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61
#260화
“청 소협. 청 소협, 일어나십쇼.”
철썩! 철썩!
“으으음.”
청풍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누군가가 그의 뺨을 힘차게 갈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뺨을 맞는 게 처음이라 신기하긴 한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하다.
‘아아, 이래서 사람들이 뺨 맞는 걸 싫어하는구나.’
청풍은 작은 깨달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기.”
철썩! 철썩!
“저 일어났.”
철썩! 철썩!
“저 일어났어요…….”
철썩!
기어코 한 대를 더 때린 후에야 손이 멈췄다.
낯익은 얼굴의 청년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셨군요. 혹시 제가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오랜만이에요. 혁무진 무사님.”
혁무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하시는군요.”
“그럼요.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청풍의 뇌리에 혁무진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 년 만에 보는 좋은 사람이 뺨을 때리고 있으면 아무리 청풍이라 해도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갑자기 돈 잃은 게 생각나서.”
“예?”
“아니,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네에.”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인 청풍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저기에서 고함이 빗발치고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축제인가요?”
“……축제겠습니까?”
“아니에요?”
“아닙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혁무진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법왕 굉도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으며, 그 흉수가 바로…….
“종리추, 라고요?”
“예. 상승검 종리추. 바로 그놈입니다. 정확한 정체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마교에서 보낸 살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마교…….”
조부인 검성의 입을 통해 몇 번이나 들었던 이름이다. 한때 온 천하를 피로 물들게 했다는 흉신악살들이 모여 있는 곳.
그런데 종리추가 바로 그 마교의 살수라니. 청풍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무슨…….”
혁무진이 황당함에 물든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직접 당하고도 모르십니까? 너무 충격이 커서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인데, 하마터면 그놈 손에 죽을 뻔하셨어요.”
아니다. 청풍은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강자를 상대로 느낀 무력감, 두려움, 난생처음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서웠어. 정말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곤두서고 손바닥이 축축해질 정도다.
하지만 왜일까. 친구가 되자며 활짝 웃던 종리추의 얼굴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리는 까닭은.
잠시 꾹 다물려 있던 청풍의 입술이 열렸다.
“제 친구예요.”
“……예?”
“그 사람, 제 친구라고요. 그럴 리 없어요.”
“청 소협!”
화들짝 놀란 혁무진이 다급하게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이내 아무도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숨죽인 음성을 토해 냈다.
“미쳤습니까? 종리추는 이미 무림공적(武林公敵)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놈을 친구라고 하시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소림사 방장을 암살하고 도망친 살수다. 종리추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치도곤을 치를 수도 있다.
설사 검성이 혈육처럼 키운 제자라고 해도 세인들의 눈총을 받으리라.
“다시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뭔가 말하려던 청풍은 혁무진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놈은 마두(魔頭)입니다. 어떤 교활한 술수를 부려 청 소협의 환심을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굉도 대사를 암살하기 위한 위장이었단 말입니다.”
“확실한가요? 그가 죽인 걸 본 사람이 있어요?”
“모든 정황이 확실합니다. 이미 놈을 잡기 위한 추살대와 소림을 구원하기 위해 모인 수천의 군웅들이 출발 준비를 마쳤습니다.”
“소림…….”
“마교 놈들의 간악한 흉계에 소림이 위험에 빠졌습니다. 적 대협과 조장님은 한발 앞서 떠나셨고요.”
청풍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캄캄한 암흑 속, 진태경과 종리추의 얼굴이 차례대로 눈앞을 스친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먼저 갈게요.”
“예?”
혁무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을 때, 청풍의 신형은 이미 저 멀리 쭉 뻗어 나간 후였다.
그의 발끝이 향하는 방향에는 숭산(嵩山)이 있었다.
* * *
숭산은 오악(五岳)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경치가 수려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푸르고 아름다워야 할 그곳은 피와 비명으로 물들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죽여라.”
서걱! 촤아아악!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곳곳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평화롭던 백중 대낮, 홀연히 나타난 수백의 복면인들은 무감각한 눈빛으로 살행을 이어 갔다.
“참배객들을 보호하라! 절대 물러서지 마라!”
이마에 계인(契印)을 새긴 소림의 무승들이 그들을 막아섰지만, 상황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인 복면인들을 상대하기도 벅찬 마당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학승(學僧)을 비롯한 어린 사미승들과 수많은 참배객까지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크아아악!”
오늘 같은 일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중원 한복판, 그것도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경내를 감히 누가 침범한단 말인가.
잔인하고 비열한 복면인들의 검에 승려들이 파죽지세로 밀리던 그때였다.
“이놈들,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감히!”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척단구의 노승이었다.
소림사 경내를 피로 물들이는 복면인들을 노려본 노승의 눈동자에서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마공(魔公)! 천산의 마두 놈들이었더냐!”
노승의 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掌力)이 전면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아!
뒤늦게 노승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쇄도해 오던 복면인들이 장력에 휩쓸려 절명했다.
단 일수에 십수 명의 고수가 바스러지는 압도적인 광경.
그러나…….
“천주(天主)께서 명하셨다. 적은 죽인다.”
“천명을 따라라. 모두 죽여라.”
수백의 복면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동요도, 망설임도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중얼거리며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그 광경에 노승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지독한…….’
사지가 잘려 나가고 내장이 튀어나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 채 살육을 자행하다가 실이 끊긴 인형처럼 툭 쓰러지는 복면인들의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놈들은 사람이 아니다. 악귀, 그 자체야.’
정마대전을 온몸으로 헤쳐 나온 노승에게조차 그럴진대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경륜 있는 중년의 무승들이 분투하고 있지만, 이런 참혹함을 처음 목격하는 젊은이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악귀(惡鬼)와 대면한 불가(佛家)의 제자가 가진 사명감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노승은 내심 한탄했다.
지난 정마대전에서 누구보다 앞장서고, 누구보다 많은 피를 흘린 것이 바로 소림이다.
천하 무림을 구한 숭고한 희생이었으나, 많은 어른과 무공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희생은 오늘의 비극으로 돌아왔다.
‘하필이면 방장 사형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금!’
어쩔 수 없다. 지금 소림을 지킬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노승, 굉천(宏天)은 이를 악물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해 냈다.
“이곳은 소림이니라!”
비록 사형인 굉도의 이름에 가려졌다지만 그 역시 드높은 경지에 이른 초절정의 고수.
비록 외부에는 알려지진 않았으나 끊임없이 무공에 매진해 온 덕에 그의 무공은 이미 굉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모두 덤벼라!”
콰아아아!
고강한 불가의 공력을 머금은 장력이 사방을 휩쓸던 그 순간이었다.
“오호. 백보신권(百步神拳)?”
“저 염병할 무공을 또 보게 되는군.”
귓가를 파고드는 두 줄기의 목소리.
굉천의 시야에 천천히 경내로 들어오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검을 내리고 일사불란하게 물러서는 복면인들의 모습도.
“네놈들이더냐?”
씹어뱉는 듯한 굉천의 말에 붉은 수염의 노인이 코를 후비며 대꾸했다.
“그래. 이 몸이시다.”
“간악하기 짝이 없는 천산의 마두들이로군.”
“천산의 마두라, 글쎄.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만 뭐, 넘어가 주마.”
굉천이 멈칫했다.
“마교가…… 아니란 말이냐?”
“그게 무슨 상관이냐? 네 번들거리는 대가리를 잡고 뽑아 줄 분이라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을.”
대학자 같은 풍모의 노인이 잔잔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염호, 자네가 처리하려고?”
“당연하지. 백보신권을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있나.”
“이 친구, 성질 좀 죽이라니까.”
“나중에 생각해 봄세. 지금은 내 성질머리보다는 저 땡중을 죽이고 싶거든.”
굉천은 눈을 부릅뜬 채 두 노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염호라는 이름. 그리고 매우 상반되는 분위기의 두 노인에게서 피어오르는 막강한 기세.
“네놈들은 혹시…….”
염호가 광포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아차린 걸 보니 아직 어린놈이군. 범(凡) 자 항렬의 땡중들은 진즉 다 뒈졌으니까…… 네가 법왕의 막내 사제라는 그놈이냐?”
“……!”
“반응 보니까 맞나 본데? 한수, 자네가 마지막에 죽인 그 늙은 중이 이름이 뭐였지?”
“범공.”
정마대전 당시 전사한 사숙의 법명을 듣자 굉천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틀림없어. 놈들이다.’
어찌 모르겠는가, 염호와 한수라는 이름을.
그리고 수많은 소림의 제자를 죽인 흉적들의 별호를.
“음양쌍괴(陰陽雙怪).”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다.
남만의 열대우림과 북부의 대설산을 각각 지배하던 두 마두는 중원으로 나와 천하를 피로 물들였고 그들을 추살하기 위해 펼쳐진 정파의 천라지망은 마교의 침공으로 갈가리 찢겨 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두 마두는 마교의 휘하에 들어가 정마대전에서 엄청난 흉명을 떨쳤다.
“음양쌍괴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오랜만이로군.”
“호시절이었지. 그때만큼 즐거웠던 적도 드물어.”
끔찍한 과거를 흐뭇하게 웃으며 추억하던 염호가 고개를 털었다.
“아니, 아니지. 그래도 지금이 좋아.”
“아무렴. 그 시절에도 하남에는 오지 못했으니까.”
“무신, 그 빌어먹을 놈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 무신도 없다네.”
“십왕이니, 삼성이니 하는 것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
눈을 번뜩이는 염호를 웃으며 지켜보던 한수가 문득 굉천을 향해 합장을 취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군.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네.”
두 노괴(老怪)의 등장에 굳어 있던 굉천은 불길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유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올라오는 길에 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뭔가. 법왕 굉도, 바로 자네 사형 말일세.”
“……!”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무림맹에 있을 사형이 죽었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헛소리!”
격동하는 굉천을 바라보며 한수가 피식 웃었다.
“진위에 관한 판단은 자네의 몫이지. 그리고…….”
염호의 뜨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를 포함한 중놈들은 전부 여기서 뒈진다. 이게 우리의 판단이고.”
스슥.
우두머리의 기세를 느낀 듯, 복면인들이 무감각한 눈빛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수백 개의 검날에서 피어오르는 예기가 소림사를 가득 채운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굉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사형…… 사실입니까?’
그러나 이내 떨림이 잦아들고 눈동자에는 빛이 스며들었다.
팔십 년을 무공에 매진한 노승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음양쌍괴를 동시에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군. 와라, 이 빌어먹을 노괴들아.”
“으하하핫! 이 친구, 승려치고는 입이 거친데. 아직 혈기 방장한 게 마음에 들어.”
박장대소를 터트린 염호가 앞으로 나섰다.
“아쉽지만 네놈은 노부 하나로 족하다. 한수, 저 친구는 더 바쁜 일이 있거든.”
“아주 바쁜 일이지.”
빙긋 웃은 한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만 비켜 주겠나? 면벽동(面壁洞)에 가봐야 하니 말일세.”
면벽동.
한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단어에 굉천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그곳에는 무명이 있다. 사형의 하나뿐인 제자. 그리고…….
‘녹옥불장.’
마침내 적들을 목적을 알아차린 굉천이 사자후를 토해 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을 막아라!”
“막아? 그 정도로는 안 되지.”
음양쌍괴가 짙은 미소와 함께 손을 떨쳤다.
마치 오십여 년 전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그들의 전신에서 끔찍한 살기가 솟구쳤다.
“다 죽여.”
쐐애애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