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81
80. 교차하는
* * *
할기온의 저항이 꽤 거세긴 했다.
왜 이딴 것들을 위해 힘을 써야 하느냐며 아득바득 우겨댔으니까.
그러나 나의 진심 어린 설득이 사흘째 이어지자, 놈도 항복하고 말았다. 정성에 하늘이 닿았는지, 기쁜 얼굴로 흔쾌히 수락해 준 것이다.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한 훈련으로는 절대 그 녀석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재능이나 노력 여하를 떠나, 니플헤임의 1파티 멤버들은 우리가 이곳에 떨어지기 훨씬 전부터 자신을 갈고 닦아왔다. 쌓아온 시간과 경험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평범하지 않은 방법을 써야만 했다.
운 좋게도 대항할 만한 카드는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엘 시드가 남긴 특급 보물인 역천의 서와 내 실력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인 심상 세계 내의 훈련. 이 두 가지를 이용한다면 최소한 한 번은 기회를 잡을 수 있겠지.
“다들 준비는?”
나는 입을 열었다.
제나와 벨키스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근처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주위로는 적갈색 벌판이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있었다. 황량한 풍경이었다.
“이곳이…… 심상 세계인가. 현실과 구분하기 어렵군.”
벨키스트가 인상을 구겼다.
“편하게 생각해라. 현실과 똑같아. 죽어도 되살아나는 것만 빼면.”
“제 실제 몸은 대기실에 있는 거 맞죠? 맘 놓고 싸워도 괜찮겠네요!”
칠흑색 갑옷을 걸친 사내가 중얼거렸다.
특유의 음침한 표정. 할기온의 인간형 모습이었다.
“뭐라고 했지?”
할기온이 손사래를 쳤다.
다시 한번 설득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제나가 그를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밖에선 영락없는 비둘기였는데, 이런 모습이었군요.”
“이 아저씨는 화를 잘 내네요.”
“겉으로만 틱틱대는 거야. 네가 두 명도 좀 도와줘라. 같이 싸우면 좋잖아. 효율도 잘 나오고.”
나는 등에 멘 가방을 내려놓았다.
입구를 열자 안에서 형형색색의 돌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각인석. 이셀이 역천의 서에서 추출한 것들이었다. 엘 시드의 각인을 비롯하여 몇몇 핵심 각인들은 빼내지 못했으나, 이것들도 S급 못지않은 보물이었다.
“6성으로 승급하면 사용 가능한 각인 슬롯은 3개. 자유롭게 시험하면서 최고의 조합을 찾아야 한다. 필요 여하에 따라 합성도 가능해. 강화할 수도 있고.”
각인석은 넘치도록 많다.
그야말로 서버 전체를 털어 온 수준.
노다지도 이런 노다지가 없었다.
‘기본 베이스는 정해져 있지만, 레퍼토리가 풍부해지겠군.’
나와 벨키스트에게는 각각 흑룡혈과 백룡혈이 있다.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해 나가야겠지. 반면 제나는 상위급 존재와의 싸움에서 충분히 먹힐 만한 힘을 새로 얻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옆을 보았다.
벨키스트의 오른쪽에 로브를 걸친 무심한 인상의 여자가 서 있었다.
2m 가까운 키에 길디긴 순백의 머리칼. 머리 양옆에 뿔이 돋아나 있고, 피부 곳곳이 새하얀 비늘로 뒤덮여 있다.
델타리 아시니스.
할기온과 똑같은 4대 가문의 시조이자, 벨키스트에게 깃들어 있는 또 다른 고대종이었다.
“이거 실례하오. 멋대로 튀어나와서.”
벨키스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시니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두 놈이라면, 남은 고대종들을 말하는 건가?
아시니스는 차가운 눈길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두 명은 시선을 마주치더니,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전혀 새어나오지 않았다. 무음으로 대화를 하는 듯했다.
“엄청 복잡한 이야기를 하네요.”
제나가 나를 보며 속닥거렸다.
“신경 쓰지 마.”
우리는 할 일만 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골칫덩어리가 하나 더 있었지.
프라이오스 알 라그나. 프리아시스의 오빠이자 제국의 제 1황위 계승권자.
타오니어 시나리오의 최종 보스로 추정되는 몬스터였다.
‘더럽게 세긴 하겠네.’
추정 레벨은 최소 300 이상.
S급 난이도답게 보스 수준도 장난이 아니다.
토론이 끝난 듯했다.
할기온은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포효했다.
할기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살기 어린 눈으로 벨키스트와 제나를 응시했다.
제나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투덜거리는 것보단 낫네.’
선생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저들의 강함은 직접 겪어봐서 알고 있다.
우리 훈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들었냐? 사정 안 봐준단다.”
나는 두 명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진짜 안 봐주니까, 각오 단단히 해둬. 너희들이 동의한 거야. 이젠 못 도망친다.”
“잘 부탁합니다!”
“바라던 바요.”
의지는 충분한 것 같다.
‘집중하자.’
성장이 꼬이지 않도록.
내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각인을 잘못 섞어버리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목표는 단순한 랭커 수준을 넘어서서, 6성 영웅의 정점에 다다르는 것. 시리스와 싸우려면 그것조차 뛰어넘어야겠지. 갈 길이 태산이었다.
스릉.
나는 비프로스트를 빼 들었다.
먼저 각자의 강함을 점검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현 상황을 파악해야만 기초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
두 명은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망설이지 않고 가진 무기를 꺼냈다.
‘이것이 마지막.’
앞으로는 훈련의 기회가 얼마 없다.
최종 임무를 끝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려나가게 될 것이다.
그 끝에서, 나는 결정한다.
오로지 나의 판단으로.
그걸 위한 훈련이었다.
지옥과도 같았던 이 여행을, 적어도 내 손으로 끝내고 싶으니까.
“일단…….”
나는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둘 다 덤벼.”
파직! 파지직!
검붉은 번개가 전신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 * *
“제정신인가, 시리스?”
리디기온이 싸늘하게 말했다.
“아무 설명도 드리지 않고 마스터를 유폐하는 것까지 나는 참았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벤다고 했어. 끝까지 남는다면.”
“죽고 싶나?”
스릉.
리디기온의 칼집에서 검날이 반쯤 뽑혀 나왔다.
시리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제 이리도 추해졌나? 네가 정녕 마스터를 믿었다면, 모든 걸 알리고 마스터께 판단을 맡겨야 했다. 그런데 이따위로 나와? 13층의 규칙이 아니었다면 진즉 생사를 갈랐을 거다.”
“이건 내가 내린 결정이다. 니플헤임의 서브 마스터로서.”
“마스터를 위해 말인가?”
시리스가 머리를 끄덕였다.
쾅!
리디기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난 여기서 빠진다. 너희 멋대로 해.”
철컥.
그는 칼집을 든 채 거친 발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슴다.”
“한두 번 저래? 쟤 성격이 원래 딱딱하잖냐. 따개비처럼.”
“이럼 난감하지 않슴까? 따라가 설득해보겠슴다.”
“지금 당장은 안 될 겁니다.”
유르넷이 부채를 펼쳤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죠. 그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줄 겁니다.”
“무슨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슴다.”
“나도 딱히.”
뮤덴이 뺨을 긁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나. 마스터가 어련히 잘할 텐데. 이렇게 억지로 압박…….”
쿵!
“에라, 약한 게 죄지.”
“마스터가 1서버에 가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그게 우리의 사명이야. 이미 한번 설명했지만…….”
시리스는 말을 이었다.
“그곳에 가면 다신 돌아올 수 없어. 영원히.”
“……다시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아.”
유르넷은 고개를 숙였다.
“리디기온은 내가 설득하지.”
시리스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있던 레바테인을 집어 들고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뒤이어 길고 긴 복도가 이어졌다. 니플헤임 13층, 그 가운데의 성. 니플헤임의 마스터인 로키만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다.
‘바라지 않는다.’
용서받을 거라고는.
길고 긴 방랑의 끝.
끝내 그녀는 뫼비우스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멸망한 원인.
되돌릴 수 없는 이유.
일억 세계를 동시에 침식한 ‘파편’과 ‘오염’의 정체.
이 장소가 억지로나마 존재하는 이유까지도.
복도를 빠져나오자 넓은 홀이 나타났다.
화려한 홀의 풍경 너머로 장막이 엿보였다.
그 뒤에는 흑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옥좌가 자리 잡고 있다.
‘허상.’
물거품.
전부 가짜였다.
의미 없는 짓이다.
저건 쓰레기만도 못한 물건이 되었다.
바로 옆, 화염과 함께 이셀이 나타났다.
아주 예전부터 니플헤임을 관리해오던 요정이자, 그녀와 함께 오랜 세월을 방랑해온 동반자였다.
[얼굴이 안 좋아. 쉬는 게 좋아 보여.]“아니.”
[…….]이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시리스는 리디기온의 기척을 따라 걸어갔다.
이윽고 그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한 이스라트.”
한 번 더.
“로키.”
마지막으로.
“……마스터.”
* * *
제국의 수도, 바르디아.
그곳에는 수천 년 전, 황제만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 있다.
라그나사르스 궁.
“전하!”
갑옷을 걸친 노기사가 사내 앞에 엎드렸다.
붉은 붕대를 온몸에 칭칭 두른 사내는, 황금의 황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머리에 묶인 붕대 밖으로 깨끗한 금발이 드러났다.
“성도가 함락되었나이다. 이제 무도한 반역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어서 명령을!”
“프리아가 많이 컸군.”
“……전하?”
“내버려 둬라. 슬슬 다음 임무가 시작된다.”
“예?”
“아차. 넌 모르는가.”
노기사는 쿵 소리가 나도록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하오나 전하, 이대로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으신다면……!”
“물러가거라. 생각할 게 있으니.”
“전하가 명하실 때까지, 저는 물러서지 않겠나이다!”
「물러가라고 했다.」
“……예.”
멍한 눈빛의 노기사가 궁을 빠져나가자,
텅 비어버린 어전에 사내는 홀로 남았다.
귓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여온다.
사내는 눈을 감았다.
“시끄럽게 굴지 마. 생각 중이다.”
“진짜 시끄럽네.”
사내가 손을 내젓자, 머리 깊은 곳에서 울려오던 목소리들이 사라졌다.
그는 뒤이어 어전을 둘러보았다. 한때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그를 보좌하던 4대 가문의 가주들도 전부 종적을 감췄다. 남은 건 사내 혼자뿐.
“……재미없군.”
사내는 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빨리 좀 와라. 지루해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