이에게 혼이 나는 것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끽해봤자 종아리를 걷어차이거나, 등을 세게 후려 맞는 정도의 일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손가락이 다치기라도 하면…. 니콜라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러나 니콜라의 답에도 비앙카는 조용했다. 마님이 조용하니 주변 이들 또한 조용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니콜라는 주변을 잠식하고 있는 침묵에 숨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마님은 무슨 표정을 짓고 계신 걸까, 어떻게 날 혼낼지 골몰하고 계신 걸까? 비앙카의 반응을 알지 못하니 두려움이 배가 되었다. 니콜라는 결국 참지 못한 채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비앙카 쪽을 살폈다.
그런데 막상 비앙카를 본 니콜라는 깜짝 놀랐다. 비앙카가 니콜라가 만든 초를 이리저리 매만져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흡족한 미소를 지닌 채! 비앙카의 고운 입가에 빙긋이 걸쳐있는 호선에 니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끔뻑였다.
속눈썹이 서늘하게 드리운 눈매는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그 밑으로 빛나는 초록 눈동자는 부서진 햇빛이 들어선 듯, 황금빛과 흰빛이 촘촘히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따듯한 봄날, 요정들이 나뭇잎에서 그러모아둔 이슬이 저러할까. 방금전까지만 해도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가 독사와 같다 생각하던 니콜라는 저도 모르게 넋을 빼놓고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계속 초만 바라보고 있던 비앙카가 슬쩍 시선을 니콜라에게 흘렸다. 비앙카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니콜라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니콜라는 후다닥 고개를 땅으로 처박았다. 순간 숨이 틀어 막힐 것 같았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까의 두려움과 다른 생소한 위압감이 니콜라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건 뭘까. 발끝이 오그라들며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을 느끼며 니콜라는 숨을 들이켰다.
니콜라가 초조해하는 것과 달리 비앙카는 태연자약했다. 그녀는 초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여상스레 물었다.
“예쁘네. 보기 좋구나. 이런 걸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니?”
“초만 있으면 몇, 몇 개든지 만들 수 있어요.”
니콜라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대답하면서도 머리가 멍했다. 비앙카가 도대체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사람들은 내가 초를 만지작거리는 걸 싫어했는데. 설마 마님은…. 내가 초를 조각하는 걸 인정해주시는 걸까? 이해해주시는 걸까? 차오르는 숨이 목 끝까지 틀어 막혔다.
니콜라는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커다란 눈망울 속 작은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고, 콧잔등에 작게 놓인 주근깨가 들썩였다. 니콜라는 본능적으로 상황이 자신에게 나쁘지 않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그제야 여유가 생긴 니콜라는 조심스레 다시 한번 비앙카를 훔쳐보았다.
마님의 행동 하나하나에 두려움에 떨던 당시 그녀는 마치 마녀처럼 보였지만, 지금 다시 본 마님은 고왔으며 좋은 냄새가 났다. 햇볕에 반짝이는 상록수 이파리 같은 따듯한 보드라움. 니콜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니콜라의 심정은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생각도 없는 비앙카는 홀로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몰두하던 그녀는 모두가 깜짝 놀랄 말을 태연하게 꺼냈다.
“역시 내 방에 쓸 초는 이런 게 좋겠어.”
“네?”
초장이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비앙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영 알 수가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낯짝이었다. 그나마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뱅상이 성급히 덧붙였다.
“마님, 이런 초는 깎여나간 만큼 오래 타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님의 방에 쓰는 초는 이런 수지를 굳힌 것과 달리….”
“밀랍으로 만든 초를 조각하게 하면 되잖아. 어차피 이곳저곳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방 하나 정도일 뿐인데.”
비앙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남들은 엄두조차 못 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벼이 입에 올리는 모습에 뱅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비앙카가 밀랍 초를 쓴다 질책의 뜻을 넌지시 전한 것이 방금 전인데,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어조였다. 애초에 뱅상의 말을 새겨듣기는커녕, 그의 말에 빈정 상했다는 의도가 풀풀 풍겼다.
‘아르노 가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배워둘 필요가 있기는 무슨!’
이제야 영지의 제정 상황을 파악하고 소비를 줄이려나 보다, 하고 조금 대견하게 여기려고 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아직도 그녀가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가만히 성 안에 틀어박혀 있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뱅상의 그런 생각을 비웃듯 비앙카는 해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작님께서 나에게 언질 주지 않았다는 것은, 초 정도는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어트린 채 뱅상을 올려다보는 비앙카의 모습은 퍽 천연덕스러워 보였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마님이 철없는 소리를 한 것처럼. 하지만 뱅상은 비앙카가 아무 생각 없이 저런 말을 꺼냈다고는 결코 믿을 수 없었다. 명백히 그를 비꼬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한 대 맞은 뱅상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물론 그조차도 비앙카가 알 바는 아니었다.
“혹시 내가 이 정도도 쓰지 못할 정도로 영지 사정이 좋지 않은가? 집사가 그리 말하면 그렇구나 알아듣겠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분통이 터지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는 집사였고, 그녀는 그의 주인의 아내였다. 종복이 주인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실제로 비앙카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주라 노력한 백작님의 명이 있었던 만큼, 뱅상은 비앙카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뱅상은 순순히 꼬리를 말고 물러섰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네. 빠른 시일 내에 이 초를 내 방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노력하겠습니다.”
가벼운 기 싸움의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 이를 갈며 고개를 숙이는 뱅상의 머릿속에서 주판이 타닥타닥 튕겼다. 그래도 비앙카의 방 정도에 한정을 하면 그리 극심한 예산 소모는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이번 겨울 그녀가 산 사치품은 여우 모피 정도였다. 작년에 비하면 눈에 띌 정도로 절약적인 태도였다.
물론 뱅상은 비앙카가 그 돈을 아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 예상은 역시나였다. 그녀는 돈을 절약하는 법은 모르지만, 자신이 쓸 수 있는 돈은 알뜰하게도 박박 긁어 썼다. 한 푼이나마 남기는 법이 없지. 뱅상의 입술이 비틀렸다.
승자인 비앙카는 이제 양초장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고고하게 명령했다.
“그러면 이곳은 얼추 다 둘러보았군. 다른 곳으로 안내하게.”
뱅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고, 비앙카는 그 뒤를 따랐다.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본느와 가스파르도 묵묵히 그녀를 보필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양초장에서 벌어진 때아닌 소란에 모여든 사람들은 후후닥닥 자리를 피했다. 깐깐한 집사와 표독한 마님의 눈에 밟혔다가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모르니까. 비앙카와 뱅상이 어느 정도 멀어졌을까, 그들은 비앙카가 사치에 눈이 돌아갔다고 수군거렸다.
“저 귀한 것을 왜 일부러 파내라 시킨대?”
“그건 모르지. 평민과 같은 모양의 양초를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귀족들은 손 하나 더 간 걸 좋아하잖아.”
“아니, 밀랍이면 되었지, 그걸 또 같은 모양이 싫다 그래? 그러면 귀족 나으리들 잡수시는 빵은 우리가 먹는 빵이랑 다른 모양인가벼?”
“하여간 귀족 나으리들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돈을 펑펑 쓰셔도 되니, 귀족들은 참 좋겠네! 우리는 촛농 흘러내리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백작님은 마님이 저러는 걸 모르시나?”
니콜라의 귓가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곧 니콜라의 목소리가 되었다. 본인이 조각한 것임에도 그러했다. 나름의 신념을 갖고 행해온 일이지만, 지금껏 반대에도 굴하지 않은 채 꽉 잡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도리어 반겨지니 생각이 근간부터 흔들렸다.
도대체 왜?
니콜라의 가슴 한 켠에 의심과, 호기심과, 기대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니콜라는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비앙카의 뒤를 쫓아 달음박질쳤다. 주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니콜라의 돌발행동에 숨을 들이켰다.
그의 가느다란 손끝이 비앙카의 로브 자락에 닿을 듯 말 듯 해졌을 때, 누군가가 니콜라를 가로막았다. 비앙카의 호위로 있는 자카리의 부장, 가스파르였다. 가스파르의 단단한 손에 진로가 막혀, 니콜라는 더 이상 비앙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개의치 않았다. 멀찍이서 비앙카를 바라보는 니콜라의 시선엔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했다. 광인의 편집증적인 집착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니콜라를 미쳤냐는 듯 바라보았다. 귀족 나으리들의 발길을 막거나, 함부로 그 뒤를 쫓는 것은 중죄였다. 모두에게서 외면 받던 초가 인정받으니 기뻐하는 건 당연했지만, 니콜라는 분수를 잊었다. 어린 니콜라가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거라고 생각한 주변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뼈가 조각난 채 바닥을 뒹구는 니콜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곧 잔인하게 내쳐질 그 아이를 향해 애도의 성호를 긋는 이도 있었다.
비앙카는 느긋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행동은 언제나 기품 있고 느긋한 여유가 흘렀다. 느릿하게 돌아본 그녀의 뒤로 햇살이 비치면서 마치 후광처럼 보였다. 니콜라는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안에서 계속 맴돌기만 하는 의문을 터트렸다.
“도대체, 도대체 왜 제 초를 쓰신다고 한 거예요? 쟝 아저씨 말대로 제 초는 오래 타지도 않고, 쉽게 녹아 없어지니 장식으로도 쓸모가 없어요. 방을 장식할 화려함은 촛대의 몫이고, 초는 방을 밝히는 것이 목적인 걸요.”
“멍청한 질문이로구나.”
비앙카는 짜증스레 미간을 찡그렸다. 잘 가던 중에 발걸음이 멈추게 된 것도 짜증이 나고, 그래서 멈춰 섰더니 듣는 말도 어처구니가 없다. 비앙카는 절박하게 저에게 매달리는 니콜라를 서늘하게 내리깐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배만 채울 거면 무얼 먹어도 상관없지. 하지만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더 좋아지지 않니? 게다가 맛있는 음식이 예쁘게 장식이 되어있으면 더 좋지. 아름다운 걸 쓴다는 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거란다. 비록 아름다울 이유가 없고, 금방 그 모습을 잃게 된다 해도 말이야. 나는 쉽게 짜증을 내는 편이라, 이정도 소소한 일로 기분이 좋아진다면 충분히 값을 치를 만하지. 안 그런가, 집사?”
“…물론입니다.”
뱅상은 못마땅한 듯 끙, 혀를 찼지만 순순히 긍정했다. 평소 불퉁한 그녀가 사치를 할 때만큼은 기분이 좋아지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고, 그의 주인인 자카리는 비앙카가 기분 좋을 일을 위해서라면 이정도 값은 충분히 쓸 터였다.
뱅상은 무척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혈통 좋은 귀족들이 그러하다면 그가 맞춰야 하는 일이었다. 뱅상은 유능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작가 정도에서 일하던 인사였고, 비앙카는 내로라하는 명문 백작가에서 태어난 귀족 아가씨였다. 사치와 체면이 어느 정도 연계된다는 것은 그도 인정했고, 훗날 자카리가 더더욱 출세를 하였을 때 그런 쪽으로 체면을 깎아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뱅상의 긍정에 비앙카는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녀에겐 한없이 가벼웠고, 모두가 별거 아니라 생각하는 일이 그녀에겐 한없이 무거웠다. 산들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그녀의 태도에서는 그들과 태생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마 그런 것을 기품이라 하리라. 그녀의 내실이 사치스럽고 한심할지언정, 그와 별개로 날 때부터 몸에 배어 있는 태도의 고귀함만큼은 뱅상도 무어라 트집 잡을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겉치레뿐일지라도.
“네가 조각한 초는 아름다워.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나에게는 그것으로 된 일이야.”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한 비앙카는 답이 되었냐는 듯 가는 눈길로 니콜라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니콜라에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니콜라는 그녀에게 있어 꽃밭에 무성히 나 있는 풀 한 포기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비앙카는 바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채 발을 옮겼다. 비앙카가 움직이자 그녀의 하인들 모두 우르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쌀쌀맞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태도였지만, 니콜라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비앙카가 해준 말이, 그녀의 목소리를 빌어 몇 번이고 그의 귀에 웅웅였다. 비앙카가 자리를 뜬지 한참이 지났지만 니콜라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자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우리 마님은요, 지금껏 방에만 콕 박혀 계셨어요. 영지에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니 마님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이 농노들 사이에 오가곤 해요. 물론 들키면 경을 칠 일이라는 걸 알지만, 왕께서 듣지 못하는 곳에서는 왕님 욕도 하는데, 까짓 마님 욕이 대수겠어요? 저도 일하는 와중 틈틈이 마님 이야기를 듣곤 했어요.
마님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안 좋은 이야기예요.
제일 많이 들은 건, 마님의 외모가 끔찍하게 못생겼다는 것이었어요. 옛날에 결혼하실 때만 해도 어여쁜 소녀였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눈 뜨고 봐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거지요. 햇빛을 쐬지 않아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하고, 신경질을 부리느라 비쩍 마른 몸은 노파 같다고도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겠냐 싶었지만, 본성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태도가 농노들의 망상에 확신을 주었어요. 그들은 맨날 모이기만 하면 마님이 하녀들을 질투해서 매질을 했다는 소리를 일삼곤 하거든요. 어여쁜 하녀들의 외모에 흠을 잡아 내쫓고, 얼굴을 어쩔 수 없으니 비싼 옷을 몸에 걸치는 거라고도 했어요. 그래 봐야 예뻐지겠냐며, 마음을 예쁘게 써야 얼굴도 예뻐지는데 우리 마님은 그게 안 된다며 투덜거리곤 했죠.
성 외각에서 일하는 농노들로서는 마님을 볼 일은 없거니와, 실제로 마님에게 혼났다는 하녀들이 엉엉 울며 성을 나가곤 하니 하인들의 말이 사실이겠거니 하고 넘겼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실제로 본 마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시체 같다는 피부는 얼음조각처럼 투명하고 연약했고, 제 몸값으로는 결코 댈 수 없는 고귀한 옥빛 옷감은 마님에게 놀랄 만큼 잘 어울렸어요. 마르시기는 했지만 노파라니요. 매끄러운 피부는 촛농을 녹여 만든 듯 흠 하나 없이 하얬어요. 예쁘다는 하녀들에게 질투를 느끼시기는커녕, 하녀들이 마님에게 열등감을 느낄만한 분이셨죠!
그분은 그저 병약하실 뿐이에요. 느릿한 손짓은 힘이 없었지만, 타오르는 듯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에서는 생명력이 타닥타닥 튀어 올랐어요. 마님이 제가 조각한 초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순간 세상은 멈췄어요. 마치 저와 마님만 존재하는 듯한 순간이었죠. 저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분이 내가 혼을 다해 깎아낸 조각을 마음에 들어해주시다니!
그건 무척 황홀한 경험이었어요.
마님께서는 다들 코웃음 치는 제 솜씨를 좋게 봐주셨어요. 그리고는 마님의 방에 놓을 초를 제가 조각하라고 하셨죠. 다시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양초장의 사람들은 다들 마님이 변덕을 부리는 것일 뿐이라고 했어요. 너 따윈 그냥 놀림감이었을 뿐이라고, 네 양초 조각 따위 지금은 뭐라도 된 듯 호들갑을 떠시지만 그건 지금의 변덕일 뿐이라고요. 내일이면 다른 귀족 나으리들처럼 새까맣게 잊어버리실 테니 많은 기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주변 사람들은 지금껏 괜한 핑계로 연약한 마님을 헐뜯었고, 지금의 속삭임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이제 저는 알아요.
그렇게 얼떨떨한 채 하루가 지나가고, 저는 달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나무판자 침대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어요. 마음만 같아선 달빛을 의지 삼아 조각해 내려가고 싶었지만, 양초는 재고관리가 엄격한 만큼 쉽게 빼올 수 없었거든요. 특히나 마님이 쓰시는 밀랍 초는 귀한 것이라 집사장님이 따로 관리하는 물건이었어요. 저는 제발 마님이 절 잊지 말아 주시기를 기도하며 뜬 눈으로 하룻밤을 샜어요.
그렇게 저는 불안과 초조에 떨며 아침을 맞이했어요. 쟝 아저씨는 제 눈 밑에 퀭하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혀를 쯧쯧 차셨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어요. 평소였다면 무엇보다도 기다려졌을 아침 식사가 목에 턱턱 막혔어요. 마님에게서 언제쯤 연락이 올까요?
아침 식사가 끝나고 정오가 되기까지 제 피는 바싹바싹 말라갔어요. 하지만 점심 식사를 하기 전, 쟝 아저씨가 절 불렀어요. 마님에게서 기별이 온 것이었어요!
집사장님께서 밀랍초가 들어있는 나무 상자를 건네며 마님께서 오늘 저녁 제가 만든 양초를 쓰고 싶다 하셨다 말하셨어요. 그러니 다른 일보다도 이걸 우선시해달라고도 하셨죠! 저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어요.
전 신이 나서 양초를 조각했어요. 마님의 명령이다 보니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어요. 마님께서 저를 까맣게 잊을 거라 말했던 수잔 아줌마는 머쓱한 듯 감자 한 알을 건네주셨어요. 저는 감자를 감사히 받았지만, 바로 먹지는 않았어요. 예전이었다면 바로 껍질을 까서 홀랑 입안으로 집어넣었을 테지만, 지금은 끌을 한 번이라도 움직이는 게 더 중요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했던 조각 중 제일 아름답고 완벽한 조각을 해낼 수 있었어요. 안도와 함께 조각된 초를 집사님에게 건네 드렸는데, 집사님은 조각을 가만히 보더니 저보고 따라오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집사님을 따라갔어요. 성문을 몇 개나 지나면서 주변이 확확 바뀌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점점 좋아져만 갔어요. 그렇게 한참을 갔을까, 저는 커다란 문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어요. 집사님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도착했습니다, 마님.’ 하고 말하고 나서야 저는 제가 마님의 방에 왔다는 걸 알게 되었죠.
집사님은 방 안으로 제 등을 떠밀었어요. 저는 조각된 초가 담긴 나무상자를 들고 마님의 방에 들어섰죠. 머리가 핑핑 돌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요. 마님의 시녀가 제 손에서 상자를 가져가는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죠.
조각을 이리저리 둘러본 마님은 살포시 웃으며 ‘잘했다, 니콜라.’라고 하셨어요. 그제야 저는 파드득 정신을 차릴 수 있었죠. 마님의 미소는 꽃이 봉오리를 막 틔워 올리는 순간처럼 조용하여 눈치 채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값진 미소였어요.
게다가 마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기까지 하다니!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이건 어떻게 조각한 거고 뭘 조각한 거냐는 마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리니, 마님께서는 다시 한번 웃으며 천천히 대답하라 해주셨지요. 얼마나 상냥하기 그지없으신지!
마님의 미소를 보니 가슴이 콩닥거려요. 지금까지는 여신님을 꺼내드리기 위해 조각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마님과 만난 뒤로는 마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마님께서 조각을 부탁할 때마다, 마님을 위해, 마님만을 위해 조각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올라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마님을 조각하기엔 제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껴버렸거든요.
지금껏 구석진 곳에서 쭈그려서 조각하던 제가 초장이 공방 한 구석에 나무의자를 놓고 버젓하게 조각을 하니 저로서는 정말 인생 역전을 한 거예요. 어찌 신이 나지 않겠어요? 이게 모두 마님 덕분이에요. 제가 마님의 총애를 받으니 제 앞에서 소리 높여 말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여전히 마님이 못되고 신경질적이라는 등 뒷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전 이제 그 이야기는 절대 믿지 않을 거예요. 마님은 좋은 분이신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