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72
1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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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력 5245년의 7월 이렛날. 그날은 발디마르의 기이한 계승식이 끝난 지 정확히 11년이 되던 해의 여름이었다.
로제스가 비쩍 마르고 초라한 소녀를 맡은 지는 10년이 좀 더 지났다. 열서너 살에 불과했던 아그네스는 그새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다.
아그네스의 첫 몇 년은 꽤 위태로웠다. 사고를 굳히고 성장을 억지로 멈추는 환을 지속적으로 복용했던 몸에서 독소가 완전히 빠지는 데는 3년이 넘게 걸렸다.
덜 자랐던 정신이 완전히 제 나이대를 찾는 데에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몇 년 전의 일들이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타인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던 소녀는 이제 간데없었다. 그러나 로제스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는 아그네스가 스무 살을 훌쩍 넘긴 뒤에도 오래전에 떠나보낸 여동생을 돌보듯 그녀를 보살폈다. 그리하는 게 당연했다. 리즈벨이 부탁한 아이니까.
세상은 당연하다는 듯 그의 누이를 잊었다.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이라 보기에는 석연치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113년 만에 나타난 성녀, 리즈벨 발디마르의 존재는 거짓말처럼 대륙에서 지워졌다.
“자리가 바뀌었어요.”
아그네스는 그렇게만 말했다. 로제스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혹시라도 나올 말이 마지막 희망을 부수어 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로제스는 그저 기다렸다. 시간은 몹시 느리게 지났다. 그러나 문득 돌아보면 순식간에 몇 년이 지나 있곤 했다.
발디마르와 라타에의 신협정을 체결하고 나니 2년. 천성적으로 흉포한 국민성을 누그러뜨리려 새로운 법령을 공표하고 민심을 다잡고 나니 3년.
대륙의 화약고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주변국들과 우호 관계를 다지고 나니 또 5년.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제는 몸에 밴 익숙한 평화가 온 왕성에 가득했다. 이 왕성이 10년 전에는 피와 철과 시체로 얼룩졌던 존속 살인의 현장이었음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소수였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정갈한 집무실 안을 채웠다.
한참 국서를 검토하고 있던 로제스는 문득 들려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그네스가 창가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하를 보러 올 수 있나요. 서운한데.”
“무슨 일이 있지 않으면 나를 보러 오지 않잖아, 너는.”
로제스는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시선은 다시 창가를 향했다.
“전하께서도 참 여전하세요.”
“……?”
가슴께까지 닿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로제스의 짙푸른 눈이 그녀의 의중을 읽으려 깊어졌다.
아그네스는 다정한 그녀의 왕을 향해 장난스럽게 몇 마디 더했다.
“여전히 표정을 짓는 데 서투르시고. 표현에도 인색하시고.”
“……그게 불만이었니?”
“그럴 리가요. 저는 전하의 무엇에도 불만이 없답니다. 다만…….”
아그네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해가 지려는지 서쪽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그네스는 가만히 물결치는 시간의 선들을 느꼈다.
며칠 전, 드디어 어긋나 있던 시간의 괴리가 전부 완벽하게 맞춰졌다. 아그네스는 그때부터 계속해서 그녀를 불렀다. 자신을 이 따듯한 곳으로 인도한 사람을.
“…….”
그녀가 보낸 신호에 오래지 않아 답이 왔다.
잠시라면 괜찮겠지. 본래 존재했던 시간 선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지만, 아주 잠시 돌아가 있는 것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한 시대에 성녀는 한 명. 그뿐이기만 하면 되니까.
“오늘 밤에는 창을 열어 두시는 게 좋겠어요.”
“뭐?”
“바람이 좋잖아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날은 따듯하고.”
오늘 밤이 당신께 완벽한 선물이 되기를.
아그네스는 창틀에 팔을 얹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녀의 입술을 타고 가벼운 곡조가 흘러나왔다.
“달, 달 달맞이꽃.”
“…….”
“가장 어두운 하늘 아래서만 뜨는 예쁜 꽃…….”
로제스는 아그네스가 부르는 발디마르의 오래된 동요를 들으며 시선을 다시 책상 위의 서류로 내렸다. 눈으로는 글자를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달빛 동산 위에는 흰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 있지요.”
꿈에서도 못 잊는 누이가 입버릇처럼 부르던 노래가 그의 머리를, 가슴을 가득 채웠다.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는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로제스는 아그네스가 처음 그에게로 오던 날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날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그네스가 그 애의 소식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 들었던 누이의 인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오라버니께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고…….”
나도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그 말을 돌려줄 수 없는 것이 한이 되었던 그날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리즈벨은 언제나 로제스의 아픈 가시였다. 10년이 더 지난대도, 아니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겠지.
해가 지는 것은 금세였다. 로제스는 결국 한 장도 더 넘기지 못한 서류를 책상 한편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그네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가에 기대어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창가 앞의 작은 티 테이블 위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것들이 놓여 있었다.
와인과 유리잔 두 개. 아마도 아그네스가 꺼내 놓고 간 것이리라.
“술은 독이라고 늘 말을 하는데도.”
로제스는 짧게 혀를 차며 책상을 빙 돌았다. 하루의 마무리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책상 바로 맞은편 벽 앞에 섰다. 벽 전체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어 내자, 색이 바랜 작은 초상화가 드러났다. 누이가 직접 자신을 그리라 명했던 초상화라, 로제스는 지금껏 초상화에 색을 덧칠하라 명령하지도 못했다. 손을 대면 색이 더 빨리 닳을까 봐 손대 보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이한 이끌림이 그를 떠밀었다. 로제스의 손끝이 초상화 속 아이의 마른 뺨을 스쳤다.
오늘로 정확히 10년이었다. 누이를 떠나보낼 때 예감했듯, 그는 수없이 많은 날을 후회했고 그보다 많은 날을 애태웠으며 단 하루도 잊은 적 없이 그리워했다.
반짝.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누이의 초상화 위로 희미한 빛 무리가 스쳤다. 따스한 금빛이었다.
짙푸른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로제스는 얼어붙은 채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다시 반짝, 누이의 머리카락이 빛났다. 초상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아니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로제스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초상화 속 누이가 작게 웃는 것 같았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환청이겠지.
“…….”
얇은 옷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창틀을 부드럽게 톡톡 두드리는 소리. 이건 다 환청일 거야.
로제스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혹시 하는 기대는 번번이 빗나가 그를 아프게만 했다.
“있잖아, 오라버니.”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초상화를 다시 그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열린 창문으로 따스한 밤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웃음기 어린 부드러운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건 너무 색이 바랬잖아.”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로제스는 여전히 그 감정을 무어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다만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다시 그리자, 누이야.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더 예쁘게…….”
“좋은 생각이야.”
로제스는 창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가가는 걸음걸음에 10년의 그리움이 배어 나왔다.
늘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떠나보내기만 해야 했던 어린 누이가, 그는 영영 알 수 없을 고된 시간을 걸었을 아이가…….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해.”
별과 달이 흐르는 밤하늘 아래, 다리를 창틀 밑으로 늘어뜨리고 앉은 예쁜 그의 누이가.
“그동안 잘 지냈어?”
떠났을 적보다 더 행복하고 빛나는 얼굴로 그를 향해 웃는다.
“……리즈벨.”
로제스는 사랑하는 누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아직도 갓 스무 살의 얼굴을 한 아이가 창틀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안겼다.
“보고 싶었어, 오라버니.”
들뜬 목소리에 결국은 눈물이 터졌다. 로제스는 동생을 힘껏 끌어안았다.
피비린내 풍기는 왕성에 홀로 내버려 두었던 15년, 어떻게든 지켜 내 보려 안간힘 썼던 5년. 그리고 내내 기다려 왔던 10년.
그 모든 세월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품에 안긴 온기가 이 아이의 생을 증명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넘치도록 충분하고 완전해졌다.
로제스는 비로소 온 마음으로 웃었다. 눈물과 애정과 미소가 무한히 번지는 밤이었다.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