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14
14화. 제나스&비비안
“엄마, 배고파.”
“조금만 참아. 도시에 가면, 엄마가 먹을 거 구해 줄게.”
꾀죄죄한 행색의 모자가 주린 배를 움켜쥐며 나누는 대화.
꼬르륵 소리가 아이의 배에서 나왔는지 엄마의 배에서 나왔는지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들은 차마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집기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그을음’을 피해 도망 온 형국인 것이다.
성벽이 있는 근처의 도시를 향하면서 자연스레 뭉쳐진 피난민 무리들.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 괴물들은 대체…….”
아스란 제국 남부의 평야에서 비교적 온건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 온 그들에겐 작금의 현실이 마계 대전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만나 뭉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 그을음이 나타나면 흩어져서 도망쳐라.
–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발생 장소를 빠르게 근처 도시에 보고하라.
– 그을음은 사람이 많은 곳에 나타날 확률이 높다.
몇 년 전부터 제국 전역에 내려진 포고령을 떠올린 이들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염려는 이내 현실이 되었다.
쿵. 쿵. 쿵.
– 그오!
– 그르.
– 그오오!
북쪽과 서쪽에서 들리기 시작한 괴성.
특히나 5m가 넘는 대형 그을음들은 이미 지평선 부근에서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 온다!!”
“또 그놈들이다!!”
“북쪽에서도!!!!”
“뛰어!”
우당탕탕.
평화롭게(?) 뭉쳐서 이동 중이던 피난민들의 무리가 단숨에 분열되며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엄마!!! 으아아아앙!”
“엄마, 엄마 여깄어! 아들!”
“뛰어! 이 사람아!”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치지도 죽지도 않는 그을음의 무리는 얼마 안 가 자신들을 금세 따라잡을 것임을.
그리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일어났던 참사가 이번엔 자신들에게 벌어질 것임을.
굶주리고 기운이 없는 노약자들은 이미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두두두두.
그을음이 나타난 곳의 반대편, 피난민이 향하던 동쪽에서도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 설마!?”
“아, 안 돼!”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떠오르던 그때.
그들 중 눈이 좋은 사람부터 환호성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을음이 아냐! 말이다!”
“기사들! 기사들이다!!”
“우와아아아!”
“살았다!!!!”
그제야 뛸 듯이 기뻐하는 사람들.
그런 그들은, 일반 기사가 그을음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몇몇조차.
– 기사들이 막아 주긴 하겠지. 우리 대신 죽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함께 환호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기마들은, 절대 자살 특공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두두두두.
“북쪽부터 친다.”
“하!”
질주하는 와중에도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
오직 전투 시에만 들을 수 있는 단장의 반말에, 블루윙의 기사들이 동시에 기합으로 답했다.
세계 최고의 기사단 중 하나로 꼽히던 블루윙은, 지금 그들의 단장 덕분에 명실공히 ‘최강의 기사단’으로 거듭났으니.
마계 대전 이후 합류한 신입들조차 선배들 못지않게 자부심에 차 있었다.
북쪽과 서쪽에서 나타난 천여 기에 가까운 그을음 떼를 보면서도 일말의 두려움을 보이는 이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백했다.
“영역 전개.”
이제는 얼굴에 제법 관록이 묻어나는 은발의 중년 기사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순간.
350명의 블루윙 기사들 무리에 희미한 오러의 빛이 어렸다.
오직 블루윙과 함께할 때만 발휘할 수 있는, ‘북풍의 기사’만의 영역.
동시에 최대 350명의 기사를 ‘미약한’ 오러유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사기 특성이 들판 위에 다시금 빛을 뿌렸다.
거기에 더해.
“블루윙 전개!”
“하!”
모든 기사의 마나가 동조하며, 은빛의 오러 위에 거대한 푸른 날개 형상을 만들어 냈다.
동시에 그들의 말이 세 배 이상 가속하며, 어마어마한 질주를 시작했고.
– 그오오오오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 은빛과 푸른 날개가 섞인 기사단의 질주가 천여 기의 그을음을 끝장내는 데는,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푸르륵.
“수고했다, 에나.”
자신의 애마를 다독여 준 제나스가 말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피난민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부하들.
“기사님, 도시까지 보호를 좀…….”
“안 돼! 우리는 또 갈 곳이 있다!”
“그래도…….”
조금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겁이 나고 불안한 마음은 짐작하겠지만, 그런 그들을 돌보게 되면 다른 곳을 구하지 못하게 된다.
“무력을 써도 좋습니다. 해산시키세요.”
나직이 내뱉은 말이 ‘바람의 마나’를 싣고 단원들 전체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블루윙의 기사들은 그 즉시 칼을 뽑았고.
챙!
“히이이익!”
피난민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들을 떠나 다시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평판 안 좋아지겠습니다, 단장님.”
“그러라고 하십시오. 어차피 우리를 대체할 인력도 없지 않습니까.”
“대체할 인력이 없는 건, 정확히 따지면 단장님뿐이지요.”
인상은 험악해도 유독 빛나는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순한 느낌을 주는 기사, 부단장 드렉슬러가 웃으며 물을 건넸다.
이제 환갑이 되어 가는 그는 여전히 전투에서는 용맹했지만, 평상시에는 그야말로 너그러운 노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현재 블루윙의 최연장자이자, 곧 은퇴를 앞둔 챌린저급의 기사.
그의 칭찬에 제나스는 물을 받아 들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드렉슬러 경.”
꿀꺽꿀꺽.
그때, 그들의 옆으로 붉은 머리 여기사가 다가왔다.
“드렉슬러 경, 어르신은 스스로 몸부터 챙기세요. 단장님은 제가 챙길 테니까요. 역할을 빼앗긴 느낌이라니까요.”
“비비안…….”
“아, 이 늙은이가 또 주책없이 좋은 시간을 방해했군요. 허허. 쉬십시오.”
또 다른 부단장이자 챌린저급 기사, 그리고 제나스의 부인인 비비안의 등장에 드렉슬러는 너스레를 떨며 물러났다.
그에 제나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반려를 바라보았다.
“그냥 두지 그랬어요. 드렉슬러 경도 얘기할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당신 피곤하잖아요. 드렉슬러 경이 옆에 있으면 온전히 쉬지도 못할 테고.”
사실이긴 했지만, 제나스는 이미 좀 멀어진 노기사의 뒷모습이 신경 쓰였다.
“가렌 경이 떠난 후부터 부쩍 늙으셨어요.”
“가렌 경은 블랙윙으로 자리를 옮기신 것뿐이잖아요?”
“제이 경과 죽이 잘 맞는 가렌 경은 살판이 난 것 같은데, 반대로 드렉슬러 경은 허전한 거겠죠. 이제 드렉슬러 경에 임관했을 때 있던 블루윙은 한 명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느낌이랄까.
듬직한 체격의 드렉슬러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여 제나스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다친 곳은 없어요?”
“당연하죠. 북풍의 영역 보호받으면서 다치면 부끄럽지 않겠어요?”
피식 웃으면서 마치 알통을 자랑하듯 팔을 들어 보이는 씩씩한 여전사.
마계 대전이 끝난 직후, 자신을 붙잡고 안 다쳐서 다행이라며 엉엉 울던 여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있었다.
“여전히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세실리아가 엄마 보고 싶어 할 텐데.”
“아빠를 훨씬 보고 싶어 하죠. 그래서 잡으러 온 거고요. 그러다 잡혀서 같이 이 고생 중이지만.”
황후의 호위 기사로서 편히 지낼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이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블루윙으로 복귀한 자신의 반려.
그녀의 농담에 제나스는 모처럼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다음 건만 처리하고, 잠시 황궁에 들릅시다. 우리 딸 많이 컸을 텐데. 보고 싶네요.”
“그래요. 아빠 얼굴 까먹기 전에, 가끔은 비춰야죠.”
“……너무 그러지 말아요. 나도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으니까.”
“농담이에요.”
한숨 섞인 자책에 비비안은 피식 웃으며 그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을음의 재앙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당신이라는 거, 이제 세실리아도 알아요. ‘우리 아빠가 북풍의 기사다~.’ 황궁에서도 그리 자랑하면서 논다던데요?”
아내의 그 말에 다시금 황궁에 있을 딸이 보고 싶어졌지만.
‘나는 기사다…….’
이 땅의 백성과 주군을 지켜야 하는 기사.
지금 세상을 위협하는 재앙은 현재 진행형이며, 그에 대처할 가장 효율적인 패가 자신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타이니 군…….’
그가 있었으면 그을음의 재앙 따위는 문제가 아닐 텐데.
잠적해 버린 인중신의 행적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쉽게만 느껴졌다.
“……당신도 조금 쉬어요. 한 시간 뒤에 출발할 거예요.”
“난, 이러고 있는 게 쉬는 거예요.”
괜히 단원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얼굴이 슬쩍 달아올랐지만, 사실 제나스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끝없이 쌓여 오던 정신적 피로가 아내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때.
우우우웅.
그의 흉갑 안쪽에서 작은 떨림이 있었다.
“……?!”
“통신?”
“잠시만.”
바로 꺼내 든 주먹만 한 통신구.
그것을 문지르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제나스, 지금 어디지?]“주군!”
강퍅한 인상의 노인, 하지만 이 시대 최강의 오러익시더 중 하나로 알려진 검제의 모습이었다.
[긴말할 시간 없어. 어디냐?]“오렌 평야 북쪽입니다.”
“아……!”
그 말을 듣고 튀어나온 반려의 탄식에 제나스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지만.
통신구 속 검제의 얼굴에는 진한 미안함이 나타나 있었다.
그럼에도.
[미안하게 됐다. 이제 너희가 왕국 연합 쪽도 커버해 줘야겠다. 그나마 제국 북부는 워로드와 문나이트가 좀 더 힘써 주기로 했으니, 남부에만 집중하면 돼.]그 와중에도, 블루윙의 임무는 더 과중해졌다.
“……예? 갑자기?”
좀 전까지 딸과의 애틋한 재회를 그리고 있던 제나스는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닥쳐올 거라는 전언이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다오.]“마지막, 고비요? 아니, 그보다 전언이라뇨?”
[마도 기사가 타이니와 연락이 닿은 모양이다. 녀석이 보장한 거야.]“예!? 그럼 각하나 루나 공은…….”
[다만, 그 고비를 넘는 게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구나. 나와 사신은 현자의 마탑으로 간다. 그리고 마도 기사와 용사도 그곳으로 모일 거다. 마도사들까지 전부.]“…….”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직감이 드는 마당에, 임무의 과중을 논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 마지막 고비라는 것을 넘기면…….”
[그을음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아니면 타이니 그 녀석이라도 돌아오겠지.]그 말은 부부의 입에서 동시에 안도의 한숨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럼 힘을 내야죠.”
“저도 힘내겠습니다. 각하!”
[그래. 세실리아는 클로이가 확실히 돌보고 있으니 걱정 말거라. 타이 황자와도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까.]“배려 감사합니다.”
[배려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조금만 더 고생해 주게. 다른 단원들에게도 전해 줘.]“물론입니다!”
임무는 과중해졌지만, 희망이 생겼다.
대답하는 제나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컸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