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15
15화. 분란?
“아하하하. 그래서 내가 말이야…….”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나는 술판.
하늘색 머리의 청년이 화려한 파티장 한가운데에서 귀빈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디에몬 왕자님, 저기…….”
시종장이 다가와 소곤거리는 말에, 왕자 디에몬 반 셀던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곧 간다고 전해.”
“이미 오래 기다렸다고…….”
그 대꾸에 그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이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님들에게 적당히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승 새끼라 그런지 인내심이 없어. 흐.”
누군가에 대한 짜증이 그 말에서 물씬 묻어 나오는데, 그를 안내하는 시종은 듣지 못한 척하며 그저 앞으로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통신실.
그의 짜증이 향하던 대상은, 역시나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감히! 짐을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다니! 제정신인가, 왕자!?]으르렁거리는 듯한, 아니 실제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통신구 저편에서는 은회색 늑대인간이 어울리지 않는 황금 왕관을 쓴 채 이를 갈아 대고 있었다.
“웨어비스트의 주인이신 쿠테이 살힌 전하를 뵙습니다. 피차 공무가 바쁜 것은 마찬가지이니, 이해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직전까지만 해도 상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던 디에몬은 그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나름의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에 디에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현자의 마탑은 본 왕국의 역린이기도 한 것을요.”
웨폰마스터가 마계 대전에서 전사한 이후, 셀던 왕국은 이제 6왕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게 됐다.
반면에 사실상 현자의 마탑에 빌붙어 있던 카일 왕국은, 이제 제국의 대공이 된 마도 기사나 다른 현자들의 힘을 빌려 왕국 연합을 주도하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었으니.
셀던을 다시 왕국 연합의 리더로, 더 나아가 대륙 최고의 왕국으로 만들고 싶은 왕세자 디에몬으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래. 이제 그 재수 없는 문나이트와 워로드는 더욱 무리를 할 수밖에 없다. 북풍의 기사도 그렇고. 9대 기사의 수를 줄이기에는 지금이 적기야!]그가 저 뇌가 없는 것 같은 수인족의 허수아비 왕과 어울려 주는 것은, 단 한 가지의 공통점 때문이었다.
마계 대전 이후 이어져 온 ‘초인의 시대’를 끝내고 대륙의 판을 다시 짜고 싶은 욕망.‘물론 자국의 초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저 얼간이랑 같은 배를 탄 것은 한심하지만.
’어쨌든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문나이트와 워로드가 함께할 때는 그 용사 못지않은 힘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풍의 기사가 이끄는 블루윙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고요. 혹시 생각하신 방도라도 있는 겁니까?”
[내가 문나이트를 따로 불러낼 수 있다. 스피릿 유저인 우란 누드 역시 함께.]……자국의 초인들을 전부 죽일 생각이다.
‘그을음은 어찌 처리할 생각이지? 바보 같은 놈.’
오러나 대마법 이상의 파괴력만으로만 없앨 수 있다는 그을음.
셀던 왕국이야 현자의 마탑 현자들의 원조나 ‘초월무구들’을 이용해 처리해 왔지만, 웨어비스트에 그런 2차 수단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있다면 진작 썼을 테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나오는 것은, 당장 자신의 욕심을 위해 왕국의 미래를 갖다 버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심한 새끼.’
대체 문나이트는 왜 저런 얼간이를 왕으로 만들었을까.
아니면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앉아 있던 왕의 자리가, 나름의 재능이 있던 아이를 저런 멍청이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왜 답이 없지?]“……우리 왕실의 그림자들을 지원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카일을 제외한 다른 왕국들도 협력하긴 하겠지요. 다만 그래도 희생이 클 터인데……. 어쩌실 생각입니까?”
허수아비 왕인 너 대신, 우리가 전력을 투입해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넌 뭘 할 거냐?
그런 의미를 담은 물음에, 통신구 속 은회색 늑대인간이 살짝 주저하다 말했다.
[마나를 흐트러트리고 광기를 자극하는 독이 있다. 특히나 우리 수인들에게 잘 통하는 물건이지. 초인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호오. 그런 독이……? 흠. 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희생은 우리 쪽에서 할 터인데요.”
[문나이트와 우란 누드, 그 둘만 제거하면 웨어비스트는 온전히 내 손안에 들어온다. 대가는 그 후에 얼마든지 치를 수 있지.]“그 말,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쿠테이 살힌, 높은 바람이시여.”
[흥. 위대한 전사의 종족 왕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왕세자.]위대하긴 개뿔.
‘너 같은 똥개 새끼가 그 전사의 종족을 망치는 거다. 털도 회색이 더 많은 잡종 주제에.’
디에몬은 속마음을 감춘 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웨어비스트의 주인이시여. 그럼 자세한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시죠.”
[다음 달 초, 우리의 국경일인…….]그렇게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하며 은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디에몬은, 자신과 닮은 비릿한 미소를 짓는 상대의 생각을 정확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가 따위 줄 생각 없겠지. 뭐, 어차피 받을 생각도 없다. 멍청한 놈.’
지금 이 영상은 그대로 녹화되어, 문나이트와 우란 누드가 죽은 뒤 웨어비스트의 귀족가에 뿌려질 것이다.
물론 놈과 통화를 하는 자신의 정체는 잡음을 넣어서 감추겠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저 멍청한 똥개 새끼는 반란죄로 처형당하거나, 지금보다 더 권력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게 될 터이니.
‘무엇보다, 문나이트가 가까스로 봉합해 놓은 어인족과의 갈등이 다시 터져 나올 거다. 크라켄의 대부는 결코 문나이트의 죽음을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현재 웨어비스트로 미친 듯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동대륙의 돈과 물자는 한순간에 끊길 것이고.
그 파편은 왕국 연합이 나눠 가지게 될 것이다.
‘카룬이 완전히 부활하기 전에, 항로를 선점해 놓아야지.’
문나이트와 우란 누드. 두 초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면서도, 디에몬의 머리 한구석에는 왕국의 이득을 위한 그림까지 그려지고 있었다.
물론 설령 실패한다 해도, 이쪽이 관여했다는 증거는 전혀 남길 생각이 없었으니.
‘최악의 경우에도 초월무구 몇 개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림자들의 희생이 따르긴 하겠지만, 애초에 그는 부하의 생명에 큰 가치를 두지도 않았으니.
디에몬의 미소는 점점 진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높은 바람의 제 목 조르기 계획이 얼추 윤곽이 잡혔을 때.
“우리 쪽 병력도 날을 맞춰서 출발시키겠습니다. 하지만 그 두 초인이 멀쩡해 보인다면, 습격은 없을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물론이다.]“좋습니다. 이 초인의 시대를 끝내고…….”
[다시금 고귀한 피가 지배하는 시대를 열기 위해.]그 고귀한 피가 너 같은 똥개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디에몬은 왼쪽 가슴을 두드려 보인 뒤 바로 통신을 종료했다.
“아니, 멍청한 개새끼라서 차라리 다행인가…….”
그리고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통신실을 나서던 순간.
문 앞에 대기 중이던 시종장을 보며 흠칫했다.
“……뭐 하는 거지, 여기서?”
“아, 파티 손님들의 요청이 있어서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디에몬의 시선이 노년의 신사, 시종장 에드가 자작의 표정을 슬쩍 훑었다.
통신실에 방음 처리가 되어 있다는 것은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드가의 눈치를 살핀 것이다.
그리고 한 치의 떨림조차 없는 충직한 시종장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하나인데,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 얼른 할아버님께서 쾌차하셔야 할 텐데…….”
디에몬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다시 파티장을 향했다.
“동생분이신 그리드 대공께서 돌아가셨으니, 상심이 크셨겠지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정확히는 그것 때문이 아니야.”
“예?”
“우리는 내 숙조부님이신 웨폰 마스터를 잃었다. 하지만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지. 그 사실이 할아버님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되었을 거야.”
디에몬은 진심으로 그리 믿고 있었다.
한때 왕국 연합의 유일한 오러유저라 불리던 숙조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 이름이 주는 가치는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분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뭐?”
“아, 아닙니다.”
시종장이 건방진 소리를 하긴 했지만, 적당히 참아 넘겼다.
내궁부의 사람을 갈아 치우는 것은 즉위식을 치르고 왕이 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후계자들은 아직 다 모여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그래.”
젊은 귀족들부터 확실히 챙겨 가며 자신을 따르게 만들어야 한다.
파티는 그저 놀기 위해 연 것이 아니니까.
그래, 이 또한 일일 뿐이다.
그렇게 다시 생각을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오, 하늘색 머리에 겁나 잘생긴 얼굴! 혹시 디에몬 왕자 저하십니까?”
웬 금발 머리 장년인이 파티장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지?”
그에 디에몬이 인상을 찌푸리며 호위 기사들을 찾는데.
평소엔 귀찮을 정도로 자주 눈에 띄던 기사나 병사들이 이상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슬쩍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순간.
“아아, 전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저하. 그냥 세상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친구 사귀는 걸 낙으로 삼은 한량입죠. 여기 지키던 기사 친구들은 제가 좀 쉬라고 보냈습니다. 하도 피곤해 보이길래.”
젊었을 때는 여자깨나 후릴 것 같은 잘생긴 장년인이 헛소리를 내뱉었다.
“누구 마음대로?”
“아, 제가 권유한 거지만……. 전하께서 시키신 일이기도 했죠, 참.”
“내가?”
영문 모를 소리에 디에몬의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장년인은 씩 웃으며 넉살 좋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저하의 뒤에 계신 저하께서 말이죠.”
“뭐!?”
그에 속임수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뒤를 따르던 시종장 대신,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자신과 똑같이 생긴 청년이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누구냐! 네놈!!”
챙!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보는데.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누구냐!”
똑같이 검을 뽑아 움직이는 그 괴물 때문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거기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헙!?”
바로 뒤에서 들리는 장년인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까지.
휘익.
황급히 뒤로 검을 휘둘러 보지만.
그 검은 금발 장년인의 손끝에 너무나도 가볍게 잡히고 말았다.
“쓰읍, 정말 야망만 크고 능력은 없다더니.”
금발 장년인은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저하께서 마나유저가 아니라 다행이군요. 제이 저 친구가 흉내 내는 게 더 쉬워질 테니.”
그 빙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손끝에서 몸을 마비시키는 마나를 뿜어냈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디에몬은 마지막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네, 네놈들 설마 마족……!”
사람을 흉내 내는 끔찍한 마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으니까.
그러나.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냥 제이 저 친구가 변장을 잘하는 것뿐이죠. 아, 소리 질러 봤자 이 밖에서는 안 들립니다?”
피식 웃는 금발 장년인의 손짓에 따라 일그러지는 공기.
그것이 챌린저급 기사나 쓸 수 있는 공간 장악의 기술이라는 것을, 디에몬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그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눈앞의 기사의 표정이 더 거슬릴 뿐.
“제 이름은 가렌 클레멘. 기사이지만, 지금은 저하처럼 이 위태로운 시국에 세상에 독을 뿌리는 해충들을 구제하는 일을 하고 있습죠. 아 이거, 이렇게 소개하니 내가 너무 저렴해지는데?”
금발의 기사가 너스레를 늘어놓자.
“딱 좋은 표현입니다, 가렌 공.”
그에 답하는 것은 조금은 낯선,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였다.
‘……내, 내 목소리!?’
하지만 이미 장년인의 마나에 완전히 제압된 그는 이제 입조차 마음대로 열 수가 없었다.
“오, 제이. 이제 완전히 됐나?”
“잠시만요. 음음. 아! 아! 네놈들 설마 마족……! 됐습니다.”
“참, 네 녀석은 신기하단 말이야. 그게 마법이 아니라니.”
“됐고, 빨리 제거하시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뭐? 임시 구속이 아니라 제거야?”
“디에몬 왕자는 선을 넘었습니다. 웨어비스트의 높은 바람도 마찬가지고.”
“뭐? 자세히 얘기해 봐.”
“통신실에서……. 아, 교대 근무자 1분 남았습니다. 먼저 처리부터…….”
“아……. 오케이.”
안 돼!!!
장년인, 가렌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어 오는 것을 끝으로.
디에몬 반 셀던의 의식은 그대로 끊겼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