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73
73. 선발전(4)
벨키스트는 검을 칼집에 넣고는 대련장을 빠져나왔다.
아론은 고개를 수그린 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올카가 머리를 기울였다.
“저는 아론이 이긴다고 생각했는 데. 이상하네요.”
“아론 오빠가 불쌍해요. 잘하고 있 었잖아요. 단 한 번에……
“그래,단 한 번이지.’
나는 눈을 감았다.
‘센스가 뛰어나다는 말로는 표현 하기 어렵군.’
전투가 길어지면서 벨키스트는 아 론의 창술 패턴을 파악했다.
이는 중반부터 벨키스트의 상처 빈도가 줄었다는 것과 마지막에 아 론의 연속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피 한 뒤 파고든 것을 보면 확실했다.
하지만 벨키스트는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음에도 기다렸다.
’공격은 단 한 번.’
승리를 따내는 것은 한 번이면 충 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다.
벨키스트는 혹시 모를 변수를 없 애기 위해,또한 완벽한 반격 타이 밍을 잡기 위해 아론의 수많은 공격 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리고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상대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관찰 력,승리의 가능성을 찾는 분석력,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 을 갖추지 못하면 불가능한 방식이 었다.
“이견은 없는 것 같군.”
나는 눈을 떴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 었다.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약속은 지킨다. 벨키스트는 1파
티. 아론은 열외야.”
분명히 말했다.
승자에게 1파티의 자리를 양도하 겠다고.
아론도 이를 각오하고서 나갔다. 그리고 결과는 나왔다.
무슨 불만이 있든 한번 결정한 룰 을 어길 수는 없었다.
“만족스러운 결투는 아니었다. 아 론,너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패배를 자초했어. 우리 파티에 있기 는 어렵다.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 야.”
“형님, 아론은 동료를 다치 게 하지 않기 위해……
“같잖은 변명은 집어치워. 우리는 우애를 다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적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왔지. 대련이라도 봐 주지 마. 어설픈 놈부터 죽는다. 잊 지 마라.”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파티의 변경을 알리는 시스템 메 시지가 표시됐다.
암케나가 제안을 수락했다.
이로써 파티 구성원 변경을 위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아론(★★,이 ‘1 파티’에서 제외 됩니다!] [‘네리사(★★)’가 ‘1 파티’에 합류 합니다!] [‘벨키스트(★★)• 가 ’1파티’에 합 류합니다!]무거운 침묵이 훈련소에 감돌았 다.
망설이던 제나가 나의 옷깃을 붙
잡았다.
“오빠,저는……
“그만.”
나는 제나의 손길을 뿌리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
다. 나도 심적으로는 다른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 이다. 동료애라는 감정만으로는 임 무를 성공시킬 수 없다.
쳐내는 게 정답이다.
아론은 15층부터 슬럼프에 빠졌
다. 더 이상 끌고 다니는 것은 아론 은 물론이고 1파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우려가 있었다.
익숙해져야 한다.
죽든,혹은 탈락하든.
같이 있던 누군가 없어진다는 일 에.
나는 말했다.
“오늘은 다들 돌아가라. 시간이 많 이 늦었군.”
선뜻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으나, 몇 분 뒤 2파티의 에디스부터 차례 로 훈련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셔가 벨키스트를 적의 어린 눈 빛으로 쳐다보고는 사라졌다. 이어 서 제나와 이올카가 훈련소를 나갔 다. 제나는 대련장 위의 아론을 몇
번이나 뒤돌아봤다.
대부분의 멤버가 사라졌다. 훈련소에 남은 것은 나와 벨키스
트,어느새 되돌아온 네리사, 그리 고 대련장 안에 홀로 서 있는 아론 이었다.
“이걸로 결정된 것이오?”
“그래, 너와 네리사는 앞으로 1파
티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렇군.”
벨키스트는 철책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 이었다.
“조금 아쉽구려. 처음에 봐주지만 않았어도 재밌게 될 뻔했건만.”
“동감이다.”
아론은 벨키스트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줬다.
아론이 이기기 위해서는 벨키스트 가 적응하지 못한 초반에 몰아쳐서 끝장을 내야 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테니까. 아론 자신의 실책 이었다.
“제 생각이 맞았군요.”
나는 시선을 돌렸다.
훈련소 구석에서 네리사가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불만입니다만, 어 쩔 수 없죠.”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건지.”
벨키스트가 중얼거렸다.
“저분은 제가 봤을 때 준비가 덜
된 것 같았으니까요. 현명하신 판단 입니다.”
네리사는 내게 허리를 깊이 숙였 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파티에 들어왔다지만 너희는 아
직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알고 있겠지. 내일 새벽에 훈련소에 집합 해라.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마.”
”알았소.”
“지도 부탁드립니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군. 뭐하러 1파티에 들어오려고 아 득바득 기를 쓰는지 원. 1파티에 들 어오면 팔자가 필 것 같나? 그 반대 야. 우리는 2파티보다 훨씬 위험하 다.”
“알고 있으니까 온 거요. 강해지기 위해.”
벨키스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 다.
오늘은 둘 다 피곤하겠군. 그만
들어가라.”
벨키스트는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훈련소를 나갔다.
네리사가 남았다. 그녀는 내게 허 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리사 이요르라고 합니다.”
네리사는 인사를 마치고는 훈련소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쨌든 훈련소의 모든 멤버가 자 리를 비웠다.
나와 대련장에 있는 아론이 남았 다. 나는 대련장의 철문을 열었다.
“일단 나와. 거기 죽치고 있는다고
바뀌는 건 없어.”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가지.”
나는 대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벨키스트가 흘린 핏자국이 흐릿해
지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아 있는 아론의 옆에 엉덩이를 걸쳤다. 아론 이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졌군요.”
“맞아,너는 졌다.”
“제가 약해서 졌습니다. 그뿐이겠
죠
아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 다.
나는 물었다.
“왜 급소를 노리지 않았지?”
아론이 나를 올려다봤다. “처음에는 네가 유리 했다. 왜 벨키
스트에게 시간을 준 거냐. 네가 충 분히 이길 수 있었어.”
“동료를 죽이면 안 되지 않습니 까.”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냐?”
설사 아론이 벨키스트를 죽였어도
나는 무마해줄 생각이었다.
이셀의 힘을 빌려 영웅 살인이 아
닌 돌연사 판정을 얻어낼 자신이 있 었다. 내가 갈기늑대에 게 그렇게 했
듯이. 하지만 아론은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도중에 다시 급소를 노렸다고 해 도,결과적으로 그것은 패배로 이어 졌다.
“너를 그렇게 약하게 키우진 않은 것 같은데.”
아론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생각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형님도 알다시피 저는 재능이 없지 않습니까.
“……..”
“지금은 제가 이길 수 있었을지 모 릅니다. 실제로 그럴 자신도 있었습
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저 사내가 힘을 더 키워서 돌아오면…
아론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죽일 자격이 있겠습니까? 저보다 더 빛나는 자를……
“……”
“벨키스트와 네리사 양을 보면서, 제가 해오던 것들이 의미 없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을 들 여도,아무리 노력을 해도…… 재능 의 차이 앞에서는…
“그게 봐준 이유냐.”
“마스터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되니까요. 저들은 중요한 전력 아닙 니까.”
아론은 고개를 숙였다.
“형님과 제나 양에게 보이는 것들 이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창을 휘둘러도 눈앞의 안개가 가시 지 않더군요. 몇 번이고 제자리걸음 을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스스로 무너졌나.’
아론이 이상해진 것은 15층에서 돌아온 다음이었다.
그때부터 훈련의 강도가 상상 이 상으로 격해졌다. 하지만 대련을 해
보면 훈련량과 무색하게 전보다 약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감이 사 라진 것이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될까요. 1파티 에는 못 들어가겠지요.”
“당분간은 못 온다. 네가 더 강해 지면 모르겠다만.”
확률은 높지 않다.
아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녀석
에 게 전투는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 부터 그랬다. 여동생을 위해 억지로 이러고 있을 뿐이었다.
“교관이라는 자리가 있다. 1층의 훈련소에서 신입들을 가르치는 역
할이지. 너와 어울린다고 보는데. 디카와도 그렇고.”
1층에 내려간 디카는 곧 올려보낼 것이다.
그 녀석은 심약하지만 성실하다. 아론과 비슷한 노력파라 기술도 충 실하다. 교관을 맡긴다면 금방 제 역할을 해줄 터였다.
”1파티에서 구르는 것보다는 편 해. 죽을 걱정도 피를 흘릴 걱정도 없지. 훈련량도 줄어들어. 안전한 곳에서 신입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돼.”
“가르치는 역입니까.”
“원래는 경쟁률이 엄청나. 수십 대 일이 되기도 하거든. 너희 둘에게는 특별히 추천해주마. 어떻게 생각하 냐?”
아론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만했으면 수고했다. 편히 쉬어 라. 너는 내가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저는……
“대체 뭘 망설이냐. 네 목적이 뭐 지? 벨키스트처럼 강해지는 거? 아 니잖아. 가족한테 무사히 돌아가는 거 아니었나?”
1파티는 아론에게 무덤이 될 가능 성이 높다.
2파티도 마찬가지였다. 10층과 15층에서 사망률이 낮았다지만,이 후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올 카와 제나는 물론 나조차도 죽을 가 능성이 없지 않았다. 이것은 아론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입을 열려 고 했다가 도로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
“그러냐.”
“죄송합니다. 교관으로 들어가겠 습니다.”
“교관은 관둬라.”
“예?”
“하기 싫으면 때려쳐야지. 별수 있 나.”
아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녀석 중에 너와 비슷한
놈이 있지. 그놈도 아주 오질라게 재능이 없거든. 네 레벨 때 창술이 고작 2였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몇 번이고 갖다 버리려 했다.”
아론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 다.
당연히 이해 못 할 것이다. 마스터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강해지고 싶나, 아론?”
“대답을 보면 아닌가 본데.” “아닙니다,형님!”
아론이 무릎을 꿇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저는, 저는 강해지고 싶습니다!
이런 비참한 생각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게 방법이……!”
“방법은 있어. 기다려라. 저 문이 열릴 때까지.”
훈련소의 열린 문 너머,굳게 닫힌 차원의 틈이 보였다.
나는 그 대문을 가리켰다.
“니플헤임에 데려가 주마.” “그곳이 어딥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아주 좋은 장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