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2)
제 88화
28화. 시론을 만나다(3)
프스스…….
정적 속에서 방금까지 문이었던 가루들이 조용히 휘날리고 있었다.
‘몇 번 들어 본 적 있다. 아버지의 검기는 대상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가루라는 흔적이 남으니 완전한 소멸이라고 볼 순 없겠으나. 방금 시론이 보여 준 검기는 분명 초월적인 무예였다.
심지어 그의 손엔 검이 쥐어져 있지도 않았다. 대신 손끝에 오러의 빛이 남아 있어, 일시적으로 오러 소드를 형성했다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문이 사라진 건 겉으로 보기엔 살벌한 위협이었으나.
진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검의 끝에 가까운 것을 보여 주셨어.’
시론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진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번엔 진으로서도 아버지가 대체 왜 저런 표정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음… 그나저나 설마 첫 인사를 잘못 골랐나? 일단 당장 내 목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긴 한데.’
그 와중 시론은, 꽤나 묘한 감정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는 이후 5분쯤 아무 말이 없었는데, 진으로서는 목구멍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자식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처음 들어 본 것 같군.’
정말로 그랬다.
무려 열셋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지만, 사실 시론은 명칭만 아버지일 뿐, 자식들과 단 한 번도 교감이나 유대를 쌓은 적이 없었다.
룬칸델에서 육아는 온전히 유모들의 몫이고.
아이들은 한 살이 되자마자 ‘선택 의식’을 끝낸 뒤 미텔 왕국의 폭풍성으로 가서 유년기를 보낸다.
이후 열 살이 되어 검의 정원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아이들은 모두 시론과 로사를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폭풍성에서 지내며 이런저런 수업과 교양을 진행한 동안 깨닫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넘어서 이 거대한 가문의 절대적인 지배자라는 사실을. 심지어 그들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이며,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혈육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쳐낸다는 사실을.
당연하게도 시론과 로사 역시 이러한 환경에서, 자식들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듣는 일 따윈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식들 중 누가 차기 가주가 될 것인가, 누가 시론의 위명을 이어받아 세계 최강의 검객이 될 것인가…….
그런 것들이 중요할 뿐이었다.
‘……썩 나쁘지 않군.’
감상에 젖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돌아보면 반신의 경지에 오른 후, 그의 마음에 작은 소요라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막내아들의 몫이었다.
‘이 아비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건 가상하나, 이걸로는 한참 부족하지. 그래, 뭘 가져왔는지 들어 보자꾸나.’
희미하게 올라가는 시론의 입꼬리.
“보고 싶어서 왔다라…… 바깥 물을 먹더니 미적지근한 가족애라도 생긴 것이냐. 내가 네게 기대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만.”
분명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진이 그렇게 확신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더 거짓말을 이어 가기로 했다.
“바깥 물을 먹어 생긴 게 아니라, 전 원래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시론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고 대신 살기를 드러냈다. 서재 안의 공기가 칼처럼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에 송곳이 박히는 느낌. 진이 이를 악물며 시론과 눈을 마주쳤다.
“시답잖은 이야긴 치우고, 가문으로 돌아온 이유를 말해라. 대답 여하에 따라 너와 네 누이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건 진심이었다.
시론은 진이 ‘별 볼 일 없는’ 이야길 하는 순간, 정말로 그의 목을 칠 의향이 있었다. 그러곤 금방 가슴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가주가 되기 전, 다른 형제와 동료들을 베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회 때 아버지께 모욕을 당했던 지플의 부가주, 안드레이 지플이 사망했습니다.”
“뭐라? 설마 네가 죽였단 말이냐?”
“아닙니다, 며칠 전 루나 누님이 베었습니다. 루나 누님을 부른 것은 저고요. 제가 예비 기수가 되어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한데 묶어 말씀을 올리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발칙하군…… 예비 기수가 루나에게 도움까지 받았단 말이지. 일단 계속 말해 보아라.”
시론이 흥미로운 듯 턱수염을 쓰다듬었고, 한동안 진은 아킨과 티칸, 비먼트를 오가며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물론 모든 걸 소상히 고하진 않았다. 거미손 알루가 룬칸델에 끈이 있는 것 같다는 의혹이나 뮬타의 룬, 첸미의 마법서, 칠색조와 동맹을 맺은 일에 대한 내용은 전하지 않았다.
“단기간에 꽤 많은 일을 겪었군. 그래서, 안드레이 지플을 죽인 것을 내게 알리기 위해 찾아왔다는 뜻이냐? 그놈은 지플의 2인자였던 만큼, 균형에 변화가 생기리라 기대하고 말이다.”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아버지. 그리고 제가 직접 만나 본 바, 안드레이는 진짜 2인자가 아닐 것 같더군요.”
시론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고작 그 정도 인물이 룬칸델을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의 부가주일 리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감일 뿐이지만요.”
“정확히 짚었군. 네 말대로 놈은 부가주일 뿐, 2인자라고 할 수는 없다. 켈리악 다음가는 진짜 권력자는 따로 있지. 아직 네게 알려 줄 만한 정보는 아니지만 말이다.”
“제 직감을 확인시켜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버지, 제가 진짜 알려 드리고 싶었던 것은. 안드레이가 사용하던 기묘한 아티팩트의 존재였습니다.”
“아티팩트?”
“예, ‘마신석’이라 이름 붙인 아티팩트였습니다.”
이어서 진이 마신석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근원석’이라는 신들의 물건을 모방한 것이며, 계약자를 집어삼킬수록 강해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론은 꽤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근원석의 모조품이라…… 사실이란 말이냐? 네가 그 아티팩트를 보자마자 효능을 알았을 리는 없고. 네 수호룡, 무라칸이 알려 준 모양이로구나.”
“예, 제 수호룡이…… 허, 그가 깨어난 것도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진이 흠칫하며 시론을 쳐다보았다.
“그것뿐일까. 네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설마 나를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닐 테지?”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 짐작은 했지만, 무라칸의 존재까지 훤히 보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크하하!”
돌연 시론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실은 아까부터 막내가 기특해 웃고 싶었지만, 무라칸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말대로 무라칸이 깨어난 건 방금 그냥 넘겨짚은 것이다! 그런데 알아서 술술 부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나비 룬칸델? 크크큭…… 위대한 흑룡이 한낱 집고양이로 전락했었군!”
진은 민망해서 시론과 함께 웃을 수 없었다.
홀랑 발가벗겨진 기분에 귓불까지 뜨거워졌으나, 시론에게 감히 그만 웃으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진은 뒷머리나 긁적여야만 했다.
‘나비 룬칸델이 그렇게 웃기신 걸까? 어쨌거나 좋은 흐름인…….’
뚝.
갑자기 시론이 웃음기를 지우자 진이 자세를 고쳤다. 방금까지의 유쾌함은 온데간데없이 또다시 바위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근원석의 모조품이라. 꽤 굵직한 건을 물어 온 것은 사실이구나. 그걸 직접 깨뜨린 루나와도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시론은 이미 근원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흑해의 왕들도 이 일을 알고 있을지 궁금하군. 다시 흑해로 가 봐야겠어. 확실히 그 힘은 위험하지…… 지플이 어디까지 구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신의 경지에 오른 후 시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 흑해.
시론은 그곳에서 몇 번쯤 흑해의 왕들과 겨룬 적이 있었는데, 흑해의 왕들은 하나하나가 근원석의 ‘조각’들이었다.
“법도를 한 번 어긴 것은 사해주겠다. 그러나 네놈이라면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테지. 서신으로 알려도 될 것을 굳이 찾아와서 말한 걸 보니 말이다.”
진이 목례하자 시론이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것을 하나 말해 보아라.”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었다. 진이 거래를 제안하기도 전에, 시론이 먼저 보상을 제시한 셈이니까.
하지만 진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순순히 뭔가를 내어 줄 분이 아니다. 분명 내가 요구 사항을 말하면 조건을 붙이시겠지……!’
잘 생각해야 했다.
너무 큰 걸 요구하면 그만큼 조건이 까다로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날 수도 없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건 바로 시론이니 말이다.
“당분간 다른 룬칸델이 자유 도시 티칸에 출입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티칸?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시론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오호라, 막내 녀석. 벌써 제 본거지를 만든 모양이지? 자유 도시 티칸이라…….’
티칸은 자유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룬칸델이나 지플, 비먼트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땅이다.
동시에 세 세력이 동시에 노리고 있는 땅이기도 했다. 군사력이 강대하거나 자원이 많은 건 아니지만, 티칸을 얻으면 칠색조의 정보력과 무역 거점을 한 번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계륵이었다.
티칸을 노리는 다른 세력과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얻을 땅은 아니지만, 가만히 내버려두기엔 아까운.
‘막내가 그곳에 거점을 두고 있다면, 차후 티칸이 룬칸델의 세력이 될 가능성이 올라간다. 이 핏덩이 녀석이 벌써 티칸의 실세인 카시미르를 홀렸을 리는 없고…… 어디 한번 지켜봐 볼까.’
시론이 기특한 마음을 감추며 뒷말을 이었다.
“내가 내린 시험을 하나 통과한다면 허락해주마.”
“예, 아버지. 어떤 시험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귀검 카시미르. 그를 너의 사람으로 만들고 내게 증명해라. 성공한다면 네가 허락하지 않은 룬칸델은 아무도 티칸 땅을 밟을 수 없을 것이다.”
한 차례 제 귀를 의심한 진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카시미르는 이미 진의 사람이었다.
“예, 아버지. 안 그래도 그와 친분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티칸은 그냥 두기 아까운 곳이니까요.”
지금껏 다른 예비 기수들은 본인의 명성을 쌓는 일에만 신경 썼건만.
시론은 벌써 가문의 세력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진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기한은 1년이다. 룬칸델 초급 생도들의 선생 자리도 몇 번이나 마다했던 그 건방진 녀석을…… 과연 막내 네가 홀릴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금방 아버지 앞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이만 물러가 보아라.”
꾸벅, 인사를 하고 서재를 나서자마자 하마터면 콧노래를 부를 뻔했다.
‘전생엔 하는 일마다 지독히 안 풀렸는데, 이번 생은 하나같이 쉽게 가는 기분이군.’
표정을 감추며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두 소년이 후다닥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 막내야! 너 괜찮은 거야……!?”
“아버지께서 살려 준다고 하셨어? 어쩌자고 이런 사건을 벌였어!”
사건이 터진 후, 막내가 죽을까 봐 내내 걱정하고 있던 토나 형제였다. 그들은 다른 형제들이 두려워 감히 바깥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방에서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형들도 가끔은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나 괜찮아. 그나저나 형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