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bee, Maybee Not RAW novel - Chapter 5
4. 낯선 길로 접어들다
목이 타고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
답답해. 눈꺼풀이 붙은 것같이 떨어지지 않아.
재희는 몸을 뒤척였다.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팔과 다리가 모로 세워진 몸통을 따라 억지로 움직여지는 것 같다.
아파.
가슴 끝이 직물에 쓸리는 느낌에 눈이 떠졌다. 재희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희미한 새벽빛 아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남자, 옆자리에서 벌거벗은 채로 눈을 뜬 여자. 꼼짝도 하지 않고 눈과 머리가 인식하는 광경과 상황을 정리했다. 어제 일을 부끄러워할 여유조차 없었다.
급히 침대에서 내려서려다가 아래서부터 느껴지는 통증에 절로 몸이 구부려졌다.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주워 입고 거실에 떨어진 원피스를 챙겨 입었다. 뒤쪽 단추를 채우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핸드백을 집어 들고 나가려다가 멈췄다. 소파 위에 준우의 재킷과 넥타이가 놓여 있었다.
침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바닥에 제멋대로 떨어져 있는 준우의 옷가지들을 정리해서 한쪽에 있는 티 테이블 의자에 얌전하게 두었다. 누웠던 자리의 베개를 바로잡다가 눈을 감은 남자를 잠시 쳐다보았다. 편안하고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다. 부드러운 음영이 진 얼굴과 드러난 상체에 살며시 손을 뻗어 보다가 ‘으음.’ 얕은 신음 소리에 막 다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숨소리도 죽이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서도 큰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친 아이처럼 재희는 어쩔 줄을 몰랐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사장님과 무슨 짓을 한 거야.
욱신거리는 머리를 싸안고 찬물에 두통약을 삼키면서 ‘차라리 꿈이었다면.’ 바보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단단하게 안아 주던 팔과 뜨거운 눈동자, 거친 숨소리와 다정한 손길, 깊이 새겨지던 고통과 떨림까지 그저 생생한 꿈이라면 그건 영원히 한재희만의 것이 될 테니까. 절대 깨어지지도 잃어버리지도 않을…….
떨어지는 샤워 물줄기에 남자의 입술과 손을 기억하는 여린 피부가 시큰거린다. 재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 틀렸다. 꿈이 될 수가 없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가지고 있던 작은 위안마저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묵직하고 따뜻한 손, 무심한 듯 던져 주는 배려, 관찰하는 깊은 눈동자, ‘재희야.’ 불러 주는 목소리, 서준우를……, 잃었다.
아빠도 엄마도 현석도 이젠 서준우마저 없다. 욕심 부렸기 때문이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어리석은 행동을 벌하지 말아 주세요. 재희는 어딘가에 있을 미래를 주관하는 자에게 소원했다. 다시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부디 어젯밤만 그저 꿈처럼 없었던 일인 양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도록, 서준우를 잃지 않도록…….
*
“한 팀장 출근했습니까?”
월요일 아침, 사무실을 들어서면서 준우는 리셉션 데스크의 혜선에게 확인했다.
“아뇨, 오늘 바로 ENP 쪽으로 간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아, 그래요?”
“찾으신다고 연락 넣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하죠.”
준우는 바짝 긴장해서 서 있는 혜선에게 웃어 보이고 제 방으로 향했다.
그 밤, 눈물이 맺힌 눈가와 작게 벌어진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는 동안 재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준우 씨.’
‘응.’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재희가 잠이 든 건지 깨어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고통을 선연하게 드러내는 눈동자는 한 번이었다. 감은 눈, 참아 내는 숨소리, 어깨에 겨우 붙어 있는 손과 젖혀지는 목선, 모든 것이 깨질 듯 위태롭고 안타까웠으며 동시에 감각의 뿌리까지 흔들었다.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깨질 것이라면 서준우가, 서준우의 품에서 깨뜨릴 것이고, 누군가가 차지해야 한다면 손끝 하나, 숨소리 한 줌까지 서준우가 모조리 가질 것이라고, 마치 정염에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움직였다.
지쳐 버린 그녀를 품으로 끌었다.
‘으응.’
재희가 잠결인 듯 이마를 비비며 소리 냈다. 한 팔로 이불을 끌어 벗은 등을 덮어 주었다.
‘재희야.’
‘……네.’
완전히 잠에 빠진 것 같았는데 작게 대답했다.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가냘픈 신음성을 억누르면서도 답했었다.
‘네…….’
준우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한재희는 7년 반을 그저 한재희였지만, 그날 밤만은 서준우가 이름을 부르고 확인하고, 그의 꽃으로 만드는 대상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분명 품었던 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 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준우는 소란스럽게 집 전체를 뒤졌다. 침실로 다시 들어오자, 그제야 티 테이블 의자에 얌전히 정리되어 있는 그의 옷가지가 보였다. 정신이 들었다. ‘네.’ 대답하던 재희도 ‘준우 씨, 가지……, 마세요.’ 하던 재희도 없었다. ‘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렇게 생글거리며 웃을 한재희만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준우는 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주말 내내 그녀는 연락하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그리고 월요일, 회사에서도 볼 수 없다.
“한재희, ENP로 갔다고…….”
그의 노력과 의지를 비웃듯이 그녀는 거침없이 모든 것을 다 부수고 들어와서 제멋대로 온통 헤집어 버린 후에 숨어 버렸다. 준우는 양복 재킷을 소리가 나도록 벗어 걸었다. 이메일 체크를 끝내고 세 통의 답메일과 두 통의 전화, 그리고 스크랩된 주요 기사 확인을 끝낼 때까지 준우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해야 했다. 더 이상 재희와 연락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재희가 준우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요일 오후였다.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해서 하나로 묶은 머리에 무늬 없는 검정색 슈트 차림이었다. ‘SJ 팀장 한재희입니다, 서준우 사장님.’이라고 항변하는 차림새만 같지만 그 모습에조차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일상적인 시선을 잠깐 맞추고 인사를 하더니 보고서 하나를 책상에 두며 말했다.
“사장님, ENP 투자 설명회 퍼스트 드래프트(first draft, 초안)입니다. 몇몇 세밀한 확인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ENP 측에 추가 자료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눈이 다시 마주쳤다. 준우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보고에 대한 답을 하지도 않았다. 재희가 얄팍한 숨을 내쉬었다.
“그럼 검토해 주십시오.”
“잠깐 기다려. 지금 검토하지.”
인사를 하고 한 걸음 물러서려다 말고 그녀가 멈췄다. 옆에 세워 둔 채로 천천히 한 장씩 넘겼다. 수십 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넘기는 동안 어깨 위로 떨어지는 숨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30분이 지났다. 재희가 양손을 모아 쥔 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대로 한 시간쯤, 아니, 두 시간이라도 세워 놓고 싶다. 다시 느리게 한 자씩 읽었다. 준우는 마지막 두 장을 남기고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한재희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두 장 남은 보고서, 넘기다 말고 종이를 쥐고 있는 손에만 머물렀다. 끈질기게 쳐다보았다. 드러난 이마와 고집스런 입술, 떨리기 시작하는 턱과 오르내리는 가슴을.
“사장님, 다 검토하셨으면…….”
“아직 남았는데.”
준우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튕겼다. 그제야 재희가 눈을 맞춘다.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눈이다.
“앉을래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
입술을 꾹 깨물더니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준우는 마지막 두 장을 다 읽고선 의자 방향을 비스듬히 틀었다. 움찔 재희가 뒤로 물러서더니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어 깍지를 만들고는 시선을 고정했다.
“좋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몇 가지만 확인합시다. 생산 시설 투자 자료와 해외 플랜트 자료 검토는 끝난 건가요?”
“지금 ENP 측에서 받은 것을 저희 쪽 리서치와 크로스 체크(cross check, 교차 검토)하는 중입니다.”
그녀가 꽤, 상당히, 매우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언제쯤 검토가 끝날 거 같습니까?”
“내일까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변화 없이 대답을 이어 갔다. 시선은 반쯤 피했지만.
“원유 가격 상승과 에너지 비용 증가에 대한 예측은 2040년까지는 나오면 좋겠는데.”
“신빙성 있는 전문 기관 자료는 현재 2025년까지입니다. 에너지 비용 예측이 단순 프로포마(pro forma, 예상)로는 무리가 있어서 가능한 한 가공할 수 있는 로 데이터(raw data, 원자료)를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환경 규제 트렌드 넣어 주고.”
“네, 사장님.”
잠시 동안 눈이 마주쳤다. 홍조 띤 뺨과는 다르게 싸늘한 의지를 세우는 눈을 보며 말했다.
“이제 됐어. 나가 봐.”
재희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문을 닫고 빠져나가는 모습이 단정하고 매끈하기 짝이 없다.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닷새 만에 얼굴을 보여 준 여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냉랭하게 보고했다.
‘사장님, ENP 투자 설명회 퍼스트 드래프트입니다…….’
준우는 보던 자료를 덮었다. 전화기 버튼을 눌러 혜선에게 연결하였다.
“저 지금 외부 나갔다가 바로 퇴근합니다. 태성 사장님과 저녁 약속 확인해 주세요.”
― 네, 사장님. 저녁 7시 30분, 조선호텔 나인스게이트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쪽에도 컨펌 부탁합니다.”
재킷을 입고 빠르게 걸어 나갔다.
한재희에게 굉장히 휘둘리고 있다. 난감할 정도로…….
준우가 사무실을 빠져나가 도착한 곳은 피트니스센터였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혹사시켰지만 부족했다. 뻐근한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극한의 순간이 지나갈 때마다 재희가 보였다. 벌어진 입술이 보이고 몽롱한 눈빛이, 정맥이 비치도록 새하얀 가슴과 자극적으로 휘어지던 몸이…….
‘당신, 보여 주세요.’
‘전부 다, 하나도 남김없이.’
준우는 숨을 멈추었다. 가슴 근육이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올랐다.
재희가 작게 속삭인다.
‘준우 씨…….’
‘응.’
천천히 호흡을 시작하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한재희한테 서준우가 무엇인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그녀가 무엇인지만 알면 되니까. 돌이킬 수 없다는 현실을 주지시킬 것이다. 서준우, 그가 그랬듯 그녀도 낯선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미 선택의 순간은 끝이 났다.
상관없이, 끝까지 갈 것이다.
*
걸어오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주먹을 쥐려 해도 손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준우 방에서 돌아온 재희는 겨우 문을 열고 책상 의자에 주저앉았다. 30~40분 동안 경직되었던 근육들이 아직도 완전히 긴장을 풀지 못했다. 거리를 두고 옆에 세워 놓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존재감은 감각 세포 하나하나를 꿰뚫었다.
낯설게 구는 모습……. 이걸로 그만이길,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다. 그저 알코올에 젖은 하룻밤이었다고, 잊어버리자고.
‘이제 됐어. 나가 봐.’
질린다는 표정, 서늘한 말투에 맘이 시리다.
재희는 서준우라는 사람을 너무 잘 알았다. 그는 여자와 영속성이 있는 관계는 더 이상 맺지 않으려는 철칙을 세운 사람 같았다. 그것이 서준우가 세운 철칙이라면 말 그대로 무쇠보다 강할 것이다.
처음 봤을 무렵, 그가 평소 모습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들게 환한 표정으로 웃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지연아, 그럼. 그대 생각하고 있었지.’
통화를 위해 자리를 피하면서 그가 터뜨리던 웃음소리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후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을 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녹을 듯이 다정한 말투나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은밀한 농담을 속삭이는 소리까지……. 그녀는 그 사람에게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였다.
밤새도록 안쓰러울 정도로 사람들과 일에 시달린 후에도, 그래서 오전 내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날에도 그는 장거리 연애에 힘든 연인을 부드럽게 달래곤 했다. 통화를 마친 후, 머리를 짚고 앉아 있던 준우가 너무 지쳐 보여서 차마 가까이 가서, ‘다들 점심 어떻게 하냐고 기다리는데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이지연, 집안과 실력만큼이나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출중한 바이올리니스트, 두 사람은 굉장한 열애를 했다고……. 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결혼을 한다고 했다. 지연이 그를 찾아 한국으로 왔고 열애의 결실이 맺어지는 듯했다. 찾아온 것만큼 급작스레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이후로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준우에게서 한 번도 그런 표정, 그런 목소리, 그런 말투를 대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여자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가끔 통화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출장을 다녀온 날이면 책상 아래 핸드백이나 주얼리 같은, 여자 선물로 보이는 쇼핑백들이 있기도 했다. 브랜드는 여인의 취향에 따라 바뀌었다. 터키블루, 오렌지, 브라운, 블랙 혹은 레드. 최상위 디자이너 브랜드를 상징하는 빛깔의 쇼핑백을 보면서 가끔 그 주인이 될 여자들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아니, 상상뿐 아니라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의 여자들,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들…….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스크린세이버로 바뀐 랩톱 화면에 제 얼굴이 비쳤다. 우울하고 초라한 여자의 얼굴을 지우려 마우스를 클릭했다. 하지만 작업 파일을 열고는 한숨과 같이 다시 잡념에 빠져 버렸다.
언제였더라. 두 해 전쯤이었나 보다. 현석과 현석 친구 커플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그가 식당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생김새가 굉장히 화려한 여인이 팔에 매달리듯 붙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한 웃음을 흘리면서……. 아무것도 못 본 척 음식을 입에 넣는데 동행한 여자애가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어머, 재희 언니, 저 여자 봤어요? 이름이 갑자기 기억 안 나는데요. 요즘 뜨는 신인 탤런트인데.”
“그래요?”
무난하게 받아 넘기려는데 그들을 발견한 현석이 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재희 너희 회사 사장 맞지? 이지연 씨 전남편.”
재희는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었다. 머쓱해진 일행이 화제를 돌렸고 더 이상 그 커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여인을 본 것은 최근이었다. 굉장히 멋있는 여자였다. 재희가 회사 앞에서 현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옆에 서 있었던지라 본의 아니게 관찰하게 되었다. 여자든 남자든 외모로 판단하는 습관은 없지만, 곁눈으로 본 그녀는 어떤 여인도 절망하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늘씬한 몸매나 세련된 생김새뿐 아니라, 어깨를 반듯하게 편 곧은 자세나 클러치를 쥐고 있는 손가락의 모양까지 지적이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여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미소 짓는 것까지 세련되고 여유로웠다.
바람에 실려 온 고혹한 향이 여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때, 여자가 저만치 뒤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더니 손을 들어 보였다. 준우 차가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서 그녀 앞에 섰다. 문을 열어 주는 그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솟아오른 질투에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 여인이라면 그와 잘 어울릴 것이다.
‘잘 알 텐데. 나, 만나는 사람은 있어도 결혼할 사람은 없는 것. 그리고 재희 씨가 말하는 그 사람과도 이제는 끝났고.’
그녀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그 표정, 그 목소리. 재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내가 그런 사람이랑 무슨 짓을 했단 말이야.
여자가, 그 사람이 만나는 여자가 되는 순간 온정적이고 안정적이며 편안했던 관계는 부서지고 끝이 보이는 위험하고 불안한 관계만이 남을 뿐이다. 다시 스크린세이버 까만 화면이다. 상심한 여자의 얼굴은 화려하지도 우아하거나 세련되지도 않다.
*
익숙한 일이라 할지라도 최종 리뷰를 앞두고 몸은 지치고 마음은 분주해지기 마련이다. 그 무렵에는 머릿속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는 것들을 얼마 후면 어느 정도 비워 내고 홀가분해질 것이라는 기대감만으로 피로와 지루함을 호소하는 육체를 달랜다. 이번에는 특히, 그러하였다. 오늘 최종 리뷰에서 크게 수정할 부분이 없다면 내일 일요일은 하루 종일 쉴 수 있을 것이다. 재희는 프린트된 보고서를 만지작거리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4시 10분이 넘어서고 있다.
‘예정보다 일찍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후 4시에 리뷰를 해도 괜찮습니까?’
시간 변경을 물어보는 이메일은 세 시간 전에 준우로부터 왔다. 준우 스케줄에 맞춰 저녁 식사 이후에 잡혀 있던 시간을 당기는 것은 환영이지만 딱 떨어지는 영문 이메일은 왠지 불편했다. 수요일에 초안을 검토받은 이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지만 재희가 사무실에 있는 시간에는 그가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지시 사항이나 보고는 이메일로 이루어졌다. 매번 딱딱한 영문이었다.
“한 팀장님, 4시로 당겨진 거 맞죠?”
“네, 사장님이 좀 늦으시네요.”
재희는 핸드폰 액정에 있는 시계를 확인하였다. 4시 14분, 순간 화면이 바뀌고 진동이 울렸다. 손바닥, 손끝, 그리고 심장까지 떨린다.
서준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사장님.”
― 좀 늦었네. 미안해요. 빠르면 10분 후에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 응.
“……미팅룸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재희는 핸드폰을 내리려다 말고 뭔가 말을 놓친 것 같아 다시 귀에 붙였다.
“네?”
― ……곧 갈게, 재희야.
이번에는 끊어진 후에도 핸드폰을 내리지 못했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준우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두를 향해 잘 만들어진 웃음을 띠고 인사했다.
“미안합니다. 늦었어요. 대신 빠르게 끝냅시다.”
재희와는 잠시 눈이 마주친 것 외에는 없었다. 준우가 평소와 다름없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한 장씩 넘기는 동안, 사람들은 그와 보고서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옆얼굴이었다. 매끈한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이마와 눈썹을 이루는 선은 생각보다 굵고 거칠었다. 아래로 이어지는 콧날은 우뚝 솟았고 턱 선은 강인했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냉정하게 보인다.
문득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그의 입술이 오랫동안 닿았던 자리였다. 별안간 일깨워진 감각은 이제 목덜미가 아닌 다른 곳을 인식시켰다. 차갑고 냉정한 입매는 거짓이다. 그것은 뜨겁고 강하고 부드럽고 동시에 날카로웠다. 아직 양손이 그에게 잡혀 있는 듯 벗어날 수 없는 압력이 느껴진다. 꼼짝하지 못하고 받아 냈던 자극은 살처럼 몸을 뚫기도 하고 목을 조이기도 했다.
“후우…….”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숨이 뜨거웠다. 순간 준우가 눈을 들었다. 재희는 급히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하지만 충분히 피할 수 없었던가 보다. 볼과 귀에, 곤두선 몸에 그의 시선이 따끔따끔 꽂혔다.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좋아요. 이대로 가죠.”
잠시 후, 준우가 입을 떼었다. 재희는 여전히 자신 앞에 놓인 보고서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 팀장”
“네?”
이제 그의 시선이 보고서에 고정되어 있다.
“12페이지에 나와 있는 해외 플랜트 설비 그림과 19페이지에 나오는 설비 계획이 일치하나요?”
“사실 계획은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거라 몇 가지 추가 시설이 더 있어요. 그림은 전체 구상도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크게 차이 나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설비 계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 면적에 다 들어 갈 수 있는 거죠?”
“네, 그렇게 확인받았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24페이지 오일 프라이스 변동 추정 그래프와 어펜딕스(Appendix, 부록)에 있는 오일 프라이스 베이스 원자재 가격 변동 그래프에 프라이스 추정치가 같은지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네.”
“아, 그리고 33페이지 프로덕트 밸류 체인(product value chain, 가치 사슬) 말이죠, 일자로 진행되는 화살표로 보여 주지 말고……. 흠, 메시지는 좋은데 밸류 체인에는 좀 끼워 맞춘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차라리 화살표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원을 그려서 서로의 가치가 상승하는 윈윈(win―win)의 느낌을 강조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그가 페이지에 깔끔하게 도형을 그려 넣으며 말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준우가 보고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따라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해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와 함께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맥이 풀리는 몸을 다잡고 재희는 빠르게 자료를 챙겼다.
“다행이에요. 오늘 밤은 고생 안 해도 되겠어요. 다 들어가세요.”
“한 팀장님은요?”
“저는 지적한 부분 조금만 수정 보고 마무리할게요. 태진 씨, 주말인데 여자 친구 만나야죠?”
“아……, 네.”
태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애인 없는 내가 토요일 저녁 봉사할게요. 나경 씨도 얼른 가 봐요.”
재희는 미안해하는 얼굴들에게 웃어 주고는 경쾌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재희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에 가서 푹 자고 싶었다. 엑셀 파일부터 열어서 오일 프라이스 데이터를 일치시키는 작업을 마치고 보고서 파일을 띄웠을 때였다.
“퇴근 안 해?”
노크에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준우가 옆에 와서 섰다. 엉거주춤 일어서려 하자 어깨를 슬쩍 눌렀다.
“앉아.”
“사장님 퇴근하셔야죠.”
“한 팀장은?”
“수정하고 프린트 넘기기 전에 한 번 더 보려고요.”
“수정할 거 별로 없지 않나? 빨리 끝내.”
빤히 쳐다보자니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저녁 같이 하자고.”
“아니에요. 천천히 검토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퇴근하세요.”
재희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우가 지시했던 대로 굽어진 화살표가 맞물려 돌아가는 원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다릴게.”
“아니요. 싫습니다.”
몇 번 더 손을 놀리자 이제 원이 완성되었다. 화살표 색을 바꾸려고 컬러 선택 창을 띄웠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옆에 선 준우를 보지 않고 재희는 쌀쌀하게 말했다.
“계속 서 계실 거예요?”
“그럴까 싶어.”
쏘아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오늘은 내가 벌을 서지, 뭐.”
“사장님.”
“응.”
“불편합니다. 사무실이구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런데 왜 그러세요?”
“이것 봐 재희 씨, 우리 둘 다 뻔히 아는 소리야.”
“그러니 더욱 말이 필요 없겠네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준우가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재희야.”
“네.”
“나 배고프다.”
“네?”
“아침에 운동하고 먹은 샌드위치 반쪽이 전부야. 말은 턱이 아프도록 많이 했어.”
“점심 안 드셨어요? 왜?”
“저녁 시간 비우려고.”
기가 막혀 픽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네 말도 귀에 안 들어와. 뭐 좀 먹은 후에 따지든 화를 내든 하자고. 내 방에서 기다릴게.”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재희도 일을 시작했다.
재희는 보고서 수정과 검토를 마친 뒤에도 잠시 늑장을 부렸다. 망설임 끝에 결국 저녁을 먹기로 마음먹었다. 어떻든 불편한 말을 해야 정리가 된다면 피할 수는 없다. 준우의 방 앞에 서서 노크를 하자, 그가 랩톱을 정리하고 나왔다.
“전화하려던 참이야. 도망갔나 하고.”
“제가 왜요.”
“도망에 재능이 있던걸.”
준우가 스쳐 지나면서 그날 새벽을 힐난하였다.
한발 앞서 걸어가는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지하 주차장에서 내렸다. 조수석 문을 열고 기다리는 모습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전에도 그랬던가. 서준우의 여자들한테 하듯이?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운전대를 잡으면서 준우가 불만스런 투로 말했다.
“네?”
“왜 이렇게 얼굴이 더 안돼 보이지?”
뻗어 오는 손을 피해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손은 어깨를 가볍게 스치고 떨어졌다.
“아니에요. 며칠 야근을 계속했더니 그런가 봐요.”
“내가 일을 많이 시켜 그렇다니 할 말이 없군.”
“아닙니다. 그런 뜻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두어 번, 먹고 싶은 음식이 없냐는 질문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준우가 별 고민 없이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회전초밥집이었다.
“스시 좋아하지? 전에 맛있게 먹던데.”
준우가 차 문을 열어 주러 돌아오는 것을 무시하고 재희는 재빠르게 내렸다.
“여기는 별로야? 맛은 꽤 괜찮은데 좀 어수선하기는 해. 주말이라 사람도 많을 텐데 예약도 못 했군. 미안해.”
스시는 언제 같이 먹어 본 걸까. 찬찬히 표정을 살피는 태도가 성가시다. 서준우는 그리 섬세하고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표현을 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가끔 놀라곤 했으니까. 그 사람들 중 한재희도 한 명이기는 했다. 그들 중 한 명, 편안하고 안정적인 자격으로 받는, 아니, 조그만 손가락 마디 하나쯤만 더 특별한 대우면 충분하고 만족스러웠다.
“좀 조용한 일식집으로 갈까? 응?”
발레파킹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옆에 서 있는 미끈한 BMW 7시리즈 은색 차량 역시 성가시다. ‘돈 많은 남자에게 응석부리는 공주구나.’ 하는 점원의 짜증스런 눈빛도 맘에 들지 않는다.
“아니에요. 자리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자리 있습니다.”
급히 답하는 점원에게 상냥하게 웃어 보이고 재희는 앞장서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이 마지막 남은 자리였던 거 같다. 긴 타원형을 이루면서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그 옆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레일 위에 놓인 스시들을 선택하여 내리고 있었다. 음식 냄새와 뒤섞인 대화 소리에 다소 번잡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여러 종류의 스시는 맘에 들었다. 천천히 살피는 사이에 준우가 꽤 바쁘게 움직였다. 재희 앞으로 따뜻한 차를 따라 주더니 괜찮아 보이는 접시는 모조리 내려놓았다. 테이블이 금세 가득 찼다.
별 대꾸도 없는데 ‘이거 괜찮아?’, ‘먹어 봐, 여기는 특히 참치 뱃살이 좋아.’, ‘롤도 좀 먹을래?’ 하나씩 내릴 때마다 의견을 구했다. 괜찮다는 말을 무시해서 그렇지만……. 좀 더운 것도 먹으라며 도미조림을 주문하고 주방장을 다시 불러 전복을 따로 부탁하자 재희는 준우를 적극적으로 말렸다.
“사장님, 너무 많아요.”
“그래? 억지로는 먹지 말고 하나씩만 맛봐. 많으면 남기지, 뭐.”
재희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목이 아팠다. 좁혀진 목구멍 사이로 겨우 스시 하나를 집어넣었다. 따로 해 달라고 한 참치 뱃살인 것 같다. 고소하고 부드러울 텐데 맛을 잘 느낄 수 없다.
“많이 먹어. 일 많이 시켜서 미안해.”
“아닙니다. 사장님도 드세요.”
“응.”
대답하면서 비어 있는 잔에 다시 차를 따라 주었다. 입에 맞는지 잘 먹는지 살피는 눈과 마주치지 않도록 재희는 가능한 한 고개를 들지 않고 천천히 접시 두 개를 비웠다.
“너무 뜨겁다. 천천히 마셔.”
새로 서빙된 미소된장국을 들려고 할 때였다. 결국 눈이 마주쳤다. 재희는 된장국을 내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그래, 어린애는 확실히 아니야.”
확실히, 직장 상사는 아닌 남자의 눈으로 쳐다보면서 준우가 답했다.
“어려 보였거든. 스물두 살, 처음 봤을 때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재희는 생긋 웃었다.
“칭찬이시죠? 기분 좋아요. 제가 어려 보인다는 소리에 좋아할 나이가 벌써 지났거든요. 그래도 나이 먹는 거 그다지 싫지는 않아요. 어릴 때면 무척이나 심각해져 잠도 못 자며 고민할 거리였다 해도 지금은 ‘그게 뭐.’ 그러고 넘어가 버릴 수 있으니까요. 서른 즈음 여자의 특권을 누린다고 할까.”
똑바로 쳐다보고 있자니 준우 입가에 미소가 만들어졌다. 불편한 속을 감추는 미소다.
“나는, 어린 나이라 고민하고 있을 것 같아서 피했어?”
“네?”
“돌려 말하기 피곤해. 하루 종일 그런 식으로 대화를 했더니 머리가 터지겠어.”
준우가 찻잔을 내리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른 즈음의 쿨한 여자 흉내를 내는 한재희 씨, 그럼 날 줄곧 피한 이유가 뭐야.”
“피한 적 없습니다.”
“그런가? 지난 수요일 잠깐 찾아온 것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
“사장님께 특별히 보고할 일이 없었어요.”
“사장님께, 보고할 일?”
화를 억누르는 말투였다. 재희는 시선을 피해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좋아, 분위기 좋은 직설 화법은 글렀고, 고전적이고 유치하게 물어볼게. 사장 말고 서준우를 만날 일은 없었어?”
“사장님.”
“나는 한 팀장 말고 한재희를 볼 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도망치더군. 새벽에 도망 나가서 주말 내내 전화 따돌리고, 회사에서는 외근 핑계로 따돌리고, 기껏 며칠 만에 얼굴 보이면서 보고서나 던져 줬지. 그러고 다시 나흘 만이야. 젠장, 내가 날짜를 꼽고 있더라고. 인내심 테스트를 기꺼이 받아 준 건, 네가 애처럼 당황했나 보다 시간을 주자 그랬더니, 이제 와 어울리지 않는 쿨한 서른 살 흉내라니…….”
“사장님!”
재희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나랑 업무 중이야, 지금?”
“사장님.”
꼼짝도 않고 고집스럽게 응시하자 준우 역시 뭔가 더 말하려던 입을 다물더니 딱딱하게 굳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봐, 한재희 씨.”
“그날 일,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많이 취했었어요.”
“그래서.”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재희는 시선을 맞춘 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했어요. 도망 다니고 따돌리다니요. 다만 너무 부끄러워서 사장님 얼굴 보기가 힘들었을 뿐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날 일, 없던 것으로 지워 주셨으면 합니다.”
“지워 주면, 너는 없던 일로 하겠다?”
“저는……,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제겐 처음부터 없었던 일입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며칠 당황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재희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닿는 곳, 준우가 내려놓았던 롤을 장식하는 선홍색 연어 알이 터질 듯이 알른거렸다. 잠시 동안 얇게 썰어진 오이가 말린 롤과 주황색 연어 알만 보았다. 입에서 비리고 시큼한 향이 퍼지는 것 같다. 입을 다물자 준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희가 용기를 내서 시선을 들었을 때, 그는 생각에 잠긴 듯이 지그시 재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동자도 입술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악다문 어금니 때문에 실룩거린 볼 근육 외에는 마치 미술관에 앉혀 두어야 할 조각상같이 굳어 있었다.
“할 이야기 더 있어?”
마침내 그가 젓가락을 들면서 입을 열었다. 쉰 듯이 꽉 막힌 음성이었다.
“아니요.”
“그래, 그럼 마저 먹자구.”
그만 먹겠다고 거절하려는데 전복스시를 앞으로 밀어 놓으면서 말했다.
“주방장이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데, 이건 먹어.”
재희는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준우가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몇 접시를 비웠다. 여전히 여러 개의 접시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남았지만 재희는 전복스시 한 점 이외에는 먹지 못했다. 준우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실은 디저트로 나온 레몬셔벗을 다 먹을 때까지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셔벗 두 스푼을 떠먹은 뒤 일없이 물만 마시자니 계산을 마친 그가 말했다.
“그만 일어날까.”
“네.”
밥알이 곤두서도록 불편한 시간이었다. 차갑게 굳어 응시하던 눈동자가 목에 걸렸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 스시집 앞에서 인사를 하고 홀가분하게 헤어지면, 그래서 다음 주가 되고 또 그다음 주가 되면 원하는 대로 서준우 사장과 한재희 팀장은 다시 제자리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발레파킹 운전자가 준우 차를 앞으로 댔다. 재희가 막 인사를 하려 할 때, 준우는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 문을 열었다. 굳은 표정에 눌려 거절하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타.”
재희는 조용히 차에 올랐다.
말없이 운전하던 그가 입을 연 것은 회전초밥집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와 도심 대로에 진입하고도 한참 후였다. 앞머리를 뚝 자른 반 토막 같은 말이었다.
“난 한재희랑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는데.”
시선은 정면에 고정한 채였다. 운전을 계속하면서 재희의 의견 같은 건 상관없다는 듯 덧붙였다.
“아까 그 스시집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적절하지가 않더군. 물론 한재희는 아무 상관없이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했지만 말이야.”
“…….”
차선을 바꿔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차량들 뒤에 멈춘 후에야, 준우는 재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늘 느끼는 건데 넌 참 말을 잘해. 네 의도대로 상대의 입을 막아. 뭐라 반박할 여지 따위 남기지 않지. 조용한 어조 속에 칼을 숨기고서.”
재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냉정한 눈이 재희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아주 유능한 직원이야.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골치가 아파.”
“사장님, 저는…….”
그가 재희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한재희, 아까 네 이야기는 끝났다고 했어. 지금부터 내가 할 거야. 잠자코 있어.”
차는 매끄럽게 좌측으로 곡선을 그리며 다른 길로 들어섰다.
*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청각은 더욱 예민해지는 까닭에 소리를 만들면서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에 대해서 집중하게 된다.
유리컵을 내리는 소리, 디스펜서에서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 물병에서 컵으로 액체가 따라지는 소리……. 컵을 쥐고 있는 손과 무표정한 얼굴, 줄곧 다른 곳을 향한 눈동자, 단추가 두 개 풀어진 흰 와이셔츠.
움직이는 존재를 인식하는 감각이 이제, 피곤을 호소한다.
텅텅 울리는 지하 주차장과 작은 신호음을 내던 카드 인식기, 묵직하게 열리고 닫히던 유리문과 엘리베이터 문, B3부터 35까지 빠르게 바뀌던 붉은색 글자,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규칙적인 구두 소리와 보조를 맞추는 힐, 그리고 한 팔 거리에있는 남자의 숨소리.
차에서, 유리문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그리고 마지막 현관에서까지 잠시 문을 잡고 에스코트하는 동안에도 서준우는 눈길 한 번,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재희가 구두를 벗는 동안 준우가 재킷을 벗으며 걸어 들어갔고, 소파 근처에 어정쩡하게 멈춰 섰을 때 그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목 끝과 손목 끝까지 잠긴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한쪽에 있는 바(bar)로 가는 것을 보면서, 재희는 그날 앉았던 소파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똑바로 앉아 마치 그러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은 사람처럼, 그가 물 한 잔을 다 마시고 한숨을 뱉는 것까지 모든 장면과 모든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탁, 물컵이 대리석 상판과 부딪혀 만드는 소리가 튀어 오른 동시에 시선이 충돌하듯 부딪쳤다. 재희는 시선의 방향을 무릎으로 꺾어 버렸다.
“영리해.”
눈을 들자 그날과 같은 자리에 앉은 서준우가 보인다.
“말도 잘하고 고집도 당할 자가 없지만, 너는 말할 때와 안 할 때, 고집을 부려 먹힐 경우와 아닌 경우를 매우 잘 파악해. 맘에 들어.”
재희는 불쾌감을 삼켰다.
“하실 말씀, 하세요.”
“몇 가지만 물어볼까.”
침착한 어조 속에 분노와 멸시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재희는 양손을 꽉 맞잡았다.
“내가 그날 술 취한 너를 유린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쳐다만 보자 준우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다시 물었다.
“질문에 대답해. 내가 너 술 취한 거 기회로 널 유린했냐고.”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취해서…….”
그가 비웃음을 한쪽 입가로만 터뜨렸다.
“너는 그날이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무슨 수로 알아?”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것……, 알아요.”
“나를 넘겨보겠다고 의지를 세웠던 것도?”
“사장님.”
재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준우를 보았다. 취기와 상관없이 그날의 기억은 사진처럼 선명하다. 다만 말과 행동이 통제를 벗어났을 뿐이다. 준우에게서 차갑게 버려지는 공포감과 억울함이 등짝을 후려치던 순간, 세게 얻어맞은 공처럼 제멋대로 튀어 올라 준우의 콧등을 갈기듯이 굴었다. 그가 수습하려 애를 쓰고 화를 참으며 물러설 때마다, 그의 자제력이나 인내심을 조롱하듯 이를 드러내고 물어뜯었다. 서준우가 손을 들어 버릴 때까지.
‘맞아요. 다른 남자 때문이 아닌 눈물이에요. 이젠 제가 또 뭘 해 드려야 하죠?’
도발적으로 쏘아보는 제 모습이 그려진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기억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군. 한재희가 인사불성이라니, 상상도 어렵지. 어떤 경우라도.”
준우가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계획적인 도발에 내가 제대로 넘어갔어. 너는 발 한 번 걸어 자빠뜨려 봤으니, 이제 제 갈 길 가 보겠다는 거고.”
“어떻게 그런 말을……. 제가 사장님을 어떻게 그랬을 거라고…….”
부들부들 떨리며 나오는 목소리가 창피스럽기 짝이 없었다. 냉정한 비웃음을 지우지 않고 준우는 말을 이었다.
“더한 추측도 가능하지. 진실에 가까운 추측. 내가 여태 그 변수를 무시했어. 장현석 말야.”
“무슨 말씀이세요?”
“첫 경험을, 아니, 순결인가, 그런 걸 아무 남자한테 던지면서 장현석 검사가 널 배신한 방식대로 복수하니 통쾌했나, 한재희?”
재희는 멍하니 고개를 젓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수치심, 분노, 원망, 억울함, 어느 하나 견디기 어렵도록 치솟지 않는 건 없었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마치 칼날에 베인 것처럼 쓰라리고 아팠다.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적 없습니다.”
평정을 찾은 듯한, 혹은 평정을 가장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핸드백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동도 없이 시선만 움직이는 그를 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현관으로 방향을 틀기 전에 재희는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그가 낚아채듯 잡은 팔을 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더 이상 사과할 수 없을 만큼 사과했고 모욕 받을 만큼 받았어요. 이제 그만하세요.”
“말 안 끝났어.”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바짝 다가선 그의 발끝만 쳐다보자, 귓등으로 그의 한숨이 내려왔다.
“나는 그날도 상관없다 그랬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상관없어.”
재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가 나를 복수에 이용했든, 그저 한 번 넘겨본 것이든 상관없단 말이야. 취해서 실수한 거라니 말대로 깨끗하게 기억에서 지워 줄게.”
“사장님, 저는…….”
“변명도 필요 없어. 사실 말을 하면 내가 당할 수가 없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눈을 하고서 실수 없이, 손해 없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거든, 한재희는.”
준우가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전혀.”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볼게요.’ 억지로 말하고 돌아서는데 준우가 잡은 팔에 힘을 더했다. 반사적으로 당겨 붙여진 몸을 뗄 사이도 없이 다른 팔이 허리를 감았다. 벌어진 입이 ‘왜?’라는 소리도 못 만들었다.
“몹시 억울하긴 하지만, 그날은 지우고 오늘 다시 시작할까 해.”
“무슨 말이에요?”
“오늘, 맑은 정신으로. 핑곗거리 없이.”
“사장님!”
“그렇게 부르지 마.”
“아니요, 사장님.”
“해고하든지 회사를 팔아 치우든지 할 테니 그 사장 소리 좀 집어치워!”
“서준우 사장님! 도대체 왜…….”
고집스럽게 소리치는 순간 입이 막혔다. 완강히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 역시 붙잡혔다. 겨우 팔을 빼내 가슴을 힘껏 밀어내자 갑자기 숨이 쉬어졌다. 구속하는 팔도, 맞붙은 몸도 그대로 입술만 놓아준 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쏟아지는 눈빛이 너무 뜨거워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빨라졌다.
“왜, 왜 그러세요.”
바보처럼 말했다.
“널 원해.”
“나를 왜…….”
“예뻐. 미치도록.”
예뻐……. 가지고 싶은 여자에게 남자가 하는 말 외에 더 이상 다른 말은 없었다. 대신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을 맞출 때마다 준우가 속삭였다.
“천하에서 제일 바보가 된 기분이야.”
이마에 입을 맞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콧날에 입을 맞추고.
“거절당하기 전에 뭐든 해야 하는데.”
뺨에 입을 맞추고.
“도망가지 마…….”
준우가 팔을 풀고 한 발짝 떨어져 섰다. 그의 몸이 닿았던 자리마다 소슬하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붙었던가, 가슴이 찬바람에 에이는 것 같다.
“한재희, 도망가지 마.”
“……왜.”
발치쯤에 시선을 내린 준우의 표정은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애써 참아 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도망가도 잡아 올 테니까.”
“그러시진 못할 거예요.”
그런 사람 아니라는 것 누구보다 잘 아니까. 재희는 속을 다 보이지 않았다.
“아니.”
준우가 재희의 왼손을 감싸 쥐었다.
“맹세해. 나는 포기 안 해. 오늘 도망가면 내일 찾을 테고, 내일 도망가면 또 모레 잡을 거야. 어디로 숨든 반드시 찾아 올 거야. 그러니 네가 포기해.”
재희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만, 그 손에 잡힌 제 손만 바라보았다. 그 맹세의 시효는 얼마나 지속될까. 1년, 한 달, 일주일……. 어쩌면 고작 오늘 밤뿐일지도.
언제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나요, 물어보고 싶다. 내 무엇이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인지도. 설마 나를 사랑한다는 건가요, 묻는다면 그는 어떻게 답할까. 사랑해, 답한다면 지옥이 시작되겠지. 사랑의 순도와 경도를 저울질하고 그 사랑에 영속성을 부여하려 꼴사납게 발버둥 칠 테니까.
“재희 네가 나 별로로 여기는 것도 알아. 상관없어. 이용하고 싶으면 이용해.”
“그런 마음 없어요.”
“낭패야. 매력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용 가치도 없다?”
재희는 눈을 맞추지 않고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우가 남자로 매력이 없다니……. 짧은 순간에 수십 장의 그림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인터뷰 장소 문을 열며 들어서던 키가 큰 남자, 그가 만들던 미소, 톡톡 자판 옆을 두드리던 손가락, 넓은 등과 단단한 가슴…….
사무실, 회의실, 복도, 음식점, 거리, 바다와 산…….
전화를 받고 서류를 검토하고 랩톱을 들여다보고 지시하고 웃고, 열심히 먹고 힘차게 움직였다. 그는 빛이 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언제나 주변을 압도했다.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재희.”
“……네.”
“재희야.”
“네.”
“고개 들어 봐.”
“…….”
“나 좀 봐.”
준우가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눈이, 그리고 마음이 보였다. 그가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한재희를. 눈을 마주한 순간 모든 것이 갑자기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안전한 관계, 영속적인 관계, 편안한 관계, 너무 외롭고 힘들어 손 내밀면 언제든 잡아 줄 거라 믿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
들어주고 싶다. 서준우가 원하는 거라면. 그가 원하는 그날까지.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아니, 단 하루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를, 그녀도 간절히 원했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모든 것을 우습게 만들어 버릴 만큼.
재희는 팔을 들어 준우의 목에 감았다. 코에 그의 향기가 닿고 뺨에 그의 목덜미가 닿고 입술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기쁘고 또 슬퍼 가슴이 울렁거렸다. 눈을 감고 몸을 꼭 붙였다.
“서두르지 않을게.”
“네.”
“아프게 안 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날처럼 그가 안아 올렸다.
“무거워요.”
“아니.”
“걸어갈래요.”
“다음번엔.”
‘다음이 있군요.’라고 재희는 말하지 않았다.
*
엎드린 채로 팔을 뻗었다. 잡히지 않는다. 부드러운 머릿결도 녹을 것처럼 감겨들던 살결도. 준우는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확인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 그녀의 향기와 감촉을 더듬어 보고는 다시 잠들곤 했다. 누웠던 자리에는 주름 하나 없이 시트가 말끔하게 펴져 있고 휙 둘러보니 티 테이블 의자 위에 옷가지가 그날처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한재희가 사라졌다.
준우는 허리쯤에 걸쳐져 있던 이불을 거칠게 걷어 내고 일어섰다. 그날처럼 온 집을 뒤질 것이다. 그래도 없다면……. 문을 열고 거실 쪽으로 향하는 걸음이 바빴다.
“재희야, 한재희!”
숨어 버린 아이를 부르듯이, 비어 있는 거실에서 닫힌 욕실 문을 보면서 불렀다. 스위치가 켜져 있나 확인해 보러 걸어가는데 뒤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저…….”
한 손에 조리 도구를 들고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재희가 서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안심되고 무안하고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여자가 괘씸하기도 하다. 망설이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붙잡아 본 적이 없다. ‘진심’을 못 주겠다면 ‘가장’만이라도 차지하고 싶었다. 외로움이든 설움이든 복수심이든, 여자에게 이용당한다 해도 좋았다. 어젠 이용해 달라 애원도 했군……. 사랑이 이렇게 초조한 것이었나, 이런 꼴로 만들어 놓고서 말간 얼굴로 서 있는 여자가 서운하다. 아니, 사랑스럽다. 모르겠다. 아직.
“일어나셨어요?”
“응.”
“커피 드려요?”
“내가 할게.”
준우는 먼저 주방으로 들어섰다. 에스프레소 버튼을 누르고 예열이 되도록 잠시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희가 종종거리며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식탁에는 접시가 세팅되어 있고 싱크대 위 볼(bowl)에는 풀다 만 달걀 물이, 도마 위에는 버섯이니 양파 같은 야채들이 잘게 썰어져 있었다.
“좀 더 있지. 잠자리가 불편했어?”
“아니요. 잘 잤어요. 시간도……, 꽤 됐어요.”
재희가 슬쩍 벽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늦잠을 잤다. 이 여자가 도망갈까 봐 지키느라 잠을 못 잔 건가.
준우는 피식 웃었다. 예열을 마친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동되는 소리가 칙칙 요란스럽게 났다. 버튼을 한 번 더 누르자 원두가 갈리는 소음과 함께 진한 커피 향이 진동했다. 먼저 한 잔을 건네니 재희가 두 손으로 받자마자 한 모금 마셨다.
“아, 맛있어.”
이제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커피 마시고 싶었어?”
“음……. 눈뜨면 마셔 버릇해서요.”
“먼저 마시지 그랬어.”
한 모금 더 홀짝거린 뒤에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소리 날까 봐.”
“응?”
한 잔을 마저 뽑아 들고 무슨 말인가 쳐다보자 시선을 피하며 더 작게 말했다.
“소리요. 잠 깨울까 봐…….”
준우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재희의 뺨이 옅게 물들었다.
“옷 입고 나오세요. 아침 먹어요.”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그러고 보니 트렁크 팬티 차림이다. 움직이지 않고 커피만 마시니 가슴 쪽으로 눈을 두다가 다시 푹 떨어뜨린다. 귓불이 발갛다.
싱크대에 커피잔을 두느라 몸을 기울이자 재희가 움찔 물러섰다. 손에 들고 있는 갈색 머그잔을 뺏고 다시 끌어안는다면 아마 한재희는 싫다고 할 것이다. 욕정에 정신없는 놈으로 보이는 건 사양이다. 머리라도 한번 쓸어 보려다가 준우는 그냥 돌아섰다. 머리카락이든 뭐든 손끝이라도 닿으면, 재희가 발간 볼을 하고서 눈을 맞추면, 그리고 입을 벌린다면 분명 다시 안을 것이다. 재희는 그날 밤처럼 어젯밤처럼 눈물이 맺히면서도 또 참겠지.
세수를 마치고 준우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와이셔츠와 양복을 챙겨 한쪽에 두고 편한 티셔츠 한 장을 꺼냈다. 맨살에 셔츠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감촉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희야.’
‘……네.’
막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서두르지 않느라 했는데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오래 참지 못하자 곧이어 ‘아아.’ 작게 터지는 신음 소리와 같이 눈물이 흘렀다.
‘쉬……, 괜찮아.’
허공을 움키는 손을 잡아 주며 달래는 꼴이 이율배반적이다 싶은데 재희가 한 손을 들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괜……찮아요.’
겨우 이어지던 음성과 오히려 위로하듯 등을 쓸어 주던 손길이 떠오르자 지금도 온몸이 저릿해진다.
그날 이후 내내, 재희의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심장을 뚫고 가슴 깊숙이 꽂혔다.
왜, 왜…….
더없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한재희가 온통 물음표다.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하고 또 확실했다.
한재희를 가지고 싶다. 다시는 두 눈을 똑바로 맞추며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단지 실수였다고 냉정하게 선을 그어 버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날을 세웠다. 완전히 소유하리라, 그리고 서준우의 여자임을 확인시켜 주리라. 깊이 움직일 때마다 재희가 입술을 깨물고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만족하지 못하고 준우는 기어이 확인을 받아 냈다.
‘한재희, 너 내 여자야.’
‘……네.’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
‘다시 대답해.’
‘준우……, 씨.’
재희가 끊어질 듯이 가는 목소리로 불렀다.
‘대답해. 재희 너, 뭐라고?’
‘당신, 여자…….’
내 여자…….
준우는 드레스 룸을 나가면서 흘러내린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잠시만요. 다 됐어요.”
재희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뭔가를 뒤집고 있었다.
“뭘 해, 이리 와.”
“잠시만요.”
재희는 같은 말만 한 번 더 했다. 뒷모습을 보다가 준우는 식탁에 앉았다. 마주 보도록 두 자리에 정갈한 세팅이 되어 있었다. 흰 냅킨, 크기가 다른 포크 두 개, 나이프, 작은 접시에 덜어 놓은 크림치즈와 딸기잼, 프룻볼에 준비해 둔 토마토와 키위, 오렌지는 한입에 먹기 좋도록 예쁘게 다듬어졌다. 따라 놓은 물을 반 컵 마시고 아일랜드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막 토스터에서 올라온 베이글을 꺼내어 미리 준비된 접시 두 개에 반쪽씩 담고 식탁으로 옮겼다.
“드세요.”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에그오믈렛. 달걀이 부푼 반달 모양이다. 재희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케첩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후추랑 치즈 들어갔는데 간이 안 맞으면 소금 간 더 하세요.”
재희가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얇게 펴 바르다가 눈이 마주치자 물었다.
“잼도?”
고개를 저었더니 앞에 두면서 종알거렸다.
“커피 식었는데 다시 내릴까요?”
준우는 대답 없이 식은 커피를 마셨다.
굉장히 오랜만의, 아니,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아침에 이런 식으로 누군가가 챙겨 주고 물어보고 눈치 보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로 곧장 내던져진 기분이다.
모양도 색도 고운 오믈렛을 쳐다보다가 나이프를 들었다.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는 걸 재희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살피는 눈이 고맙기만 해야 하는데 참으로 복잡했다. 미안하지만 별로 달갑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서준우를 위해 서준우의 집에서 오믈렛을 만드는 한재희는 싫다. 준우는 이기적인 발상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그저 서준우의 여자 한재희로, 혹은 한 팀장으로만 존재하기를 원하고 있다. 아니, 한재희는 서준우의 그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다만, 그에게 단 한 가지는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고 신뢰를 박살 내고, 결국 꿈꿀 수 없을 만큼 망가지는 일을 그녀와 하고 싶지 않았다.
재희에게 가정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고, 준우에게 가정은 반복할 수 없는 실패다. 철저하게 깨어져 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순결한 믿음과 성스러운 기도로 현재를 견디는 이다. 패잔병은 믿음과 기도를 완성시킬 자격도, 능력도 없다. 그 점을 알기에 욕심을 억누르며 돌아서곤 했다. 가질 수 있다는 환희와 그로 인해 겪게 할 고통을 저울질하며 어쩌면 수년 동안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비겁한 망설임은 끝이 났다. 이를 악물고, 나아갈 뿐.
어떻게 할까…….
재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재희가 분석해서 만든 보고서들을 보면 군더더기 없이 냉철하고 정확했다. 나긋나긋해 보이는 그녀의 외양과 전혀 다르게 싹둑싹둑 각이 서도록 잘라진 육면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한 팀장과 잘 맞았다. 굉장히 치밀하고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신속하게 판단을 내리는 성향이 무척 맘에 들었다. 그런 한재희라면 빠른 판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여자라는 자리는 영원성이나 두 사람이 같이 설계하는 달콤한 미래, 이를테면 같이 눈을 뜨고 같이 잠이 드는, 아이, 강아지, 찌개 냄새와 하얀 드레스 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자리임에 대해서.
“맛, 어때요?”
“맛있어.”
준우는 오믈렛을 삼키며 답했다. 그러고 보니 재희 앞에는 오믈렛이 없다.
“재희 씨는?”
“전 괜찮아요.”
“같이 먹자. 운동 갈 거라 많이 안 먹어.”
준우는 반을 갈라 재희 접시 위로 덜어 버렸다. 모양이 흐트러지고 속이 갈라진 오믈렛이 속상한 듯 재희가 제 앞의 것과 준우 것을 번갈아 봤다. 포크를 억지로 드는 것을 보면서 잔인하다 싶게 덧붙였다.
“다음부터 나 먹으라고 뭐 만들고 그러지 마.”
시선을 피해 커피를 마시면서 다시 말했다.
“나가서 사 먹으면 돼. 아침에는 커피랑 토스트. 그것도 먹게 되면 내가 준비할게.”
“……미안해요.”
“응?”
“생각, 거기까지 못 했어요. 불편하셨죠.”
무안을 당한 아이처럼 풀이 죽은 모습에 맘이 정말 불편해졌다.
“내가 미안해서 그래. 손님 부려 먹는 것 같아서.”
“……네.”
준우는 남은 오믈렛을 두어 번 만에 다 먹은 후, 재희가 접시를 비우도록 기다리면서 커피를 마셨다. 얼굴을 들지 않고 마지막 조각까지 재희가 천천히 삼키더니 이내 눈을 맞추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운동, 자주 하시나 봐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피트니스센터 가세요?”
“주로 그렇지. 골프는 어쩌다가. 테니스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어서더니 ‘다 드신 거죠.’ 그러면서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게.”
재희가 물끄러미 보다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몇 번 싱크대와 테이블을 오가며 치우는 걸 말없이 지켜보더니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잔 하나를 들고 왔다.
“재희 씨, 고마워요.”
세척기 안에 집어넣으며 말하자 재희가 웃었다.
“공주님 된 거 같아요.”
“왜?”
“손가락 까딱 안 하고 사장님 부려 먹으니까.”
준우는 후후 기분 좋게 웃었다.
“앞으로 계속 그러시죠.”
“후회하지 마세요.”
“절대.”
‘정말 그래요?’ 하는 눈으로 보더니 의미가 정확하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럼 앞으로 공주 노릇만 하면 되는 거네요.”
“응.”
“준우 씨 여자로 일종의 특권인가요?”
준우는 똑바로 꽂히는 시선을 피하며 재희를 가볍게 안았다.
“그래, 맞아. 내 여자로의 특권.”
“난 그 특권 즐기기만 하면 되구요?”
“응.”
“그래도 회사 일은 열심히 할게요.”
“그것도 나 부려 먹고 싶으면 시켜.”
“설마, 저는 꽤 정확한 편이에요.”
“알지.”
재희가 품에서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
“그래서 맘에 들죠?”
꽤 정확한 편이 아니었다. 매우 정확하고 깔끔했다. 한재희 팀장은 오늘 아침 이미, 예의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을 완료한 모양이다. 그래서 맘에 드냐고 묻고 있다. 준우는 조금 시간을 들여서, 그러나 몹시 정확하게 대답했다.
“……응, 맘에 들어.”
“운동 가셔야죠.”
재희가 떨어지면서 시계를 살폈다.
“같이 가자.”
“네?”
“피트니스 갈 거야.”
“저……, 운동은 아무래도……, 좋아하지도 않고…….”
발그레해지면서 재희가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렸다.
“어제 보니 운동 좀 해야겠던데?”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뭔가를 확인하듯이 커졌다가 이내 아래로 향했다. 입을 꾹 다물었다가 떼면서 조그맣게 불만을 터뜨렸다.
“저……, 그게……, 그랬어요? 그래도 오늘은…….”
“응?”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운동……하기 싫어요.”
재희 얼굴이 더 발갛게 되었다. 더듬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상당히 귀엽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준우는 푹 웃음을 터뜨렸다.
“근육질 여자는 취미 없는데, 너 체력이 너무 약하더라고. 맘껏 안지도 못하겠어.”
새치름하게 입을 다물어 볼록해진 뺨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래, 오늘은 하지 마. 오후에 결혼식 가야 할 곳이 있어. 네 시간쯤 남았어. 내가 운동 쉴게.”
“아니에요, 운동하세요. 음……, 생각해 보니 운동하는 거 보고 싶어요.”
재희를 다시 끌어안았다.
“저는 구경만 하든지 밖에서 기다릴게요. 아니면…….”
재희가 품에서 뭐라고 더 이야기를 했지만 간질거리는 숨결밖에 안 느껴진다.
*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한국에서 맘에 드는 클램차우더를 먹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온 곳은 준우가 다니는 피트니스센터가 있는 호텔 베이커리였다. 재희는 조갯살까지 듬뿍 한 스푼 더 떠올렸다.
“맛 괜찮아?”
“맛있어요.”
준우는 막 부스러뜨린 크래커를 감싸고 있는 투명 비닐 포장지를 윗부분부터 길게 찢었다. 부서진 과자가 클램차우더 위로 소복하게 뿌려졌다. 숟가락으로 두어 번 젓다가 쳐다보자 준우가 야채수프를 뜨다 말고 다시 물었다.
“이것도 먹어 볼래?”
“맛있어요?”
“괜찮은 편이야. 셀러리가 많이 들어가서 향이나 맛이 좀 강해. 난 좋아하는데 입에 안 맞는 사람도 있을 거야. 먹어 봐.”
재희는 맛을 보고는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좀 매워요.”
“응, 시즈닝이 많이 들어간 편이지.”
준우는 맛있게 떠먹으면서 대꾸했다.
“아침에 운동하시는 날에는 여기서 이렇게 드시나 봐요.”
“샐러드로 할 때도 있고. 여기 샐러드도 괜찮은데 하나 사 올까?”
재희는 대답 없이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준우가 맛을 묻기 전에 답을 했다.
“맛있어요.”
“샐러드도 먹을래?”
샐러드에 대한 대답은 못 했구나. 재희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뇨, 어서 드세요.”
“더 맛있는 거 사 줘야 하는데 좀 그러네.”
“충분히 맛있어요.”
소스가 흘러내릴 것 같아 냅킨으로 샌드위치 아랫부분을 한 번 더 감싸려는데 준우가 한입 먹다 말고 일어섰다.
“먹기가 좀 불편하지? 나이프랑 포크 받아 올게.”
좁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돌아서려는 준우의 팔을 잡았다.
“앉으세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네, 맛있고 불편하지 않고 그리고 좋아요.”
또박또박 끊듯이 말하자 준우가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원래 자상한 사람인 거 알았는데요.”
“응?”
“매사 무섭도록 정확해서 그렇지 자상한 면이 있는 거 알았어요.”
“칭찬인가?”
“그런데 어제 오늘 만 하루도 안 돼서 7년 넘게 받았던 자상한 배려의 양을 초과했어요. 방금 ‘정말 괜찮아?’ 물은 걸로.”
“하하.”
준우가 샌드위치를 삼키다 말고 사레가 걸리도록 웃었다.
“좋아요. 그런데 받아도 되나 싶은 기분 들어서 좀 불편해요.”
“공주님 하신다면서 뭐가 불편해. 안 그래요, 공주님?”
“누가 들으면 웃어요.”
“왜?”
준우가 진지하게 되묻자 재희는 순간적으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남자가 여자한테 ‘공주님.’ 그런 말 하는 거 우스워 보이잖아요. 태진 씨 핸드폰으로 여자 친구 전화가 오면 ‘공주님’ 그렇게 떠요. 사람들한테 말할 때도 공주님이라 받들어야 한다고.”
“우습게 보였어?”
“나경 씨는 우습대요. 전, 별생각 없었어요. ‘우리 공주님.’ 하는 말은 아빠들이 딸한테 쓰는 말 같아서 좀 다정하게 보이기도 하고……, 음…….”
재희는 물을 삼켰다. 솟아오르려는 기억 한 자락도 같이 삼켰다.
‘우리 공주님!’
‘아빠!’
퇴근할 때면 매일같이 공주님에게 주는 선물이 있었다. 사탕 한 알에서 눈이 휘둥그레 커지도록 화려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은 공주 인형까지.
“나도 바꿀까? 우리 공주님, 이렇게?”
“네?”
핸드폰을 꺼내 드는 걸 보고 재희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말도 안 돼요.”
준우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리면서 싱긋 웃었다.
“지금은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한 팀장?”
준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한재희 팀장?”
“아니.”
재희는 샌드위치를 마저 먹고 수프도 먹었다. 아버지가 준 인형이 입었던 옷은 부풀린 소매 끝과 치마 끝단에 수제 레이스가 층층이 달린 초록색 벨벳 드레스였다. 갈색 눈에 갈색 곱슬머리 하얀 얼굴에 발간 뺨. ‘우리 공주님’을 닮은 인형이라고 했다. 그래서 재희는 지금 샌드위치를 급히 먹으면서 아무 질문이든 계속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쓰레기통에서 눈을 감고 있던 인형의 영상을 지워야 했기에.
“음……, 그럼 그냥 이름만 하셨어요? 한재희라고?”
“…….”
답이 없어 꿀꺽 샌드위치를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관찰하는 눈동자였다. 시선을 맞추고 웃어 보려는데 그가 짧게 답했다.
“재희.”
언제부터, 원래 그랬나요, 누구에게나? 아니라면 왜? 순식간에 몇 가지 질문이 뒤죽박죽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아무 특별한 이유 없이 성을 뗀 이름만 입력시켰다 해도, 단지 그가 버튼 몇 번을 더 누르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좋았다. 충분했다. 전화를 할 때마다 그는 ‘재희’라는 글자를 보며 ‘재희가 전화를 했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비록 받으면서 ‘네, 서준웁니다. 한 팀장,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답했다고 하더라도.
샌드위치 덩어리가 목에 걸린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이고 침을 삼키는데 눈앞에 하얀 냅킨이 불쑥 내밀어졌다. 입가를 닦아 주는 손을 잡았다.
“제가 할게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준우는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다.
“애도 아닌데 뭐 묻히면서 먹었나 봐요.”
준우는 조금 웃으면서 오른쪽 입가를 털어 주고 손등으로 볼을 쓸었다.
“처음부터, 계속 그랬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했다. ‘처음부터 뭘 묻히고 먹었다고요?’라고 말해야 하나 싶은데 준우가 더 빨랐다.
“재희였어. 그걸로 늘 충분했어.”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한 준우의 눈동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았는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재희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얼음물, 가져오려고요. 좀 더워요.”
“갖다 줄게.”
“아니, 나가면서 아이스커피 테이크아웃 할래요.”
“그럴래?”
“네.”
답하면서 도로 앉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재희의 가방 속이었다. 핸드폰 액정에 찍힌 익숙한 번호는 갑자기 위층 베란다에서 머리 위로 뿌려진 물줄기 같았다. 엄청난 일들이 파도처럼 밀리고 밀려들어 첫 번째 휩쓸렸던 파도로 받은 충격은 이미 멀리로 달아나 버린 건지도 몰랐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가 이내 아득했다. 벨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자 준우가 일어섰다. 쟁반을 들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재희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
통화는 무척 짧게 끝났다. 별로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몇 마디…….
“응, 그렇지.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아, 그 정도는 이제 알려면 알 수 있는 사람이지…….”
그리고 만나자는 말에 다시 연락한다고 하고 끊어 버렸다. 재희는 현석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커피를 흔들어 보다가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에 있는 컵홀더에 두었다. 무릎 위에 둔 가방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가 하는 동안 차는 회사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지하 5층이에요.”
“응.”
“엘리베이터 입구 가까운 쪽이긴 한데……. 여기서 좌측으로.”
“알아.”
“네?”
“늘 비슷한 자리쯤에 세워 두잖아.”
말대로 준우는 정확하게 재희가 주차한 곳을 찾아 그 앞에 차를 대었다.
“저…….”
재희는 가방끈을 다시 쥐었다가 놓았다.
“응?”
준우가 마치 들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아까 전화, 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만나고 싶다고…….”
“그 뒤로 처음이야?”
“네.”
“만나.”
준우가 군더더기 없이 잘라 말했다. 빤히 쳐다보자니 조금 웃으며 덧붙였다.
“만나고 싶은 거 아니야? 아니라면 얘기도 꺼내지 않았겠지.”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어록을 풀었다.
“갈게요.”
웃으며 인사하고 문을 열려는데 왼손이 잡혔다.
“네?”
“이번만이야.”
바로 답하지 못하자 준우가 손을 더 세게 쥐면서 눈을 맞췄다.
“대답하라고 하면 유치하다 할래?”
“맹세하라 한다면 유치하다고 말하려 했어요.”
재희는 여전히 눈매를 부드럽게 풀지 않는 준우를 향해 생긋 웃었다.
“낮에, 사람들 많고, 밝은 곳에서 만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알아. 그래도 이건 그러겠다고 답해.”
“네, 그럴게요.”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고 뺨을 쓸더니 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네.”
재희는 문을 닫고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며 ‘가세요.’ 입모양으로만 말하고 제 차에 올랐다.
앞뒤로 나란히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간 후 한동안 준우 차가 바로 뒤를 따라오더니 어느 순간 룸미러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빼 보니 오른쪽 차로 몇 대쯤 앞으로 은색 차량이 보이는데 확실하지 않았다. 재희는 좌회전 신호를 넣었다.
*
결혼식장은 번잡했다. 한국의 결혼식은 대체 혼인을 하는 남녀의 친구들이 모여 축하한다는 자리라기보다는 양가 부모의 인맥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회합장에 가까웠다. 양가 모두에게 초청받는 하객이 많을수록, 혹은 신부나 신랑 어느 한쪽의 청첩장을 받은 사람이 다른 쪽에 참석한 지인들과 우연한 만남에 반가워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그 결혼은 좋은 혼사라는 말을 듣기 쉬웠다. 어울리는 레벨 간의 만남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니까.
혼주婚主, 맞는 말이다. 혼사의 주체는 바로 그들의 부모였다. 이번 혼사의 신부 아버지는 K그룹 부회장이었고 신랑 측은 여당 실세 4선 의원이었다. 신부 부모님의 남매들은 전현직 장관급만 세 명이고 신랑 측 다른 사돈은 꽤 탄탄한 중견 기업인 M그룹 오너였다. 당연히 굉장히 좋은 혼사였다.
준우는 신부 측 혼주에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서서 식장으로 들어서기 전에도 다섯 번은 넘게 인사를 해야 했다. 두 번은 신부 측, 세 번은 신랑 측의 객이었다. 그중 네 차례는 ‘서 사장도 결혼……하셔야죠.’ 하는 인사를 받고 틀에 박힌 답을 해야 했다. 소개시킬 여자가 있다는 말에는 적절하게 감사를 표하면서 웃었다. 하지만 천만에, 인생에 두 번 다시 결혼은 없다. 더군다나 이런 소개로 이어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피식 속으로 웃었다. 어느 순간 서준우가 격상되었다. 결코 레벨이 맞지 않는 집안의 사윗감으로.
준우의 결혼식은 별로 좋지 않은 혼사에 속했다. 레벨이 맞지 않는 결합. 지연의 외가는 H그룹 계열이었다. 그것만으로도 LA에서 작은 사업체를 하는 집안의 아들, 서준우는 데릴사위였다. 뭐라 생각하든 나쁘다고 느끼지 않았다. H그룹에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데릴사윗감으로 골라서 데려온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된다 해도 손해 보는 패는 아니다 하면 그만이었다. 실은, 지연의 집에서 상당한 미움을 받고 있었다. 창창한 딸의 미래를 꺾은 남자였으니. 아니, 그건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 결혼은 사랑이 전부라 해도 맞는 말이었으니까.
사랑…….
불같은 사랑이었다. 몇 달간은 그 불길을 잡지 못해 눈이 녹고 심장까지 녹는다고 생각했다. 이성에 처음 설레던 사춘기 때조차 비슷한 감정도 느껴 보지 못했었다. 그런 감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
스치고 만나고 알던 모든 여자, 누구와도 지연은 달랐다. 빨갛게 익은 얼굴로 ‘이름 알아요. 서준우죠? 저는 당신이랑 사귀고 싶은데요.’라고 말하던 순간부터 그녀는 세상 어떤 사람과도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무쇠도 녹일 만큼 뜨거운 열정이 끝없이 솟아나는 사람. 폭포수처럼 퍼붓는 사랑이 가능한 사람. 손을 잡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모든 것이 새로운 모험이었으며 어느새 구름을 밟고 서 있었다.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지연과 같은 정도의 열정과 사랑을 퍼부어 주는 것은. 그녀는 언제나 하나만 볼 수 있었다. 바이올린만 봤고, 그 대상이 준우로 옮겨진 후 그는 그녀의 바이올린이고 그녀의 인생이 되어야만 했다. 누구도 그 무엇도 더 중요할 수는, 아니, 조금도 중요해서는 안 됐었다. 그건 가장 지독한 배신이었으니까.
배신, 이었다.
지연이 가르쳐 준 것 중 가장 크고 무거웠던 것은 사랑과 배신은 거울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의 절대량에 대한 배신, 절대적 믿음에 대한 배신, 뜨거운 열정에 대한 배신…….
절대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절대적 믿음을 충족시킬 능력이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열정이 되어 버렸다. 결코 고갈될 것 같지 않던 열정도 사랑도, 너무 깊기에 넘치기에 더욱 쉽게 배신의 덫에 잡힌다는 잔인한 법칙을 깨닫게 되었다.
준우는 결코 지연을 사랑했음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결혼은 후회했다. 결혼은 생활이고 결합이고 하나로 뭉개져야 하는 것이었다. 배신의 날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장인과 장모의 질책을 받을 때마다, 이지연의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인사 받고 평가받을 때마다, 인정받으려 일에 매달릴수록, 일로 사람으로 늦은 귀가가 반복될수록, 점점 웃지 않는 지연을 웃게 하려 노력할 때마다, 지연이 잠을 못 이루고 눈물을 흘리고 지쳐 갈 때마다……. 서슬 퍼런 배신의 칼날 아래 준우도 지쳐 갔다. 바닥까지 떨어지도록 지쳤다.
지연은 까맣게 타들어 갔고 준우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지연은 앞길이 꺾여 버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서준우는 재계와 정부가 주목하는 새파란 금융인이 되었다. 단지 그 차이였다 반박할 수도 없었다. 나도 타들어 가노라, 준우는 원망하고 소리 지르는 지연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모진 놈이라 냉정한 놈이라 장인 장모는 돌려서 우아하게 말했고, 준우 부모는 그의 면전에 대고 욕했다. 누가 봐도 그러할 만한가 보다, 주는 대로 다 듣고 다 받았다. 결과는……, 파경이었다. 둘 다 상대가 자신을 먼저 버린 것이라 했다. 두 사람의 시작처럼 끝에 대한 말들과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의 끝, 배신의 승리, 서준우의 패배,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할 죄책감, 그리고 서준우는 사랑에 대해 겁쟁이가 되었다.
그것들만으로도 충분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찾은 옵티멈(2)은 한도가 정해진 사랑이었다. 배신과 패배의 위험이 없는 사랑. 투자에 있어서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3), 위험과 수익률을 매치하는 최적의 결합에서 준우는 리스크 러버(4)에 가까웠지만 사랑과 배신으로 바뀐 변수들의 결합에서는 극도의 보수였다. 움츠러들 수 있는 만큼 움츠러들어 최고로 안전한 국공채 같은 사랑에 100퍼센트 분배하도록 맞춰졌다. 그것으로 족했다. 두 번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아도 좋았으며 모험을 하고 싶지도 구름을 밟고 싶지도 않았다. 진정으로.
잡념으로 유달리 집중할 수 없던 결혼식 행사를 예정보다 더 빨리 빠져나왔다. 주차장에서 운전대를 잡다가 홀더에 꽂힌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집어 들었다. 재희가 마시다가 두고 간 커피다. 흔들어 보다가 스트로로 들이켰다. 얼음은 다 녹아 싱거웠지만 그래도 약간은 시원했다. 컵 겉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손바닥을 타고 손목으로 흘렀다. 눈앞에서 흔들어 봤다.
검은색 스트로에 립스틱 자국 같은 건 없었다. 오늘 화장을 안 했던가. 그래도 커피에 오렌지 향이 나는 것 같다. 어제 안으면서 알았다. 익숙한 재희의 냄새는 오렌지 향과 비슷했다. 톡 터지는 자극은 빠진, 부드럽기만 한 오렌지 향. 준우는 남은 커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 꽤 시원해졌다.
재희…….
도로에 진입하면서 생각했다. 맹세도 하지 않고 약혼자를 만나러 간 여자.
그 약혼자는 지적이면서 귀티 나고, 곱게 멀쩡하게, 그리고 멀겋게, 매가리 없게 생긴 자식이다. 유치한 적의감이 끓어올랐다.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재희는 그 자식 편도 들어 주고 갔다.
오늘 만나기로 한 걸까. 어떻게 해야 하나. 전화를 걸어 볼까, 집으로 찾아가 볼까 생각하다가 신호를 놓칠 뻔했다. 준우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재희는 분명 국공채는 아니었다. 골똘하게 생각해 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7년 넘게 가까이 했던 여자인데도 정보가 전혀 없다.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느새 좌회전 신호로 바뀐 것을 또 몰랐다.
*
삐이익, 찻주전자에서 물이 끓었다는 소리가 요란했다.
“녹차 괜찮으세요?”
재희가 싱크대 쪽으로 가다가 멈취 서서 준우에게 물었다.
“응, 좋아.”
재희 오피스텔 구조는 단순했다. 현관과 가까운 쪽으로 난 문이 침실이자 유일한 방이고 작은 거실 공간과 주방 공간은 붙박이 식탁을 경계로 이어져 있었다. 준우가 앉아 있는 카우치 옆쪽으로는 잡다한 책들과 컴퓨터가 놓인 커다란 책상이 자리 잡고 있다. 대학원 시절 혼자 살던 원 베드룸 형태랑 흡사했다.
준우는 결국, 도곡동에서 있었던 저녁 식사 약속을 급히 마무리 짓고 분당으로 통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재희는 집에 있었다.
“티백이에요.”
재희가 머그잔 두 개를 들고 걸어오면서 말했다. 준우와 재희는 카우치에 나란히 앉았다.
“결혼식 잘 다녀오셨어요?”
“응.”
“그 뒤엔 저녁 약속?”
“응.”
재희가 녹차를 후 불어 한 모금 마시더니 가만히 올려다봤다.
“오늘 오후에 만났어요. 자주 만났던 카페에서. 천장도 높고 바닥은 넓고 사람은 많은 곳.”
“후후.”
안절부절못하고 달려온 걸 눈치챘나 무안해져서 웃음이 나왔다.
“더 보고해야 해요?”
“내가 더 알아야 하는 사항이 있어?”
재희는 고개를 젓더니 녹차를 다시 마셨다. 두어 모금 더 마시는 동안 준우는 재희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녹차가 아니라 술이라도 마시면서 해야 할 이야기 같지만…….’ 하면서 재희가 조금 웃었다.
“……한 번은 봐야 했어요. 이야기도 하고 마무리를 짓는 상징적 행위, 그런 것도 필요하구요.”
“응?”
“반지를 돌려준다든가…….”
“으응.”
재희는 머그잔만 보면서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왜 이제 사과하냐, 그런 대화도 했어요. 또…….”
“다시 잘해 보자, 그런 말은 안 하고?”
재희가 눈을 들어 준우를 한참 쳐다보았다. 준우는 재희 입만 바라보았다.
“그런 말, 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태연해 보려 해도 심장이 쿡쿡 찔리는 느낌이다. 준우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그랬어요.”
“……후회해?”
재희가 조용히 웃었다.
“그렇게 보여요?”
“슬퍼 보이는데.”
“그렇지 않아요. 갑자기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시간을 정리하기가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으니까. 그냥 그런 거예요.”
재희가 시선을 피했다. 우울하고 불안한 표정은 흘러내린 앞머리로 가려졌다. 머그잔을 무릎에 댄 채로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는 손놀림 외에는 재희는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준우는 재희 손에서 머그잔을 빼냈다. 제 것과 나란히 우측에 있는 책상에 두었다. 그제야 올려다보는 얼굴을 부드럽게 만져 주고 어깨에 기대게 했다.
“후회하지 마.”
“네.”
“오늘로 완전히 정리해.”
재희는 목덜미에 얕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희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고 손등을 덮어 위로 다섯 손가락이 맞물리도록 하나하나 넣고 깍지를 꼈다. 재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냐고 물었어요.”
“응?”
“꽤, 아니,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에요. 도저히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사장님이냐고…….”
준우는 장현석이 장경환 전 중수부장의 아들이며 지연의 어머니와 그의 모친이 가까운 동창 사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그에게 준우 이미지 역시 적의를 품기에 충분할 것이다. 갑자기 감정의 날이 예리하게 비죽비죽 솟았다. 서준우가 가장 떠올리기 싫은 실패를 안줏거리 삼았을 사람들의 비웃음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만 같다.
“장 검사 펄펄 뛰었겠군.”
“내가 먼저 다른 남자가 있었다던가 하는 지저분한 오해는 전혀 안 했어요. 그냥 좀……, 아니, 아니에요.”
말을 얼버무리며 몸을 떼려는 재희를 억지로 힘으로 눌렀다.
“극구 말렸겠어. 이지연 전남편 서준우,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
“그렇지 않아요.”
일어서서 한 발짝 걸어 나가는 걸 도로 앉히자 재희 몸은 미끄러지듯이 벌린 허벅지 안쪽으로 푹 들어왔다. 불편한 듯 일어서는 재희를 다시 눌러 앉혔다.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더하고 반쯤 풀어진 깍지를 단단히 조였다. 재희가 갇힌 채로 목을 늘여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그럼 뭐라고 했는데.”
“…….”
“말해 봐.”
“조금 걱정한 건 사실이에요. 어울리지 않게도 누이동생 걱정하는 오라비 흉내도 아닌데, 사장님은 내가 감당하기 벅찬 남자라고 그랬어요.”
뭐라 더 말하려 입을 여는데 턱 끝에 촉촉하고 보드라운 재희의 입술이 닿았다.
“그만할게요. 너무 말을 많이 했어요. 좀 답답해서. 그래도 이러는 거 아닌데.”
“……미안해.”
재희가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입을 댄 채로 말했다.
“손, 풀어 줘요.”
“아파?”
“아니요. 안아 주고 싶어서.”
준우는 손을 푸는 대신 턱을 잡아 얼굴을 들게 했다. 그리고 깊이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 * *2 optimum, 최적의 결합, 투자 포트폴리오 위험과 기대 수익률의 결합
3 high risk high return, 고위험 고수익
4 risk lover, 경제 활동 시 위험 감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