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75
75화 비정기회의
카이루스의 질문에 멜빈이 어,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고민을 이어간다.
그 거대한 대피소 안에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폰투스는 그 자체가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카이루스를 포함한 여기 세 명은 폰투스를 가질 수 없다.
폰투스의 주인은 장미정원이 될 예정이다. 그러니, 돈이 될 만한 가치 있는 다른 것들을 챙겨야 한다.
“글쎄요. 건축 목적을 생각해보면….”
자신들의 최후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한 안식처다.
멜빈은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보았다. 물론 다양한 것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카이루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도 금은보화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아. 대피소라고 했잖아.”
폰투스는 대피소다. 대피소에 금은보화를 넣어놓는 경우는 없다.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금은보화나 사치품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
멜빈이 카이루스의 생각과는 다른 추측을 내놓았다.
“해당 대피소는 데르소스의 왕족들을 위해 마련된 대피소입니다.”
원래 귀하게 태어난 녀석들은 대피소에서도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법이다.
“왕릉처럼 무지막지한 양의 금은보화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양의 귀금속은 기대해 볼 만합니다. 하지만….”
멜빈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역시 대피소에 미리 넣어놓은 무수한 자료들이겠죠.”
카이루스는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자료?”
“폰투스는 국가 멸망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최후 선택지입니다.”
즉, 지상에 존재하는 데르소스의 모든 것이 싹 쓸려나간다는 소리다.
“폰투스에는 완공 당시까지 데르소스 문명에서 집필된 주요한 서적이 거의 전부 비치되어 있을 겁니다.”
대피소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갔을 때, 비치된 자료를 참고해 다시금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폰투스에는 데르소스 문명이 누리고 활용하던 무수한 지식들이 잠들어있다.
“현대에 와서는 과거의 지식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지 않아?”
고대 문명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써먹을 만한 고대의 지식이라는 건 사실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잊혀진 기술이라고들 하지만, 잊혀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써먹지 못할 지식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 그 점은 동의해.”
데르소스 문명의 흔적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은 많다. 뭐든지 가져와서 팔면 돈이 될 거다.
“지금은 소실된 배틀기어 재련법이나 당시 무술에 관련된 서적도 기대해 볼 만 합니다. 아니, 확률은 굉장히 높습니다.”
“배틀기어 재련법이라.”
과거의 배틀기어 재련법은 도태되었고, 결국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균일품질 대량생산이 가능한 현대의 배틀기어가 훨씬 유용하니까. 지금 와서는 다시 옛날 방식으로 배틀기어를 재련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사라진 건 이유가 있는 거야. 그건 관심 없어.”
과거의 배틀기어 재련법은 확실히 고점이 높다. 하지만 그 고점을 달성할 확률이 극악하다. 그 낮은 확률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당시의 무술이라.”
카이루스 또한 싸움을 밥 먹듯이 하며 살아왔다. 과거의 검술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고대 검술이라… 멋지네.”
관심을 보이는 건 카이루스뿐이 아니었다. 일레나도 당연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실, 새로운 검술에 대한 열망은 일레나가 훨씬 더 간절한 편이다.
‘어차피 나도 카이루스처럼 제풍이 한계야.’
페더윙 직계가 아니라면 제풍 이상의 검술을 익힐 수 없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제풍이 부족한 검술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레나 입장에서는 다른 검술을 익히고 싶은 열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만약 폰투스에 멜빈이 말한 서적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다.
“애드온이나 배틀기어 같은 건 따로 없을까?”
카이루스의 말에 멜빈이 꽤나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뛰어난 물건은 없을 겁니다. 국가 멸망 위기를 대비하기 위한 시설이니까요.”
국가가 망할 위기라면 좋은 배틀기어나 애드온은 전장에 투입해야지, 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지하에 파묻어 놓는 건 비정상이니까.
멜빈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카이루스도 폰투스에서 챙겨야 하는 품목의 범위를 나름대로 좁힐 수 있었다.
‘서적.’
어차피 폰투스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카이루스가 모조리 독점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최대한 노른자만 뽑아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잠시 쉬고 있으려니, 갑자기 멜빈이 카이루스에게 질문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장미정원이라는 조직은 뭣도 모르는 제가 봐도 굉장히 강력한 범죄조직 같습니다.”
카이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뭣도 모른다 해도 지금 우리를 싣고 달리는 기차칸만 봐도 그 위세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카이루스 씨에게서 유척검을 그냥 강탈할 수도 있을 텐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했네.”
카이루스는 멜빈의 말을 듣고 픽 웃었다.
“내가 곱게 빼앗길 거라고 생각하냐?”
“아니요. 그러니까 빼앗는 거 아닐까요.”
뭐, 생각 자체는 책만 읽으며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온 샌님치고는 꽤나 날카로웠다.
카이루스는 그 점은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결국 샌님들이 할 수 있는 생각에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 개수작을 시도하면, 그 순간 내가 유척검을 박살 내겠지.”
유척검은 배틀기어도 아니고, 설사 배틀기어라 해도 명멸의 출력을 동원해 연타하면 충분히 박살 낼 수 있다.
“아니, 그 귀중한 물건을 부수겠다는 겁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멜빈이 경악했다.
“귀중이고 나발이고, 내 물건 빼앗겠다는데 ‘네, 여기 있습니다. 어서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면서 구경이나 할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뿐인 물건을 그렇게 즉시 박살 내면 다음이 없지 않습니까.”
카이루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다음.
“너희 같은 양반들은 항상 다음을 생각한단 말이야. 마치 강도가 물건만 가져가고 너는 살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
강도는 물건을 빼앗고 주인을 죽인다. 온갖 흉악범들이 가득한 칼슨 노동교화소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면 형량이 늘어나잖아요.”
카이루스는 참으로 순진해보이는 멜빈의 말에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강도가 은행 털 때 잡힐 거라 생각하고 터는 것 같냐?”
“네?”
멜빈이 멍하니 카이루스를 바라본다.
“잡힐 거라고 생각하면 은행을 왜 털어. 개고생해봤자 무조건 징역을 살 텐데.”
“그건, 그렇죠.”
멜빈이 동의하자 카이루스가 여전히 히죽거리며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다.
“안 잡힐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른 강도들은 다 잡혀갔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거지.”
탁, 하고 테이블을 손등으로 치며 카이루스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안 잡힐 거니까 사람 죽여서 형량 늘어나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
오히려 목격자나 피해자를 죽이면 신고할 사람이 줄어드니 무사히 도망칠 확률이 더 늘어나는 셈이다.
“그렇군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잡힌 이후를 걱정하는 강도는,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생각을 하는 군인 같은 거다.
다시금 침묵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침묵을 깬 것은 멜빈이었다.
“…잠시만요. 카이루스 씨의 말에 따르면 지금 대피소의 존재 유무를 알고 있는 조직은 장미정원 말고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멜빈의 말에 카이루스가 잠깐 생각을 곱씹다가 대답했다.
“그러네. 잠깐, 그럼 지금 이건 어떻게 되어가는 상황인 거냐.”
애초에 다른 조직들이 대피소의 존재나 멜빈에 대해 모른다면, 장미정원이 이렇게 남들 눈에 다 띄는 대접을 해가며 그들을 베넷 시로 수송할 이유가 없다.
들키지 않았다면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이토록 화려하게, 호위병력까지 잔뜩 붙여가며 이동한다는 것은, 이미 다른 조직이 눈치를 깠다는 거다.
편안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있던 카이루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런 경우 베넷 시에서는 갈등을 어떻게 중재하지.’
절대 전면전에 들어가지는 않을 거다. 그건 범죄자들의 상식에 나름 통달한 카이루스의 시선으로도 말이 안 되는 개짓거리다.
다른 조직이 신흥세력으로 떠오르고, 기존의 운영위원회 조직 중 하나를 ‘대체’ 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이미 운영위원회에 소속된 두 조직이 서로 갈등을 빚다가 둘 중 하나가 사라져버리면 난리가 난다.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일단은 대화로 해결하려 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카이루스의 머리를 스쳤지만, 솔직히 카이루스는 그 가능성을 높게 치지는 않았다.
‘범죄자 새끼들이 대화는 무슨 망할 놈의 대화.’
사실, 카이루스가 금방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대화라는 수단이 웃기는 짓거리는 아니었다.
* * *
카이루스가 스스로의 생각을 비웃을 무렵.
베넷 시에서는 꽤 오래간만에 안타리아 대운하 운영위원회의 비정기 회의가 개최되는 중이었다.
“다들 건강해보이시네. 안타까워라.”
회의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세실리아가 커다란 원탁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슥 훑으며 인사했다.
세실리아까지 포함해 총 일곱 조직의 장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루카스의 아이들의 우두머리 루카스 볼피드.
아름드리 전당포의 어르신 도노반 보나파르트
초롱불 갱단의 길라잡이 타파스 아이올라
루미스&웨슨 운송회사의 바렌자 오누이.
치안대장 젠슨 러드보우
경찰청장 다우슨 필러리
마지막으로 장미정원의 세실리아 롱호른까지.
“전원 참석이라. 다들 생각보다 안 바쁜 모양이에요?”
세실리아는 속으로 불쾌한 마음을 삼키며 한마디 하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도노반 보나파르트에게 향했다. 아름드리 전당포의 어르신. 이전에 세실리아가 잡아낸 장미정원의 간첩은 지하수로로 도망쳤다.
비정기회의의 안건이 폰투스라면, 이 짓거리를 벌인 작자는 도노반 보나파르트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셈이다.
“오랜만이군. 세실리아 대표.”
잿빛 턱수염을 기르고 중절모를 눌러 쓴 남자가 물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고 연기를 뿜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실리아는 손을 살짝 흔들어 연기를 흩어버리며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당신 부고소식이나 듣고 싶었는데.”
붉은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아는 쓰고 있던 챙이 넓은 모자를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땅에 묻혀있는 보물을 탐내면 쓰나. 지하는 내 거야.”
루시온의 말에 세실리아가 미소를 지은 채 회의실의 사람들을 슥 훑어보았다.
“혹시 저 개소리에 동의하시는 분 있나요?”
당연히,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실리아의 시선이 다시금 도노반에게 향했다.
“누구 좆대로 지하가 댁 물건이라고 하는 거야.”
“지 가랑이에는 달려있지도 않은 꼬추는 뭣하러 입에 담고 지랄이야. 보험팔이 년이.”
말을 마친 도노반이 손에 쥐고 있던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자, 세실리아가 그 시가를 가로채더니 테이블에 놓인 물잔에 던져넣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시가의 불이 꺼진다. 물잔에 암갈색의 타르가 번지고, 독한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른다.
“달고 다니긴 해도, 돼본 적은 아직 없으실 텐데….”
세실리아가 면도날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야 장물아비, 너 오늘 한 번 좆 돼볼래?”
당장 누구 하나가 먼저 무기를 뽑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회의실을 잠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