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64
#863화
수백 명이 넘는 금의위와 동창의 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짓고 있는 표정만큼은 아니었다.
충격. 경악. 의문. 분노.
주위를 에워싼 수많은 얼굴들을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마침내 현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모든 얼굴 근육을 동원하여 분노를 표현했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진 공자?”
홍진은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하, 시바. 또 좆 됐네…….”
혁무진은 깊은 한숨과 함께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음.
홍진이야 그렇다 치고, 혁무진 저 녀석은 나 때문에 한두 번 고생한 게 아니라 살짝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뭐.
‘어쩌라고.’
그럼 니가 조장 하든지.
그리고 이건 지엄하신 상산왕 전하께서 내리신 왕명(王命)이다.
나 역시 대한민국, 아니 대국의 백성으로서 성심성의껏 따르는 수밖에.
물론 내 이름으로 된 호패는 구경도 못 해 봤고 앞으로도 만들 생각조차 없지만, 아무튼 그런 거다.
쉽게 말하자면 합법적 깽판이라는 거지.
“명하신 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리긴 했는데. 제 대답이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천연덕스럽게 건넨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던 상산왕 주표가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아니다. 짐이 원했던 대로 아주 솔직한 대답이었다. 약간 놀라긴 했지만.”
약간 아니라 상당히 놀란 것 같던데.
뜻밖의 대담함을 보인 저 어린 왕에게도, 내가 한 발언의 수위가 제법 강하게 와닿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후회는 없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무림이건 황궁이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곧장 잡아먹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니까.
막다른 골목에 몰려 움츠러든 쥐는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고양이에 의해 그저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굴려지다가 끝내는 숨통이 끊길 뿐이다.
‘어차피 맞서야 한다면, 이빨을 드러내는 게 시간을 더 벌 수 있는 길이지.’
나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막 들이댄 것은 아니다.
천자가 상산왕을 황도까지 데려왔다는 건, 적어도 모종의 명분을 갖춘 후에 제거하겠다는 의미니까.
그리고 그 말은, 사방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저 사냥개들도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얌전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가장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대장 사냥개도 포함해서.
“허.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수많은 금의위를 휘하에 거느린 수장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초인의 영역에 든 고수이기에 보일 수 있는 여유일까.
그 이유가 뭐든 간에 백연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살기에 가까운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고, 날 죽이는 게 평생 소원인 듯 병장기를 만지작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부디 충고하건대, 다음부터는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이곳은 무림이 아니라 대국의 황실이니까.”
나는 턱을 긁적였다.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도 뭐라 하네. 이거 나처럼 힘없는 백성은 억울해서 살겠나.”
슬쩍 곁눈질하자, 신호를 알아차린 상산왕이 입을 열었다.
“금의위 지휘사 백연. 이 자는 짐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니, 그대는 더 이상 일언반구(一言半句)하지 말라.”
백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상산왕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짐이 묻고 있거늘, 어찌하여 답하지 않는가!”
아.
내가 이런 건 또 못 참지.
“맞다. 감히 전하의 말을 씹다니! 이 무엄한 놈!”
발성 좋고. 타이밍 좋고.
스아아아.
분위기도 끝내주고.
4분의 3박자로 찰지게 치고 들어간 내 준엄한 질타에 사방에서 들끓는 기파.
홍진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고, 혁무진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조장님. 조장님. 그만하세요, 제발.”
“지엄하신 황상 폐하의 아우이신 상산왕 전하가 묻고 계시지 않느냐! 대답 안 하면 황족 모욕이다! 역적이야!”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것 아닙니까? 저 이런 곳에서 객사시키려고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어요?”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이 검기도 쓸 줄 모르는 한심한 녀석 같으니! 네놈도 저것들과 한 패냐!”
“아니, 시팔. 제발 좀…….”
혁무진이 반쯤 울먹거리던 그때, 말없이 줄곧 상산왕을 응시하고 있던 백연이 불현듯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슥.
순식간에 흩어지는 무거운 공기.
하늘 같은 상관이 모욕당하는 모습에 분노를 금치 못하던 금의위들이 일제히 기세를 거둬들였고, 백연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부디 용서하소서, 전하. 소신이 우둔한 탓에 무슨 답을 드려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나이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병신은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왕이라 해도.
“용서한다. 허나 망설인 만큼 옳은 대답이 나와야 할 것이다.”
위엄 어린 태도로 응하는 주표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황족이었다. 여의주만 얻는다면 용이 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난 자.
어쩌면 오랜 세월 동안 곁을 지켰던 홍진조차도 상산왕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몰랐다.
무수한 숙청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유일하게 곁에 남은 어느 환관과 산서성으로 떠나야 했던 어린아이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신, 금의위 지휘사 백연. 상산왕 전하의 명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철컥.
금빛 철갑이 토해 내는 마찰음에 상산왕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인다.
비록 나이에 걸맞지 않은 대담함과 위엄을 갖추었으나, 그럼에도 아직은 어린아이. 황도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와 맞서는 것에는 생각 이상으로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약간의 도움 정도는 괜찮겠지.
슥.
내심 중얼거린 나는, 무엄하게도 상산왕의 등을 스치듯이 짚었다.
갑작스럽게 흘러들어온 온기에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 어린 왕은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들은 짐이 다스리는 산서성의 백성이며, 동시에 친히 초청한 빈객(賓客)이니 일체의 소홀함이나 불상사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는가?”
또렷해진 목소리에 나를 힐끗 바라본 백연이 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곳은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머무르시는 황궁. 그 누가 감히 전하의 빈객들을 해하겠습니까?”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거야 모르는 거지, 뭐. 막말로 전하 앞에서 검도 뽑는 마당에 뭘 못 해.”
“……!”
“어후, 요새 세상 살기가 무섭다, 무서워. 안 그렇습니까, 전하?”
내 엄살에 상산왕이 재차 백연을 응시했다.
“짐은 저 말이 옳다 여겨지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황궁 개꿀팁.
일단 왕이랑 친해지면, 황제의 오른팔이라 해도 당장은 쉽게 건드릴 수 없음.
그리고 내 예상대로, 잠시 침묵하던 백연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신 역시, 전하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짐 또한 더는 긴말하지 않겠다.”
“……망극하옵니다.”
확실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팽팽한 설전(舌戰)이었으나, 굳이 전황을 따지자면 확실히 득을 본 것은 우리였다.
지휘사의 이름으로 안전을 약속받았을뿐더러, 상산왕 주표가 지닌 권위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문제는…….
‘언제까지 이 안전이 보장될지는 모른다는 거지.’
마치 수술대 위에 눕혀진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를 비롯한 일행 모두는 환자고, 친절한 간호사 대신 창칼을 든 금의위와 환관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으며, 이 수술의 집도의는 다름 아닌 천자(天子)가 될 것이다.
이곳은 황궁.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의 말 한마디에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다.
‘얼굴 한 번 못 본 누군가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라…….’
이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좆 같다.
물론 천자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서, 곱게 당해 줄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정확한 병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몇 바늘 꿰매는 가벼운 수술로 끝날지, 마취 주사와 수술 도구 대신 창칼을 든 무시무시한 간호사들에 의해 안락사당할지는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아니, 부디 그러길 바란다.
이미 집도의가 시한부 판정을 내린 상태라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몸부림쳐야 할 테니까.
그리고 집도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수간호사, 아니 백연은 그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들고 온 상태였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전하의 알현은 내일로 미뤄질 것입니다.”
“알현을 미룬다고?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인가?”
“예. 전하.”
예상치도 못한 말에 주표는 물론이고 홍진까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도착 전에 듣기로는…….”
“감히 환관 따위가 어딜 끼어드는가, 홍 첩형. 아니, 이제는 도지휘동지겠군.”
이미 일면식이 있는 듯, 단호하게 홍진의 말을 잘라 낸 백연이 말을 이었다.
“때가 되면 기별할 터이니 그때까지 전하를 모시게.”
“……이유라도 알려 줄 수는 없나요?”
“폐하의 명이라 했을 텐데.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뭐라 말하려던 홍진이 입을 다물었다.
다름 아닌 황명이다.
그 단어 앞에서는 그 어떤 의문이나 반박조차 할 수 없었고, 나는 갑작스럽게 미뤄진 이 알현에 대한 의미에 대해 곱씹었다.
‘어째서지? 무슨 이유가 있나?’
이미 정해져 있던 알현이 미뤄졌다. 권력자들 특유의 변덕이야 딱히 놀라울 것도 없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깊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듯한 현재로서는 그마저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지만.
“정 천호.”
“하명하십시오.”
“상산왕 전하를 안으로 모셔라. 그리고…….”
겉모습과는 달리 긴 세월의 흔적이 서린 백연의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향한 그 순간.
우우웅.
나는 전신을 옥죄는 백연의 기세를 느꼈다.
오직 나만을 향해 쏘아진 그 강대한 기운을.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하단전 깊숙이 잠들어 있던 공력을 일으켰다.
화아악.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기운이 허공을 격하여 맞닿는다. 찰나의 순간 수없이 충돌하고 뒤섞인 끝에, 마침내 안개처럼 흩어졌다.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함께.
– 제법이군, 젊은이.
가진 힘의 절반.
아니, 그 절반의 반도 되지 않는 기세로 벌인 신경전.
그 결과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핥았고, 잠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백연은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도 함께.”
“충!”
힘차게 군례를 올린 정호군이 수하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금 황금빛 물결이 우리를 에워싸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아니, 이동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 한 가지를 잊었군.”
나직한 음성으로 모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백연이 한 금의위의 앞에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감히 전하의 앞에서 검을 뽑다니.”
서걱.
대답 대신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목이 솟구쳤다.
섬광처럼 휘두른 수도(手刀)로 수하를 베어 넘긴 백연이 상산왕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수하의 죄는 곧 소신의 잘못. 부디 용서하소서,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