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10
제210화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정령왕은 그저 바다를 가르며 헤엄만 치고 있었다.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
그러다 결국 정령왕이 말문을 뗐다.
“원래라면 이 책을 그대가 보도록 되어 있었다.”
“되어 있었다고요?”
“내가 말해줄 순 있는 건 거기까지다. 그러나 미앵비슈가 죽으면서 책을 지키라는 사명을 다하지 못했지.”
“사명이라는 건,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 책을 지키라고 명했다는 겁니까?”
“……………….”
“알겠습니다. 더는 말씀해 주실 수 없다는 거군요.”
“실망한 눈치군. 못 믿기도 하고.”
“실망은 했지만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상했었을 뿐.
여전히 이 책과 서재가 어째서 여기 있으며, 무슨 이유로 엘 더 하임이 이걸 지키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아예 모른다고 할 순 없었다.
저자 유리.
이건 명백한 증거였다.
유리가 이 책을 썼고, 책을 엘 더 하임에게 맡겼을 거라는 증거.
“…….”
유리는 그 이상의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엘 더 하임이 처음부터 그랬듯, 그는 끝끝내 아무런 말도 안 해줄 것이다.
유리도 책의 저자와 출처에 관해선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냈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정령왕께선 이 책을 읽어보셨겠죠.”
“읽어봤다.”
“그렇다면 왜 악마와의 참전을 고려하지 않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 책에 나의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우리의 계약 없이도 악마를 대항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원작에 정령술사들이 등장한다 한들 끝끝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령들의 힘이 약한 건 아니었으니.
악마들이 집요하게 정령술사들을 노리는 바람이 그들이 일찍 죽었을 뿐.
반대로 보자면 정령술은 악마와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유리가 굳이 라군도와 계약한 채럿, 그리고 이자벨과 물의 정령왕을 계약하려는 이유도 그런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엘 더 하임은 그런 강력함을 언급한 게 아니었다.
“그대 또한 책의 내용을 알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그대가 직접 악마들과 대적할 필욘 없다. 카이가 알아서 해줄 테니.”
“그게 이유입니까? 굳이 정령왕님과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막아줄 사람이 있으니까?”
“아니다.”
정령왕이 말했다.
“우리의 힘으로 악마를 막을 수 없다.”
“…….”
“이해 못한 건가? 카이라는 주인공은 그대와 나를 택하지 않았다. 그 자의 선택은 항상 옳았다. 그런 그가 우리를 택하지 않은 건 우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주인공인 카이는 늘 옳은 선택을 해왔다. 가끔 실패하고, 비인간적인 선택을 하긴 하지만.
어쨌든 악마를 물리치는 수단으로 정령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건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경험을 쌓은 카이였다.
카이의 선택이 그렇다고 하는데, 누구도 그의 의견에 반발할 수는 없을 터.
책을 읽어 본 엘 더 하임도 카이의 선택이 옳았다고 여겼다. 정령을 택하지 않고서도 멸망을 막았으니까.
그러나.
“카이와는 상관없습니다.”
유리는 그리 말했다.
“카이가 멸망을 막는 주체가 되긴 하겠지만, 전 그 녀석한테 선택 받으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허면 그대는 왜 이곳에 있지?”
아까 유리가 던졌던 질문이 역으로 되돌아왔다.
난 여기 왜 있는가.
어쩐지 유리는 그 질문의 답을 스스로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그 답은 오래 전부터 했던 각오와 똑같았다.
애초에 유리는 직접적으로 멸망을 막을 마음이 없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지내면서 마음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당장 이자벨 때만 하더라도 그녀가 제 편이 되어줄 거라곤 알지 못했다. 그녀가 교환 학생으로 가문에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채럿, 밀리샤, 엘카, 모두가 그랬다.
의도하지 않은 인연들이 계속되면서 유리로선 알게 모르게 책임감이 늘어갔다.
왜 책임감이 늘었을까.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들과의 인연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았다.
시작은 필요에 의한 인연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있으면 좋은 인연이 되었으니.
“지키고 싶은 걸 지키려 왔습니다.”
“…….”
순간 고래의 등이 파르르 떨렸다. 거대한 진동에 서재의 책들이 와르르 떨어지고 유리와 미앵비슈가 휘청거렸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멈춘 떨림과 동시에 다시금 엘 더 하임이 말했다.
“영혼계에 있는 우리 정령들이 물질계에 영향을 끼치는 건 좋지 못하다. 그건 그대도 알고 있겠지.”
“‘범람’ 때문이군요.”
악마들의 강림 방식이었던 ‘범람’.
모든 것에는 그릇이 있다는 마법사들의 가설이 하나 있다.
그릇이라 함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크게는 세계, 작게는 생명과 육체, 또 다른 의미로는 한계라고도 칭했다.
악마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사는 마계에서 악마의 영혼이 범람하면서 물질계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강제로 영혼을 늘렸고.
강림만으론 제한적인 숫자 밖에 물질계에 나올 수 없던 걸 극복한 것이다.
정령계 또한 물질계가 내포할 수 있는 영혼의 숫자와 크기는 정해져 있다.
여기에 정령들이 넘어갈 땐 그만한 ‘범람’이 일어난다.
이 범람이 지속되면 정령계와 물질계가 허물어지면서 세계에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한다.
“하지만 악마를 막기 위해서라면‘범람’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다른 멸망을 초래한다 해도?”
“악마들에 의한 멸망보단 낫겠죠.”
순간 정령왕이 크게 꼬리를 움직였다. 거대한 물살에 정령들이 휘말려서 멀리 날아갔다.
같은 멸망이어도 다른 멸망이 낫다는 말에 기겁한 엘 더 하임. 그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실로 무서운 발상이군. 하나를 망가뜨리기 위해 다른 걸 망가뜨리겠다는 것이냐.”
“그럴 수만 있다면요.”
“정령계의 왕인 내게 정령계를 망가뜨리겠다는 망발을 하면서까지 나에게 도움을 청하겠다고?”
“네.”
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엘 더 하임과 미앵비슈는 그런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의지를 가졌는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어차피 물질계가 멸망한다면 정령계의 멸망도 자명했다. 악마들의 목적은 단순히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결국 누군가를 희생하더라도 저지해야만 했다.
유리는 그 희생이 무엇이든 멸망을 막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엘 더 하임은 다시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책의 저자가 괜히 그대의 이름을 쓴 건 아닌 모양이군. 감히 세상의 멸망을 논하고 이 몸에게 서재를 지키게 했으니.”
“그렇다 함은……?”
“책을 지키는 자로서 도움을 주겠다. 이자벨이라는 그 사람과도 계약을 고려해보겠다.”
“감사합니다.”
이로서 조건이 갖춰졌다.
유리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엘 더 하임은 용왕과의 화해도 쉽게 받아들였다.
듣고 보니 그들의 사랑 싸움은 유치할 정도로 사소하면서 오래 갔지만, 반대로 사소해서 금방 해결되었다.
오히려 엘 더 하임은 데카라비아 때문에 곤란했었다.
물질계에 있는 용왕에게 직접 계약이 아니고선 간섭할 수 없었던 엘 더 하임은 이번 일을 계기로 유리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아무도 정령계 밖에서 일어난 멸망의 가속화를 예측하진 못했다.
유리가 게슐츠와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땐, 악마 몇몇이 침공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 * *
얼마 전 채럿은 가주 대행직을 공식적으로 임명받아 여러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주 대행직을 맡자마자 샤를린느에게도 부가주 대행직을 맡겼다.
꽤나 많은 반발이 일어났지만, 샤를린느가 가문 내에서 많은 업무 처리를 해왔기에 반발심은 금방 사그러 들었다.
원래 가주였던 벤헬링턴, 부가주였던 마리는 이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더 길게 자리를 비워야 하니 채럿에게 모든 걸 일임했다.
그렇게 2주 하고도 며칠이 지난 무렵.
“솔리드녹스에서요?”
“네.”
채럿은 플레온 기사단 본부에서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황급히 뛰어 들어온 블레이크가 소식 하나를 전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상황을 전했다.
“빅스터입니다.”
“확실해요? 빅스터 님이라고요?”
“네. 단원들이 확인했고…… 현재 대치 중입니다.”
“얼른 가죠!”
쥐고 있던 서류와 펜을 전부 내팽겨 둔 채 채럿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블레이크도 그녀를 따랐고, 밖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 또한 그녀의 꽁무니에 따라 붙었다.
‘빅스터라니. 하필 이런 시기에…….’
여전히 나이트워커 내부는 어지럽게 돌아갔다.
미앵비슈 건이야 아직 처리도 안 됐고, 다이올드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와중에 장로들은 계속해서 미다스에 관한 처분을 해달라며 채럿을 닦달했다.
어떻게든 다이올드가 돌아올 거라 믿는 거겠지.
“빅스터가 왜 왔는지는 말 안 하던가요?”
“아무 말도 없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베리온 제국 황실 측에서도 막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 과정에서 부상자도 있었고요.”
“무력 충돌이 있었다고요?”
“막무가내였다고 합니다.”
“대체 왜…….”
나이트워커가 혼란스러운 것에 비해 솔리드녹스는 비슷한 일을 겪고도 조용히 지나갔다.
최근 솔리드녹스의 가주가 죽었다.
죽음의 진상에 관해선 좋지 못한 소문이 돌았다. 채럿의 정보망에서 확보한 진실은 그보다 더 추악했고.
그런 것에 비해 솔리드녹스의 차기 가주는 예정된 수순대로 빅스터가 차지했다.
가려진 마도사.
이 시대 유일한 용언 마법의 술식자.
‘이제 와서 우리 가문을 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이트워커과 솔리드녹스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100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동안 작고 큰 충돌이 없진 않았지만, 서로의 영지에 출몰하는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앙숙 가문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충돌이 불러온 대륙 정세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니까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회가 있다면 또 다르다.
가주와 부가주가 없고, 마땅한 권력자도 없는 나이트워커는 무주공산과 같았다.
“블레이크 경.”
“네, 하명하십시오.”
“하명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빅스터가 있는 광장에 다다랐다.
영지 외곽에 자리한 작은 마을과 그 광장엔 병사들로 꽉 차 있었다.
모두가 긴장감에 땀을 흘리는 동안, 정작 화제의 중심에 선 빅스터는 바닥에 주저앉아 다과를 차리고 있었다.
“손님들이 오셨나보군요.”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새롭게 등장한 무리를 느꼈다.
채럿이 병사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섰다.
“전 나이트워커 가주 대행 채럿 알리아스 나이트워커입니다.”
“오, 처음 뵙습니다. 전―”
“알고 있어요. 빅스터 님이죠.”
“후후후, 누추한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영광이군요.”
능글맞은 태도에도 채럿과 기사단들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듣던 대로 빅스터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용인의 범주마저 초월했다.
그런 와중에도 채럿은 그런 빅스터와 벤헬링턴을 비교했다.
둘 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시면서 말썽을 일으켰더군요.”
“말썽이라.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나의 땅에 멋대로 들어와놓고 말썽이 아니면 뭐죠?”
누가 이길지 비교야 어찌됐든.
채럿은 가주 대행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갔다.
“나이트워커의 가주로서 정식적으로 경고합니다. 당장 여기서 나가주세요.”
“흐음, 당돌하신 분이라고 들었지만…… 저한테도 이리 말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군요.”
“용언 마법 좀 부린다고 자만하고 있다면 미리 말해두죠. 원래 가주님과 부가주님이 없다고 해서 당신 하나 못 죽일 전력은 아닙니다.”
“솔리드녹스와 전쟁이라고 하겠다고요?”
“……당신 하나 죽이는 겁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요.”
채럿의 말은 단순한 전쟁 선포 따위가 아니었다.
현 솔리드녹스의 가주인 빅스터를 이곳에서 죽이더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만한 외교적, 정치적 능력을 갖췄으니 자신을 무시 하지 말라는 채럿의 또 다른 경고인 셈.
빅스터는 조소하다가 단숨에 표정을 고쳐 잡았다.
“실례했습니다. 이것은 빅스터가 아닌 솔리드녹스의 가주가 드리는 사과입니다.”
“그럼 나가주시죠.”
“그건 곤란합니다.”
그리 말한 빅스터가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났다. 그리곤 머리 위 하늘을 지팡이 끝으로 가리켰다.
채럿을 포함한 모두가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빠르게 구름들이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더니 순식간에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빅스터도 하늘을 올려다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짜증나는 손객에게 쫓기고 있거든요.”
어지러이 물결치던 구름들은 갑자기 종잇장처럼 평평해지더니 웬 얼굴 형상을 갖춰갔다.
산양의 눈, 주름진 뿔,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
흉악하게 생긴 그 얼굴을 보고 어떤 병사가 읊조렸다.
“악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