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61
제160화
강변을 따라서 일정한 간격으로 커다란 무덤 같은 그림자가 늘어서있었다.
막 강을 건넌 네 사람으로부터 삼사 장 떨어진 곳에서도 하나가 보였다. 그것은 자그마한 시체의 산이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시산(屍山)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사인에게 전달해주었다.
하수린은 욕지기가 치밀었다. 진천에게 들어 시체 더미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인들이 그들의 정복한 영토의 백성들이 정맹이나 사벌의 영역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고용으로 만든 시산이었다. 시산 하나의 족히 수백 구의 시체가 쌓여있을 터였다.
가린이 길고 납작한 코를 킁킁거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고량도 이를 악 물며 분노를 참는 기색이었다. 팽하연이 시산으로 다가갔다. 내키지 않았지만 하수린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군요.”
팽하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수린은 그녀의 감상에 십분 공감했다. 온전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시신에 남은 흔적은 그들이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채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들의 시체도 허다했다. 젊은 여인들은 예외 없이 알몸들이었다.
머리가 깨지고 배가 갈라진 시신들이 서로 뒤엉킨 기괴한 더미 위에 구더기들이 우글거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 같았다. 목불인견의 참상을 더 보지 못하고 일행은 시선을 돌렸다. 아미를 찌푸려 이마에 갈매기를 그린 하수린이 팽하연의 말을 되풀이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이심전심의 결의를 다진 사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멀리 보이는 성벽을 향해 달렸다.
마련에 침탈당하기 전 자성을 지배했던 방파는 조가장(曹家莊)이었다.
이백여 년에 걸쳐 중원 전역에 이름을 알린 창술의 대가들을 꾸준히 배출한 덕분에 명문으로 발돋움했던 자성 조가의 터전은 사마류에 속하지 못한 잡마류(雜魔流)의 마인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굴이 되어있었다.
거리에 깔린 마졸들의 눈을 피해 일만 평 넓이의 장원으로 접근한 세평회의 인사들은 미리 짜두었던 계획에 따라 둘로 갈라졌다. 팽하연과 고량, 그리고 하수린과 가린이 각각 짝을 이루었다.
이인일조로 나뉜 사인은 다시 선후로 벌어졌다. 고량을 먼저 조가장으로 들여보낸 팽하연은 담장 위에서 추이를 살폈다. 가린도 전각의 지붕으로 올라가 매의 눈으로 하수린의 동선을 쫓았다.
고량과 하수린은 일종의 응수타진 용 패였다. 그들이 외곽을 두드려 마인들을 자극하면 지켜보던 팽하연과 가린이 차후 전개될 상황에 따라 대응할 참이었다. 만약 감당불가의 적이 나타나면 후방조가 그와 맞서고 그 동안 고량과 하수린은 신속하게 퇴각하기로 했다.
북운상단의 오재승으로부터 얻은 정보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을 우려해 이틀 전 직접 자성을 탐사했던 진천은 팽하연에 필적하는 초절정의 강자가 없음을 확인했지만 그새 변동사항이 있을지 모르니 반드시 돌다리도 두르려보고 건너도록 친인들에게 주지시켰다.
장원의 관목 숲을 빠져나온 하수린은 마당에서 주지육림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마인들에게로 걸어갔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국부만 가린 천 조각만 걸치고서 한 손으로는 술병으로 나발을 불고 다른 손으로는 나신의 여인들을 떡 주무르듯 농락하고 있던 이십여 명의 마인들은 그녀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가슴팍은 물론이고 배까지 털이 수북하게 덮인 사십 대의 장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쳤다.
“네년은 누구냐? 어째서 옷을 입고 있는 게냐? 당장, 헉!”
사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수린이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하수린의 발길질에 하초를 걷어차인 털북숭이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장내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저마다 옆에 있던 병장기를 집어든 마인들이 하수린에게 달려들었다. 하수린은 애초의 작전대로 달아나면서 그들을 가린이 잠복한 곳으로 유인하는 대신 정면으로 격돌했다. 마당 곳곳에 놓인 여인들의 사체를 보고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두부가 으깨진 참혹한 모습들이었다. 전날 오양 천지문에서 장마류의 마인들이 행했다던 만행을 이곳의 잡마들이 답습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하수린과 부딪친 마인들은 곧 그녀가 자신들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가 주먹을 뻗을 때마다 어김없이 단말마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예닐곱 명의 마인을 때려눕힌 하수린은 허리에 걸려 있던 채찍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휘두른 청사편이 도망치던 마인들을 쓸어버렸다. 이 성의 내공밖에 싣지 않았음에도 마인들의 등짝이 걸레짝처럼 찢겨져나갔다.
최초의 공격 후 단 네 호흡 만에 장내를 평정한 하수린은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마인들이 그녀를 포위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수십이었던 수가 금세 수백으로 불어났다. 꼴사납게도 거의 대부분이 나신이었다. 누군가 붉은 선혈을 머금은 파란 채찍을 보고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하남편봉이다!”
그녀의 별호를 들은 마인들은 압도적인 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눈치 빠른 자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수린은 그들이 발을 뺄 생각임을 간파했다.
“천하의 악종들. 나는 세평회의 하수린이다. 하늘을 대신해 네놈들을 지옥으로 보내주마.”
선전포고를 한 하수린이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살수를 자제하라던 진천의 당부를 어길 참이었다. 이런 악귀들에게 인정을 베풀 까닭이 무언가. 그들을 일일이 제압해가며 폐인으로 만드는 수고를 할 바엔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나았다.
하수린의 공력을 주입받은 청사편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발산하며 춤을 추자 마인들의 안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약속이나 한 듯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을 쫓으며 하수린은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허리가 두 동강 난 시체들이 수십 줄기의 피분수를 뿜어냈다.
“한 놈도 놓치지 마, 가린.”
그녀를 지원하러 내려온 가린에게 하수린이 소리쳤다. 뒤늦게 달려온 팽하연과 고량은 하수린이 펼치는 무자비한 살육전에 놀란 듯 했으나 곧 그녀에게 가세했다. 일 각이 지난 후 장내에 서 있는 이들은 세평회의 사인뿐이었다.
검신에 묻은 피를 닦으며 팽하연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검과 하수린의 채찍에 동체가 양단되고 고량의 주먹에 머리가 터져나간 수백 구의 시신들이 마당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온전한 자들은 가린에 의해 팔다리가 꺾인 마인들뿐이었다. 가린은 일행 중 유일하게 진천이 당부했던 살계를 어기지 않은 이였다.
일방적인 승리에 기쁘기는커녕 팽하연은 돌덩이를 얹은 듯 가슴이 무거워졌다. 저기 널브러진 시체들 가운데 구제받았어야 할 마인이 한 명이라도 섞여 있었다면 오늘의 행사는 협행이 아니라 또 다른 만행이 될 터였다.
팽하연은 자책했다. 하수린을 탓할 수는 없었다. 분노에 압도당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평정심을 잃은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잘못이었다.
진천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한 가린 덕분에 숨이 붙어 있는 마인들의 단전을 파괴하며 후속작업을 마무리 한 고량이 우두커니 지켜만 보고 있던 팽하연에게로 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검선.”
팽하연이 마지못해 답례했다.
“금강권도 수고했어요.”
두 사람은 청사편을 갈무리하지 않고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하수린을 바라보았다. 압승을 거둬놓고도 뭐가 못마땅한지 그녀의 이마에 갈매기 두 마리가 떠 있었다.
팽하연과 고량의 시선을 느낀 하수린이 채찍을 허리춤에 수습하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너무 시시하지 않나요?”
그녀의 질문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하수린이 말을 이었다.
“여기의 마졸들은 잔챙이들뿐이에요. 나 혼자 왔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을 거예요.”
과장된 언사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절정 급이 몇 명은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에겐 이런 오합지졸들을 떠맡기고 자기는 검마류와 도마류의 본진을 치러 가다니. 너무 한 거 아닌가요?”
그녀가 비난하는 이가 진천이었기에 고량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이는 우리의 안위를 최우선시 했을 따름이오, 하남편봉.”
“그의 역성을 들을 필요는 없어요. 고 대협도 속으로는 언짢으면서. 그는 우리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까지 했잖아요.”
“…….”
“분명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자성에 경계해야 할 마인들이 서넛 정도 있다고. 그래서 잔뜩 긴장했었는데 이게 뭐예요? 허탈함을 넘어 분노까지 치밀어요. 두 분 다 저하고 같은 심정이리라 믿어요.”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공감하는 부분도 작지 않았기에 고량과 팽하연은 부인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우리에 대한 배려로 치부하고 넘어갈 순 없어요. 그는 우리를 신뢰하지 않았어요. 우리를 믿었다면 이렇게 형편없는 먹잇감을 던져주고…….”
누구에게도 말을 놓는 법이 없는 팽하연이 하수린을 타일렀다.
“회주의 행사에 불만이 있으면 나중에 따지면 돼요. 지금은 홀로 용담호혈로 들어간 그를 마음을 다해 응원해야 할 때에요.”
하수린은 진천에 대한 명칭을 가지고 팽하연과 각을 세울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럴 거예요, 검선. 하지만 우리도 아직 우리의 임무가 끝나지 않았어요.”
“무슨 말인가요?”
잠시 뜸을 들인 하수린이 속을 털어놓았다.
“육백 리를 달려왔는데 고작 피라미들만 잡고 갈 수는 없잖아요. 자성 인근에 문천(文川)이 있어요. 여기서 북쪽으로 백사오십 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아무도 부상을 입지 않았느니 한 시진이면 도달하고도 남을 거리예요. 삼보장으로 귀환하기 전에 그곳의 마인들도 징치했으면 해요. 우리 넷이 합심하면 날이 밝기 전에 끝낼 수 있을 거예요.”
팽하연이 난색을 표했다.
“예정에 없던 일인데…….”
하수린이 고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 대협은 내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고량은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묵묵부답했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그의 동요를 읽어낸 하수린은 설득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문천의 사정도 자성과 비슷하다고 했어요. 장마류가 들어와 있다고 했지만 지난번에 오양에서 고수급들은 상당수가 제거되었으니 여기처럼 떨거지들밖에 없을 게 분명해요. 진 공자가 북운상단에서 얻어 온 정보대로 절정 수위의 마인이 소수 있더라도 우리 넷이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어요. 한 명의 마인이 백 명을 죽인다잖아요. 백 명의 마인을 처단하면 만 명의 목숨을 구하는 셈이에요. 정의를 구현할 힘과 명분이 있는데 망설일 까닭이 없어요.”
그래도 진천을 의식한 고량이 동조를 하지 않고 우물거리자 하수린이 쐐기를 박았다.
“정 두 분이 반대한다면 나와 가린만 가겠어요.”
고량과 팽하연에게서 반응이 나오기 전에 남의 일인 양 듣고만 있던 가린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가린은, 가지 않는다. 가린은, 그의 말을 따른다.”
믿었던 가린의 ‘배신’에 하수린이 발끈했다.
“네가 그의 종이야?”
가린이 튀어나온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분기를 표했다. 고리눈이 뿜어내는 안광도 흉흉해졌다.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던 하수린이 돌연 몸을 돌렸다.
“좋아. 너는 그의 충실한 수하 노릇을 해. 나는 내 길을 갈 테니까.”
말릴 새도 없이 하수린이 신형을 날렸다. 남아있던 삼인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