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40
#839화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던 것도.
시간의 섭리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평등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절대자도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고, 바람에 흩날려 흙에 섞여든 씨앗이 수백 년 뒤 울창한 풀숲을 이루기도 한다.
무림(武林)도 마찬가지였다.
아득한 과거, 그들은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공을 단련하고 자신들만을 위한 울타리를 세웠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낮과 밤을 흘려보내며, 거대한 전란과 빛나는 영웅들이 스쳐 지나간 끝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구파일방(九派一幇).
그리고 오대세가(五大世家).
중원 무림을 지탱하는 열다섯 개의 기둥.
지난 수백여 년간 흔들릴지언정 뽑혀 나가지 않은, 뿌리 깊은 거목들.
사천당가(四川唐家)도 그중 하나였다.
“바로 앞의 언덕만 넘으면 도착입니다.”
마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주원공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헤어져야 한다니 아쉽구려. 내 마음 같아서는 진 공자를 극진히 대접하고 싶으나…….”
“그럼 성으로 갈까? 까짓거 대접받지 뭐.”
“진 공자께서도 공사가 다망해 보이시니, 그런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소.”
그냥 놀리려고 해 본 소린데, 자식이 괜히 겁먹기는.
나는 황급히 말을 비트는 주원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녀석도 딱히 나쁜 놈은 아니다. 무능한 주제에 여기저기서 돈 받아먹기 좋아하고, 황족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호사를 누릴 뿐이지.
“…….”
말하고 보니 좀 나쁜 놈 같긴 하다. 결국 주원공이 받아 처먹은 뇌물 중 일부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 짜낸 것일 테니까.
‘죽다 살아난 후에도 정신 못 차린 것 같은데, 좀 더 갈궈야 하나.’
내 고민이 표정 위로 드러난 모양이다. 주원공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부를 재촉했다.
“한시가 급하다! 속력을 높여라!”
“그 정도로 안 급해. 괜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 갈구지 말고 너나 잘해.”
“한시가 급하지 않다! 지금 속력을 유지해라!”
마치 아바타를 조종하는 이 느낌, 의외로 재미가 쏠쏠하다.
상대가 방계 황족에다가 임시 사천성주라 더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뭐, 이래 봬도 내가 생명의 은인인 데다가 다루기도 쉬우니 이렇게라도 인연을 맺어 두면 도움이 되겠지.
“더 갈 필요 없이 이쯤에서 멈추자. 어차피 거의 다 왔는데, 괜히 이대로 사천당가에 가 봤자 피차 반갑진 않으니까.”
숫자는 적지만 척 봐도 중무장한 기마병 수십 기에, 황실의 깃발이 달린 육두마차를 끌고 가 봤자 환영 인파가 몰리지는 않는다.
관과 무림의 관계는 좋게 말해서 불가침이지, 서로를 경원시하는 편에 가까우니까.
“오오, 그것참 좋은 생각이구려.”
나와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대번에 얼굴이 밝아진 주원공은 냉큼 명령을 내려 행렬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친히 마차에서 내려 문까지 열어 주는 친절함을 발휘했다.
“멀리 배웅 못 하는 것을 양해하시오. 그리고 부디 진 공자의 앞날에 무, 무…….”
“무운?”
“아, 맞소. 무운(武運)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라겠소.”
진심으로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는 말이 고우면 가는 말도 고운 법이다. 나는 웃는 얼굴로 주원공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우리 황족님도 다시 볼 때까지 몸 건강하고, 이참에 주색잡기도 좀 줄이시고. 알겠지?”
“알겠소. 진 공자의 조언을 잊지 않으리다.”
“좋아, 그럼 잘 가.”
“조심히 가시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마차의 문을 닫았다.
탁.
격자 창문 사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주원공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안 내리시오?”
내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내가 왜 내려?”
“응?”
“아, 아직 말 안 했구나. 이 마차 내가 좀 쓰려고.”
“……?”
“너도 알다시피 우리 일행 중에 나이 든 사람도 있고, 아픈 사람도 있잖아. 있으면 편할 것 같더라고. 거리 나가면 사람들도 길 잘 비켜 주고.”
“……!”
“거기 화룡각 친구들. 이제 다들 안으로 들어오세요. 불편하게 말 타고 오느라 고생했네.”
평범한 무림인이었다면 내 말에 당황했을 거다.
그래도 황족 소유의 마차인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등등의 온갖 모범 답안이 줄줄이 쏟아졌겠지.
하지만 대(大) 화룡각 대원들은 싹수부터 달랐다.
아니, 그나마 파릇파릇하던 싹수도 남만에서 노랗게 염색해서 돌아왔다.
“어후 시부럴 거, 가뜩이나 삭신이 쑤셔 죽겠는데 중원 놈들은 신분 높다고 노인 공경도 없나…….”
마치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며 허리춤을 툭툭 두드린 남호를 시작으로, 말에서 내린 화룡각 대원들이 줄줄이 마차 안으로 입성했다.
물론 한마디씩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오향장육도 안 주고. 태산이 화난다. 다 때려 부수고 싶다.”
“어허, 태산아. 아무리 대접이 박하다 한들 그래서는 안 된다.”
“낭인 생활 막 시작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도 지금처럼 사람대접 못 받았는데.”
“마차 좋네요. 각주님. 이거 나중에 저희 표국으로 가져가면 안 될까요?”
나는 마차에 흥미를 보이는 주화란에게 그래도 된다고 말해 준 뒤, 벙찐 얼굴로 서 있는 마차 주인을 향해 정중하게 부탁했다.
“혹시 거기 매달려 있는 깃발 좀 뽑을 수 있을까? 우리가 황족도 아닌데, 저거까지 달고 다니면 좀 귀찮아질 것 같아서.”
“…….”
마차 안에 쏙 들어간 우리와 당황한 얼굴로 먼 산을 쳐다보는 기마병들을 번갈아 바라본 주원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호화찬란한 황금빛 깃발을 쑥 뽑았다.
“아, 문도 닫아 주라.”
“…….”
“싫어?”
탁.
마치 아바타를 조종하는 이 느낌, 역시 재미가 쏠쏠하다.
* * *
사천당가에 도착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새롭게 쌓아 올린 석벽 위에서 대기 중인 수문위사의 무뚝뚝한 목소리와 경계심 어린 눈빛이었다.
“정지! 우선 소속과 이름. 만약 무림인이라면 별호와 찾아온 목적을 밝히시오.”
그리고 수문위사의 경계심은, 내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문을, 문을 열어라!”
“왜요? 누구 왔어요?”
“열라면 열어, 이 어린 노무 새끼야!”
몇 달 전 처음 사천당가를 찾았을 때만 해도 암기부터 날아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입 벙긋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그그긍.
육중하기 그지없는 철문이 열리는 사이, 어리버리한 신입의 뒤통수를 후려친 수문위사는 나를 향해 몇 번이나 포권을 취하고는 이내 헐레벌떡 어딘가로 달려갔다.
“모두 밖으로 나오시오! 화룡각이 도착했소!”
“뭣이! 또 적습이란 말이냐!”
“아니, 그게 무슨 미친 소리요. 열화신룡 진태경 대협이 이끄는 화룡각이 왔단 말이오!”
“뭣이이이!”
교대 근무 후 낮잠이라도 한숨 때리고 있었는지, 입가에 허연 침 자국이 남아 있는 사천당가의 무인이 손에 들고 있던 암기를 내던지고 달려온다.
아니, 정확히는 사천당가뿐만이 아니다.
“진 대협!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이리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구려. 그대 덕분에 본문의 제자들이 큰 희생을 피할 수 있었소.”
“아미타불. 진 시주께서 다시 사천 무림을 찾으시다니, 아미의 이름으로 재차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이쿠, 이게 누구신가! 개똥아, 애들 불러와라!”
녹색 무복을 걸친 사천당가를 시작으로 청성파와 아미파의 도사며 비구니들. 마지막으로 개방의 거지들까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처럼 몰려드는 막대한 인파에, 남호가 입을 떡 벌렸다.
“허, 네놈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게냐?”
“대충 말씀드렸잖아요. 사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아무리 그대로 이건…… 그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사천당가에 타 문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한한 일인데, 뭘 이렇게까지 몰려들어?”
“그냥 뭐, 이것저것 했습니다.”
남호도 어느 정도의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내 얼굴에 스스로 금칠하는 것만큼 낯간지러운 일도 없고,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니까.
‘그나저나, 다들 잘 지내고 있던 모양이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와 포권 세례에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다.
사실 고백하자면, 조금이나마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서천마군(西天魔君)이 이끄는 암천의 군세가 사천 땅을 휩쓸었던 것은 불과 반년도 되지 않은 일.
그 과정에서 중심 표적이 되었던 사천당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청성과 아미, 개방 역시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했으니까.
그러나 내 우려와 달리, 지금 주위를 둘러싼 그들의 얼굴에는 오직 기쁨만이 가득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떠나기 직전까지 검붉은 핏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던 외원(外院)은 이제 푸른 잔디로 가득했다.
연일 수많은 시신을 화장하는 불길과 새카만 연기로 뒤덮였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그 아래에는 모두의 도움과 노력으로 새롭게 재건된 전각들이 즐비하다.
저들이 그날의 슬픔을 완전히 벗어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천당가는, 아니 사천 무림은 다시 일어섰다.
지금까지 줄곧 이어졌던 보이지 않는 균열을 멈추고, 하나가 되어 슬픔을 딛고 일어나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리고 그 소중한 무언가를 두 번 다시 잃지 않기 위해.
‘그래, 그럼 된 거야.’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마음속으로 힘주어 뇌까린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사방에서 몰려든 인파 탓에 꼼짝없이 길이 막혀 버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저 멀리 가까워지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호리호리하다 못해 비쩍 마른 몸. 병을 앓는 이처럼 파리한 안색과 그런 자신에게 호통치듯 힘있게 내딛는 발걸음.
저벅.
불현듯 걸음이 멈춘다.
서서히 잦아드는 환호와 함께 주위의 인파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끝에 선 노인이, 은은한 녹광(綠光)이 흐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딱딱한 것을 넘어,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음성으로 건넨 인사.
하지만 다음 순간, 숨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굽혀질 것 같지 않던 노인의 허리가 나를 향해 기울어지는 모습을.
이 자리의 누구도 들어 본 적 없었을, 노인의 따뜻한 목소리를.
“사천당가의 가주, 만독수라(萬毒修羅) 당사독이 가문의 은인을 뵙소이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극진한 예의. 진심을 담아 포권지례를 취한 당사독이, 문득 할 말을 잃은 나를 바라보며 웃는다.
언제나 한 자루의 비수처럼 날카롭고 딱딱하던 그의 입가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 열화신룡 진태경.”
노인의 기쁨이 담긴 그 한 마디에, 억눌려 있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동시에 그 사이로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음으로 미뤄야겠지. 안 그런가?
뒤늦게 따라 웃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당사독의 전음이 이어졌다.
– 따라오게. 노야께 안내해 드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