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 Director Returns from Hell RAW novel - Chapter (92)
#92화
E―40과 미소, 그리고 프롤로그 파트의 메인 몬스터인 ‘무표정’의 모델링이 나온 것은 얼마 뒤였다.
“귀엽다···!”
조아윤이 뺨을 말갛게 태우며 좋아했다.
조아윤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직원에게 호평받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매력이 캐릭터에 존재하고 있었다.
카툰 렌더링을 고른 것에 다시 한번 확신이 차올랐다.
‘이걸로 대중성의 장벽을 완화할 수 있을 거야.’
기본적으로 아이덴티티는 어두운 세계관과 무거운 서사를 채용하는 게임이다.
그런 특성에 실사에 가까운 그래픽까지 채용한다면 장르 자체가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었을 터.
그것을 캐주얼로 해소한 것이다.
적어도 시각적인 요소가 가벼움을 표방한다면 서사의 질척함이 덜 와닿을 테니 말이다.
이는 아이덴티티에서만 할 수 있는 시도였다.
아무렴, 헬릭 시리즈는 도트를 쓰던 1을 제외하곤 폴리곤 뭉치인 헬릭2조차 실사에 가까운 그래픽을 채용했는데, 그런 기조를 뒤늦게 바꿔 봐야 기존 팬층의 반발을 사지 않겠나.
카툰 렌더링을 통한 표현과 다른 형식의 게임 연출 경험은 헬릭에선 얻을 수 없단 말이다.
여하튼,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 말하길.
‘얼개는 잡혔어. 시스템 QA도 순조롭고.’
이제 본격적인 게임 진행을 구현해야 할 때였다.
전과 다른 점은 내가 그 모든 과정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헬릭3를 통해 개발 1팀의 경험이 꽤 쌓였기 때문이다.
이제 내 밑의 직원들도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해 득실을 계산할 수 있을 정도의 일머리가 생긴 상태다.
나는 전체적인 조감과 검수의 역할을 주로 맡을 것이다.
몇 가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개중 하나를 따지자면 그랬다.
“사장님, 1챕터 시나리오는 나왔습니까?”
“아직 작성 중입니다.”
시나리오.
즉, 이번 게임의 줄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굳이 시나리오를 내가 직접 짜는 이유는 하나였다.
세상 그 누구도 이 세계관을 만든 나보다 게임 내적인 표현을 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럼 어떻게 이 세계관을 적절한 서사로 다듬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
중요한 문제였다.
아이덴티티는 대중적이지 않은 세계관을 채용하는 만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세계관에 대한 몰입감이 달라질 테니 말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렇다.
아이덴티티의 설정을 내러티브로 묻어뒀다간 유저들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고, 이 게임은 뭘 하는 게임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낯선 세계관을 이해시키겠다고 스크립트를 꽉꽉 때려 박으면 그 과도한 정보량에 게임에 대한 흥미가 식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스크립트를 보려 하지도 않겠지.
전자인 내러티브 과다와 같은 결론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유저는 소설을 읽으러 온 게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러 온 것이니 말이다.
한 단어로 정리하여 말하면 그렇다.
‘정보량 조절.’
중요한 과제다.
전생 아이덴티티의 방향성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인디적인 표현과 분위기로 설정의 불친절함을 무마했기 때문이다.
이번은 확실히 ‘친절한 설명’을 해야 하고, 그를 위한 방법이 있었다.
‘설정을 제외한 모든 요소를 친숙하게 만드는 거야.’
음식으로 치면 ‘특이한 재료를 넣은 떡볶이’로 설명할 수 있겠다.
낯섦 속에서 익숙함을 느낄 수 있게끔 서사나 전개 방향은 클리셰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얼굴’이 게임 내에서 어떤 개념을 표방하는지 보여주면 유저의 이해도 어렵지 않을 터.
방식 자체의 효용성은 전생에 검증했다.
심화만 하면 된다.
드르륵―
화면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챕터 목차가 눈앞에 드리워졌다.
‘아이덴티티의 서사는 선형 구조야.’
겉보기엔 오픈 월드처럼 보이는 하나의 땅을 이용하지만, 그 속에서 유저가 움직일 방향은 철저히 서사에 의해 통제된다.
즉, 이 목차의 순서가 게임의 진행 순서가 된다.
‘스토리는 E―40이 올토르 제국을 방랑하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 그들과의 교류를 통한 깨달음. 그렇게 찾는 자아를 다뤄.’
그렇다면 게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만을 해야 했다.
어떤 외부적인 신념도 담아선 안 되며, 주제 의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섞어서도 안 됐다.
인간은 생각보다 보수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꾸기까지는 세심한 설득이 필요하다.
예컨대 ‘톤의 유지’.
그림으로 치자면 ‘유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면 생길 결과에 관해서 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또한 예를 들길, ‘재벌 드라마에 끼얹어진 로맨스’가 불러일으키는 불쾌함이 꼭 그것과 같을 테니까.
‘모든 서사가 자아라는 카테고리에 묶여야지. 주인공의 여정도, 만나는 이들의 역경도,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달할 목적지까지.’
그 수단을 ‘얼굴’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친숙하게 만들 것인가.
앞서 말했듯, 얼굴 외의 모든 요소를 친숙한 배경으로 두면 된다.
‘세계관은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주인공은 그런 제국의 고위 장교였던 배반자.’
검증된 맛이지 않나?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운 모든 이들은 알 것이다.
인간에게서 욕망을 지우지 못한다면 전체주의는 성립할 수 없고, 그것이 성립되었다 한들 소속한 개개인은 괴로움에 신음한다는 것을.
세계관에서 ‘얼굴’은 그런 이들의 괴로움을 조명할 것이다.
국가가 강제한 소명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들 말이다.
겉보기에 전체주의의 사상적 결점을 꼬집는 것으로도 보이겠지.
아이덴티티는 그런 방식을 통해 게임을 플레이하고 엔딩을 본 유저가 ‘올토르 제국’이라는 세계를 낯설어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구태여 하나 더, 얻는 얼굴··· 즉 아이템에 ‘캐릭터성’을 덧씌워 그에 관한 서사적 이해도를 높일 수도 있겠지.
그것을 위해 할 일이 있다.
‘첫 단계는···.’
우선 핵심 제작 시스템 중 하나인 ‘채집’.
그를 다룰 ‘햇볕에 찌푸린 얼굴’의 농부.
『C1 : 공허한 수확』
시작은 초원 너머의 밀밭을 그릴 것이다.
* * *
E―40은 드넓은 초원을 넘어 황금빛으로 밀밭에 도착했다.
곳곳엔 투사의 ‘험악한 얼굴’을 그린 허수아비가 우뚝 서 있었고, 밀은 기지개를 켜듯 허리를 쭉 휘어 살랑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제국 신민의 배를 불리는 토양이었다.
E―40은 언젠가 감찰을 위해 이곳에 왔던 것을 떠올리며 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그때였다.
웬 울음소리가 E―40의 귀를 스쳐 지나간 것은.
―흑흑···!
E―40은 의아해 하며 울음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그곳엔 밀짚모자를 쓴 농부가 낫을 바닥에 꽂은 채로 울고 있었다.
그러다 E―40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들곤, “헉!” 소리를 내며 자지러지게 놀랐다.
―으악! 넌 누구야!
소리치던 농부의 몸이 점점 떨렸다.
검은 면사포로 가려진 E―40의 얼굴을 본 까닭이다.
―너, 너는 범죄자구나!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건 떳떳하지 못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 그래! 약탈! 너는 밀을 약탈하러 온 거야!
씩씩거리며 바닥에 꽂아둔 낫을 쥐어 든 농부는 험악했다.
E―40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적이 아님을 말하고자 했다.
그런 순간, 농부는 문득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힘 빠진 기색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아니, 됐어. 약탈당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이봐, 약탈자. 밀을 도둑질하기 전에 내 푸념이나 좀 들어줄래?
E―40은 끝까지 풀리지 않은 오해에 곤란해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곁에 앉았다.
농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다시피 나는 농부야. 위대한 제국이 굶주리지 않게끔 하는 일꾼으로서 ‘햇볕에 찌푸려진 얼굴’을 받았지. 올해로 10년 차야. 나는 이 넓은 밀밭을 홀로 가꿀 정도로 능력 있는 농부다 이 말씀이지!
그는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곤 또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너는 범죄자니까 이런 말을 해도 고자질할 곳이 없겠지? 그래, 사실 나는 이 밀을 수확하는 일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 왜냐하면 나는 농사를 잘할 뿐, 좋아하진 않거든.
E―40은 생각했다.
과거였다면, 이런 불경한 발언을 한 농부를 체포해 얼굴을 사냥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중에도 농부는 계속 말했다.
―어릴 때는 하고 싶은 게 있었어! 그런데 이젠 그게 생각나지 않아! 너무 오래 농사를 지어버렸기 때문이야! 나는 이 밀을 키우고 수확해 제국에 상납하는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게 되겠지! 올해 수확이 끝나도!
쿵쿵, 그가 발을 굴렀다.
그러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곧 징수관이 올 거야! 나는 그놈들 앞에서 수고했다는 말이나 들으며 웃어야 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제국이 내게 이런 얼굴을 씌웠으니까!
그가 얼굴을 벅벅 긁었다.
―아아! 너무 슬퍼! 이제 나는 이 얼굴이 햇볕에 찌푸려진 건지 분노로 일그러진 건지 알 수 없어졌어! 누군가 알려줬으면 해! 이봐, 범죄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얼굴을 벗어던지고 싶어!
E―40은 새삼스레 놀라움을 느꼈다.
그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제국이 수여한 얼굴에 대한 노골적 적의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얼굴 사냥꾼이던 시절, 누구도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여 E―40은 모든 제국의 신민들이 자신처럼 얼굴을 자랑스러워할 줄로만 알았다.
일말의 괴리감은 생각보다 빠르게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하나, 이윽고 가라앉았다.
농부의 말은 E―40이 미소에게 들었던 어떤 이야기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엇으로 너를 지칭하던, 너는 네가 되어야만 해. 우리는 모두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E―40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를 통해서 미소가 했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 가지 더, E―40은 그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 있었다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E―40은 과거에 그런 게 없었고, 지금도 여전했다.
그가 가진 것은 미소의 얼굴뿐이었다.
결심은 그런 이유였다.
E―40은 그를 돕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조금은 알 수 있길 바랐다.
행동이 이어졌다.
스릉!
E―40은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으악!
농부가 비명을 질렀지만 E―40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저 먼 산 너머, 제국이 있는 방향으로 칼끝을 향했다.
농부는 의아해하다, 이내 말했다.
―네가 날 도와주겠다는 거야?
E―40은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없다.
아니, 대부분 사람은 생업을 위해 일을 한다는 걸 생각하면 직업을 사랑하는 건 생각보다 꽤나 어려운 일일 터였다.
오죽하면 취미도 일이 되면 싫어진다는 말이 있을까.
농부라는 캐릭터는 그런 발상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정확히, 정말 부끄러운 속내를 말해, 그 캐릭터의 모티브는 ‘직장에 있던 나’였다.
프로젝트 권한조차 뺏긴 채 ‘게임을 만든다’라는 기계적인 행위에 회의감을 느끼던 순간을 되새기며 지었을 것이다.
이제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지난 생엔 끝까지 그 사실을 외면했다.
여하튼, 그런 것을 둘째치고 이야기의 대략적인 흐름을 짚자면 그렇다.
E―40은 농부를 돕고 그 과정에서 농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그에게 수확과 채집이 가지는 의미와 그가 진정 바랐던 꿈 따위의 이야기를 말이다.
개괄적인 흐름은 정해둔 상태.
하지만 이번 역시 가장 내 발목을 잡는 것은 캐릭터의 모티브를 다시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의 감상을 그대로 다시 가져올 만큼 순간이 선명하지도 않았고, 그걸 넘어 내 아집의 잔재를 이 게임에 또 녹여내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과정은 신중해야 했다.
아이덴티티는 각 캐릭터의 서사가 가지는 비중이 큰 만큼, 매번 그 매력 포인트를 확실히 잡아야만 할 테니.
하여 농부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까를 생각했고, 그것이 이어지는 오늘이었다.
“연호 씨, 오늘은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엄마가 고추장 덜 넣었나?”
양길상이 내게 물었다.
점심시간의 분식집이었다.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또 기획 생각입니까?”
“그쵸,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뒤에 고생하니까요.”
“크으, 장인정신!”
“그렇게까지야.”
답하며 숟갈을 들었다.
양길상은 분식집까지 와서 직접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가 젓가락을 들어 면발을 치는 순간, 눈에 보인 게 있었다.
‘아, 정수리 넓어졌다.’
···그러고 보니 2015년, 양길상의 스킨헤드까지 5년밖에 남지 않았다.
돌연, 머릿속에 강렬한 영감이 내리꽂혔다.
‘···공허한 수확.’
1챕터의 제목.
그걸 떠올리니 뭔가.
“크, 역시 라면엔 고추가 들어가야 한다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연호 씨? 제 머리는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아, 이거요? 요즘 젤을 너무 발랐더니 빠진 것 같아요. 한동안 관리 좀 해야 하나?”
뭔가···.
“···병원은 가보셨습니까?”
“에이, 또 그러신다. 아니라니까. 다시 자랄 거예요.”
···뭔가 꽂힌다.
의미 없는 농사, 그로 인한 허무와 절망, 그리고 자기혐오.
끝끝내 수용하지 못해 자기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할 두 사내의 운명이 그리는 궤적이 내 속 어딘가의 창작욕을 불태웠다.
‘아아···.’
이거다.
이래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뜬금없긴 하지만.
‘···농부.’
양길상은 수확하지 못하는 농부였다.
단언컨대 캐릭터 적으로 그보다 더 농부의 모티브로 어울리는 이는 없을 터였다.
나는 극적으로 돌파구를 찾아냈다.
공허한 수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