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60
제160화
아무것도 없는 전후방.
멈춘 공기.
구름 없는 하늘.
이정표나 나아갈 방향조차 가늠되지 않는 아찔한 기시감.
유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몸에 긴장을 덜었다.
“딱 봐도 안내하는 거 같네.”
[어딜 봐서 이게 안내니?]“왠지 그런 직감이 들어. 어쨌든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잖아.”
보이지 않는 크리스털이 엄청 보잘 것 없는 아티팩트 같지만, 엄연히 에덴부르크 신이 세상의 모든 바람을 모아 만든 신물이다.
신물이 있는 곳엔 항상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으니.
지금까지 신물을 만나본 결과, 이런 짓을 신물들이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갑자기 세상이 바뀐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아니면 혹시 모르니까 베어볼까?”
[추천하지 않아요, 주인님. 여기서 마나를 썼다간 아마 세계가 불탈 거예요.]“무슨 뜻이야?”
[미세하게 퍼져 있는 마나를 인화성 가스라고 보면 쉽겠네요. 마법을 썼다간 공기가 타서 주인님도 같이 불 탈 걸요.]“…….”
유리는 티르빙을 뽑으려고 뻗었던 손을 거뒀다.
마법조차 쓸 수 없는 공간이라니.
이러면 정말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결국 무작정 걸어야 되겠네.”
[답도 없이? 난 모르겠다. 차라리 드래곤 하트로 몸을 보호하고 이 공간을 통째로 베어버리는 건 어때?]“신이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시험지를 아예 잘라버리자?”
참고로 창조주는 드래곤과 정령이 중간계를 안정화시키면서 그 존재를 감췄다고 전해진다.
그와 달리 에덴부르크를 비롯한 작은 신들은 아직 살아있다고 알려져 있다.
계시자인 엘카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창조주를 섬기는 종교의 추기경이지만, 그녀가 받는 계시는 창조주가 아니라 다른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마 에덴부르크도 계시를 준다는 그 신처럼 살아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답을 주고 시작하는 문제는 없어. 문제의 답을 찾으러 다니는 거지. 그리고 나갈 길을 찾으려면 일단 어디든 다녀야 하지 않겠어?”
[망나니 신이 시시한 장난질이나 해놓고. 쩝.] [어쩌겠어요. 우선 주인님 말대로 걸어보죠. 그러다 통로가 나올지 누가 알겠어요?]에덴부르크의 장난인지, 신물의 장난인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자연적 현상이든지.
어쨌든 걷는 거 말고는 현재로선 답이 없었다.
다행히 마을에서 물과 식량을 챙겨왔으니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일주일 이상은 걸을 작정을 해야 된다는 거지.’
모르는 정보, 모르는 세계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몰라서 경계한다기보다. 알고 있는 미래나 원작 덕분에 편하게 살았던 마음이 문제였다.
그간 알고 있는 미래를 토대로 쉽게 해결해온 것에 비해, 이번 여정은 어찌될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런 마당에 언제나 그랬듯 해결할 수 있다고 안심했다간 갑자기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기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더 단단히 먹어야 했다.
그렇게 유리는 무작정 사막을 건너기 시작했다.
* * *
2일째.
유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다.
소금 사막은 알고 있던 사막과 달리 혹독한 환경은 아니었다. 덥지 않았고, 딱히 춥지도 않았다.
다만, 바람이 불지 않아서 숨을 쉬어도 숨을 쉬는 건지 헷갈렸다. 흡사 진공 상태에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낮과 밤이 없다.”
하늘은 태양 없이도 터무니없이 밝았다.
어디서 빛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물이 자체 발광을 하는 걸까.
아니면 물 아래 땅에서?
3일째.
이때부턴 잠을 조금씩 청했다.
클라우드 하트와 접속 이후 정신적인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그에게 수면은 사치였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피로감을 최대한 덜어내야 했다.
문제는 잘 곳이 없었다.
마법 주머니에서 천막을 꺼내도 바닥이 물로 흥건해서 수면 위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결국 임시 처방으로 천막 기둥과 천을 잘라 해먹을 만들었고, 마나를 발산하지 않고 체내에서 굴려가며 체온을 유지했다.
괜스레 몰려드는 한기에 유리는 몸을 움츠렸다.
7일째.
식량을 아꼈건만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
유리는 마법 주머니에 든 식량을 전부 풀어헤치고 해먹 위에 올려놨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산한 대로 남아야 하는 식량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충동적으로 식량을 먹은 적은 결코 없었다. 하물며 몇 번은 계산 외로 끼니를 거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식량이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물이 없다.’
식량도 식량인데 물은 더 부족했다.
이건 더 아껴먹었거늘.
문득 유리는 바닥을 쳐다봤다.
발아래 소금물이 찰랑거리며 갈증을 유혹했다.
‘안 돼.’
아무리 목이 말라도 소금물은 더한 탈진을 불러온다. 절대, 절대 마셔선 안 된다.
유리는 원래대로 식량과 물통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다시 걸어야 할 시간이다.
13일째.
식량이 엊그제 바닥났다. 역시나 계산보다 빠르게 소진되었다.
물은…….
“없다.”
가방에서 손을 넣다 빼니 홀쭉해진 물 주머니가 딸려 나왔다.
물은 앞으로 4일 정도 더 먹을 수 있게 남겨놨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물이 새는 것도 아니고, 먹기는 더 아껴 먹었다.
방법이 없을까.
“티르빙.”
[…….]“티르빙?”
[…….]“아스칼론! 티르빙!”
[…….] […….]새로운 별빛나무의 이름까지 불러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헌데 지금 영혼을 둘러보니 그녀들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감쪽같이 그녀들이 사라지자 유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 하하. 이젠 별의 별 짓을 다하는군.”
솔직히 불안했다.
클라우드 하트 땐 수 십 번을 죽음과 마주했었으나, 결국 드래곤들이 살려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와 달리 지금은 유리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셈이었다.
또한 구해줄 사람은 없으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마인드는 더더욱 확신으로 들어찼다.
“제대로 날 시험하겠다는 건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연달아 벌어졌다.
기이한 공간에 사라져가는 식량, 자취를 감춘 티르빙과 아스칼론.
분명 보이지 않는 크리스털이나 에덴부르크의 시험이었다.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유리는 부들거리는 몸을 힘껏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멈추면 절대 답을 찾을 수 없으리라.
21일째.
시험이라는 게 확신이 드는 일이 발생했다.
분명 비어있던 물주머니가 갑자기 꽉 차 있던 것이다.
심지어 물주머니 개수도 늘어났다. 원래 큰 물 주머니 두 개였는데, 지금은 세 개가 되었다.
그리고 세 개의 주머니 주둥이에 쪽지가 달려 있었다.
세 가지 중 하나가 물이다.
고르라는 건가.
틀리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유리는 신중히 물주머니를 살폈다.
딱히 겉만 봐선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온도라든가 냄새, 양이 다 똑같았다. 그나마 주머니 색이 묘하게 달랐다.
“빨간 가죽, 노란 가죽, 검은 가죽이라…….”
그나마 전에 마시던 물 주머니와 비슷한 노란 가죽을 골랐다.
그러자 뚜껑에 달린 쪽지에 다른 내용이 적혔다.
남은 두 개의 물 주머니 중 빨간 주머니엔 물이 아닌 피가 담겨 있다. 바꿀 것인가?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문제인데.
체력이 방전되면서 사고 회로가 의도만큼 돌아가질 않았다.
그나마 그의 마지막 본능이 답을 골라줬다.
‘바꿔야 한다.’
그의 본능대로 여기서 선택을 바꿔야지만 물을 선택할 확률이 높았다.
전생에 유명했던 수학 문제인 몬티홀이었다. 유리는 그걸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건 전생의 수학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로 에덴부르크의 시험이라면 뭘 선택하든 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셈.
“마시지 않겠다.”
어차피 가져온 물은 진즉에 바닥났다. 유리는 물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모조리 바닥에 버렸다.
피와 구정물, 달궈진 황금물이 줄줄줄 흘러 발목 근처로 퍼졌다.
원래부터 물 따윈 없었다.
신은 넌 살 수 있다는 기회를 극한의 상황에서 줬다.
“죽음으로 날 통제할 수 있다 여긴다면 착각이야.”
유리는 물주머니를 돌아온 길 쪽으로 힘껏 던졌다. 이걸 가지고 있는 것부터 미련이었다.
신이 물주머니를 제대로 채워줄 것 같지도 않고.
물을 주려 한다면 물주머니를 만들어서 주겠지.
그때까지 유리는 신에게 농락당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 * *
유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얀 머리와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사막 한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엔 흰자위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이었으나, 이곳은 그의 세계이고 그는 자신의 세계 어디든 마음대로 엿보았다.
그가 바로 창조주와 함께 세상의 대기를 구성한 신 에덴부르크였다.
“클클클, 여태까지 내 영역을 침범한 어떤 인간보다 흥미롭구나.”
이곳 소금 사막은 오래 전부터 에덴부르크가 머물던 땅이었다.
원래는 바다였던 곳으로, 그가 정착하면서 바람에 바다가 밀리고 산과 돌, 땅이 깎였다.
이어서 하늘의 빛과 어둠마저 풍화되어 사라져서 지금의 소금 사막이 되었다.
유리가 가지고 있던 식량이나 물, 티르빙과 아스칼론이 사라진 것도 바람에 휩쓸려서 그리 된 것이었다.
바람으로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
그건 에덴부르크가 신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돌려보내려 했더니, 클클!”
방금 유리가 모든 물 주머니를 바닥에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물을 전부 버리다니.
사실 소금 사막을 오기로 건너려는 자들이 있으면 에덴부르크는 그들에게 시험을 내렸다.
이 시험을 줄 때마다 멍청한 자들은 다짜고짜 물을 마셨고, 정신이 멀쩡한 자는 고민이라도 해본다.
그에 반해 유리는 망설이지 않고 모든 물주머니를 비웠다.
그리곤 다신 유혹 당하지 않겠다는 듯 주머니까지 전부 버렸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건만. 이게 예언을 막는 자라는 건가.”
에덴부르크는 눈을 감았다가 하늘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자 무풍 지대였던 곳에 드디어 공기가 거세게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이것도 견뎌 보거라.”
바람은 보이지 않는 칼날을 품고 유리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