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Eyes Under Black Feet RAW novel - chapter 45
“릴리.”
그러자, 릴리가 와르륵 그의 가슴팍으로 무너졌다.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그녀는 어깨를 떨며 그 말을 반복했다. 카르낙이 손을 들어 릴리의 등을 도닥였다.
여긴 어디일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니 안락한 막사로 옮겨진 것 같았다. 릴리가 보였고 영 낯선 여자들이 보였고 웬 꼬부랑 노파가 보였고 그리고… 로리아나.
로리아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왕에게 예의를 다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네가 어떻게.”
“근위대장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유랑을 가장하여 폐하를 찾아 리오로 데려오라는.”
“…핀이 너에게?”
“물론 저뿐만은 아니고요. 캘던의 많은 이들에게요. 근위병뿐 아니라 상인과 귀족들도 모두 은밀히 폐하를 찾고 있을 겁니다.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또 저 같은 창기의 유랑단에 합류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도 했다. 그러니 정예병이나 귀족 나부랭이가 엘버그 대륙을 쑤시고 다니는 것은 핀이 만약을 위해 뿌려 둔 미끼에 불과했다. 적의 감시를 분산시킬.
릴리가 카르낙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며 이야기했다.
“오코가 로리아나 일행을 이리로 데려왔어요. 폐하의 군마에게 아주 큰 상을 내리셔야겠어요.”
아직 뺨 위에 눈물이 흥건했다. 카르낙은 손등으로 그것을 부드럽게 훔쳐주었다.
“내가 놈을 살려 준 적이 몇 번인데, 제 밥값을 이제야 한 거지.”
실없는 농담에 설핏 웃음이 났다.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상처가 말끔하게 아물고 바스러졌던 뼈가 붙어 자유롭게 오른손을 움직이는 카르낙을 보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대로 그의 목숨을 잃거나, 적어도 팔 한쪽은 잃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리. 당신은 정말… 마법을 부렸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죠?”
릴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아무 흔적도 없이 나을 수가 있지? 기적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몰라. 기억이 안 나.”
말리는 이가 거의 다 빠진 잇몸을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노인은 어제보다 더 노쇠해 보였다. 카르낙을 치료하는 내내 무언가에 씐 듯하더니 릴리의 생과 카르낙의 목숨을 교환하며 제 삶도 같이 빼앗겨 버렸나 싶을 정도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알고 어떤 것들은 내가 모르지. 그것들은 내가 모르는 것들이었어.”
“것? 것이요?”
로리아나가 되물었다. ‘것’이 무엇일까. 물건? 아니면 힘? 아니면 영혼?
“내가 아는 것은 하얀 늑대에게 물려 살고 싶다면 늑대를 죽이고 그 혀의 살점을 먹여야 한다는 것뿐이야. 그 이후엔 기억이 안 나. 그 고약한 것들이 온통 내 진을 빼놨어.”
“…….”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에 로리아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부나비의 창기들을 위해 그녀를 고용해 함께하고 있지만 말리는 이해할 수 있을 때보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다.
“말리, 혹시 당신도 달거리를 하지 않나요?”
“맞아. 난 달거리를 안 해.”
“…그럼 당신도 다이옌인가요?”
“뭐?”
“다이옌이요. 그라타에선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을 그렇게 불러요.”
“몰라. 그런 거. 그냥 나는 그냥 다른 계집들보다 억세게 재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것뿐이야.”
사람들이 다이옌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할 때도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이젠 그 존재를 믿을 수 있다. 말리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분명. 분명 사람들의 말처럼 다이옌 역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
세상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존재한다. 하얀 늑대가 존재하고, 그 늑대와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마법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왕에게는 힘이 있어.”
말리의 부옇게 흐려진 눈동자가 병상에 누워 있는 카르낙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도 날카로웠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천박하고 고약해. 길들이기가 불가능한 그 힘이 왕의 삶을 지배하고 있어. 당신이 날뛰는 종마 같은 것은 그 이유라우”
“…….”
“당신의 팔은 불로 지졌어. 뼈도. 살도.”
로리아나는 말리와 카르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리의 표정처럼 카르낙도 그다지 놀랍지 않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고 있는 저는 도통 모를 소리에 나오는 말마다 놀랍고 의문스러운데 말이다. 대신 카르낙은 제 어깨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모든 감각은 전보다 더 기민했고 근육은 더욱 단단했으며 움직이는 느낌은 더욱 날렵하고 생생하였다.
“말리는 치료사예요. 그녀가 당신을 살렸어요.”
릴리가 카르낙에게 노인에 대해 설명했다. 어쩐지 반쯤은 맛이 가 보이더라니. 카르낙이 상체를 일으켰다. 릴리가 곁에서 그를 도왔다. 사실 아내의 도움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만 그녀의 손길은 어느 때고 기분이 좋았으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면 고맙단 인사를 해야겠군. 그다지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감사 인사는 안 받아. 감사를 표할 거면 차라리 돈을 줘. 만 겔링쯤.”
말리의 말에 카르낙은 소리 내어 웃었다. 강퍅한 노인네가 욕심도 많군. 그러나 바른말을 하며 속내를 숨기는 이들보다는 나았다. 오히려 대하기 쉽고 편했다.
“값은 리오에 무사히 도착하는 대로 치르도록하지. 늙은이. 그나저나 매짐은 어디 있지?”
아까부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카르낙은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하얀 늑대가 릴리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몸을 던지긴 했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되었더라. 매짐은? 놈은 살아는 있나? 릴리가 대답했다.
“매짐은 말타기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 조랑말과 함께?”
이번엔 로리아나가 답했다.
“아니오. 제 마차를 끄는 종마로 연습 중입니다. 함께 온 부나비의 감시꾼 하나를 붙여 주었지요. 더하여. 그 황순이란 조랑말은 제가 짐을 싣는 데 쓸 계획입니다.”
카르낙이 튼튼한 녀석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완전히 두 다리를 바닥으로 내렸다. 지난밤까지 사지를 헤매던 병자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침착하고 온건한 모습이었다. 이제 그는 완연히 엘버그의 왕다웠다.
“캘던으로부터의 소식은? 혹, 내게 전해 줄 것이 있나?”
“없습니다. 전하. 다만 근위대장께서 리오에서 기다리고 있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핀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면, 놈은 멀쩡히 살아 리오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물어볼 것도 없는 이야기다. 늘 그랬지. 핀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놈이었다.
“내 검은 어디에 있지?”
그러자 로리아나가 탁자 위, 벨벳 천으로 귀하게 감아 놓은 카르낙의 검을 정중히 그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받쳐 드는데도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해 어깨가 떨렸다. 카르낙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볍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폐하께서는 부나비의 감시꾼으로 위장하셔야겠습니다. 왕비 전하께서는 제 몸종으로 위장하실 겁니다. 그래야 제가 두 분을 안전하게 리오로 모실 수 있습니다.”
카르낙이 제 검을 살필 동안 릴리가 그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왕이 쾌차하였으니 모든 짐을 꾸려 서둘러 리오로 떠날 일만이 남았다. 그러려면 이곳을 가능한 빨리 정리해야만 한다.
“폐하께서 드실 음식을 챙겨오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한 요기 후, 이곳을 뜨도록 해도 될는지요?”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좋을 것이 없으니. 릴리가 다시 카르낙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곧 돌아오겠습니다.”
로리아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막 천막을 나가려는데 카르낙이 그녀를 불렀다
“로리아나.”
로리아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네, 폐하.”
“고마워.”
단출한 감사의 인사. 로리아나가 알기로 카르낙 발투만은 그런 것은 할 줄 모르는 사내였다. 왕으로써 마땅히 내뱉어야 할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 담긴 진솔한 감사 따위는. 지금껏 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도 파니릴리처럼 변한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이후에도 발투만 왕가의 핏줄이 대대손손 왕좌에서 왕좌로 이어지길 바라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따르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로리아나는 기꺼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귀하신 분을 보필할 수 있어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폐하.”
“그렇게 하고 계시니 정말로 사내 아이 같으십니다.”
로리아나가 릴리의 차림새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여종으로 분장을 시키려 했지만 더디게 자라난 반삭발의 머리가 마음에 걸렸다. 어쨋든 엘버그의 여자들에게 머리카락은 생명이 아니던가. 무채색의 터번을 씌우고 짧고 단출한 튜닉에 허름한 바지를 입힌 것은 그런 이유였다. 사내의 복장을 하고 나니 릴리는 여인이라기보다 아직 사춘기에도 접어들지 못한 어린 소년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런가요?”
릴리는 그 복장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편안하고 아주 잘 맞았으며 무엇보다 움직이기에 쉬웠다. 그라타에서는 늘 짧은 윗옷에 반바지, 혹은 아랫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여밈 바지를 입었었다. 그래서일까, 이제야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복장으로라면 어디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릴리는 정말로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릴리, 그러다 넘어져.”
카르낙이 오코에 오르며 훈계했으나 릴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자유를 실컷 만끽할 뿐이었다.
“영 분위기기가 다르시네요.”
매짐이 카르낙의 뒤를 따라 자신의 새 말에 오르며 릴리 대신 대꾸했다. 카르낙은 아주 잠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가 이내 릴리를 따랐다.
“원래부터 엘버그의 복식을 별로 안 좋아했어서 말이야. 왕비를 위해서라면 뜯어고쳐야 할 것들이 아주 많지.”
예법도, 복장도, 규율도, 제도도 모두 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확실히 모든 것들을 개혁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릴리가 엘버그에 남기로 한 이상 카르낙은 그것들을 모두 이룰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주 쉽고 빠르게.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왕국을 통일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루빨리 테르조 진영을 장악하지 않으면….
“칼!”
릴리가 펄쩍 뛰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르낙이 오코의 고삐를 바짝 쥐며 은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흥분으로 발갛게 물든 볼을 한 채 외쳤다.
“저 좀 태워 주세요! 저도 같이 타고 갈래요!”
“오코에 말이야?”
“네!”
카르낙은 로리아나의 안락하고 화려한 마차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로리아나와 함께 마차에 올라야 했다. 엘버그의 정숙한 귀부인들이 그러하듯이 릴리 역시 안전하고 편안한 마차로 목적지까지 모셔져야 맞았다.
하지만 엘버그의 전통 따위. 이제 막 아기 새가 날갯짓하듯 펄쩍거리며 뛰어다니는 파니릴리의 앞에서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좋아.”
무엇이든 릴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카르낙은 자신이 오코에서 내려 그녀를 올리고 뒤를 이어 자신도 오를 작정이었다. 그러나 릴리는 그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그의 소매 깃을 잡고 말등자 위 카르낙의 발등을 밟았다. 그대로 카르낙을 붙잡고 저 혼자 오를 작정이었다.
카르낙은 당황하여 얼른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릴리!”
한차례 고함을 치며 간신히 균형을 잡자, 벌써 그녀가 저의 등 뒤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릴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됐어요. 이제.”
등 뒤에 아내의 말캉한 가슴이 바짝 닿았다. 느낌이 아주 이상했다. 한 번도 릴리를 제 등에 매달고 달린 적이 없는데. 늘 지니고 다니는 목걸이처럼 제 가슴팍에 담아 두어야 마음이 놓였었다. 그런데 릴리는 마음대로 그의 등 뒤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떨어지면? 제 허리를 감은 손이 풀려서 꼬꾸라지면? 혹시라도 달리다가 전력 질주라도 하게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