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19
317화 2년 전, 영국
2년여 전, 벨기에.
길게 늘어진 햇살이 바닥의 나뭇결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둑하고 흠이 난 벽돌 벽에는 점박이 강아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길쭉한 바와 마호가니 테이블이 딱 두 개 있는 조그만 카페였다.
그마저도 사람이라곤 단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손님만이 홀로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종이를 깐 작은 바구니에 썰려 담긴 바게트에는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금갈색 머리칼을 길게 땋아 내린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에블린 밀러는 안경알 너머의 눈을 살짝 휘며 테이블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루해 보이시네요, 미스터.”
“시간 내어 왔는데 허탕만 쳤으니.”
성현제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긴 다리가 테이블과 의자의 간격에 맞질 않아 어색하게 기울어져 있었으나 그마저도 일부러 연출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요즘 들어 거짓 정보가 더욱 판을 치는 것 같더군요. 미스터까지 헛수고할 정도니까요.”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뜻이지. 바뀐 세상에.”
던전과 각성자가 나타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런던으로 넘어간 뒤에, 귀국할까.”
“이대로 그냥 가실 겁니까?”
“오랜만에 속았으니 수고비 정도로 쳐주지.”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그가 말했다.
“한국엔 오랜만에 돌아가시는 거군요. 한 달쯤 됐죠?”
“언제 돌아올 거냐며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려오더군. 복에 찬 엄살이야.”
S급 헌터가 국외에 오래 나돌아 다니면 어쩌냐는 핀잔들이었다.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협회는 세성 길드장이 국내에 없다는 사실을 열심히 감춰 주었다. S급 헌터가 한 명이라도 더 한국에 머물러 있어야 안정적으로 비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반 대중만 잘 모를 뿐, 성현제가 종종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은 상급 헌터들 사이에선 잘 알려져 있었다.
“송태원을 가지고도 불안해하다니.”
“아, 그 특이하다는 S급 헌터 말이지요?”
“덕분에 한국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지.”
원래라면 세성길드를 만든 후 최소 1년 이상 한국에 터를 닦아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송태원의 존재로 그 기간을 반년으로 줄였다. 그가 중립적인 공직자로서 버티고 있는 한 S급 길드장이 자리를 비운다 해도 길드가 무력적인 공격은 받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들이야 해외에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했다. 던전 내부와 달리 통신 가능하고 멀리 있어도 하루면 귀국할 수 있으니 한국의 던전에 들어가는 것보다 해외로 나가는 것이 리스크는 훨씬 적었다.
던전 또한 아직은 낮은 등급이 대부분이라 더더욱 한국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럴 시간에 해외에서 쓸 만한 헌터와 아이템을 찾고 군데군데 선을 만들어 놓는 편이 나았다. 각국의 길드들이 전부 확실하게 자리 잡고 난 후에는 헌터와 아이템을 빼돌리기 더 힘들어진다는 이유도 있었다. 쉽게 영향을 뻗어 두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작년에 해외 출장까지 오게 만든 건 다시 생각해 봐도 미안해.”
“미안한 얼굴이 전혀 아니십니다만.”
성현제가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바게트는 그대로였지만 커피 잔은 거의 비워졌다. 에블린이 바게트 한 조각을 들어 끄트머리를 물었다.
“해연 길드장은 여전히 한국에 머물러 있나?”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이것도 미스터가 틀렸군요. 길어야 석 달 내에 한국을 뜰 거라시더니.”
의자가 가볍게 밀리며 성현제가 몸을 일으켰다.
“직접 본 건 고작해야 두 번뿐이니 파악이 덜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의외야. 한국은 송태원 실장 때문에 날뛰기 좋은 환경이 아니니 오래 못 버틸 줄 알았는데.”
“미스터와, 리에트와 비슷한 류라고 했지요. 그 최연소 S급.”
“그래. 성질로 따지자면 나와 리에트가 더 가깝겠지만.”
“그래 봤자 둘 다 동급으로 생각하진 않으시잖아요. 죄다 아래지.”
성현제가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겨갔다. 바 위에 지폐가 내리 놓아졌다.
같은 태생 S급, 동족이라고 말은 해도 에블린의 말처럼 성현제에게 있어 한유현과 리에트는 같은 위치에 서는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나란히 서기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너무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있어선 태생 S급이라 해도, 사실상 다른 S급 헌터들, 혹은 비각성자와도 같았다. 손 내밀어 키워 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감별 대상으로.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태생 S급이 하급 각성자보다도 못한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공평한 시선이라 할 수 있었다.
“올해 내 생일에는 해외의 S급 헌터들에게 초대장을 돌릴 생각이야. S급 헌터 에블린 밀러도 그때 소개하고.”
이미 S급으로 각성한 에블린이었지만 아직은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 기척을 숨기는 스킬을 가볍게 응용하면 S급 헌터 상대로도 평범한 비각성자처럼 비치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세성에─”
“사양하겠습니다.”
에블린이 딱 잘라 말했다.
“한동안은 프리 헌터로 남고 싶어요.”
“섭섭한데.”
“결혼이라도 하시면 고려해 보죠.”
문이 열리고 탁 트인 풀밭이 나타났다. 양 몇 마리가 울타리 너머에서 서로 몸을 맞댄 채 웅크리고 있었다.
“여기서도 결혼 소리를 들을 줄이야.”
“정확히는 미스터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금은 여차할 땐 도망가면 그만이지만 길드에 소속된 후엔 튀기 힘들어지니까요.”
암갈색, 적갈색, 회갈색 등의 벽돌집이 나란히 서 있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일견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박살 난 승용차가 나타났다. 깨진 창문과 부서진 벽 부근에 체액이 흘러넘친 흔적이 남아 있다. 도로 한쪽도 무언가에 흥건히 젖었다가 햇살에 말라가고 있었다.
그때 하늘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다다─ 헬기가 두 사람에게로 접근해 오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총탄이 도로의 표면을 비 오는 날 흙탕물 튀기듯 박살 낸다. 그와 동시에 금빛 사슬이 차르륵 주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 몸뚱이쯤 가볍게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릴 화력이었지만 단 하나의 총알도 사슬을 통과하지 못했다. 흠집조차 나지 않은 사슬이 이번엔 제 차례라는 듯 헬기를 향해 쏘아졌다.
콰득! 수색자의 사슬이 헬기의 바닥 부분을 꿰뚫고 그대로 천장을 가로질러 회전하는 날개를 박살 낸다. 날개를 잃은 헬기가 기우뚱 바닥으로 떨어진다. 추락의 요란한 소리가 울리기 직전, 다섯 명의 사람이 헬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비교적 평화로워.”
“어차피 기관총쯤 통하지도 않잖아요. 총알에 마력이라도 넣을 수 있다면 모를까.”
“옷이 상해.”
“그건 귀찮긴 해요. 매일 던전 아이템만 입고 다닐 수도 없고.”
잡담이 오가는 사이 헬기에서 뛰어내린 자들이 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중 가장 앞에 선 남자는 S급 헌터였다.
“나는─”
“자기소개는 비서실을 통하도록.”
잡상인을 대하는 듯한 시선에 S급 헌터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로선 S급으로 각성한 이후는 물론 이전에도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에블린은 비각성자인 척 조용히 뒤쪽으로 물러섰다.
“네게 S급 무기가 있다고 알고 있다.”
“나보다 인기 많다니까.”
성현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 주위를 맴도는 금빛 사슬을 가볍게 매만졌다.
고상한 수색자의 사슬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한 S급 이상 무기로 알려져 있었다. S급 던전의 수가 극히 적은 지금은 S급 다른 장비는 소수 있어도 무기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수색자의 사슬을 탐내는 S급 헌터들이 더러 있었다.
“그 사슬을─”
탓, 구둣발이 바닥을 박찼다. 성현제의 몸이 순식간에 S급 헌터의 바로 앞까지 쇄도한다. 움직임을 눈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급습이었지만 상대 또한 S급은 S급. 그가 재빠르게 태도를 들어 올리며 반격하려는 순간.
탕! 뜬금없는 총성이 울렸다. 어느새 사슬로 무리들 중 하나의 총을 빼앗은 성현제가 S급 헌터의 이마를 향해 쏜 것이었다.
“윽!”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중급 이상 헌터들 또한 스스로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몸을 보호하기에 일반적인 무기로는 상처를 잘 입지 않았다. 하지만 무방비한 상태로는 S급 헌터라 해도 코앞에서 쏘아진 탄환에는 이마를 강하게 얻어맞는 정도의 타격은 있었다. 심지어 머리다 보니 두개골 안쪽까지 전해지는 흔들림에 조금쯤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현제가 평범한 총을 쓸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던 S급 헌터가 당황하기도 전에, 힘을 실은 킥이 그의 복부를 강하게 두들겼다.
쾅!
그대로 날아간 S급 헌터의 몸이 건물 벽을 뚫고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금색 사슬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남은 넷을 채찍처럼 한 번에 휘둘러 후려쳤다. 비명 소리와 함께 네 명의 장정이 짚단처럼 풀썩풀썩 쓰러져 나뒹군다. 피가 튀진 않았지만 뼈는 한두 군데쯤 부러졌을 터였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애송이인가.”
“그렇지 않을까요. 무턱대고 덤벼드는 꼴을 보면.”
“S급 헌터를 일부러 줄일 필요는 없겠지. 아무리 멍청해도.”
구멍 난 벽에서 기어나온 S급 헌터가 노려봐 왔지만 성현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런던에 도착한 성현제는 자신의 손길이 닿아 있는 영국 헌터 길드 길드장과 만났다. 눈에 차지 않는 점이 더러 있는 남자였지만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그 밖의 몇 가지 일을 처리한 뒤 공항으로 향했다.
영국에 도착해 잠깐 헤어졌던 에블린도 배웅을 위해 공항으로 왔다.
“이번에는 좀 오래 머무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이쪽으로 오지 마시거나.”
“인도 쪽으로 가볼 예정이야. 체계가 아직 엉망인 만큼 건질 것도 많겠지.”
“덤비는 멍청이들도 더 많을 거고요. 어느 공무원분께서 또 고생하게 될 확률이 높겠군요.”
“생일 선물이라도 잘 챙겨 줘야겠군.”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는 고급스런 대기실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겉보기에는 마흔 살 안팎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럼에도 머리카락은 눈이라도 내린 듯 새하얬다.
성현제가 약간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반응에 에블린 또한 놀라고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안녕하세요, 세성 길드장님. 영국 헌터협회 소속 마리사 무어입니다.”
그녀가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처음 뵙는 듯하군요.”
“네. 최근에 각성했습니다. 스탯 B급, 등급 B급의 중급 헌터지요.”
마리사가 자신의 등급을 먼저 밝혔다. 그녀를 살피던 성현제가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세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올해로 64세입니다.”
“무척이나 젊어 보이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마리사는 영국 헌터협회 인장이 찍힌 편지를 성현제에게 건넸다.
“덧붙여 영국으로 오실 시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마리사는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곧장 돌아갔다. 내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던 에블린이 문이 닫히자마자 물었다.
“이상하리만치 정중하군요, 미스터.”
“해연 길드장보다는 리에트가 나와 성질이 가깝다고 말했었지.”
“예. 그랬었지요.”
“저분은, 그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군.”
성현제가 손에 들린 편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에블린이 한쪽 눈가를 약간 찌푸렸다.
“분명 B급이라고 했습니다만. 제가 느끼기에도 스탯은 B급 정도였습니다. 혹시 스탯을 감춘 겁니까?”
“아니. 내가 보기에도 B급이야. 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성현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각성한 S급 헌터는 대부분이 20대지. 많아도 30대 중반 정도고 40살을 넘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만약 S급으로 각성할 수 있었던 사람이 시기를 놓치고 50세, 60세가 되었다면. 그럼 타고난 능력치보다 낮은 등급으로 각성하지 않을까.”
에블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젊은 사람의 각성 등급이 대체로 높은 건 사실이지요. 그럼 무어 여사께선 원래는 S급 각성자였을까요.”
“나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지.”
“신경 쓰이신다면 영입 시도라도 해보시지요. 한국어도 잘하던데.”
“받아들일 것 같진 않아. 대신 정기적으로 확인 정도는 해보도록.”
성현제의 시선이 닫힌 문에 잠깐 닿았다가 거두어졌다.
* * *
“길드장님! 이거 보실래요?”
강소영이 휴대폰을 성현제 앞에 내밀었다. 폰 화면 속에 캡처된 사진이 가득 차 있었다. 분홍빛 도는 은발을 한 성현제였다.
“아직도 화제라니까요. 세성 길드장의 새로운 스타일!”
휴대폰을 거둔 그녀가 이번에는 다른 사진을 열었다. 역시나 성현제, 체인질링의 사진이었다.
“용 모습은 거절해서 못 찍었어요. 정말 귀여웠는데. 아, 한 소장님 부럽다~”
“주책맞다, 벌써 노망났나 하는 소리도 있지만 대체로 반응은 좋습니다. 어울리긴 하니까요.”
에블린이 대응하시겠냐고 물었다. 성현제는 짧게 고개 저으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의 일을 물었다. 에블린이 간략하게 그간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몇 가지 변화가 생길 듯합니다. 한국과 달리 몬스터 출몰 사태로 피해가 컸던 곳이 많으니까요.”
“아직은 나갈 일이 없었으면 싶건만.”
“예전 생각나네요. 한국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으셨는데.”
“밀러 헌터가 세성 길드에 들어오기 싫다고 한 적도 있었지.”
“지금은 여차하면 한 소장님을 던져 놓고 튀면 되니까요. 모자라다 싶으면 송 실장님도요.”
맞아요, 하고 강소영이 거들었다.
“편하다니까요, 한 소장님. 그래도 다치게 하시면 안 돼요. 앞으로 또 어떤 용을 키워 주실지 모르니까요! 어? 손에 뭐예요?”
강소영이 직접 잡고 확인은 차마 못 하고 손가락질로만 가리켰다. 성현제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다 지워지지 못한 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내 이름.”
“…와, 진짜 노… 음. 흠흠.”
강소영이 말을 하다 말고 스르륵 뒷걸음질 쳤다.
“반테스를 불러 주게. 내일 중요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