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6)
16 화 켈톤.
켈톤.
밤새 눈이 내려앉은 새하얀 벽.
청염(靑炎)의 사제는 귀스의 동문 앞에 서 있었다. 여러 개의 선택지 가운데 귀스를 고른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검 한 자루로 거대한 악마를 잡았다는 악마도살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마음이 내켜 이리로 왔을 뿐.
간단한 신분검사를 하고서 귀스로 진입하자, 분주히 움직이는 인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때 무너졌던 도시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악마가 일으킨 파괴의 흔적을 본 청염의 사제는 악마도살자에 대한 마음속 평가를 좀 더 높였다.
재건되는 도시를 가로질러 청염의 사제가 향한 곳은 바로 영주의 저택이었다. 자신이 성화교(聖火敎)의 푸른 불꽃임을 알리자, 경비들은 빠르게 달려나가 귀스의 영주, 트레돈 필리안에게 자신의 방문을 알렸다.
일부분이 무너졌던 영주의 저택은 이곳저곳 뚫린 장소를 대충 막는 시늉만 했음이 역력했다. 청염의 사제는 안내를 받아 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귀스에 방문한 걸 진심으로 환영하네.”
과묵한 눈과 냉막한 분위기, 비록 머리가 서서히 벗겨져 가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사소한 단점 따윈 눈에 전혀 안 들어오게 만들 만큼의 무게감이 있는 사내였다.
“접객실이 무너져서 어쩔 수 없이 집무실에서 맞이하는 무례를 저지르게 된 걸 사과하지. 게다가 내 몸 상태가 상태인지라.”
나무로 만들어진 의수를 슬쩍 들어 보인 영주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편히 앉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성화교의 푸른 불꽃이 직접 순례를 하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일 텐데, 어쩐 일로 온 건가?”
“잠시 이것을 봐주시지요. 혹시 이 남자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청염의 사제가 내민 것은 한 장의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귀스를 향해 오면서 직접 그린 물건으로 성화교의 성물을 탈취한 도둑의 얼굴을 그려놓은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이 성물 도둑은 없는 존재. 본단에서 비록 별 가치가 없는 성물을 도난당한 것이고, 며칠의 추격 끝에 바로 잡힌 데다 이미 사망한 자이기에 이 자의 얼굴이 그려진 공식적인 수배지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청염의 사제는 자신이 직접 이 남자에 대한 인상착의를 그려야만 했다.
문제는 그림이 단순히 조악하다는 수식어가 과분할 정도로 아주 난잡한 수준의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거기다 이 그림을 내민 본인은 나름 자신이 꽤 잘 묘사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악마는 조악한 그림을 보자마자 비상한 직감으로 이것이 마르낙의 얼굴을 그린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림을 확인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이 자는 대체 누구길래 성화교의 푸른 불꽃이 직접 뒤를 쫓는지 물어봐도 괜찮겠나?”
청염의 사제는 조용히 앉아, 트레돈 필리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우묵한 눈빛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샅샅이 캐내려는 것처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청염의 사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그런가.”
악마는 천천히 청염의 사제의 얼굴을 살폈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긴 청발과, 아무런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시리도록 푸른 눈. 굳게 다문 입술에선 그녀의 굳은 심지가 언뜻 엿보였다. 그 누구라도 한 번쯤은 시선을 뺏길만한 미녀를 보며 악마는 생각에 잠겼다.
‘좋은 이유로 뒤를 쫓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이게 용건의 전부라면 이만 가보게. 한창 바쁜 와중이라 더 시간을 내주긴 조금 곤란하네.”
“예.”
영주의 명백한 축객령에 그녀는 미련없이 그림을 집어 품속에 넣고 일어섰다. 애초에 큰 기대를 하고 영주의 저택을 찾아온 것도 아니었기에.
저택을 벗어나 거리로 나선 청염의 사제는 길거리를 거닐며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그림을 내밀어 봤지만, 당연히 그 조잡한 그림이 마르낙을 그린 것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른 도시로 간 건가.”
자신의 그림이 잘못됐음을 전혀 눈치 못 챈 그녀는 자신이 도시를 잘못짚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수도로 발령받았다며? 이거 정말 섭섭하네.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해?”
“기회가 되면 놀러 올게요!”
“여기 놀 게 어딨다고, 빈말은···. 됐고 가는 길에 몸이나 조심해! 여행이란 건 항상 위험한 법이잖어.”
“저 혼자 가는 게 아니니 너무 걱정마세···.”
붉은 머리를 살랑이는 여인과 식료품 가게 아주머니가 나누는 대화에서 튀어나온 ‘수도’라는 단어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수도라···.”
어차피 지금 다른 도시로 가도 별다른 수색수단이 없는 이상, 그를 찾아낼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애초에 지금의 추적은 그녀의 자그마한 의심에서 비롯된 것.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물증 따윈 없었다.
그렇게 성화교의 푸른 불꽃은 결심을 굳혔다.
수도에 있을 정보상들을 이용해 도망자인 그를 찾아보기로.
***
왜애애애애앵!
도살자가 두 마리째 눈거미의 머리통을 갈아버렸다. 얼굴을 향해 튀어 오르는 끈적한 체액들. 진심으로 따뜻한 물에 세수가 하고 싶었다.
– 끼이이이이이이!
잠깐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마지막 눈거미가 내게 달려들며 날카로운 앞발을 내질렀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푹!
날아온 화살이 정확하게 눈거미의 앞발을 관통해 공격을 지연시켰다. 그래, 이 정도 틈이면 충분하지. 도살자가 다시금 거칠게 시동음을 뱉어냈다.
왜애애애애애앵!
나는 그대로 도살자를 휘둘러 눈거미의 머리통을 갈아버렸다. 마침내 마지막 눈거미가 바닥에 쓰러졌다. 감각을 곤두세운 채로 잠시 주변을 살폈지만, 추가로 다가오는 개체는 없었다.
여전히 화살을 시위에 메긴 채 긴장하고 있는 카르멘을 향해 손짓했다.
“이게 마지막인 거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도살자에 묻은 체액을 대충 털어내곤 사제복의 옷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머리카락에 튄 체액 때문에 여전히 찝찝했지만, 얼굴이라도 닦아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어느새 다가온 카르멘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내 능숙하게 눈거미의 껍질을 가르고 있었다.
“뭐하십니까?”
“아, 눈거미의 독주머니를 채취하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의 독은 마취 효과가 대단해서 여러 방면으로 쓸모가 있거든요. 화살촉에 묻혀서 사용해도 괜찮고, 그냥 팔아도 값이 꽤 나갑니다.”
나는 그 알뜰살뜰한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같이 지내본 결과, 카르멘은 귀족가의 도련님답지 않게 생활력이 무척 강했다.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몬스터 사냥에 자주 참가했거든요. 아무래도 실전이 활 솜씨를 늘리기에 가장 좋지 않습니까?”
독주머니를 꺼내기 위해선 당연히 눈거미의 배를 갈라야 했고, 그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체액이 튈 수밖에 없었다.
“이왕 체액 범벅이 된 김에 제가 하겠습니다. 독주머니가 어디 있는지나 알려주시죠.”
카르멘은 얼굴에 튄 체액을 닦아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어차피 다음 도시인 켈톤까지 반나절 거리지 않습니까. 독주머니를 채취하는 법을 가르쳐드릴 테니 같이해서 얼른 끝내고 도시에 가서 시원하게 씻죠.”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각자 두 마리씩 맡아서 눈거미 네 마리의 독주머니를 채취하고, 체액투성이가 된 채로 켈톤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거미들의 앞발에 묻어있던 혈액의 주인들과 만났다.
부서진 마차와 여기저기 튀어있는 피와 살점들.
카르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저희를 습격했던 눈거미가 한 짓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부서진 상자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린 카르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차 크기에 비해, 여기 남아있는 물건들의 양이 너무 적습니다. 물건을 처분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던 걸까요.”
“거기다 시체들조차 없군요.”
피와 살점들이 가득했지만, 정작 중요한 사람의 시체가 없었다. 눈거미는 사냥감의 체액을 빨아먹는 몬스터라서 이렇게 시체가 하나도 없을 수가 없는데.
“마르낙 사제님!”
“예.”
카르멘은 어느새 꽤 먼 곳까지 가서 주변을 뒤지고 있었다. 얼른 다가가자, 눈밭 위로 새겨진 눈거미의 선명한 흔적은 핏자국들과 함께 숲의 깊숙한 곳으로 이어진 것이 보였다. 카르멘이 바닥의 흔적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저희가 잡았던 네 마리가 끝이 아니었나 봅니다. 정말이지 기이한 일이군요. 켈톤에 도착하면 그곳 영주님께 이번 일에 대해서 반드시 알려드려야겠습니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굳이 우리가 저 눈거미들을 추적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우리는 마차에서 챙길만한 것이 있는지 빠르게 살폈지만, 남아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도저히 쓸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던지라 별다른 물건을 챙기지 못한 채로 다시 출발했다.
조금 걸음을 빨리해 걸어서 마침내 우리는 켈톤에 도착했다.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성벽. 나는 체액으로 차갑게 굳은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영주님께 알리는 것도 좋지만, 우선 몸부터 씻는 게 예의에도 맞고, 저희 기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카르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확실히 예상보다 더 찝찝하군요.”
켈톤의 서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자, 우리를 발견한 경비병들이 놀란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명의 경비병이 잽싸게 튀어나와 우리에게 말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떻게 왔냐니?
나는 카르멘과 얼떨떨한 얼굴로 마주 보곤, 말을 꺼냈다.
“저희는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만?”
“오시는 길에 몬스터들과 마주치시···.”
경비병은 물음을 꺼내다 말고 말을 멈췄다. 눈거미 체액투성이인 우리를 보곤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질문을 꺼냈는지 깨달은 듯했다. 카르멘은 쓰게 웃으며 경비병에게 말했다.
“혹시 지금 켈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경비병은 침을 꿀꺽 삼키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켈톤은 지금 삼 일째 모든 길을 봉쇄당한 상태입니다. 그것도 몬스터들에게요.”
몬스터들에게 길들 봉쇄당해? 설마 우리는 손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된 도시로 온 건가.
도시 안에서 좀 더 선임으로 보이는 경비병이 튀어나와 우리에게 재빠르게 말을 전했다.
“스트렌 영주님께서 두 분을 뵙고자 하십니다. 영주님의 저택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머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아무래도 저희는 한 번 씻은 다음에 영주님을 뵙는 게 예의에 맞지 않겠습니까?”
경비병은 나와 카르멘을 훑어본 다음 대답했다.
“아마 영주님께서 저택의 욕탕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허락해주실 겁니다.”
영주의 욕탕이라. 굉장히 끌리는 제안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카르멘을 바라보자 그도 살짝 기대 어린 눈빛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얼른 갑시다.”
***
따뜻한 물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기분 좋게 내 볼을 스치고 둥실둥실 피어올랐다. 대충 몸을 씻어낸 나는 준비된 개인 욕탕에 몸을 담갔다, 적당히 뜨거운 물이 내 몸을 마음껏 지져댔다.
“흐아아아아아…”
‘ㅅ…ㅏ…ㄹ…ㅎ…ㅐ…’
씻기 전에 먼저 뜨거운 욕탕에 담가드린 덕에 어머니는 이미 뜨거운 물에 푹 취한 상태셨다.
“손님용 개인 욕실이 준비되어 있다니, 참으로 옳게 된 영주입니다. 이 따뜻한 물 하나만으로도 벌써 영주에 대한 호감이 천장을 뚫는군요.”
‘살…해…”
어머니께서는 물속에서 손바닥을 뒤집으며 내게 긍정의 의사를 전해오셨다.
그렇게 뜨끈한 목욕을 마치고, 뽀송뽀송한 상태가 되어 저택의 고용인이 준비해둔 새 옷을 입자, 그냥 침대에 누워서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순 없었지만.
고용인의 안내를 따라 영주의 접객실로 향하자, 카르멘이 먼저 도착해서 영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기 앉으시지요.”
켈튼의 영주는 조금 통통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는데, 굉장히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많이 쳐줘 봐야 이십 대 중반 정도.
카르멘의 옆자리에 앉자, 영주는 나를 향해 굉장히 호의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귀스의 ‘악마도살자’ 마르낙 사제님이시지요? 정말이지 저희 도시를 찾아주셔서 이 어찌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다 죽어가던 악마의 숨통을 끊은 것뿐이고, 진짜 악마 사냥은 바른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교화교 사제님들 세 분께서 다 하셨지요.”
“다 죽어가는 악마의 숨통을 끊는 것도 범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이거 마르낙 사제님께선 무척이나 겸손하신 분이로군요.”
말이 더욱 길어지려던 찰나, 카르멘이 귀족다운 방식으로 능숙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화제를 전환했다.
“몬스터에게 도시가 포위당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켈톤의 영주, 스트렌 플코르는 울적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두 분을 이리 부른 이유도 그 일과 관련이 있지요. 두 분께서도 이미 느끼셨겠지만, 이번 포위는 단순한 몬스터들의 준동이 아닙니다.”
살짝 입술을 달싹인 영주가 무거운 한마디를 꺼냈다.
“전부 악신의 숭배자가 벌인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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