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07
#906화
지금 이 상황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전(亂戰)?
아니면 혈전(血戰)?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시체가 밟히고, 지상과 하늘을 가리지 않고 적들의 창칼이며 화살촉이 쉴 새 없이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조차도.
“조심!”
내 외침을 들은 금의위 중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비틀었다.
피핏!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갈라지는 갑옷.
전장의 혼란을 틈타 그를 기습하려던 배신자의 칼날이 한 끗 차이로 빗나간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지면을 나뒹굴던 언월도(偃月刀) 한 자루를 걷어찼다.
쐐애애액! 뻑!
그 흔한 단말마조차 없었다.
섬광처럼 쏘아진 언월도는 표적을 관통한 것으로도 모자라 근처에 있던 적 두어 명을 꼬치처럼 꿰어 냈고,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금의위는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맙…….”
그리고, 두 번 다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푹!
정확히 목젖을 관통한 화살.
피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금의위의 시신을 짓밟으며 들이닥친 적들이 닥치는 대로 병장기를 휘두른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더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천상천하(天上天下).”
“만마앙복(萬魔仰伏).”
무림으로 넘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미친 광신도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미친놈들…….”
외마디 탄식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자신들이 걸친 황금빛 갑옷의 무게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갑작스러운 아군의 배신에도 침착하게 전투를 이어 가고 있던 금의위들조차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배신자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은 누군가의 무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철벅.
앞으로 나선 걸음과 함께, 가죽신이 피 웅덩이에 잠긴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금의위 중 한 사람의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삼보…….”
그래, 바로 그였다.
병필 태감 마삼보.
동창의 이인자이자 실질적인 우두머리.
아니, 정확히는 그런 신분으로 세상을 속여 왔던 그가 나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다가온다는 표현이 무색해질 만큼, 실로 섬광 같은 속도로.
쐐애액! 쾅!
머리 위에서 벼락처럼 쏟아지는 일격, 일격을 막을 때마다 저릿해지는 손아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거칠어진 호흡은 물 흐르듯이 이어져야 할 움직임을 방해한다.
후욱, 훅.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토록 고전하는 이유가 좋지 않은 몸 상태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강적을 만났기 때문인지.
그러나 그 생각조차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쉭!
살아 있는 뱀처럼 휘어진 연검(軟劍)이 콧날을 스친다.
갈라진 살갗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뜨거운 핏물.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물러나는 내 귓가로 낮은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처음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나, 응?”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틀었다. 마삼보의 풍성한 소매에서 튀어나온 비수가 빛살처럼 빈 공간을 관통했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또 하나의 생명.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어지는 목소리.
“안타깝군. 네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저 젊은 금의위도 멀쩡히 숨이 붙어 있었을 텐데.”
빈정거리는 마삼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피하지 않았다면 그는 살 수 있었을까?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언젠가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괜한 죄책감에 기분이 더러워진다. 정작 지금 막 숨이 끊어진 저 금의위에게 미안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도.
‘어째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 싶었다. 나와 적천강. 자신의 수하들마저 이 전장에 몰아넣은 채 방관하는 황제와 소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묻고 싶었다.
왜, 어떤 이유로 이 지랄 같은 대연회를 열었느냐고.
전황을 뒤집을 힘이 있음에도 왜 나서지 않느냐고.
“도대체 왜!”
그리고 끝끝내 참지 못하고 터트린 그 외침에 답한 것은, 황제도 소교도 아닌 바로 마삼보였다.
“왜 저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실소를 터트린 놈이 말을 이었다.
“열화신룡 진태경. 네놈도 결국 황제에게 이용당한 거야. 우리가 자네와 화왕을 이용해서 소교를 제거하려 했던 것처럼.”
“……!”
“차도살인(借刀殺人). 피를 묻히기에는 남의 칼만큼 좋은 것이 없지. 화왕과 열화신룡이라는 명검이라면 더더욱.”
말해 주고 싶다.
그 아가리 닥치라고.
하지만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만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내가 직접 겪어 본 황제의 성격이라면.
그리고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여자, 소교라면.
“너와 네 스승에게 남은 역할은 하나뿐이다. 죽을 때까지 발악하며 싸우다가, 끝끝내 죽는 것.”
쉬쉬쉬쉭!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수십 개로 늘어난 연검이 사방에서 들이닥친다.
속도의 한계에 도달한 듯한 극쾌(極快)의 검법.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잔상이 주위를 빼곡하게 에워싼다 하더라도, 결국 실체는 하나뿐이다.
카앙!
단순히 날붙이끼리의 충돌이라고는 믿기 힘든 굉음과 함께 밀려나는 신형.
이 기세를 놓지 않고 쉼 없이 휘둘려지는 연검 너머로 마삼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국은, 황제는 늘 그랬지. 이 광활한 천하를 차지한 지배자들에게 있어 나나 자네 같은 무림인은 다스려야 할 백성이 아니야.”
쉬쉬쉭, 핏!
검에 실린 압력을 이기지 못한 살갗이 베인다. 갈라진 살갗 틈새로 흘러나온 옅은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내가 스승님을 따라 그분께 충성을 바치게 된 것도, 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것도 결국 그래서다. 황제는 상산왕을 지키고 싶을 뿐이지, 강호의 무뢰배 따위를 구하기 위해 숨겨 둔 패까지 꺼내 들 생각은 없을 테니까.”
“뭐?”
순간 뇌리를 스친 어떤 깨달음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저 멀리 적천강과 함께 굉음을 동반한 혈투를 벌이고 있는 한 사람에게 문득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혹시?’
아니, 혹시가 아니다.
마삼보가 제 입으로 말했으니, 이건 짐작이 아닌 확신이다.
카가가가가각!
제각각 다른 강기가 부딪히며 불꽃을 토해 낸다.
본래는 하나로 이어져 있던. 그러나 마삼보의 강력한 공세에 두 자루의 단창이 되어 버린 그것을 교차시켜 연검을 막아 낸 나는, 코앞에서 멈춘 검신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창공. 창공의 제자였나?”
“창공? 감히 누구더러 저 음험하고 나약한 황제의 신하라 하는 것이냐.”
입매를 비틀며, 마삼보가 말을 이었다.
“동천마군(東天魔君). 그것이 바로 위대하시며 전능하신 천주께서 당신의 충복에게 내리신 새로운 이름이다.”
“……!”
“그리고 바로 그 동천마군의 제자가, 네놈을 무릎 꿇릴 테고.”
그 순간.
쉬리릭.
연검 특유의 탄성(彈性)을 머금은 검신이 휘어졌다.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앞을 가로막은 창대를 타 넘어 들이닥치는 섬광을 바라보며, 나는 교차했던 두 자루의 단창을 힘껏 위로 쳐올렸다.
카앙!
가슴을 향해 들이닥치던 연검의 방향이 뒤틀린다.
그러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을 뿐, 그것으로 모든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뻐억!
흡.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번쩍인다.
훤히 드러난 앞가슴에 일권을 적중당한 나는 연거푸 십여 걸음을 물러났고, 그것은 곧 마삼보에게 있어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팟.
단 한 걸음.
그와 동시에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린 마삼보의 신형.
그러나 몸 상태와 함께 무뎌진 감각 속에서도, 나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왼쪽!’
확신과 동시에 한 손을 흩뿌렸다.
비록 두 동강 난 탓에 긴 사정거리라는 본래의 이점을 잃었으나, 그와는 반대로 투창(投槍)에 최적화된 길이와 속력을 얻게 된 그것은 막강한 힘을 받아 쏘아졌다.
쐐애애액!
대기를 찢어발기는 한 줄기의 강맹한 파공성.
그리고 그 끝에서 울려 퍼진 거대한 충돌음.
콰앙!
굉음과 함께 지면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솟아오르던 그 순간.
솨악!
공간이 갈라졌다.
단창을 튕겨 낸 연검이 휘황한 강기(罡氣)를 뿜어내며 먼지구름을 베어 내며 들이닥쳤다.
마삼보의 것이 분명한, 비웃음 섞인 전음과 함께.
– 걱정 말거라.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베어 줄 테니.
그리고 그건 놈의 실수였다.
느려진 세상 속, 나는 다시 한번 허공을 뒤덮으며 쏟아지는 수십여 개의 검영(劍影)을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벤다고? 그것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우스운 일이다.
아직 상대가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음에도 저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목숨을 건 생사결에서 승리한 자라면 상대에게 침을 뱉을 자격이 있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며 비웃어도 괜찮다.
하지만…….
‘그건 모든 것이 끝났을 때의 이야기지.’
육신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언제나 파도처럼 거침없이 흘러들어오던 공력은 가닥가닥 끊기고 있었지만 상관없다.
내 눈은, 아직 남아 있는 한 자루의 단창을 움켜쥔 손끝은 아직 흔들리지 않았으니.
‘보인다.’
슈확!
정확히 일점(一點)을 관통한 창날의 끝이, 수십의 검영을 지워 내며 실체에 맞닿은 순간.
콰앙!
강렬한 충돌음과 함께 그 여파를 감당하지 못한 신형이 튕겨 나간다.
내가 아닌, 마삼보의 신형이.
콰드득.
힘주어 내디딘 발끝이 지면을 갈아엎는다. 가까스로 흐트러진 신형을 바로 잡은 마삼보가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팟.
어느덧 자신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나를.
“놈!”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마삼보의 연검이 바람을 갈랐다.
극쾌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속도로.
마치 빙하와 같은, 하지만 그보다도 더 차갑고 무자비한 강기를 흩뿌리며.
슈화아악!
그리고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그 기운 앞에서, 나는 전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화륵.
젖어 있던 장작에 불이 붙는다.
뒤틀린 철로처럼 불안정한 혈도를 타고, 그야말로 불길처럼 솟구친 열양지기를 손에 담아 옆구리를 막 파고 들어오던 검신을 붙잡았다.
콰득, 콰아아아!
힘과 힘의 격돌.
동시에 양손에서 전해지는 끔찍한 통증.
정확한 타이밍과 속도에 맞춰 날붙이를 잡는 공수납백인(空手納白刃)이 아닌, 그야말로 무식한 움켜잡기.
“이런 미친……!”
무림인이라면 마삼보의 저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니까.
최소 한 수 아래의 하수라면 모를까, 비슷한 수준의 고수.
그것도 더 강한 공력을 지닌 상대로 이런 짓을 벌였다간 단숨에 양팔이 날아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놈이, 시스템으로 근골을 뭐 빠지게 올린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내가 주어진 여러 능력치가 우량주라면, 근골은 레벨 업이나 수련을 할 때마다 꾸준하게 쌓여 온 적금이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얻은 지 일 년이 훌쩍 넘은 지금은?
‘내 레벨이 몇이더라.’
나는 웃었다.
손바닥이 걸레짝이 되어 가는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며, 터질 것처럼 부릅떠진 마삼보의 눈을 들여다보며.
조금 전 놈이 건넸던 한 마디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토씨 몇 글자만 바꿔서.
“걱정하지 마. 딱 죽을 정도로만 쑤셔 줄 테니까.”
“……!”
마삼보는 뭐라 외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새어 나오지 못했다.
콰드득!
마삼보의 입술이 열리려던 그 순간, 내 손에 들려 있던 단창이 놈의 목줄기를 관통했으니까.
크륵. 컥.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나를 바라보던 두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