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ad Demon RAW novel - Chapter 313
313화. 자네는 훌륭한 무인이야.
감개무량은 이런 때 쓰는 말인가?
전생의 색마를 그냥 여자를 더럽게 밝히는 놈으로 격하시킨 것은 내 업적이다.
그게 그거 같겠지만 엄연히 다르다.
실제로 저놈이 지금도 색마 짓을 하고 있으면 이 자리에서 권왕, 도왕, 맹주의 합공에 맞아 죽었을 테니까 말이다. 꼴에 진지한 태도로 비무에 임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못난 새끼, 제 운명이 바뀐 줄도 모르고.’
색마와 이군악의 대치가 길어졌기 때문에 내 상념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득 색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군악, 비무에서 네가 날 이길 수는 없다. 생사결이라면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다만. 이것이 내 결론이야. 항복할 기회를 주마.”
이군악이 웃었다.
“고민이 깊은 줄 알았더니 망상에 빠져있었구나.”
색마가 임소백 맹주를 바라봤다.
“……맹주님, 승부를 제대로 내려면 한쪽이 중상을 입습니다. 이번에는 비무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승패의 조건으로 삼는 게 어떻겠습니까?”
임소백이 이군악에게 물었다.
“괜찮겠나?”
이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나가떨어졌던 놈인데 뭐 어렵겠습니까.”
임소백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하자.”
색마가 잔머리를 굴린 모양이다.
새삼 간사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도 색마가 어떻게 이군악을 넓은 비무대 바깥으로 떨어뜨릴 것인지는 예상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내내 도망치던 것은 색마였기 때문이다.
이군악이 색마에게 다가갔다.
“네가 경공을 믿고…….”
이군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색마가 달려들었다. 이군악의 주먹이 색마의 머리통을 부술 것처럼 날아가자, 고개를 젖힌 색마가 이군악의 팔을 쳐냈다. 이어서 두 사람의 권법과 금나수법이 빠르게 맞붙었다. 색마는 주로 이군악의 공격을 흘려내듯이 움직였다. 그때마다 색마의 불결한 손이 이군악의 팔목, 팔뚝, 주먹에 닿았다.
나는 그제야 색마의 의도를 파악했다.
‘빙공 중첩(重疊)이네.’
과연 빙신(氷神) 같은 선택이랄까.
애초에 이군악은 권왕의 호신공을 제대로 익혀서 웬만한 타격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색마는 이군악의 체내에 빙공을 중첩해서 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쉽게 통할까?
이군악의 체술은 수준이 높은 터라, 색마가 끝까지 잡히지 않는다는 가정에서만 통할 전략이었다.
어깨라도 잡히는 날이면 외공과 체술에 의해서 비무대 멀리 날아가는 사람은 색마가 될 가능성이 컸다.
어느 순간, 북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군악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겨우 막은 색마가 비무대 끝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겨우 한 발을 뒤로 빼서 바닥을 찍더니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어서 이군악의 일방적인 폭행이 벌어졌다.
이제껏 양손으로만 싸우던 이군악이 각법(脚法)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발차기를 한번 막을 때마다 색마가 휘청거렸다.
잡기와 각법을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에 색마는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색마는 대부분의 수비를 손으로 했다.
발차기에 맞았다가 땅을 쳐내면서 일어나기도 하고.
무릎 공격도 양손으로 막은 다음에 밀려나고, 주먹도 손으로 막고, 기회가 될 때마다 금나수법으로 이군악의 공격을 흘려냈다. 어느 순간 양팔을 교차해서 이군악의 발차기를 막아낸 색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색마의 표정을 읽자마자 안부를 물었다.
“왜? 팔뚝이 부러질 것 같아?”
“…….”
나는 수비만 펼치다가 피를 토하는 무인은 본 적이 없는데 조만간 색마가 보여줄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바보 놈이 우직하게 강하네.’
하지만 색마도 근성이 있는 놈이라서 서서히 똥을 지렸을 때의 표정으로 돌변하더니 재차 이군악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이군악이 고개를 살짝 절레절레 젓는 것을 목격하고 속으로 아차 싶었다.
‘바보 놈이 방심하나?’
내가 싸웠다면 방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군악은 색마가 주먹을 막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주먹의 위력이 어쩐지 전과 같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봐주겠다고?
이건 아니다.
문득 색마가 공격을 멈춘 채로 물러나더니 정색하는 표정으로 이군악을 바라봤다.
“……이 새끼, 똑바로 안 해?”
이군악이 대답했다.
“몽 공자, 죽고 싶은 게냐?”
잠자코 있던 도왕이 끼어들었다.
“군악아, 쉽게 죽을 놈이 아니다. 아무리 백도의 비무라고는 하지만 네 태도는 옳지 못해. 강호에서 그런 물렁물렁한 생각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중상을 입히든 기절시키든 간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예의다.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하면 부상을 피하는 게 어렵다.”
이군악이 도왕을 쳐다봤다.
“예, 선배님.”
색마가 쌍욕을 입에 담으면서 전진했다.
“이 시건방진 새끼가…….”
두 사람이 다시 맞붙었다. 색마의 손이 보법처럼 빨라진 상태에서 여러 차례의 장력이 이군악의 몸에 적중됐다.
타격감은 별로 없었으니 적중됐다기보다는 빙공이 침투되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랄까.
색마는 보법은 물론이고 장법을 펼칠 때도 속도만큼은 전혀 이군악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이군악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살벌하게 주먹을 휘두르다가 결국에는 왼손으로 색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화들짝 놀란 색마가 왼손을 들어서 이군악의 주먹을 막았다.
퍼억! 소리와 함께 땅바닥을 구르던 색마가 불편한 얼굴로 일어나더니 이군악을 보면서 비웃었다.
“흐흐.”
순간 발끈한 이군악이 재차 달려들었는데, 이번에는 몸집에 흥분한 감정이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근접 거리에서 갑자기 색마가 입에 머금고 있었던 피를 내뿜었다.
푸악!
핏물이 분사 형태로 이군악의 눈을 뒤덮었다.
“앗!”
이어서 얌체 같은 색마의 장력이 이군악의 가슴, 어깨, 배에 묵직하게 꽂히고, 온갖 요혈들을 지법으로 연달아서 찍었다.
타다다닥!
색마도 지독한 면모가 남다른 터라, 이런 와중에 날아오는 주먹을 막지도 않은 채로 계속 지법을 찍었다.
결국에는 이군악의 주먹이 색마의 얼굴까지 도착했다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
누적된 빙공의 중첩 때문에 얼어붙은 모양새였다.
“퉤!”
색마가 입에 담긴 핏물을 바닥에 뱉더니 왼발로 이군악의 옆구리를 찼다.
퍽― 소리와 함께 이군악이 비무대 바깥으로 날아가자…….
색마도 비명을 내질렀다.
“아으…….”
색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드러눕더니 자신의 발을 매만졌다. 분명히 내공을 주입해서 찼을 텐데도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임소백과 도왕이 고개를 돌리더니 서로를 바라봤다.
“황당하군.”
“그러게 말이오.”
색마가 쩔뚝거리다가 일어나서 임소백에게 물었다.
“맹주님, 제가 이겼죠?”
임소백이 아무 말 없이 쳐다보자, 색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이군악이 분노한 표정으로 뒤에 서 있었던 상태. 그사이에 회복해서 다가온 상태였다.
사실 비무가 아니라면 싸움은 지금부터가 진짜였을 터였다.
색마가 화들짝 놀라면서 물러났다.
“깜짝이야. 뭐야? 무슨 일이야? 비무 끝났어.”
이군악이 황당한 표정으로 임소백을 바라봤다.
“으음.”
임소백이 말했다.
“군악아, 방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았을 테니 됐다. 약조는 약조다.”
“그렇습니까?”
“바로 쫓아가서 비수라도 내질렀으면 막을 시간이 있었겠나?”
이군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임소백을 바라봤다.
“그렇군요. 맹주님. 제가 졌습니다. 비무에서 눈에 피를 내뿜는 수법을 사용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졌는데도 별로 진 것 같지 않은 사내가 화를 애써 억눌렀다. 괜히 전생 바보가 아닌 셈이다.
도왕도 패배한 이군악을 먼저 위로했다.
“군악아, 강호에는 더 비열한 놈들이 많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라.”
“예.”
그 옆에는 못난 승자 놈이 입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어쩐지 이군악에게 또 이기라고 하면 비무대에서 앓아누울 것처럼 보였는데 어쨌든 색마가 이겼다.
아무도 색마에게 칭찬을 해주지 않고 있어서 나 혼자 색마에게 대충 박수를 보냈다.
“이야, 엄청나게 비열했다. 역시 백응지의 몽랑이야. 비열한 승리, 저열한 전략, 꼼수의 대가, 더러운 침 뱉기, 저잣거리 싸움의 전문가인 너의 승리다.”
색마가 나를 쳐다봤다.
“닥쳐라.”
“칭찬인데 왜 지랄이냐. 이겼으면 됐지.”
“이겼지만 기쁘지는 않아.”
“알면 됐다.”
그제야 이군악이 고개를 젖힌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본래도 호랑이 목청이라서 웃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임소백이 말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은 제왕들이 더 도착할 테니. 경험을 더 쌓고 싶으면 제대로 쉬어야 할 게다.”
임소백이 도왕에게 말했다.
“자네도 쉬게나.”
임소백이 먼저 자리를 뜨자, 분위기가 실로 어색했다. 전부 월하관으로 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고개를 돌려보니 귀마는 말 한마디도 없이 비무를 감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가자고.”
나는 귀마와 먼저 월하관으로 향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귀마가 입을 열었다.
“엄청나게 강하네.”
“이군악? 권왕의 제자인데 강해야지.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기에?”
“내 검이 계속 부러지는 상상?”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마가 정확하게 봤다. 권왕은 상대의 병장기를 뺏거나, 부러뜨린 다음에 더 강해진다. 심리적으로도 병장기를 빼앗긴 자들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본래 병장기를 빼앗는 수법도 많이 알고 있다.
비무는 이군악과 색마가 벌였지만, 얻는 것은 관전자들에게도 많았다.
문득 뒤를 쳐다보니 이군악과 색마가 서로에게 비난의 말을 조곤조곤하게 주고받으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애새끼들이라서 딱히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나도 도왕과 한바탕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얌전히 방으로 들어가서 침구에 누웠다.
이번 비무에서는 이상하게도 이군악이 더 얻은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마의 침 뱉기는 다시 통하지 않을 테고, 빙공에 당한 이군악이 전략을 수정하면 색마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꽤 값진 패배였다. 도왕의 말대로 비슷하게 비열한 놈에겐 다시 당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천장을 보면서 상념에 빠져있는데 계단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주님.”
“말씀하시오.”
“맹주님이 잠시 보자고 하십니다.”
“아까 부르시지…… 갑시다.”
* * *
나는 맹원을 따라서 맹주전을 통과했다. 어디서 만나는가 했는데 깊숙이 들어가는 꼴을 보아하니 맹주의 집무실인 듯했다. 맹주전에서 대기 중인 호위들은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아는 척도 안 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맹원이 보고했다.
“하오문주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와라.”
맹원이 문을 열어주면서 나를 쳐다봤다.
“들어가시지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림맹주의 집무실을 구경했다. 상상하던 것보다 크지 않고, 집기도 별로 없었다. 그저 보고하고, 보고받기 좋은 형태의 밀실에 가까웠다.
자연스럽게 벽에 시선이 갔다.
몇 가지 병장기가 진열되어 있어서 맹주에게 물었다.
“전부 선배가 사용합니까?”
임소백이 대답했다.
“그런 것 같나?”
“아닌 것 같군요.”
검뿐만이 아니라 극(戟), 도(刀), 쌍검(雙劍)도 있고 서장에서 흘러들어온 것 같은 특이한 칼날 모양의 곡도(曲刀)도 있었다.
임소백도 병장기를 바라봤다.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주인을 잃은 병장기도 있고, 선배들이 은퇴하면서 두고 간 것도 있지. 전대 맹주들이 사용하다가 흥미를 잃었는지 기증한 것도 있고.”
병장기를 둘러보는 사이에 바깥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맹주님, 부르셨습니까?”
“들어오게.”
입구를 바라보자, 공손월이 등장해서 맹주에게 예를 갖췄다.
“맹주님.”
공손월이 나를 쳐다봤다.
“문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는 답례하면서 대답했다.
“군사, 어서 오시오.”
임소백이 공손월에게 물었다.
“도왕과 문주가 겨뤘는데 알고 있나?”
공손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미 보고를 받아서 기록했습니다. 무승부로…….”
“도왕과 무승부라니 그러면 문주의 서열이 빠르게 올라가지 않겠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한 공손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삭제하게. 비무는 없었던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문주가 원하지 않아. 다른 비무가 있더라도 추가로 기록할 필요 없어. 서열도 의도적으로 천천히 올리도록.”
공손월이 나를 쳐다봤다.
이 새끼 왜 이러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아서 주둥아리를 열었다.
“뭘 쳐다보시오?”
“아, 아닙니다. 맹주님, 더 분부하실 게 있으십니까?”
공손월이 맹주를 쳐다보자, 임소백이 고개를 저었다.
“동호에서 사도제일인 죽인 것도 삭제하고. 문주의 서열이 너무 올라가면 따로 보고하도록. 그렇게 하려면 같이 다니는 자들의 서열도 비슷하게 취급해야겠지.”
“아, 예. 알겠습니다.”
공손월이 나가자, 임소백이 말했다.
“이 정도면 됐나?”
“예.”
일전에 별을 헤아리고 있다가 내가 했던 부탁을 임소백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굳이 여기까지 나를 부르고, 공손 군사까지 불러서 처리한 것은 살짝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도왕과 겨뤄보니 어때?”
“답답하더군요.”
“도왕도 같은 말을 하더군. 자존심이 강한 사내야.”
“그렇겠죠.”
“저녁 먹고 다시 붙기로 했을 때 그 자존심 때문인지 자네의 팔 하나를 날려야겠다고 하더군. 그래야만 이길 수 있겠다고 하더군. 물론 자네가 없는 자리여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겠지.”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임소백이 나를 쳐다봤다.
“……자네의 팔 하나가 날아가면 백도의 큰 손실이라고 대답했지.”
“…….”
어허, 그런데 이 사람이?
사람을 자꾸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무척 큰 손실이긴 하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도왕을 좀 추켜세워줬네. 정말 그렇게라도 할 셈인가? 물었더니 자꾸 한숨만 내쉬더군.”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임소백이 갑자기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더니 탁자에 있는 차를 홀짝거렸다. 뭐가 좀 웃긴 모양인데, 왜 웃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임소백이 말했다.
“자네는 훌륭한 무인이야.”
“갑자기요?”
“변함없는 마음가짐이 자네를 더 강하게 만들겠지. 당분간 여인을 만나는 것은 그른 것 같으니 수련에만 집중하게.”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맹에서 가장 뛰어난 미인이기도 한 공손월을 괜히 불러내서 내 표정을 관찰한 모양이다.
자네는 훌륭한 무인이야, 라는 말이 놀려대는 말로 해석되는 신기한 경험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나는 이 대책 없는 노총각에게 똑같은 말을 되돌려줬다.
“……맹주님도 훌륭한 무인이십니다.”
임소백이 갑자기 찻물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