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38
#737화
미카엘 실베르트.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세계 최고라 불리는 오딘 길드의 주인이자, 대격변이 낳은 숱한 영웅 중에서도 특출 난 존재였으니까.
사람들은 목숨 바쳐 자신들을 구해 준 미카엘 실베르트를 사랑했고, 나 역시 그를 동경했다.
아니, 했었다.
저벅.
등 뒤에서 멈춘 발걸음.
그와 동시에 천천히 돌아선 나는 볼 수 있었다.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잿더미와 폐허 위, 물끄러미 이쪽을 응시하는 한 남자를.
“그래, 자네로군.”
짧은 침묵을 깨트리는 한 마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도, 그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니까.
아마 온갖 미디어에서 떠도는 얼굴 사진이 없었어도 그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느껴졌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저 몸뚱어리에 응축된 거대한 힘이.
그것은 이정룡보다, 아니 지금껏 마주한 어떤 S급 헌터보다 강대한 기운이었고, 내가 깨달은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너냐?”
미카엘 실베르트.
놈의 회색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비로소 확신했다.
지금 내가 딛고 선 폐허가 누구의 작품인지. 이 끔찍한 재앙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건넨 첫마디와 같지만 다른 내 물음에, 미카엘 실베르트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쓸데없는 질문이군. 내가 아니라면 누구겠나.”
“뭐?”
“어차피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야. 더는 묻고 답할 가치조차 없는.”
도대체 뭘까.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
잠시 분노도 잊은 채 굳어 버린 내 모습에, 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군. 이미 상호 간의 뜻을 알았고, 협상이 결렬된 이상 당연한 수순에 불과한데.”
“너 이 새끼…….”
“후긴을 통해 경고하지 않았나. 제안을 거절하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내 말을 잘라 낸 미카엘 실베르트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대격변의 영웅이 손을 뻗어 허공에 흩날리는 잿가루를 움켜잡으며 말을 이었다.
“들어 보니 지난 몇 주간 제법 바쁘게 지냈더군. 그 넓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아 헤맸나?”
“……!”
“한 가지 충고해 주지. 이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어. 설령 펜타곤이라 할지라도.”
놈이 꽉 쥐었던 주먹을 펼쳤다.
몬스터의 핏물과 섞인 잿가루는, 몇 주 전 수도 없이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곳곳에서 죽어 나가는 수많은 광신도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강물처럼 흐르는 핏물로 끈적하게 젖은 사막의 모래알…….
그리고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평화롭고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완전히 뿌리를 뽑았어야지.”
“……설마?”
“상대가 정신 나간 광신도들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합리적인 거래였지. 나는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그들은 복수를 위한 무기를 원했으니.”
알았다. 이제야 알겠다.
이 갑작스러운 몬스터 웨이브의 진짜 원인을. 눈앞의 미친놈이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를.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그리고 모든 것을 깨달은 그 순간.
화아악.
눈앞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전에서 솟구친 삼 갑자의 열양지기가 용암이 되어 사지백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놈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최적의 움직임을 찾아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일보(一步).
단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지면을 밟는 동시에 놈과 나 사이에 놓인 공간은 사라질 테고, 그럼 개소리나 늘어놓는 저 아가리를 멸염신권으로 닥치게 만들 수 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몬스터도 아닌 같은 인간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덥석.
양어깨를 붙잡는 두 개의 손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진태경 씨!”
“보는 눈이 있다. 지금은 안 돼.”
최 팀장과 스켈레톤 킹.
그 자신들도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 어깨를 붙잡은 손의 주인들을 떠올리자 들끓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도 안다. 두 사람의 말이 옳다는 것을.
당장 눈앞의 개새끼를 향해 달려드는 건 쉽지만, 그 이후 몰려올 후폭풍을 감당하는 것은 나로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한 증거도, 명분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미카엘 실베르트는 복수심에 불타는 테러범을 무찌른 대격변의 영웅이다.
처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떠나 이 자리에서 놈을 공격한다면, 설령 이곳이 현대가 아닌 무림이라 할지라도 공적(公敵)으로 낙인찍히기 딱 좋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저놈이 가장 바라는 상황이겠지.’
아레스 길드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천태민은 이미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지 오래다.
만약 이럴 때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설령 이 자리에서 놈을 죽인다 해도, 그 이후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가장 큰 적은 눈앞에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적들 역시 존재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머리도 가슴도 차갑게 식었다.
스아아아.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던 기세가 가라앉자, 미카엘 실베르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 혈기왕성한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는데.”
“닥쳐라. 주둥이 찢어 버리기 전에.”
“그렇게 쉽게 찢어질 주둥이였다면 이미 다른 누군가에 의해 수백 번은 찢어졌겠지. 하지만 그거 알고 있나?”
놈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자네와 비슷한 말을 했던 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더군. 나는 그들의 주둥이를 찢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거든.”
“……!”
“그러니 오늘은 좋은 친구들을 둔 것에 감사하게. 그 친구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역시 자네한테는 큰 행운이겠지. 그렇지 않나?”
목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시선은 아니다.
그리고 묘한 눈빛으로 내 어깨 너머를 응시하는 놈의 모습은, 잠시 무뎌졌던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스켈레톤 킹.’
이미 매직 존슨을 통해 깔끔한 신분 세탁을 거친 뒤 평화 길드 소속 헌터로 활동하고 있지만, 녀석이 괜한 주목을 받게 되면 곤란하다.
미카엘 실베르트는 그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고, 한번 약점이 드러나면 가차 없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테니까.
‘차라리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이 무색하게도, 놈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아레스 길드의 젊은 부길드장이로군. 외조부님은 안녕하신가?”
최 팀장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잘 지내고 계십니다. 파리 지부의 소식을 전해 드리면 어떻게 반응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나로서도 유감이야. 개인적으로 자네 외조부님을 존경하기도 하고. 그러니 모쪼록 잘 말씀드려 주게.”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보고 들은 사실 그대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그리고 그런 최 팀장을 미카엘 실베르트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였다.
쉬쉬쉭!
파공성과 함께 폐허를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 그 선두에는 불과 얼마 전 아레스 길드를 찾아왔던 전령, 후긴(Huginn)이 있었다.
우리를 힐끗 바라본 녀석은 곧장 제 주인에게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길드장님, 모두 준비됐습니다.”
“피해 집계부터.”
“사상자는 대략 삼백. 그중 구출한 생존자는 마흔다섯입니다.”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해. 사람들은 많이 모였나?”
“인근의 시민들은 물론이고, 파리의 모든 기자들이 길드장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운이 좋았습니다. 때마침 새로운 마나 연공법 공개로 외신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요.”
“CCTV는?”
“그렇지 않아도 바로 확보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찍혔더군요. 정제되지 않은 마정석과 폭탄을 이용해서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테러범의 모습부터, 우리 오딘 길드가 몬스터 웨이브를 진압하는 장면까지 전부 말입니다.”
처음에는 몰랐다.
후긴이 말하는 ‘준비’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하지만 두 놈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는 내 머릿속은 차갑게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이건…….’
정교하다.
새로운 마나 연공법 공개. 복수심에 불타는 중동 테러범을 이용한 파리 지부 습격 및 몬스터 웨이브. 그리고 모든 이목이 집중된 기자 회견까지.
마치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는 것처럼, 놈들은 치밀하게 짜인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듣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한번 회전하기 시작한 톱니바퀴를 멈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저 멀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사흘 밤낮 동안 진실을 떠들어 봤자, 어차피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저 미친놈들의 생각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무력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현실.
“미안하지만 이만 가 봐야겠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나와 최 팀장, 마지막으로 스켈레톤 킹에게까지 눈인사를 건넨 미카엘 실베르트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니,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는 많이 바빠질 걸세. 생각보다 훨씬 더.”
까드득.
나는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었지만, 끝내 뻗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띠링.
― 돌발 퀘스트, [연쇄 테러]가 생성되었습니다!
― 해당 퀘스트는 승낙 여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의 권한으로 퀘스트가 강제 진행됩니다!
때는 새해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1월.
겨울이 붉게 물들었다.
* * *
“시작됐습니다.”
귓가에 전해진 후긴의 나직한 목소리에, 미카엘 실베르트는 담담히 되물었다.
“이번에는 어딘가?”
“런던입니다.”
“늙은 왕이 진노하겠군.”
“버킹엄 궁전은 멀쩡할 겁니다. 대신 런던 브릿지는 무너지겠지만요.”
수하의 건조한 농담을 들은 미카엘이 실소를 흘렸다.
“런던까지 처리하면…… 앞으로 여덟 번 남았군.”
“예.”
후긴이 사막에서 데려온 이들은 총 열 명.
한 사람, 한 사람이 미친 광신도이자 숙련된 헌터인 그들은 아무런 차질 없이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들이 터트린 폭탄은 건물을 무너트릴 테고, 정제되지 않은 마정석은 사람들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하니까.
‘그리고 그 부서진 희망을, 우리 오딘 길드가 이어 붙이겠지.’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수많은 희생과 노력 끝에 오른 자리다.
한 치의 실수도, 실패도 용납할 수 없다.
미카엘은 가까워지는 기자들의 모습과 시민들의 환호를 들으며, 비통한 표정으로 미소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