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31
15화
그러다 여왕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깨고 나오려 는 느낌이 그녀의 육체와 정신 전부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여왕의 동공이 파충류의 것과 동일 하게 세로로 쭉 찢어졌다. 그녀의 전 신이 걷잡을 수 없게 떨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뾰족했던 귀부터 새하얀 피부로 미 끄러지는 다리 끝까지.
껍질들로 뒤덮였다.
풍만했던 가슴이 쪼그라들며 가슴 벽에 달라붙은 무렵부터는 뼈마디가 비틀리는 소리들이 우드득 울려 나왔 다.
바닥에는 그녀의 녹색 빛깔 머리칼 이 송두리째 떨어져 있었다.
허기와 흥분에 찬 눈빛이 희번덕거 리다가,이내 녹색 정광(晶光)으로 진 정세를 찾아갔다.
그간 여왕과 카노나스의 정사를 비
춰 왔었던 여러 개의 거울 속에는 어 느 드라고린이 우뚝 서 있었다.
“너무 흥분하고 말았구나. 카노나
스.”
여왕의 말대로였다. 이번에는 분노 때문이었지만 성적 흥분이 극도로 끓 어오를 때에도 여왕은 본 모습을 드러 내곤 했었다.
카노나스는 여왕의 본 모습을 처음 목격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 날은 여왕의 침전에 처음으로 발 을 디딘 날이기도 했다.
그날 여왕은 아슬란 같은 그녀의 근 위병들과 은밀하고도 위험한 밀회(密
會)가 한창이었는데,여왕은 구태여 그 현장을 감추지도 않았다.
연인이기도 했던 어머니 루스라가 죽자마자 그 야밤에 침전을 찾은 것을 두고,여왕 나름대로 자신의 저의를 꿰뚫어 본 게 있었던 것이다.
여왕의 남자가 되겠다는 저의를 말 이다.
“……예,폐하. 말씀하시읍소서.”
카노나스는 발톱이 곤두선 여왕의 발밑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소울 링은 우리 주 락리마께서 만들 어 내신 성물이 아니다. 옛 신마대전 에서 첫 번째 마왕,둠 아루쿠다가 상
실한 것이었지.”
여왕의 말에 카노나스의 두 눈이 휘 둥그레졌다.
“그런……위험한 물건이 왜 다른 성 물들과 함께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옵 니까?”
“저주가 걷혀 더는 위험하지 않기 때 문이었다. 위대한 조상들께선 그걸 엘 슬란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안전한 곳 에 두기도 하셨다. 한데 교단이 !
“폐하. 교단에는……
“사용돼서는 안 되는 물건이니라. 내 그것에는 손을 대지 말라 그토록 당부 해 왔거늘.”
“교단에는 마왕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서 열성을 다하는 자들이 많사옵 니다.”
“내 당부를 어기면서까지 말이냐.”
여왕의 남자가 된 이후부터.
카노나스는 연적(繼敵)이 될 수 있는 아슬란을 마왕의 차원으로 치워 버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슬란과 교단을 설 득해야 했는데,마왕의 차원으로 침투 가 가능한 방법 중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수단을 끄집어냄으로써 가능해 졌었다.
마왕군의 육신으로 영혼을 전이시킬
수 있는 소울 링이라면 보장된 성공이 었다.
그렇게 아슬란을 23차 원정대의 수 장으로 추천한 것도,아슬란을 설득한 것도,배후에서 아슬란에게 소울 링을 장비시키도록 교단에 힘을 쓴 것도 모 두 카노나스,자신이었던 것이다.
카노나스는 진실을 감춘 채 교단을 변호하기 바빠졌다.
“그만,그만. 그게 아니다. 카노나스 야. 본시 그것의 본 목적은 영혼을 전 이시키는 데 있지 않았느니라.”
“하오면…… 무엇이옵니까?”
“둠 아루쿠다는 강력한 영혼들을 수
거하는 데 그것을 사용했었다 한다. 카노나스.”
“예,폐하.”
“한시라도 빨리,아슬란을 복귀시킬 방법을 찾거라. 절대 마왕의 손에 들 어가면 아니 될 물건이니라. 마왕 둠 맨이든. 마왕 둠 아루쿠다든. 다른 어 떤 마왕의 수중으로든……
[ 성(聖) 라시안의 영혼 어전 반지 (아이 템)] [ 변질된 둠 아루쿠다의 영혼 수확 낫 (아 이템)]둠 아루쿠다!
본능 같은 경고가 뇌리를 찌릿하게 울렸다.
집어 든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는,실 질적인 통증도 있었다.
어쨌든 둠 아루쿠다의 이름을 발견 하자마자 바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무엇보다 빠르게 !
[ 오딘의 절대 전장이 개방 되었습니다. ]연희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녀 는 내가 어떤 위험을 감지했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그녀가 광대의 단검을 말아 쥐는 동 시에 아슬란을 넘어트렸다.
한 손으로 아슬란의 얼굴을 짓누르 고는 다른 손에 쥐어진 단검으로는 금 방에라도 꿰뚫어 버릴 수 있게끔,아 슬란의 목 언저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간 연희의 품에서 조용히만 있던 크시포스도 흉포한 아가리를 드러내 며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슬란 때문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 내주고 난 후였다.
그제야 아슬란은 연희의 위협으로부 터 벗어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보라.
어떤 원리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 어도,성(星) 드라고린으로 들어오면 루네아에게 내 일거수일투족이 알려 지기 마련 아니던가.
루네아를 통해 제 물건이 내게 들어 온 것이 알려지면 둠 아루쿠다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템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틈도 없이,즉시 절대 전장을 펼쳐 버린 까 닭은 바로 그래서 였다.
그런데 갑자기.
솨아악-!
반지가 손아귀 안에서 거대한 낫의 형태로 돌변했다.
내가 뭘 의도한 것은 아니 었다.
더 그레이트 레드의 심장 반쪽에서 있었던 현상과 동일했다.
더 그레이트 레드의 심장 반쪽도 처 음 외형은 쪼개진 검 형태였으나,내 손아귀로 들어오면서 지금의 작은 형 태로 바뀌었었다.
이번에도 같았다. 반지는 내 손아귀 안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더 그레이트 레드의 심장 반 쪽을 취했을 때와는 다르게 통증이 계
속 기세를 높이며 끓어오르는 것이었 다.
강렬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독물(毒 物)이기도 한,올드 원의 마나를 강제 로 내 몸 안에 받아들일 때와 동일한 통증이었다.
통증은 고통으로 치달았다. 순간적 으로 낫을 땅에 떨어트릴 정도였다.
시퍼런 날은 무엇의 대가리도 칠 수 있어 보이는 것이 몹시 위험천만해 보 였다.
그때 연희가 몸을 튕겨 왔다.
“왜! 무슨 일이야?”
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이 앞에서 번
뜩였다가 뒤로 스쳐 지나갔다.
“너 ! 대체 뭘 가지고 온 거야?” 연희가 아슬란을 향해 외쳤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 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아슬란은 당혹스러워했다.
녀석은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밝혔었다.
궁정에서 본인이 여왕의 경비병이었 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원정대에 합류 하게 된 과정 그리고 반지에 대해 알 고 있는 것은 물론.
여왕의 곁에서 알게 된 다른 정보들 까지도 말이다.
그중 하나만 끄집 어내자면 드라고린 에 대한 것으로,교단에서 스스로를 드라고린이라 자각하고 있는 홀리 나 이트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자각하 지 못한 다른 드라고린들을 찾는 과정 역시 진행 중이라고 했다.
사실 그 과정에서 그토록 헤매 왔던 사안이 완수되기도 했다.
여왕은 드라고린 그린이지,더 그레 이트 그린이 아니 었다.
물론 녀석의 정신세계를 통해서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일이지만.
연희도 낫을 들 수 없기는 마찬가지 였다.
반면에 아슬란은 여전히 그것을 드 는 게 가능했다.
녀석이 낫을 집어 올렸을 때는 또다 시 반지 형태로 바뀌었다.
“됐다.”
그리고 아슬란이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에도 여전히 반지 형태였다.
과연 급이 다른 물건이라,우리가 사 용하지 못하게끔 강력한 저항력이 걸 려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비단 이 물건뿐만이 아니다.
둠 엔테과스토의 늑골을 내 소유로 정화하기 전만 해도 비슷한 현상으로 제약을 받았지 않았던가.
다만 이번에는 그 강도가 더욱 높은 게 다른 점이다.
둠 엔테과스토의 권능보다 더 큰 힘 이 이것에 깃들어 내게 제약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집어 들기도 힘들 만큼.
“ ᄋ.,,
답…•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이것이 내게 반응하기 전인,수정되
지 않았던 이름은 성(聖) 카시안의 영 혼이전반지였다.
성 카시안은 태고의 홀리 나이트를 통틀어 성 제이둔과 함께 양대산맥으 로 꼽히는 자였다.
내가 둠 맨이 되어 이 세계에 위협으 로 나타나게 될 거라는 걸,그 오랜 세 월 전에 이미 예언한 자이기도 했다.
홀리 나이트들의 검술과 마법들도 그자의 기록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사실상 성 카시안은 지금의 성(星) 드라고린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두 번째.
성 카시안이 둠 아루쿠다의 물건을 습득했다. 둠 아루쿠다와 싸워서 얻어 낸 전리품이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거기에 깃들어 있던 둠 아 루쿠다의 권능을 성 카시안이 본인의 힘으로 정화시켰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며.
성 카시안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초 월체인 게 된다.
종합해 보자면 성 카시안은 후대들 을 위해 안배를 남겨 둔 초월체다.
어쩌면,둠 아루쿠다에게서 놈의 병 기를 전리품으로 취할 수 있었을 만큼 더 강력한 초월체일 가능성도 품어져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무엇인지 감히 속단할 순 없지만 한 가지 의심을 아니 해 볼 수 없다.
성 카시안이 올드 원일 가능성 말이 다. 아무리 못해도 성 카시안은 성 제 이둔처럼 태초의 고룡(古龍) 중에 하 나가 분명하다.
그간 품어 왔던 소망을 말해 보자면 둠 카오스나 올드 원이 처치 가능한 존재였으면 하는 거 였다.
추정 불가능한 코스믹 호러 같은 존 재가 아니길 바라 왔었다.
그런데 정황이 점점 그렇게 좁혀지 고 있었다.
불가침의 영역.
혹은 인지할 수 없는 공포적인 영역 에서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았던 둠 엔테과스토도 물질적인 존재였다.
실제로 둠 아루쿠다의 외눈박이 눈 알을 본 적이 있었고.
둠 카오스가 나를 봉인시켰을 때에 도,찰나였지만 그것의 눈알 또한 본 적이 있었다. 또 신마대전에서 남겨진 유물들만 봐도 그것들은 서로 싸워 대
며 제 소중한 일부분을 잃어 왔었다.
그러니 왜 아니겠는가.
둠 카오스도 그렇지만 올드 원도 처 치 가능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생명 체일 수 있었다.
둠 엔테과스토를 딛고 장막 너머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둠 카오스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해질 것이다.
성 제이둔이었던 더 그레이트 레드 가 이 세계 어디에 지금 살아 있는 것 처럼 성 카시안도 그럴 수 있었다. 놈 과 마주할 수 있다면 놈이 어떤 존재 인지 또 확실해질 것이다.
나를 묶고 있는 속박을 끊어 버릴 열
쇠는,바로 그런 것들의 정체를 확인 하는 데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둠 아루쿠다의 물건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연희에게로 가져갔다.
一 전장이 유지되는 시간 안에 어떻 게든 끝장을 봐야 한다.
– 자세히 말해 줘. 뭘 어떻게 끝장 봐야 하는지.
– 저게 정확히 무엇이고,내 소유물 로 만들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저걸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엔 둠 아루쿠 다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다.
– 그래서?
一 심플해.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지 금은 보지 못하는 영역까지 강해져야 한다.
저것을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할 수 있게.
또 불가피하게 바깥에 가지고 나가 야 한다면 최소한 지난번 회의처럼 무 턱대고 당하지 않도록.
행동 대장,둠 엔테과스토나 저 물건 의 주인인 둠 아루쿠다 같은 상위 둠 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최소한이 나마 갖춰야 하는 거다.
추정컨대 저 물건에는 권능 저항력 도 깃들어 있을 것이다.
아무렴 둠 아루쿠다의 물건이 아닌 가.
이걸 삼키는 데 성공한다면…….
–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는 묻지 않겠어. 넌 지금 꽤 시급해 보이니까. 전장이 유지되는 시간이 언제까지지?
– 두 시간.
– 그 시간 안에 일약 강해져야 한다 면,역시 거기에서겠지?
– 그래. 정신세계 안에서다. 거기에 서만큼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지.
– 전장은 단단한 거 맞지? 정신세계 에 진입한다고 여기 시간이 완전히 멈 춰지는 건 아니야. 아주 찰나지만 흐 르긴 흘러.
어떤 초월체에게 방해를 받으면 위 험해질 수 있다는 소리였다.
둠 아루쿠다에게 제 물건이 내게 들 어왔다는 것이 알려졌고,또 놈이 실 력을 행사하기로 했다면 벌써 시끄러 워졌을 일이다.
확신하건대 절대 전장을 펼쳤던 속 도는 빨랐다.
루네아의 감시망을 피했을 만큼.
– 그 점은 염려할 것 없다.
– 좋아,선후야. 그럼 시작점을 어디 로 잡을까?
아슬란을 턱짓하며 말했다.
– 엘슬란드.
이 세상에서 나는 영향력 높은 귀족 중 하나인 아네모스고 연희는 내 부인 이다.
아슬란의 기억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세상이었으며 녀석의 기억 속에서 아 네모스는 전 귀족을 통틀어 가장 자유 로운 자였다.
아슬란이 알고 있는 많은 인물 중.
마나 탐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진 것으로는 아네모스가 제격이었 다.
숱한 엘프 귀족들처럼 궁정 출입이 잦지 않아도 방해하는 자가 없고,본 인의 저택에서 파티를 주최하는 경우 도 없었다.
그래서 방해받을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밖에 없었다.
올 때가 됐는데?
역시나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 가들렸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아네모스 님.
여왕 폐하께서 손님을 보내오셔 서……
이 여성 엘프의 이름은 에레나. 하녀 로 들어온 평민 계급이다.
본토.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대치동의 부모 들이 자식 교육에 집착하는 보통의 까 닭은 본인들의 지위를 자식에게 승계 하는 게 애매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 다.
그들은 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자 식들이 명문대에 입학하고 학벌을 바 탕으로 원숙한 사회적 지위를 형성하 길 바랐다.
그러나 압구정과 청담동의 부모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식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 든 얼마든지 본인들의 지위를 자식에 게 물려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까닭 에,비단 공부를 통해서가 아니어도 제 자식들을 본인만 한 위치로 끌어올 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압구정과 청담동에선 부모들
의 지위와 부가 자식에게로 승계되는 게 어렵지 않은 구조다.
그들은 이너 서클(Inner circle)을 형 성하고 있다. 전일 그룹을 중심으로 말이다.
하지만 엘프 사회에서는?
압구정과 청담동 같은 구조만 주를 이루고 있을 뿐,대치동 같은 것은 존 재하지도 않는다.
사회 구조는 중간 영역이 아예 존재 하지 않은 채,극소수의 상류층과 에 레나 같은 대부분의 평민 계급으로만 양분되어 있다.
엘프들의 사회가 그린우드 대륙이나
우리 본토의 중세와는 다르게 유별난 까닭은 이것들의 사회 구조가 자연 발 생했다는 데 있었다.
이것들은 법문으로 신분 계급을 규 정해 두지 않았다.
미국에서 구태여 금융실명제법을 제 정해 둘 까닭이 없는 것처럼,이것들 의 신분 계급도 사회적인 약속으로 자 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궁정과 그 일대는 상류층의 거주 지 역으로,여기에 거주하고 있는 것들은 본인들을 가리켜 왕과 귀족이라 자칭 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그게 엘프들이 누리고 있는 삶
때문이라 생각했다.
한번 태어나면 수백 년을 살며,고대 로부터 수없이 반복되어진 각 일가 (一家) 속에서의 승계 작업이 지금의 엘프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렇게 엘슬란드는 법문이 따로 존 재하지만 않을 뿐 관습으로 통치되는 세상이었다.
고일 대로 고여 버린 곳.
엘프 상류층들은 본인들의 세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라도,그것들이 벌이 는 암투는 치 열하고 교활했다.
그러니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날도 궁정 파티에 참석했던 연희
가 내 앞으로 난입해 왔을 때는,피비 린내부터 확 풍겼다.
그녀의 모피 드레스는 피로 물들어 핏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닌지라,그녀는 또 질린 기색으로 뾰족한 귀를 꿈틀거 렸다.
“리셋시킬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스 럽게 열렸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아네모스 님. 여왕 폐하께서 손님……!”
에레나가 피에 젖은 귀부인의 모습 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행복한 가짜 세상과 불행한 진짜 세 상. 그중 무엇을 택할 텐가.
어차피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건 인식의 차이일 뿐이니 보통은 전자를 택할 일이다.
하지만 나는 후자다.
다른 스트레스 없이 탐구에만 매진 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 창밖으로 보 이는 아름다운 설원. 추운 기후를 잊
게 만드는 따뜻한 벽난로. 온갖 산해 진미와 숙취도 없는 알콜. 행복한 감 정을 풍부하게 끌어올리는 향로.
그런 것들이 무한정으로 지급되는 세상일지라도 고민 없이 대답할 수 있 다.
바깥에 내가 지켜야 하는 세상이 있 으니까.
그러나 연희가 걱정이었다.
지금이야 훗날 엘슬란드를 침공할 때를 염두에 두고,아슬란이 무심결에 놓치고 있을 엘슬란드의 사정을 파헤 치기 위해 궁정 출입이 잦지만.
그 일이 끝나고 나면 그녀도 이 가짜
세상에 녹아들 일이 아닌가.
한 대상으로부터 중요한 기억들만 뽑아내는 작업과는 다르다.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인물로,그 세 상을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벌써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리셋시킨 세상이지만 우 리가 보내온 시간만 계산하자면 그렇 게나 됐다.
한편 방해자가 도착할 시각이라서 나는 집중을 깨고 나왔다.
무대를 리셋시킬 때마다,오늘과 지 금 시각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 청객 에레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아네모스 님. 여왕 폐하께서 손님을 보내오셔 서……
무시해도 소용없다. 안 해 본 게 아 니다.
여왕이 보내온 손님이란 이 기억의 주체인 아슬란이었는데,녀석은 여왕 이 보낸 전갈을 내게 직접 전해 주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당시 아슬란은 전령이면서도 그것을 훔쳐봤던 것 같다.
그러니 전갈의 내용이 흑백 처리 되
지 않고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일 테 지.
「친애하는 아네모스.
마왕 둠 맨이 예언대로 도래한 이래, 그 린우드 대륙은 빠르게 불타고 있습니다.
나약한 그린우드의 원주민들로서는 감당 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린우드의 홀 리 나이트 또한 종(種)의 한계를 어김없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요.
허나 우리 주 락리마의 성역에도,궁정 밖으로 관심을 돌려 보면 그린우드의 원 주민 같이 나약하고 천박한 것들이 지천 인지라 내 근심은 그치질 않습니 다.
합심하여 성역의 병단을 구성하고,밤을
준비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데도 최근 에니카스가 루스라의 아들,카 노나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궁정의 분위기가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만일 그대가 중재를 수락한다면……
〈하략〉」
이번에도 글씨 하나 달라지지 않은 전갈.
그것을 한쪽에 치워 버린 다음 집중 을 재개했다.
집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올드 원은 우리 각성자들을 제대로 설계해 놓았다.
특히 자체 회전력을 품으며 자가 발 전기처럼 작동하는 스킬 영역의 메커 니즘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계속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이 바로 거기 였다.
회전력을 똑같이 모방하는 것. 올드 원의 설계도를 파헤치는 것.
이뤄야 할 첫 번째 목표였다.
회전력을 모방할 수 있는 경지까지 마나를 다루는 데 완숙해진다면 새로 운 영역이 보일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그 어느 날…….
무수히 반복해 온 무대.
시작점은 카노나스가 여왕의 남자로 들어갔을 때부터고 종착점은 아슬란 이 소울 링을 장비하고 원정대로 보내 지기까지 다.
한 무대당,대략 석 달 정도의 시간 을 거쳐왔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아네모스 님. 여왕 폐하께서 손님을 보내오셔 서……
돌이켜보면 이 목소리만 열 번 이상 들어 왔던 것이었다.
이제 연희를 위해서라도 무대를 바 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궁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 었다.
“무대를 바꾸자고?”
이 무대를 시작점으로 잡은 건 나였 지만,엘슬란드 여왕의 정체를 확인한 이후부터는 그녀가 이 무대를 고집해 왔었다.
이후로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면 앞으로 도움이 될 정보들이 깃들어
있는 무대에서 일을 진행시키는 게 효 율적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궁정의 지리부터 궁 정을 보호하고 있는 마법 체계 그리고 귀족들 한 명 한 명의 면목 그리고 어 디까지나 아슬란의 잠재의식을 통해 서였지만,‘태초의 세 신전 중 하나’ 가 있을 거 라 추정 되는 지 역까지 알아 냈다.
“지긋지긋하잖아.”
내가 대답하자 연희의 눈초리가 가 느다래 졌다.
감응을 여전히 차단하고 있었던 건 지 내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
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선후야!”
내게 안기다시피 몸을 던져 왔다. 지 금까지처럼 아네모스의 부인 캐릭터 를 유지한 상태 였다.
제 풍만한 가슴골 사이로 내 얼굴을 끌어당기고서 놓아주질 않았다. 모처 럼 만에 장난을 걸어올 만큼 그녀도 기뻐했다.
무대를 바꾸는 순간이 왔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도 눈치첸 게 있기 때문 이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 뗐을 때,반짝 이는 그녀의 눈빛이 보였다.
비록 아네모스 부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어도 그 눈빛만큼은 연희의 것이 었다.
정말이야? 정말 성공한 거야? 드디 어?
연희가 그런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래. 시도해볼게 있다.”
“알았어. 알았어.”
연희의 목소리가 순간에 흐릿해졌 다.
화악-!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여기 방 안 의 광경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이 년이 넘도록 잊고 살았던 방.
바닥에는 둠 아루쿠다의 물건이 떨 어져 있고 내부 벽 전반에는 절대 전 장의 막이 걸쳐져 있다.
이따금 방해자로만 출몰했던 아슬란 또한,그때마다 보인 궁정 예복이 아 닌 본토의 정장 차림이되 다니엘의 모 습으로 서 있었다.
정신세계에 진입하기 직전에 확인했 던 때보다 1초가 지나가 있었다.
나는 편한 자세로 앉았다.
연희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 다.
요구할 때마다 아네모스 부인의 캐 릭 터 에서 본 얼굴을 보여 오긴 했었으 나,그래도 현실 세계에서 그녀의 진 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새삼 다른 즐 거움으로 다가왔다.
그때 연희가 슬란에게 막 끝까지
떨어지라고 말했다.
엘프들만 쓰는 특유의 발음이 자연 스러웠다. 나는 할 수 없는 발음이었 다.
아슬란이 놀란 눈을 하며 자리를 비 키는 광경을 끝으로 내부의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A급 순간 이동의 인장을 담당하고 있는 영역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쏴•아아•악 _
거기로 어떤 속도감이 일어 전신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이 느낌이 고도의 집중을 마쳤다는
분명한 증거다.
무형(無形)의 손길로 어루만지듯이 영역을 조작해 나갔다.
회전력을 품고 있는 스킬 영역을 대 조군으로 삼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그 설계가 뇌리 끝까지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도 절대 전장 밖으로 나가 새로 운 인장을 공수해 올 수 없는 처지인 이상,한번 파괴되면 다시 수급해 올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절대적인 주의가 필요하다. 폭발물을 다루는 듯한 긴장감이 치밀 어 오르는 것도 경계야 한다.
무아(無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전제 조건인 것이다.
그러고 눈을 떴을 때였다.
메시지가 막 지워지고 있었다. 그 위 에 덮어씌워지는 메시지.
[ 스킬 ‘헤르메스의 순간 이동’을 획득 하 였습니다.]하지만 현실로 나왔던 본 목적은 여 기에 있지 않다.
인장에 회전력을 결부시킬 수 있는 것도.
꼭 순간 이동의 인장을 통해서가 아 니 라 다른 종류의 인장을 통해서도 순 간 이동 스킬을 복사해 낼 수 있을 거 란 것도.
모두 짐작해 왔던 일!
확인해 보고 싶은 건 이다음 단계에 있다.
스킬에 걸린 설계를 꿰뚫어 볼 수 있 게 되었던 당시,더 이상의 무엇이 가 능한지 그때 충격처럼 깨달았었다.
그러니 이제 시도해 볼 작업은 분명 하다.
마나의 영역에서 직전에 만들었던 순간 이동 스킬을 해체시킨 후.
해체된 마나를 스킬과 특성 그리고 인장 등 전체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로 유도하는 것,그렇게 껍질의 크기를 키워 보는 것이다.
쏴아아악-!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몽롱 함과,무아(無我)의 마지막에서 달고 나왔던 느낌이 뒤섞여 있었다.
등은 땀으로 젖어 있다.
그리고 눈앞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스킬 ‘헤르메스의 순간 이동’이 제거 되 었습니다.]또 그 위에 덮어씌워지는 메시지.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래,바로 이거다!
[ 레벨 : 600 (92.26%) ] [ 레벨 : 600 (92.38%) ]0.12%. A급 순간 이동의 인장 하나 에 담겨 있던 마나를 경험치로 사용했 을 때 올라간 수치 다.
바다에 물 한 바가지를 추가했다고 해서 티가 나지 않듯 상승치는 미비했 다.
그러나 인장을 스킬화시키거나 그것 의 마나를 흡수해서 랩업 재료로 사 용,혹은 스킬과 특성들을 하나로 융 합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방법 대부분이 가능 해진 데에서 가슴에 큰 울림이 일었 다.
가장 큰 결실은 마나를 꿰뚫어 보는 시각을 얻은 것!
물론 당장에는 인장의 마나를 흡수 할 수 있는 것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 다.
절대 전장 밖으로 나가서도 마찬가 지.
인장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시작의 장에서 각성자들은 박스를 얻으면 아이템과 스킬을 깠지 인장을 까는 경우가 드물었었다.
어쨌거나 지금,올드 원의 설계에 완 전히 정통한 것은 아니었다.
역경자,질풍자,타고난 자처럼 특정 조건에 돌입했을 때 본연의 마나 이상 으로 힘을 폭발시켜 버리는 원리까지 는 꿰뚫지 못했다.
권능에 걸려 있는 잠금장치를 해제 시키는 방법 또한.
거기까지 파고들기 에는 너무나 많은 세월이 필요해질 것 같았다.
나는 그 세월에 무뎌지지 않을 자신 이 있지만,연희는 위험할 수도 있었 다.
다음 단계로 아이템에 시선을 돌린 건 그런 까닭에서 였다.
아이템에 깃들어 있는 마나를 흡수 할 수만 있다면…….
“이제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선 거 다. 다음 무대로 진입하자.”
“어디로?”
“네가 행복했던 때라면,어디로든.”
조나단은 창 너 머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선 김청수가 이번 재판과 관 련된 주요 인사들과 미팅을 가지고 있 었다.
바깥에 알려지면 또 다른 스캔들로 번질 수 있는 회합이 었다.
사법부 인사들을 비롯해 청문회에서 조나단을 공격하는 데 동참했었던 정 치계 인사들도 진땀을 빼며 앉아 있었 다.
그들은 잠깐 정치계의 생리(生理)를 잊고 군중 심리에 휩쓸렸던 것을 후회 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미소를 띠고 있지만 두 눈에는 본인
의 앞날을 걱정하는 흐린 빛만 가득했 던 것이다.
그때 조나단이 기다리고 있던 손님 이 방문했다.
정부로부터 철저한 독립성을 보장받 고 있다고 알려진 기관.
그러나 본 정체는 선후의 소유물인, 연방준비제도(FED)에서 나온 인사였 다.
조나단은 클럽의 왕좌를 일임받은 사람으로서 시위에만 모든 시간을 쏟 아부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연방준비제도의 총재 리암은 반드시 만나 줘야 할 사람 중에 한 명
이었다.
리암은 건너편 방에서 진행되고 있 는 비밀 회합을 쳐다보고 있다가 조나 단의 손짓을 받고 걸음을 옮겼다.
리암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긴장감 때문이 었다.
청문회에서 보였던 초자연적인 파괴 력도 그렇지만,조나단은 어느 날 그 분을 대신하여 클럽을 움직이는 위치 로 올라섰다.
세계 그림자 정부의 총수 말이다.
“습격을 받았다 들었습니다.”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 다.
“연방준비제도에서는 있을 만하시 오?”
리암은 그렇다는 대답과 함께 가지 고 들어온 선물을 조심스럽게 올려놓 았다.
그것은 알루미늄 박스였다.
조나단은 구태여 그것을 열어 보지 않아도 거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눈 치철 수 있었다. 박스 겉에 거래소의 직인이 찍힌 명찰이 박혀 있기 때문이 었다.
이계산(産)이 아닌,정통으로 분류되 는 아이템. A급 방어구.
“어떻게 도움을 드려야 할지 몰라,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 다.”
이 정도 급이라면 켓 푸드 웨어하우 스에 선후가 비축해 둔 아이템이 산재 해 있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구태여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질책하지 않았다.
어디서 돈이 나서 이런 거액의 물건 을 입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도. 대신 조나단은 이렇게만 말했다.
“긴장하지 마시오. 그래서야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소? 이전 같이 개의 치 말고 얘기하면 되는 거요,리암.” 그랬어도 리암의 긴장된 기색은 쉽 사리 풀리지 않았다.
건너편 방에서 다소 언성이 높아져 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건 브라이언 김의 목소리였는데, 사법부와 행정부 인사들을 질책하는 소리였다.
총재 리암은 덩달아 본인까지 질책 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는 무덤덤한 모 습으로 앉아 있지만,그 속만큼은 격 노로 가득 차 있을 강력한 인사가 앉 아 있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지난 밤에 외계의 습격까 지 있었다 하니,신경이 얼마나 곤두 서 있겠는가?
알아보니 지난 밤에 다 타서 없어져 버린 염마왕의 자택은 염마왕이 건설 당시 직접 설계에 참여했을 만큼 애정 을 쏟았던 곳이 었다.
리암은 조나단을 방문한 본 목적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무거운 기류가 리암의 어깨를 짓누 르기 시작했을 때,조나단이 먼저 입 술을 뗐다.
“기준금리 때문이오?”
리암에게서 맞다는 대답이 나왔다. 리암은 물 한 모금으로 말라 버린 입 술과 식도를 축인 후에야 말을 이어 나갔다.
연방준비제도의 총재로서 당연히 상 의를 해야 할 일이지만 어쩐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지난번 클 럽 회의에서 결의된 사안과 반대되는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08년 금융위기 이후 15년 12월에 처음으로 금리를 0.25% 인상하였습 니다. 그 이후로 점차적인 인상을 단 행하였다가,시작의 날을 기점으로 다 시 제로 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 니다.”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거 렸다.
시작의 날 정체되어 버렸던 세계 증
시를 견인하는 방법으로 선후가 내렸 던 결정이었다.
뉴욕 회사와 질리언 투자 금융 그룹 의 보유 주식들을 시장에 풀고.
동시에 금리를 파격적으로 인하했었 다.
결과는 시장에 그대로 반영됐었다.
현재 세계 증시는 어느 때보다 호황 을 누리고 있었다.
단 한 곳,클럽의 질서에 대적하려 했었던 중국만 제외한다면.
“거품이 끼고 있다는 거요? 아니면 경제 지표가 좋아졌다는 거요?”
“둘 다입니다. 하지만 올해를 넘기면
다음 연도의 클럽 회의에서 이 사안이 최대 화두 중에 하나로…… 상정될 것 같습니다.”
아직 08년도의 세계 경제 위기를 언 급할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반드시 짚고 넘어갈 일이었다.
총재의 설명이 길어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에서 결정되는 금 리는 세계 경제를 주도하기 마련이었 다.
세계 모든 나라들은 미국의 통화 정 책을 기반으로,본인들의 통화 정책을 수립하거나 그에 맞게 추정해야만 한 다.
조나단은 총재가 담아 온 자료들을 확인했다.
시작의 장 이전부터 줄곧 저금리 시 대였다.
그리고 시작의 장 이후,제로 금리 시대에 돌입하면서 08년도 세계 경제 위기를 촉발시켰던 당시처럼 부동산 쪽으로 민간의 자본이 흘러가고 있었 다.
민간에서 사들일 수 있는 주식의 유 동량이 더 협소해진 이상.
확실히 부동산 쪽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벌써부터 장기적인 위기에 베팅을
건 헤지펀드들이 나오고 있는 판국이 었다.
문득 조나단은 오래전 선후와 함께 해 왔던 세월들이 떠올랐다.
세계적인 위기를 직감하고, 그것을 통해 자본을 꾸준히 성장시켜 왔던 세 월들.
한 번의 베팅마다 짜릿한 쾌감이 휘 감던 세월들.
조나단은 도전을 갈망해 왔던 그 세 월들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때는 올라가야 되는 다음 계단이 빤히 보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계단의 최정상에 올
라,아래에서 일어나는 소란들을 주관 해야 할 때였다.
잠시 후 조나단은 회상을 깨고 나오 며 한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국은 지금도 선후의 부모님이 계 시는 모국인 탓에 그가 틈틈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물론 리암은 조나단이 갑자기 이야 기를 중단하고,한국 같은 작은 나라 의 사정을 살펴보기 시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과연.’
한국은 증시와 부동산 모두가 최고 조로 상승해 있었다.
한국 내 기업들의 주식이 전일 그룹 과 뉴욕 회사 그리고 질리언 투자 금 융 그룹 같은 선후의 다른 주머니들에 산재해 있어서 증시의 유동성이 적었 다.
꼭 그 때문이 아니 었어도 한국은 꾸 준히 그래 왔었다.
증시보다도 부동산을 부의 증식으로 활용하는 나라가 한국이 다.
가뜩이나 연방준비제도에서 제로 금 리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에 한국의 중 앙은행에서도 저금리를 운용하고 있 었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 역시 대출을 활
용하는 데 큰 부담이 없어서 그 돈들 로 부동산을 긁어모으고 있는 것이었 다.
겝 투자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수십 채 수백 채씩 아파트를 사들이는 사람들을 투자의 귀재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그러니 만일 미 연방준비제도에서 금리를 인상시키기 시작하면 이는 한 국에 타격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의 중앙은행에서도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휘하 은행들도 당연히 그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출을 끌어안고 부동산을
사들인 한국의 대중들에게는 이자 부 담이 늘어나는 것인데.
금리의 인상폭,한국의 경제 생태계, 한국의 부동산 정책 등.
악조건들이 겹치다 보면 한국의 부 동산들이 매도 시장에 대거 나타나면 서 그 나라의 부동산 거품이 일거에 터져 버리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 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잘 대응해야 할 일이지.’
마침내 조나단은 결정을 내렸다.
한국이 선후의 모국인 것은 틀림없 는 사실이지만 한국 한 나라 때문에
세계 경제의 흐름이 좌우돼서는 안 된 다.
선후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제는 금리를 인상시킬 때라고. 내 렸다면 올려야 하는 순간이 오는 법.
그래서 부풀어 가고 있는 거품을 꺼 트리고 인플레이션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이 끝나고 나면 언젠가는 다 시 금리를 인하시켜 경기를 또 부양해 야겠지만…….
조나단과 총재 리암의 단독 회의가 끝났을 무렵.
김청수가 건너편 방에서 진행시켰던 회의도 이미 끝나 있었다.
조나단은 김청수에게 회의에서 확답 받았던 밀약(密約)을 보고 받았다.
그런 다음 이번엔 조나단이 김청수 에게 이후 금리 정책에 대해서 설명했 다.
다음 분기부터 금리를 점차적으로 인상시킬 것이니,그에 맞게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재조 정하라는 지시 였다.
“그럼 질리언 부부를 비롯해 클럽 회 원들에게도 관련해 전달해 두겠습니 다. 그리고 설계도는 확인해 보셨습니 까?”
미로형 벙커.
사실 외계의 습격을 의식해서 만든 새 거처의 설계도는 그렇게 마음에 드 는 것이 아니었지만,금리를 인상시켜 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준비해 둬야 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조나단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김 청수는 거기까지 확인받고 나서야 자 리를 비켰다.
그제야 혼자 남을 수 있게 된 조나단
은 위스키 한 병을 꺼내 왔다.
시작의 장에서 선후와 만나게 될 때 를 기약하며 수십 년간 보관했었던 그 위스키와 같은 브랜드였다.
위스키를 따면서도 조나단의 감각은 날이 서 있었다.
‘올 테면 얼마든지 와 봐라.’
자신을 정탐만 하고서 도주해 버린 엘프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렇게 날이 서 있기 때문이었을까.
화상 연결이 들어왔다는 알림음이 고막을 파고들 듯이 들어왔다. 그때 조나단의 감각 수위는 컴퓨터 스피커 의 진동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을 정
도였다.
「발신자: 믹」
믹,저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계 정이었다.
선후가 클럽의 왕좌를 일임하였던 당시에 저장하게 된 계정이었으니까. 조나단이 수락하자마자 다급한 얼굴 과 함께 역시나 급박함이 느껴지는 목 소리가 튀어나왔다.
“초월체가 습격했습니다!”
대상이 실시간으로 연결시킨 자료 화면은 켓 푸드 웨어하우스의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초월체?’
과연 영상에서는 초월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움 직이면서 만들어 내는 궤적들만 보였 다.
그런데 시각에 감각을 좀 더 집중시 켰던 그때였다.
핏줄 하나하나가 뻘겋게 도드라진 그 동공 위로,찰나에나마 포착된 게 있었다.
‘썬?’
창고를 습격해 온 초월체라 오인받
은 것은 분명히 선후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화상 연결 을 걸어온 믹만큼이나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었고 창고의 아이템들을 휘젓 고 있었다.
“습격이 아니다. 오딘이시다!”
선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 림 없었다.
선후가 만들어 냈던 궤적이 갑자기 사라진 순간,조나단은 모니터에 대고 황급히 외쳤다.
“어디로 갔는가? 빨리!”
그때 아이템 창고를 비추고 있던 화 면이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
거기서도 선후의 음직임이 만들어 내고 있는 궤적이 곳곳을 휘젓고 있었 다.
거기는 마석을 쌓아 둔 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