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55
그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프로그램에 대해선 들어보셨죠?”
“그럼요.”
주로 나이대가 꽤 있는 배우들이 해외에서 연극을 기획하는 예능이었다. 배낭 여행을 하면서 연기까지 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이 프로그램의 힐링 포인트이자 재미 포인트였다.
“이번에는 엄지영, 문유화, 윤슬아. 이렇게 세 분이서 여행을 하실 텐데···”
기사로 봐서 알고 있었다. 세 명 모두 40대의 배우들로, 모두 개성있는 연기로 유명한 배우들이었다. 유일 역시 좋아하는 배우들이기도 했고.
“이번에 베를린에 가시잖아요? 저희가 이번에 독일로 가거든요. 딱 영화제 기간 끝날 때쯤 베를린에 가는데~ 혹시 영화제 이후 딱 하루 이틀 정도만 같이 다니실 수 있을지 여쭤보려고요.”
유지혁 피디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돌아오는 비행기 표도 지원해 드립니다!”
장재이 실장은 한유일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래?’라는 질문이 담긴 눈이었다.
유일은 옅게 웃었다. 이미 이렇게 미팅까지 잡았다는 것은 회사 측에서도 검토가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제 은근슬쩍 유일의 의사를 물어보기도 했고.
“···네, 하고 싶습니다.”
연기파인 선배 배우들과 이렇게 만날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랑극단이라는 컨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유일의 답을 들은 유지혁 피디는 능청스럽게 밝은 미소를 띄웠다. 지금 이 장면도 모두 카메라로 찍고 있겠지. 아마 멤버들이 베를린으로 넘어갈 때쯤 자연스러운 편집으로 끼워 넣을 터였다.
【정확합니다, 유일 님.】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실 황이원 배우님은 이후 스케줄이 있어서 고사하셨거든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전하던 유지혁 피디는 출국준비 때문에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가 가자마자 민우진은 유일을 향해 정리해둔 스케줄표를 슬쩍 들이밀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영화제만 참석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중간중간 인터뷰가 양념처럼 껴 있었다.
특히 상영과 폐막식이 있는 날엔 하루 일정이 꽉 차있었다.
‘그나마 중간엔 좀 비어있네.’
영화제에 가서 다른 영화들도 많이 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유일이 처음 생각한 것만큼 여유로운 일정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
.
.
유지혁 피디와의 미팅이 끝나고.
유일은 팬미팅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장재이와 홍보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팅룸에서 한참 집중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유일은 울리는 미톡 알람에 정신을 차렸다.
– 박영현 형 : 덕분에 미팅 잘 끝냈어.
– 형이 잘하신거죠.
– 박영현 형 : 고맙다.
– 박영현 형 : (고개 숙이는 강아지 이모티콘)
애초에 다 본인이 연습을 열심히 한 덕일 텐데.
한유일은 굳이 밥까지 산다는 영현을 말리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유일아, 뭐해?”
유일의 핸드폰 화면을 쓱 본 민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뭐야, 뭐야?! 집 사게?”
“그냥요. 요즘 보고 있어요.”
“자가? 전세?”
“일단은 전세요.”
이모 직장과 가까우면서 적당히 조용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꼼꼼하게 살펴보진 못 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집들이 몇 곳 있긴 했다.
때마침 다시 미팅룸으로 돌아온 장재이 실장이 눈썹을 올린 채 물었다.
“···유일 씨 혹시 집 때문에 그렇게 열일하는 거였어요?”
유일의 표정을 본 장재이 실장은 깔깔 웃었다.
“장난이에요! 그래도 필요하면 말해요.”
장재이는 CF 촬영 요청이 꽤 많이 들어왔다는 말과 함께, 과하게 이미지 소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여유로울 때 찍자며 덧붙였다.
“근데 유일 씨가 여유가 없어서 문제지.참, 이거 말하려고 했는데. 이번에 영화 촬영 끝나면 좀 쉬어요.”
“···어···.”
한유일의 얼굴을 본 장재이 실장이 세모눈을 떴다.
“···표정 보니까 또 차기작 잡으려 했네. 맞죠?”
“그건···”
“대표님 명이에요. 유일 씨 좀 쉬게 하라고. 이제 3학년 들어가는 거 맞죠?”
“···.”
【3단계 달성률 28.4%】
유일은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 달성률 수치에서 눈을 돌렸다.
쉴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이걸 말할 방법이 없네.
“배우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장재이 실장과 함께 들어온 홍보팀 직원은 품에서 종이뭉치 하나를 꺼냈다.
“아, 이건 온라인 팬미팅 대본이에요.”
그가 대본을 보던 유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충 봐도 중편 영화 분량은 될 것 같은 대본이었다.
“꼭 그대로 하진 않아도 되는데, 유일 씨가 팬미팅이 처음이시니까 일단 만들어 봤습니다.”
“···.”
···홍보팀 직원의 웃는 눈이 유달리 지쳐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리고 오튜브랑 샤스타랑 블루챗에서 모두 팬클럽 이름 후보를 공모 받았는데, 한번 볼래요?”
“네···!”
유일은 기대에 가득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유일이 간과한 게 있었다.
바로 그 이름 후보들이 모두 ‘팬들이 정해준’ 것이라는 점이었다.
– 유일아 유일아 뭐하니
– 유일토피아
– 원앤온리
– 하나뿐인 유일
– 내 생애 유일한 사람
.
.
.
‘···아.’
이건··· 저번 깜짝파티 때 혼자 빔프로젝터로 영상을 보던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감사한데 민망하고,좋은데 부끄럽고, 숨고 싶은데 간질간질한···
“유일아, 너 표정이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게다가 팬들이 적어준 거라고 생각하니, 하나같이 특별하고 아까웠다.
“···도저히 못 정하겠어요.”
결국 한유일은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장재이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유일 씨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럼 그냥 회의해서 후보 올릴게요. 나중에 딴 소리하기 없기예요?”
“실장님의 감각을 믿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부담스럽고~!”
미팅룸의 분위기가 한층 온화하게 풀어졌다.
유일은 홍보팀 막내 직원들이 갈려나갔을 대본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와 Q&A, 실시간 질문···. 마지막이 팬클럽 명 정하기네.’
그가 머릿속에 팬미팅의 목차를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던 그때였다.
【유일 님···!】
브윈이 답지 않게 큰 목소리를 냈다.
‘왜?’
【긴급 상황입니다.】
‘···긴급 상황이라고?’
이어진 말에 유일은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현재 유일 님의 집에 외부인이 침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유일은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이모가 퇴근하는 시간인데.’
유일은 튕겨 나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시X.’
갑작스러운 유일의 표정 변화를 본 장재이는 놀란 눈으로 한유일의 얼굴을 살폈다.
“···유일 씨? 괜찮아요?”
“잠깐···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아니, 일단 나가요. 괜찮으니까.”
유일은 미팅룸을 나서며 곧바로 진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넘어갑니다.
‘···아.’
순간 머리의 전원이 꺼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주변 소음이 점차 흐릿해졌다.
유일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차가워진 손을 꾹 쥐었다.
【유일 님. 방금 신고를 받아 유일 님의 집으로 경찰이 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고자는···】
오로지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 탓에, 브윈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
한유일은 울리는 전화에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핸드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진하영 씨 조카 분 맞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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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땜 (2)
“···바로 가겠습니다.”
유일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떻게 답했는지도 모르게 전화가 끊겼다.
어느새 미팅룸에서 달려나온 사람들이 유일을 붙잡았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유일에게 향했다.
“유일 씨, 무슨 일이야?”
말을 해야하는데.
“유일아! 괜찮아?!”
유일은 입을 달싹였다. 분명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정신 없는 와중에 어깨를 붙잡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민우진이었다.
“유일아! 내가 운전할게! 어디갈지 말해!”
한유일은 겨우 목을 쥐어짜 소리를 냈다.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어린 한유일은 생각했다.
사실 이 모든 게 꿈이고, 거실로 향하는 방문을 열면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러나 문을 열 때마다 유일의 기대는 배반당했다.
문고리를 돌리면 텅 빈 거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 속에서조차 유일은 같은 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실에서 그의 앞에 있던 문은, 꿈에서도 똑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유일은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거실이 아닌,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는 어느 남아메리카의 정글이 보였다.
짙은 녹음과 후덥지근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실감나는 꿈이었다. 매번 다시 꿔도 놀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