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54
#353화
둥, 둥, 둥!
우렁찬 북소리를 들으며 한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것도 오랜만이구먼.”
땅딸막한 체구에 제멋대로인 이목구비.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그저 추하고 심술궂어 보이는 노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를 한 번이라도 마주한 이들은 노인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악귀.’
노인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백여 장 앞, 철옹성처럼 사천당문을 둘러싼 성벽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하룻강아지들을 보니 기분이 썩 유쾌해진다.
“벌써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군. 기련산에서 막 하산했을 때가 이런 기분이었지.”
태어나길 난산(難産)이라, 추한 생김새를 타고났다.
한날, 한배에서 태어난 다른 두 형제라고 어찌 다를까. 아비마저 사라지자 기댈 곳 없던 세 형제는 사람들의 멸시에 기련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때는 우리도 참 젊었지. 이놈, 저년 할 것 없이 죽이고 또 죽였는데…….”
그렇게 타고난 시대가 난세(亂世)라, 악귀가 되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추하다 멸시하며 세 형제에게 돌팔매질하던 이들이 모두 피 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중원을 침공한 마교에 합류하여 세상을 피로 물들이자, 사람들은 그들을 기련삼괴라 부르며 두려워 마지않았다.
“한창때 생각이 나니 흥겹구나. 안 그러느냐?”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린 노인, 일괴(一怪)는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혀를 찼다.
“이것 참.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깜빡깜빡한단 말이지.”
평생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두 아우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이괴(二怪)는 청성, 삼괴(三怪)는 아미를 맡아 떠났으니까.
이제 머지않아 천하에서 손꼽히는 두 명산은 시산혈해로 뒤덮일 것이다.
그리고…….
콰아아앙-!
마침내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울려 퍼졌다.
일괴는 사천당문의 성벽 너머에서 들려온 굉음에 껄껄 웃었다. 서천마군, 그가 약속한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마군께서 우리를 부르시는구나. 그렇지 않으냐!”
차차차창!
수백 개의 병장기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뽑혀 나온다.
일괴의 뒤로 길게 늘어선 삼백 명의 흑의인들. 어느새 관군의 복색을 벗어던진 그들은 검은 피혁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때가 되었다. 깃발을 올려라!”
일괴의 외침이 울려 퍼진 다음 순간, 성벽에 있던 당문의 무인들은 볼 수 있었다.
펄럭.
희끄무레한 새벽 안개 너머, 우뚝 솟아오른 깃발을.
세찬 바람에 나부끼는 두 글자를.
“암천(暗天)……?”
성벽 위, 누군가의 중얼거림은 우렁찬 북소리에 파묻혔다.
둥, 둥, 둥!
점점 더 힘을 더해 가는 북소리에 맞춰 흑의인들이 전진을 시작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은 뜨겁고 눈빛은 차갑다. 서슬 퍼런 살기가 그들의 전신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한 마리의 악귀가 있었다.
“천주(天主)께서 명하노니.”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기쁨에 젖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날인가. 정파 무림은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천하에 드리운 암천의 깃발을 보며 두려워 마지않을 것이다.
일괴는 환희에 떨며 외쳤다.
“사천당문을 멸(滅)하라!”
“존명!”
둥, 두둥, 두두두두둥!
가파른 북소리와 거센 함성. 땅에서는 삼백의 흑의인들이 성벽을 향해 돌격하고,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와 막 내리쬐기 시작한 햇빛을 가렸다.
성벽 위에서 힘찬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감히 본가를 침범하려는 악적들이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전원, 발시(發矢)!”
쉬쉬쉬쉬쉭! 퍽!
강맹한 기세로 쏘아진 화살촉이 누군가의 몸을 꿰뚫고 땅에 처박힌다. 피 안개가 맺히고 비명이 터져 나온다.
“크아아악!”
그러나 사상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흑의인들은 병장기로 화살을 막아 내거나, 더러는 입고 있는 갑옷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저, 저런!”
“쇠뇌로도 뚫지 못하다니. 저게 무슨……!”
어지간한 두께의 철판조차 관통해 버리는 쇠뇌의 효용도 갑옷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당문의 무인들이 동요하는 그 순간, 다른 누구보다 눈부신 속도로 쏘아지는 자그마한 신형이 있었다.
쐐애애액!
“크하하하! 좋구나, 좋아!”
성벽 위의 그 누구도 일괴의 정체를 몰랐다. 그러나 광기에 찬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모두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만독진(萬毒進). 만독진을 발동시켜라!”
다급한 명령. 그러나 유령처럼 사라진 일괴의 신형은 이미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히죽,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웃은 그의 일권(一拳)에 이 갑자의 공력이 회오리처럼 몰려들었다.
“어디, 당가의 피 맛 좀 볼까.”
후웅, 콰아아아앙!
바야흐로,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응?”
“어?”
나와 청풍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들었어?”
“은인, 들었어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적천강의 맥을 짚고 있던 신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잠시만요.”
손을 들어 이어지려는 신의의 말을 막은 나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비록 몸은 지하 뇌옥에 있지만, 감각은 다르다. 공력의 힘으로 몇 배나 극대화된 청력은 미로처럼 얽힌 뇌옥의 복도를 벗어나 위로, 더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둥.
이번에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청풍이 손에 쥐고 있던 먹거리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은인, 이거 혹시…….”
“맞아.”
나는 뇌옥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북소리야.”
둥, 둥, 둥.
마치 내 말에 동의하듯, 때맞춰 북소리가 울려 퍼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띠링.
–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 당신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퀘스트가 자동으로 승낙되었습니다!
– 퀘스트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
나는 말 없이 눈앞을 가득 메운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울려 퍼진 북소리와 돌발 퀘스트.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시벌, 벌써 팔뚝에 닭살 돋은 것 봐.
“미치겠네, 진짜.”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다. 지금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졌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퀘스트 정보 확인.’
띠링.
특유의 경쾌한 알림과 함께 새로운 홀로그램 창이 생성되었다.
물론 알림 소리와는 달리, 퀘스트창에 적힌 내용은 전혀 경쾌하지 않았다.
퀘스트
[초대받지 않은 손님]암천의 먹구름이 마침내 사천에 드리워졌습니다.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고, 사천당문은 포위되었습니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등급 : ???
제한 : ???
임무 : ???
보상 : ???
실패 : 죽음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히 세 번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내용부터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적들이 쳐들어왔다. 포위되어서 도망치지도 못한다. 일단 무운을 빈다. 끝.
‘빌어먹을, 더럽게 심플하네.’
등급, 제한, 임무, 보상. 모든 것이 전부 물음표다.
아, 그나마 하나는 확실하게 알려 줬다.
이 퀘스트를 실패하면 죽는다는 것.
세상에, 쳐들어온 적들을 막아 내지 못하면 죽는다니.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다. 너무 좋은 정보를 알려 줘서 불알을 탁 칠 뻔했다.
‘이게 시발 퀘스트 정보창인지, 퀘스트 통보창인지.’
둥, 둥, 둥.
눈앞이 아찔하다. 점점 더 또렷하게 거세지는 북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느새 등허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머릿속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퀘스트창을 지운 나는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동 노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공을 익혔지만 그 경지가 한참이나 떨어지는 신의다.
나와 청풍과는 달리, 북소리를 듣지 못한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제라니. 그게 무슨……?”
“적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적들이라니. 이곳 사천당문에 말이오?”
“예, 틀림없습니다. 이미 포위된 상황입니다.”
신의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다분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어느 미친놈들이 사천당문에 쳐들어온단 말인가.
하지만 그 미친놈들이 암천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름 아닌 바로 그 소림사를 피로 물들인 주범이니까.
그러나 일분일초가 아쉬운 지금,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고 계십시오.”
“……알겠소.”
신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천하를 돌아다니며 숱한 일을 겪어서일까.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적천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지난번에 말했듯이 아직 기운이 안정되지 않았소. 만약 이 상태에서 외부의 충격을 받는다면…….”
신의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천강의 상태는 아직 불안정하다. 퀘스트창이 알려 준 바에 의하면 사천당문은 이미 암천에 의해 포위된 상황.
‘만약 우리가 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적천강의 안위도 안위지만, 성공 가능성도 희박하다. 소림사를 쳤던 암천의 전력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사지(死地)에 발을 디디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특히 혈주(血主). 그놈 같은 괴물이 있다면 더더욱 피해야 한다.’
고민 끝에 도출해 낸 답은 하나였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 소협.”
청풍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은인.”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뭐든지요.”
청풍은 한없이 순진하고 가벼운 녀석이지만, 아주 가끔 진중한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구보다 그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이 청풍에게 지금과 같은 부탁을 할 수 있는 이유다.
“이곳에서 노야를, 스승님을 지켜 줘. 그게 내 부탁이다.”
“……!”
“옆에서 들었겠지만, 지금은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누군가는 나가서 사천당문을 도와야 한다.”
“은인.”
“그러니까…….”
“은인.”
나는 이어지려는 말을 삼켰다. 청풍이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은인이 남으라면 남고, 가라면 갈 거예요. 하지만 은인.”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은인은 지켜야 할 사람이 있잖아요. 맞죠?”
“……!”
“저는요. 누군가를 지켜야 할 때 겁에 질려 싸우지 못했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바보 같은 놈이에요.”
몰랐다. 청풍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 후에도 밝고, 말 많고,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처럼 살았으니까.
녀석은 늘 그랬다. 그러는 것이 녀석에게는 어울렸고 당연했다.
‘하지만 아니었어.’
하남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멀고도 어두운 뇌옥 어딘가를 바라보던 청풍이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같은, 하지만 평소와 다른 미소가 녀석의 입가에 맺혀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정말 결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떠난다.’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의 청풍. 걱정스러운 표정의 신의. 점점 더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비명과 함성.
그리고…… 일렁이는 횃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적천강의 얼굴.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청 소협. 부탁 하나 하자.”
청풍과 내 시선이 부딪힌다.
나는 천장을 가리키며 씩 웃어 보였다.
“저 개새끼들한테 한 방 먹여 주고 와.”
“네, 은인!”
어느 때보다 해맑은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