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55
#254화
“산서잠룡 진태경, 승!”
심사관의 외침에 수만의 관중들이 일제히 기립한다.
환호와 박수 세례를 받으며 비무대에서 내려오는 진태경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동자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기이한 놈이군.’
타구봉법은 개방의 후개가 되어야만 사사할 수 있는 개방 최고의 절기다.
우스꽝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그 위력이나 초식의 신묘함은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다.
한데 진태경은 별다른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너무나도 쉽게 타구봉법을 파훼했다.
공력이 실린 죽장을 맨주먹으로 박살 내고, 항룡십팔장을 맞아도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피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맞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왜?’
고통을 즐기는 별종인가 싶었지만, 매번 오만상을 쓰는 걸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맷집을 키우려고 타구봉법을 맨몸으로 맞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나.
‘여하간 흥미로운 녀석이군.’
진태경을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이 잊히지 않는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듯한 근골. 천무지체(天武肢體)가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화왕의 제자라…… 주의 깊게 살펴봐야겠어.’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돌아선 사내, 상승검 종리추는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좇는 시선들이 있었다.
뱃살이 후덕한 장사치, 허리가 굽은 노인, 싸구려 무복을 걸친 삼류 무인과 낭인…….
주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들.
그러나 그들의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절정 고수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전음이 오고 갔다.
– 각주, 명을.
– 이 호, 삼 호가 붙는다. 단, 백 장 밖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 행적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다.
– ……받들겠습니다.
– 사 호, 오 호는 진태경과 청풍을 주시해라. 그가 다시 접근해 온다면 즉시 알리도록.
– 옛.
– 그럼 모두 무운(武運)을 빈다.
짧은 대화가 끝났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평범한 얼굴들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겨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길거리에 주저앉아 동냥하던 한 중년 거지는 그 후에도 한동안 사람들이 던져 주는 푼돈에 허리를 굽실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인적이 드문 어느 골목에서부터였다.
뿌드드득, 스륵.
구부정하던 어깨가 펴지고, 뒤틀렸던 척추가 일자로 곧게 섰다. 이어 보이지 않는 손이 주무르는 것처럼, 안면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중년 거지는 푸근한 인상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또각. 또각.
단단하기가 강철 같다는 흑단목(黑檀木)으로 만든 의족이 돌바닥을 두드렸다.
‘상승검 종리추.’
노인, 천면호리 송호는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은영각의 각주이기 이전에 그 역시 한 사람의 정보원이자 역용술의 달인이다.
한 번 본 얼굴은 잊지 않았고, 사소한 습관이나 골격만으로도 상대를 알아차렸다. 역용술을 쓰더라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 종리추만큼은 예외였다.
‘분명 놈과 나는 마주친 적이 있다.’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였을까.
종리추의 얼굴을 떠올리며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송호는 다리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걸음을 멈췄다.
‘또 시작이로군. 요즘 들어서 더욱 극성이야.’
실로 오래된 상처였다.
수십 년 전, 젊은 시절의 그는 마교와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했다가 한쪽 다리를 잃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그날의 기억은 화인(火印)처럼 그의 뇌리 깊숙이 새겨졌다.
무저갱처럼 깊고 어두운 한 사람의 목소리도.
‘천면호리 송호. 여우치고는 덩치가 제법이군. 우선 가볍게 다리부터 뜯어 볼까?’
몸을 부르르 떨던 송호는 통증을 참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찌꺼기조차 남아 있지 않은 과거다. 그보다는 실체가 뚜렷한 현재에 집중해야 했다.
‘종리추…… 네놈은 누구냐? 또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이미 만반의 준비는 끝마쳤다. 그럼에도 가슴에 남아 있는 불안감은 자꾸만 그를 흔들었다.
‘내가 늙은 것인가. 평화가 길었던 것인가.’
노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눈을 감았다.
컴컴한 암흑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늘 해맑은 웃음이 맺혀 있는 소년 같은 얼굴과 평범한 체구.
하지만 그가 검을 뽑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쉬이이잉!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들리지 않아도 들린다.
삼십육방(三十六方)을 빈틈없이 점한 채 쏘아지는 자줏빛 검기.
그것은 빛살처럼 빨랐고 흩날리는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멸염신권, 화염신장, 아니면…….’
그밖에도 몇 개의 무공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청풍은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대. 결국, 답은 하나다. 짧은 고민 끝에 서늘한 창대를 움켜쥔 그 순간이었다.
삐걱.
“조장. 조장님.”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청풍도, 그가 만들어 낸 허상의 검기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혁무진이 보였다.
“헤헤. 저 왔습니다.”
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왔냐?”
“적적하실까 봐 말동무나 해 드리려고 왔죠.”
“말동무?”
“예. 기특하지 않습니까?”
“기특?”
후우, 깊은 한숨을 쉰 나는 의자 다리를 뽑았다.
“엎드려, 이 사특한 새끼야.”
“왜, 왜 이러세요.”
“청풍이 시켰냐? 나 수련 방해하라고?”
“헉, 수련 중이셨습니까?”
“그럼 가부좌 틀고 조는 놈도 있냐?”
눈치를 살피던 혁무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조장님 어린 시절에는 의자에 앉아서 마보 수련하려고 했다면서요.”
“그건 내가 아니라…… 그런데 너 지금 나한테 말대꾸한 거냐?”
“아니, 말대꾸도 못 합니까?”
아니, 이 자식이 미쳤나.
나는 어안이 벙벙한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잽싸게 머리부터 가렸을 녀석인데, 잠깐 흠칫하더니 이내 가슴을 쭉 폈다.
“너 지금 뭐 하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저도 나름 조장님을 보필하면서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십시오.”
“무슨 대우. 사대 보험? 앞으로 다치면 산재 처리 해 줘?”
“사대 보험이니 산재 처리니 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고요. 자꾸 이러시면 저 그냥 다 때려치우고 포목점이나 이어받을랍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그럼.”
“예?”
“수고했어. 아니, 수고하셨습니다. 무진 씨. 앞으로도 포목점 번창하세요.”
“잠깐, 잠깐만요.”
“아, 맞다. 다른 곳은 몰라도 산서성에 있는 본점은 문 닫을 준비 하세요.”
덥석!
종아리를 끌어안은 혁무진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
“예. 뒤통수 한 대만 때려 주십시오.”
“걸맞은 대우를 해 달라며?”
“아니에요. 저는 조장님의 손찌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
미친놈인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녀석의 이마를 툭 쳤다.
“잡소리 그만하고 본론부터 얘기해. 왜 왔어?”
“그게, 진짜 말동무해 드리려고 왔는데요.”
“뭐?”
고리눈을 뜨자 혁무진의 목소리가 한층 기어들어 갔다.
“내일이 결승인데 부담감이 크실 것 같아서…….”
“아직 상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무슨. 오늘 준결승 마지막 날인 거 몰라?”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니 이제 곧 종리추와 청풍의 비무가 시작될 것이다.
둘 중 승리하는 자가 내 결승 상대이며, 엄청난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청풍의 승리는 확실하다.
내 말에 혁무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는데 들른 거죠.”
“싱거운 놈일세. 이럴 시간에 수련이나 해, 인마.”
말은 이렇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생각해 보면 무진이 저 녀석, 나 따라다니면서 고생도 참 많이 했지.
가끔 정신 나간 언행을 하는 것도 내 뒤통수 스매쉬로 뇌세포를 하도 많이 파괴당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미안해지네.’
앞으로는 잘해 줘야겠다 다짐하고 있던 그때, 혁무진이 물었다.
“청풍 소협이 이기겠죠?”
“그거야 당연……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야죠. 무적신검이라는 유치한 별호에 이름은 강풍이고, 지난번 비무에서는 자하신공까지 썼는데 모를 수가 있습니까?”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고 있더라고요. 청풍 소협이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니라 대부분은 화산파의 제자 정도로 알고 있지만요.”
하긴, 자하신공은 워낙 특색 있는 무공이니 그 정도까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청풍 소협이 이기는 게 확실하죠?”
“당연한 거 아니냐?”
“확실해야 합니다. 반드시!”
뭐지. 왠지 모르게 저 탐욕스러운 눈빛은.
내가 찜찜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함성.
나는 옆에 놓아둔 창, 백염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올라가는 건 청풍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이건 명백한 계란과 바위의 싸움이다.
하지만 계란이 어떻게 부딪치는지, 바위가 어떻게 계란을 깨트리는지 지켜보는 것은 결승 비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뭐 하냐. 안 일어나고.”
“옙.”
* * *
“연명검!”
“너한테 은자 한 냥 걸었다! 한 번 뒤집어 버려!”
“으하하! 무적신검이 아니라 연명검한테? 흑우가 따로 없구먼.”
타오르는 횃불, 쏟아지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비무대에 오르던 종리추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상석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들 때문이었다.
십왕(十王)이라 불리는 초절정 고수가 자그마치 세 명.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주인들과 가장 뒤에서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는 천면호리 송호도 보였다.
“상승검 종리추. 정해진 위치에 서게.”
발걸음이 멈춘 시간은 극히 짧았다, 심사관의 말에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비무대 위에 오른 종리추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갑작스러운 행동에 순간 조용해졌던 주변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튀어 나왔다.
검파는 흙덩이가 끼어서 문양도 알아볼 수 없었고, 검신은 온통 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무인이라면 병장기를 제 목숨처럼 아끼기 마련인데, 종리추의 검은 만들어진 이래 손질이라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뭐야, 저게.”
“난 또, 뭔가 하고 깜짝 놀랐지 뭔가.”
“저러니까 연명검이지. 뭘 기대해?”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녹이 슨 검신을 유심히 바라보던 종리추가 혀를 찼다.
“당장은 못 쓰겠군.”
그때, 잔뜩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던 청풍이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어, 내 거 빌려줄까? 아니, 내 거 쓰겠나?”
“아닐세. 그건 자네가 써야지.”
“난 괜찮은데…….”
“괜찮다? 자네는 어떡하고?”
“상관없네. 친구니까.”
청풍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종리추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마음만 받지. 내 것으로 해도 충분해.”
“그래도 친구니까…….”
“이보게.”
스으윽.
붉게 녹슨 검날이 청풍을 향했다.
장난스럽던 종리추의 눈동자 속에는 어느새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난 네놈 같은 친구 둔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