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141)
141 정령이 또 늘었어, 죽겠다
아직 캄캄한 새벽이라 복도에는 시종과 궁을 지키는 병사뿐이었다.
조용하다.
다만 기분 탓인지 나와 할아버지 주변으로는 병사 수가 조금 많은 것 같다.
왕궁에 온 것은 연회 때문에 방문한 어제가 처음이다.
그래서 이게 보편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깊이 들어가는 거지.’
어제 연회에 참석할 때는 이렇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리면 금방이었는데, 오늘은 으리으리하게 높은 왕궁 복도를 한참이나 걷고 있다.
이 정도 길이면 작은 수레라도 타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복도에서 다시 복도가 나오고 또다시 복도가 이어졌다.
그 긴 길을 입 다물고 조용히 걷노라니 머릿속이 딴짓을 시작한다.
원래 인간은 뭔가 하게끔 만들어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딴생각을 하든 게임을 하든, 뭔가 쉴 새 없이 하고 있었을 것이다.
뇌 입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굉장히 어렵다고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독방에 갇히는 게 벌이 되고, 머리를 텅 비우는 명상이 어려운 거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내 머리가 끝없이 복도를 걸으면서 뭔가 열심히 생각을 돌리다 드디어 떠올렸다는 것이다.
나는 어제 이 왕궁에서 사람을 죽였다.
마그리트한테 청혼했던 후작을 죽였던 거야.
“….”
이거 꽤 위험한데.
후작을 죽인 건 일부러 그런 것이고 효과도 내가 노린 것이라 괜찮다.
하지만 거기에 갑옷기사단이 저지른 일을 합하면, 왠지 내가 엄청나게 나쁜 놈처럼 보이잖아.
물론 다뷔토 백작가 몰살은 내 짓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갑옷기사단이 혼자 한 일이지만 남이 볼 때는 그거나 이거나 같은 게 아닐까.
“….”
아니, 내가 봐도 정말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게다가 지금까지 손톱만큼도 통하지 않던 의사가, 하필이면 이 왕궁에 와서 말이 통하는 것처럼 되었고 시종장이 목격했다.
어쩌지.
차라리 내가 여기에 없는 게 낫지 않나.
“… 할아버지.”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부르는데 시종장이 걸음을 멈췄다.
하필이면 그새 도착한 모양이다.
하다못해 뭔가 입이라도 맞춰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아예 그런 생각이 없는 것 같고, 큰일 났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열린 문 안으로 한 발 디뎠다.
할아버지와 내가 들어가도,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쫓아오는 갑옷기사 때문에 문은 닫히지 않았다.
왕궁에서 근무하는 시종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정도의 훈련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을 열어준 시종의 눈은 거짓말 조금 보태 접시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이 흘러나와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해는 한다.
유령 기사는 살면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거지.
나도 보기 어렵고 싶었다.
안내된 곳은 왕의 침실인 모양이다.
아까 시종장이 말했던 것도 같은데 생각에 빠져있느라 듣지 못했다.
“….”
넓다.
공작가 저택도 넓기로 말하면 서러울 정도로 넓지만, 여기는 넓을 뿐 아니라 삐까뻔쩍 요란하기까지 했다.
방 전체를 무슨 금으로 발라놨나.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번쩍번쩍하다.
지구에서 침실이 개인 공간인 것과 달리, 이 세계의 왕이나 귀족의 침실은 종종 공적인 공간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의 침실은 일종의 쇼룸이랄까, 부를 과시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샹들리에에 보석 달고 방안에 비싼 물건 늘어놓는 건 기본이고, 벽에 금칠까지 해놓는다.
나도 지금 알았어.
벽에 금칠하는구나, 이 세상에서는.
공작가로 들어가면서 사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
언제나 위에는 더 위가 있는 법이지.
왕은 정 중앙에서 약간 비낀 곳에 놓인 침대에 앉아있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다.
옷은 제대로 입고 있는데 연회에서 볼 때처럼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다.
왕은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왠지 모르지만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손자 맞이하는 친할아버지 같다.
이상하네.
“어서 오게. 이 새벽에 오느라 수고했어.”
“폐하,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아니야, 그대가 와 줘서 오히려 고맙지. 다뷔토 백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얼추 들었네. 당분간은 힘들겠어.”
“그 건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원래 두 사람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 보면 평생의 전우 같다.
이야기하는 중에 가끔 왕의 시선이 갑옷기사를 향했다.
그리고 나에게 눈이 머문다.
빙그레 웃는 모습이, 진짜로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손자 만난 것 같다고 하면 믿어지나.
연회에서 아버지를 노리던 맹금 같은 시선은 흔적도 없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 보였다.
‘저 정도 연기는 가능해야 왕 노릇 하는 거구나.’
솔직히 감탄했다.
나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침실에 들어오는 짧은 시간 동안, 왕이 추궁하면 어떻게 대답할지 백 가지 정도는,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두어 가지 정도로 고민해서 답을 만들어놨는데 필요 없을 것 같아.
왕은 다뷔토 백작가의 사람이 죽은 건 건드리지 않은 채, 앞으로 마도구사의 부족을 어떻게 해소할 건지, 공작가에서 제시하는 방책에 허술한 점은 있는지, 왕가에서는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만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도 거기에 대화를 맞춘다.
다뷔토 백작가는 당주까지 죽었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뷔토 백작가가 조금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왕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왕이 나를 보았다.
“라파, 그대는 저들을 어찌 생각하는가?”
왕의 시선이 갑옷기사를 향한다.
뭘 말하는 건지 지금의 말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렵다.
말머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싶은데 왕이 빙그레 웃었다.
“그들과는 말이 통하는가? 그대의 마음을 읽느냐?”
아, 어쩌면 갑옷기사에 대한 변명이라든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작가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피력할 기회를 주는 건가.
잘 됐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저들이 우리 인간에 대해 완전히 모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허나 말이나 뜻이 통하지는 않더군요. 다만 나름대로의 경험은 쌓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행동이나 말은 저들에게도 뜻이 통하는 듯 합니다.”
“그런가.”
왕이 갑옷기사를 본다.
왠지 왕의 눈이 조금 젖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갑옷기사의 시선도 왕을 향했다.
왕이 가슴에 손을 대고 가볍게 인사하자, 그런 행동을 이전에도 해본 적 있는 것처럼 갑옷기사도 가슴에 손을 댔다.
투구를 약간 숙인다.
“오늘의 일은 잊지 않을 것이다.”
왕이 중얼거리자, 갑옷기사가 가만히 그를 보았다.
*
이곳은 우리 왕의 아이가 오래전 살았던 곳이다.
우리가 처음 몸을 갖고 왕의 아이를 만났던 장소였다.
[….]우리 왕은 가끔 그립다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이 감정이 그런 것일지 모른다.
우리 마음이 촉촉한 비에 젖는 것 같았다.
그립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마음에 뭉글한 것이 생겼다.
한 개 두 개… 자꾸만 생긴다.
[그립다….]우리는 불쑥 말을 뱉었다.
그 말이 허공에 울리자 왠지 그 말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립다….]한번 시작하니 계속해서 말이 나왔다.
그립다… 그립다… 그립다….
우리는 계속 허공을 향해 말을 뱉었다.
먼 옛날 왕의 아이 곁에 남았던 정령들은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정령이 이 방 근처에 몰려 있다.
정령이 우리 몸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만나서 반갑다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왕의 뜻으로 태어난 정령의 일종이니까.
몇몇이 우리 왕의 아이, 우리가 보살피는 아이를 향해 날아가자, 그 뒤를 다른 정령도 따른다.
우리 왕의 아이 곁에는 이미 많은 정령이 있었지만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받아들여 어우러지며 섞인다.
왕의 아이 주위에 정령이 쑥쑥 늘어 허공을 메웠다.
우리 왕의 아이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정령이 날아와 붙는다.
어느새 이 방에 없던 정령들도 몰려온 모양이다.
정령은 소문이 빠르다.
우리 왕의 진한 피에 정령들이 기뻐하며 파르르 날개를 떨었다.
날개가 있는 것은 그렇게, 날개가 없는 정령은 제 몸을 빙글빙글 허공에서 돌리며 기뻐했다.
뭔가를 느낀 듯 우리 왕의 아이가 허공을 보았지만, 인간의 눈에 정령은 보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왕의 아이 곁에 있으며 우리는 그걸 알았다.
정령들이 그 일에 슬퍼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몇몇 정령의 몸에서는 눈물이 가루가 되어 흩어 떨어졌다.
우리에게 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왕의 아이는 우릴 보고 우릴 느낀다.
그 일이 기쁘고, 정령의 슬픔이 슬퍼 우리는 손을 뻗었다.
이곳에 우리 왕의 아이를 그리워하는, 사랑하는 정령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 왕의 아이, 너의 곁에는 언제나 우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왕에서 태어난 것들은 모두 그대, 왕의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
모두가 왕의 아이, 너의 행복을 빌고 있다.
우리가 손을 내밀자, 정령이 춤추며 왕의 아이 주변을 흩어져 돌았다.
구름처럼 에워싸고 기뻐하며 춤춘다.
우리를 느껴달라고 정령이 왕의 아이에 달라붙으며 노래하고 있었다.
*
말을 탄 채 가만있던 갑옷기사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저것은 무슨 뜻인지 아느냐.”
그 모습을 보고 왕이 묻는다.
모르지.
당연히 모른다.
다만 아까부터 정령이 부쩍 늘어났는데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갑옷기사가 정령하고 인사하는 중이라거나, 너희들 영역에 발 디뎌 미안하지만 잠시만 참아달라고 말하는 거라든가.
실제로 갑옷기사가 손을 내밀자마자 주변이 웅성웅성 난리다.
보이지 않는 벌이나 잠자리가 구름처럼 몰려와 이리저리 날뛰는 느낌이었다.
왕은 그걸 못 느끼는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금세 알고 주변을 보았지만 왕은 알아차린 눈치가 없었다.
이것도 모른 척 연기하는 걸지 모르지만 내 느낌으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자 우리는 왕의 침실에서 나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왕은 사람이 변한 듯 인자하고 친절한 모습을 거두지 않았다.
할아버지까지 비슷한 태도로 왕을 대했다.
이전의 관계를 알지 못했으면 십년지기 절친인 줄 알았을 거다.
왕은 특히 나한테 살가웠다.
진짜로 친할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굴어 속으로 조금 난감했다.
대놓고 치고받으며 싸우는 건 익숙해도, 이런 식으로 마음을 숨기고 겉모습을 꾸미는 건 뻘쭘하고 어색하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막상 왕의 침실을 나오자 더 난감한 일이 생겼다.
방을 꽉 채운 것 같던 정령들이 왜인지 모르지만 함께 나온 것 같다.
내 주위가 왕의 침실에 있을 때처럼 정령으로 빼곡하다.
정령이 일으키는 작은 바람을 보통 사람은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 같은 정령인은 공기의 흔들림을 미세하게 느낀다.
남들보다 몇십 배는 예민하다 보니, 정령이 일으키는 공기의 흔들림이 내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싸 다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복도로 나온 할아버지가 약간 놀란 듯 내 주변을 바라보더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얘야, 혹시 정령이 더 늘어난 거니?”
“네.”
“혹시 아까 그 방의?”
할아버지가 시종장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것 같아요.”
“….”
할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나란히 걷다 작게 탄식했다.
“… 왕궁에는 정령이 많지. 하지만 그 정령들이 모두 너를 따를 모양이구나.”
“….”
어, 설마.
그냥 신기해서 잠시 붙어 있는 거겠죠.
지금 있는 정령도 처치 곤란인데 더 늘어나면 곤란하다.
진짜로 곤란하거든요.
팔에, 머리에, 거기에다 덩치 큰 갑옷까지 붙어 다니는데 여기에서 더 늘면 정말로 곤란하다.
게다가 우리한테는 만드라고라의 씨앗에서 태어나는 미래의 정령도 있으니까.
“….”
만드라고라의 씨앗은 봉인하자.
절대로 싹이 트지 못하도록 흙에서 1미터는 떨어진 곳에 보관해야지.
… 아니, 적어도 3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걸어가는 내 주위에 몰린 정령들이 마치 그물에 잡힌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뛴다.
친구를 만나 기뻤는지, 내 몸에서 반짝반짝 빛이 튀었다.
물론 내가 그런 건 아니다.
정전기 정령이 제 마음대로 기뻐서 그렇게 한 것뿐.
하아, 앞날이 구만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