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s Top Troll RAW novel - Chapter 408
408화 인턴 (1)
언제나 공부에 매진하며 끝없는 경쟁에 빠져드는 대한민국의 학창 시절.
대학교에 가면 마음껏 놀 수 있다는 장밋빛 환상에 빠져 그 이전까지는 공부에 모든 것을 매진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 원룸이 주변 대학로 중에서는 최고야. 월세는 60. 이거 비싼 거 아니다? 다른 곳 찾아가도 이 정도 수준에 이런 가격은 아예 없어.] [크흠……. 이번 기말 시험은 조별 과제로 대체하도록 하겠네. 주제가 꽤 어려우니 서로 힘을 합쳐서 열심히 해 보도록.] [등록금이 한 학기에 500만 원? 진짜 이 새끼들 미친 거 아니냐? 뭐 이렇게 비싸?]평상시에는 과제와 학점 챙기는 것도 버거워 죽겠는데 미친 듯한 가격을 자랑하는 월세와 대학교 등록금, 거기에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아르바이트가 강제되는 젊고 가난한 대학생들. 그렇기에 대다수는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학교를 힘들게 졸업해도 점점 삭막해지고 비정해지는 사회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요즘 취업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 너 그냥 학점만 적당히 받는 수준으로는 안 돼. 뭔가 다른 놈들과는 다른, 너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니까?”
해외 봉사, 어학 성적, 공모전 입상 실적, 인턴 경력……. 그 이외에도 수많은 이력을 요구하며 인재를 찾아 나서는 기업들과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경쟁자 사이에서 발버둥 치는 취업 준비생들.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고충과 고민이었지만, 사실 재영에게는 지금껏 전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던 문제들이었다.
“인턴십 프로그램이라……. 마감이 딱 오늘까지인데 어떻게 타이밍이 좋게 맞아떨어졌네.”
앞으로의 미래를 고민해 보라는 채연의 추천으로 알게 된 서민 대학교의 산학 협력 제도.
언제나 그렇듯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갔던 학과 게시판에 붙어 있던 홍보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포스터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기업은 바로 당신과 같은 인재를 원한다!]마치 전쟁에 입대할 병력 자원을 구한다는 홍보물을 패러디 한 것 같은 촌티가 팍팍 풍기는 홍보물. 하지만 재영은 간략하게 적혀 있는 지원 사항을 확인하고는 나쁘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3학년도 지원할 수 있고…… 대상 기업들도 생각보다 좋네…….”
최근 몇 년 새에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진 서민 대학교.
가상현실 산업의 인재 육성을 선도하는 대학교로서 수많은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인턴십 프로그램에 적힌 기업들은 대부분 이름만 말해도 어디인지 알 법한 그런 곳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특히 지원 대상이 가상현실 공학과인 재영의 경우에는 그 특전이 어마어마했다.
-가상현실 공학과의 경우 우선 선발 대상.
-가상현실 관련 미래 인재 특채 전형과 연계 적용.
-학기 중에 공부하고 방학 때 일하라! 대학생 신입 사원 프로그램 신설.
안 그래도 최근 재계에 엄청난 화두를 몰고 오며 뜨거운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는 가상현실 산업. 전 세계적으로 관련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향인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회사에 뼈를 묻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열정이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
“이래서…… 우리 과가 입결이 미쳐 버린 거구나……?”
그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대한민국 최상의 대학에 입학하는 것과 맞먹는 수준으로 높아져 버린 서민 대학교의 입결. 물론 그 대상은 가상현실 공학과에 한정된 이야기이긴 했지만, 졸업만 하면 억대 연봉을 받으며 무조건 취업이 보장된다는 사실이 수능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뭐…… 회사에 입사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사회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해 보지 않았던 재영.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제대로 해 보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한정된 인간관계 속에서 소극적으로 살아왔었기에 무언가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그는 지원서를 제출했다.
아르카디아의 덱스가 아니라, 평범한 가상현실 공학과 3학년의 학부생, 윤재영으로서.
* * *
재영이 다양한 경험을 위해 현실에서 한 걸음을 내디뎌 보려는 그 순간.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신성이자 천상을 대표하는 영광스러운 성위(聖位).
대천사 미카엘은 오랜만에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뭐야? 네가 무슨 낯짝으로 볼일이 있다고 나를 찾아와?”
그녀를 보자마자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적대적인 기세를 내뿜는 초록빛 머리칼의 소녀. 하지만 미카엘은 그런 날 선 태도에도 성급하게 받아치지 않고 오히려 자세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싸우자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요.”
“흥. 이번에는 웬일로 그 박쥐 새끼는 같이 안 데리고 왔대? 둘이 요즘 아주 죽이 잘 맞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탄을 언급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세계수. 하지만 살짝 놀리는 듯이 이죽거리는 그녀에게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도 보셨죠? 앞으로 이 아르카디아에 펼쳐질 미래를?”
아르카디아에 도래할 미래.
다른 일반적인 NPC들과 다르게 이 둘은 엘리스가 전 대륙을 관조하고 분석하며 예측하는 정보들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 권능, 인과율의 선구안.] [신성 권능, 인드라망.]아버지에게 부여받은 이 전지(全知)의 설정(設定) 속에서 다가올 미래의 결말에 대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둘.
수백, 수천 가지의 분기점들로 나누어지는 그 수많은 미래 속에서 엘과 세계수가 바라본 것들은 전부 한 가지의 결말로 귀결되었다.
세계의 종말.
끝.
찬란했던 문명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그 폐허의 흔적만이 남을 것이며, 번성했던 수많은 생명은 모조리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초월적인 신성을 가진 이들마저도 모든 권능을 빼앗기고 결국 영원한 죽음과도 같은 소멸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비극적인 결말.
그 끔찍한 미래를 알고 있기에, 세계수는 엘의 물음에 딱딱하게 낯빛을 굳히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나더러 뭐 어쩌라고?”
이미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세계수는 답답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나 나나 우리 둘 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잖아? 탄생의 순간부터 초월적인 신성과 힘을 타고난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사명의 제약을 받은 이상, 이미 정해져 있는 서사를 바꿀 수는 없어. 그저 그 서사 속에서 우리는 주어진 배역에 따르는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 그걸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되고, 어차피 그럴 수도 없어.”
비록 그 서사가 자신의 소멸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순응해야 하는 이들. 애초에 선택권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세계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엘에게 말했다.
“만약 가능했다면, 애초부터 너랑 그 박쥐 새끼가 아르카디아에서 깽판 쳤을 때부터 내 뿌리 공격에 얻어맞고 엉엉 울면서 쫓겨났을걸?”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이들. 그렇기에 세계수는 조금은 슬픈 얼굴로 엘에게 이야기했다.
“그냥 포기해. 제아무리 저항한다 하더라도 검은 안개의 주인이 다시 이 아르카디아에 재림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창세의 순간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이자 운명이잖아.”
이 세계를 멸망시킨다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아수라.
그의 부활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계수는 거의 체념한 느낌이었지만, 엘은 그런 세계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따져 물었다.
“어느 정도 동의해요. 하지만,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말에는 틀렸다고 말하고 싶네요.”
“뭐……?”
“제가 왜 지금까지 그 망할 박쥐 새끼가 지랄하는 걸 참아 내면서까지 계속 이 아르카디아에 머물고 있었는지 아세요?”
그저 조금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계약자.
하지만, 그의 행보 속에서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아르카디아의 서사와 인과 속에서 엘은 분명하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모험가가 가진 저력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분명히 정해져 있던 한 인간의 운명이, 한 도시의, 국가의, 대륙의 서사가 완전히 비틀어지며 전혀 새로운 이야기와 정반대의 결말로 뒤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역천(逆天)에 가까운 힘.”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모험가. 그리고 재영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이 아르카디아의 운명을 뒤바꾼 존재였다.
“아버지께서 왜 모험가라는 이계의 존재들을 이 아르카디아로 끌어들인 것인지 알겠어요. 그들을…… 아니, 덱스라는 그 모험가만 있다면, 아수라를 물리치고 이 아르카디아에 완전한 평화와 안정을 가져와 줄지 몰라요.”
그를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엿본 엘.
그렇기에 재영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그녀는 세계수를 찾아와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한테 도대체 바라는 게 뭔데?”
여전히 조금은 회의적인 시각의 세계수. 하지만 어느 정도 귀를 기울이는 그녀를 보며 엘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당신의 진영에서 꽤 많은 움직임이 있던 게 아르카디아 곳곳에서 관측되더군요. 고대의 종족이었던 하이 엘프가 부활했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숲의 일족들이 세계수의 영역 안으로 결집하고 있더군요, 그 모험가를 필두로.”
과거, 세계수를 수호하며 대륙을 호령하던 강대한 세력, 엘븐 킹덤.
그것을 재건하려는 그녀의 계획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묘한 미소를 짓는 엘에게 세계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것 같아요. 멸망의 순간이 오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최후의 항전을 하기 위해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는 거죠? 이 아르카디아의 대륙에 남아 있는 유일한 신성이자, 모든 생명의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녀의 그런 헌신적인 노력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엘은 굳게 입을 다문 세계수에게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도…… 아니, 천상도 그 순간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
“뭐……?”
그 말에 진심으로 놀란 듯, 입을 벌리며 되묻는 세계수. 하지만 엘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이 말했다.
“아르카디아를 멸망에서 수호하는 것은 천상의 사명이기도 해요. 저로서는 응당 해야만 하는 의무이기도 하지만 천상이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적에게 맞서는 데에는 다른 이들과 손을 잡아야 할 때도 있는 거 아닐까요?”
“……네가 그런 소리 하니까 진짜 위선적인 거 알지?”
언제는 악을 정화한다며 아르카디아의 대륙 대부분을 성화로 불태우며 거의 멸망에 가까운 수준까지 파괴했던 학살자가 할 소린가 싶어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세계수.
하지만 엘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가볍게 내밀며 뻔뻔스럽게 말했다.
“천상과 손을 잡으세요, 모든 만물의 어머니시여. 드높은 천상의 성화가 이 아르카디아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맹도 없다.
비정한 국제정치의 논리 아래에 과거의 악연을 털어 버리고 손을 맞잡자는 엘의 제안에 세계수는 잠깐 고민하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손을 맞잡았다.
“……뭔가 엄청 못 미덥지만…… 내가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 본다.”
“그 선택,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아르카디아의 수호라는 목적 아래에 이루어진 치킨과 묘목의 양자 동맹.
그리고 엘은 동맹이 체결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동맹이니까 하는 말인데…… 최근에 벌어진 사태 때문에 천상의 사정이 조금 어렵거든요? 교황이 그 빌어먹을 박쥐 새끼한테 죽어 버렸지, 성지는 타락했지, 거기에 신성 왕국들은 서로 자리싸움하느라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난리가 났지…….”
갑자기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한탄을 시작한 엘. 그런 그녀의 푸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세계수는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르는 기세에 말을 끊으며 물었다.
“……용건만 말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혹시…… 개연성 좀 빌려줄 수 있어요?”
“……?”
“금방 갚을게요. 최근에 무리한 일이 너무 많아서 저희도 주머니 사정이 조금 어렵거든요.”
배시시 웃으면서 개연성 좀 빌려 달라는 치킨 새끼들의 수장. 힘을 합치자며 찾아와서는 결국 개연성을 뜯어 가고야 마는 그녀를 보며 세계수는 다시금 되새겼다.
성깔이 더럽지만 그래도 무식한 박쥐 새끼들보다도 온갖 착하고 정의로운 척은 다 하면서 영악하고 치사하고 잔머리만 굴리는 치킨 새끼들이 더더욱 악랄한 새끼들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