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219
메넬라오스는 조용히 경기장을 떠나 왕궁 쪽으로 돌아간다.
시민들이 빠져나간 거리는 한산했고, 마찬가지로 중요한 왕실 인사들이 빠져나가 최소한의 호위만 남은 미케네의 왕궁 역시 그랬다.
그 몇 안 되는 호위들의 안내를 받으며 메넬라오스는 작은 식당방으로 향했다.
지금쯤 경기장의 모두가 연회에 참가하며 호사스러운 소고기 요리를 즐길 것을 생각하면 이상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메넬라오스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의문은 해소되리라.
“그래서, 이런 얄팍한 수를 쓰겠다고요?”
틴다레오스의 딸,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
그녀가 메넬라오스의 맞은편에 앉은 채 우습지도 않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당신은 당신의 ‘형님’께서 돌아가셨는데, 고작해야 반려 한 사람 붙잡아두는 게 그렇게 중요했나 보죠? 뭐, 당신이나 당신 형님이나 똑같은 개자식이니까.”
“저를 감정적으로 휩쓸어보려 꽤나 노력하셨나 봅니다. 평상시에 쓰지 않는 욕설을 쓰시는 걸 보면.”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의 반응 따위 무시하며 시종이 건네는 꼬챙이를 받았다. 잘 구워진 소고기가 꿰여 있다.
메넬라오스는 꼬챙이를 그냥 식탁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무언가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가 형님의 죽음으로 감정적으로 쉽게 동요될 거라 판단하셨겠죠. 그렇지만 세상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쉽게 뒤집히지 않습니다. 뭐든 계단처럼 천천히 밟아나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제가 당신을 고립시켜온 것처럼요.
보십시오. 이렇게 하니 상대방이 동요하지 않습니까?”
헬레네는 자존심 때문에 애써 표정을 굳혔지만, 손 떨림은 멈추지 못했다.
“내가··· 이 바보 같은 식사자리에, 와준 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두려워서?”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아니죠. 스파르타의 아름다운 여왕과 말 한 마디 나눠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몰랐나보군요.”
헬레네의 눈빛이 매섭게 메넬라오스를 찌른다. 증오와 살의를 담아.
“내가 남편에게 붙들려 경기장에 나서지 못했다고 알려지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알게 되겠지.”
헬레네는 음료를 단숨에 쭉 들이키며 말했다.
“당신의 약점이, 바로 나라는 걸. 나를 잘만 흔들면 스파르타를 손에 넣는 건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
“내가 갖지 못할 거라면 온갖 탐욕스러운 돼지들이 스파르타로 몰려들게 만들겠어. 최소한 당신이 스파르타를, 내 도시를 쉽게 손에 넣게 놔두지는 않겠어!”
“그럼, 누가 갖게 되기를 바라죠?”
메넬라오스는 꼬챙이를 내려놓았다. 고기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였다.
“당신이 사랑하는 파리스?”
그 말에 헬레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너··· 감히 그 따위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까? 그의 귀에다 사랑을 속삭여주고 싶습니까? 그리고 그에게 어리광이라도 부려서 스파르타를 되찾고 싶습니까? 아름다운 왕자가 저라는 사악한 괴물을 물리쳐 주기만을 바랍니까?”
“···.”
헬레네는 분노에 차서 확 몸을 일으켰다. 물기 어린 눈동자를 파르르 떨더니, 곧장 그녀는 몸을 돌려 식당을 떠났다.
···떠나려 했다.
그녀는 이내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몸이 바닥을 향해 천천히 기울고 있다는 사실도.
“잘 되었군요.”
머리가 바닥에 부딪혀 다치기 직전에 빠르게 달려온 메넬라오스의 손이 그녀의 목을 받쳐주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한 마디도, 메넬라오스의 것이었다.
“제가 당신의 소원을 이뤄드리겠습니다.”
생각이 점차 느려지더니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가 된다.
그리고 암전.
벨라돈나의 즙은, 틴다레오스의 딸에게 죽음만큼이나 깊은 잠을 주었다.
메넬라오스가 눈짓하자, 스파르타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시종들이 다가왔다. 스파르타에서 이 비슷한 일을 많이 해본 이들이었다.
그들은 스파르타의 여왕을 어느 상자 안에 담았다. 혹시 모르니 물통과 빵바구니도 그녀의 곁에 두었다.
곧 상자는 조심스럽게 옮겨져 미케네의 어느 거리로 향했다. 준비되어 있던 마차가 곧 상자를 항구도시 아르고스로 실어날랐다.
아르고스는 한참 북적였다. 각지에서 장례식을 위해 몰려온 ‘높으신 분들’을 태워다 준 이들이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챙겨보려 자기 지역의 토산물을 비싸게 팔아먹기 위해 용을 썼으니.
그리고 왕자들을 따라 수익을 올리러 온 어느 트로이아인 상인은, 미케네에서 금광석을 사고 판다는 어느 호구에게서 크게 한 몫 잡았다.
원래 그가 가져온 물건으로는 10상자도 못 구할 금광석을 무려 20상자나 새로 얻게 된 것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리 철통 같이 물건을 지켜내던 미케네인이, 왜 자기에게만 헐값으로 광석을 넘겼는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금광석’이 들어 있을 상자는 뚜껑이 열릴 일도 없이 트로이아인의 범선으로 옮겨졌다.
미케네인 상인은 자신에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하라고 강요한 이들에게 정당한 몫을 요구했고, 곧 목이 잘려 살인멸구당했다.
그 외에도 몇몇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이들이 하나씩 죽어서 사라졌는데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럴 이들만 죽였으니.
계획을 아는 나머지 사람들은 운동 경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결과가 지금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더욱더 커다란 환호성을 내질렀다.
또 헥토르가 우승이었다.
***
모든 경기가 끝났고, 장례식을 마무리하는 연회와 함께 하룻밤이 지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잔을 높이 들며 집주인의 성대한 환대와 죽은 이의 덕을 칭송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런저런 의례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위대한 왕중왕의 별이 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망자 역시 만족하리라는 말이나, 신들이 평소 성실히 제물을 바쳐온 왕을 홀대하지 않으리라는 말 같은 것들 얘기다.
실제로는 그런 의례적인 인사를 듣는 이들도, 지난 날 얻어먹었던 요리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자기들이 얼마나 괜찮은 인맥들을 얻었는지 등등에 대해 생각했겠지만.
뭐, 다들 원하는 걸 얻었으니 괜찮은 행사였다.
나 역시 아가멤논의 죽음이 가져왔던 찜찜한 기분이 어느 정도 씻겨나가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우리 일행 중에서 가장 우울했을 이피게네이아 역시 이제는 어느 정도 슬픔에서 회복되었는지 싱긋 웃으며 배 위에 올랐다.
보통 약속이 있으면 집이 약속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일찍 출발하지 않던가. 이번에도 비슷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트라키아를 빼면 우리 집이 여기서 제일 멀었다. 막차 끊기기 전에 떠야 했다.
에게 해 건너에서 온 유일한 손님들인 우리가 떠나려 하자 군중들이 운집해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와 헥토르는 선미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데이포보스는 온전히 슬픔이 가시지 않은 이피게네이아를 위해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빠르게 군중 속을 훑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그녀’가 없음에 안심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보이지 않았었지. 몸이 좋지 않아서라고 했지만, 글쎄, 남편 메넬라오스의 술수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파리스? 볼 일은 전부 봤니?”
헥토르의 말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린다. 그래, 이 지역에서 더 볼 일은 없었다. 내 집, 이노, 아이들이 생각난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출발하죠.”
내 말에 배는 천천히 돛을 펼친다. 아르고스의 해안에 운집해 있던 군중들 역시 하나둘씩 흩어져간다.
그닥 빠르지 않은 속도로, 상업용 범선 여러 척이 동쪽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망자들이 향한다는 서쪽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불씨
갤리선은 아무래도 속도는 빠르지만 화물의 적재 한도가 형편 없고, 많은 인력이 필요하며, 그렇기에 물과 식량을 가득 실어야 한다.
안 그래도 많이 못 싣는 화물 중 거의 전부가 선원들의 음식이란 뜻이다.
화물 대부분이 노잡이라는 생체 엔진의 연료로 들어가야 한다면, 그 배는 화물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고로 지금부터 대서양 무역이 떠오르고 지중해가 쇠퇴할 15세기까지 2,500년 동안, 지중해에서는 두 종류의 배가 각기 다른 용도로 바다를 나다니게 된다.
첫째가 군선으로 많이 쓰이는 갤리선이다. 순간적인 추진력도 좋고, 섬세한 컨트롤이 중요한 전투 한가운데서 움직이기 좋다.
둘째는 상선으로 주로 쓰이는 범선이다. 느리지만 적재할 수 있는 화물의 양이 많고 선원도 그나마 덜 필요하니, 하루 걸러 육지에 들러야 하는 갤리선보다 훨씬 낫다.
“여기 스키로스 섬에서 떠난 뒤로는 곧장 레스보스 섬까지 직행합니다. 그리고 트로이아까지 직행하려 하는데···”
“레스보스 섬이라면 안탄드로스가 더 가깝겠군. 안탄드로스부터 경유하도록 하지.”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선장의 얼굴이 나 대신 이 자리의 책임자인 헥토르를 향한다.
“그래, 물론이지. 내 동생은 지금 막 아이들이 태어난 상태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상태지.”
헥토르는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손짓은 부드럽지만, 근육질의 팔이 단단하다.
“네가 먼저 가 있으면 내가 아버지께 보고할 테니, 걱정 말고 집으로 가.”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배의 방향을 틀도록 하죠.”
“좋아. 다들 들었나? 스키로스 섬에서 벗어나면 이틀에서 사흘 동안은 바다 한가운데다. 적재된 짐들은 전부 확인하고 가도록 하지. 혹시 모르니 식량과 식량 아닌 것들은 구분해놓고.”
“알겠습니다!”
슬슬 해안가에서 사내들이 배를 밀자, 범선들은 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면서 다시 물에 잠겼다. 건조해져 있던 목재들이 소금물을 먹으며 다시금 부풀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이제 며칠 동안은 다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생활해야 했다. 뱃멀미는 없었지만, 단단한 지반 위에 발을 올려놓고 살지 못한다는 건 어쩐지 어색한 일이었다.
나는 그 흔들리는 감각에 익숙해지기 위해 갑판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동안 선원들은 각자 갑판 아래 창고에서 상자를 이리저리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 스키로스 섬에서 내가 선원들을 지휘했으니, 오늘은 헥토르가 일할 차례였다. 헥토르는 짐을 단단히 묶어놓았는지 등등을 확인하며 선원들을 향해 외쳐댔다.
그리고 내가 슬슬 배 위에서의 걸음걸이에 익숙해졌을 무렵.
“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들린다.
나는 즉시 한가로운 산책을 끝내고 갑판 아래로 뛰어든다. 누군가 부상자가 생긴 줄로만 알았다.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우니까.
차라리 그랬어야 했는데.
“파리스!!!!”
“형님, 무슨 일입니까?”
“거기 멈춰!!!!”
나는 말 잘 듣는 동생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선내의 광경에 눈이 익숙해지니, 이리저리 흩어진 상자들이 보인다.
개중에서 어느 큼지막한 상자의 뚜껑이 열려있고, 그 안에서 팔이 솟아오른다.
“···.”
“···.”
모두가 침묵한다.
“파리스.”
“···.”
“당장 네 선실로 돌아가서 문을 잠그고 있어라.”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형님, 무슨 일인지는 설명해주셔야···.”
“돌아가있어.”
헥토르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줄 테니까.”
“···.”
나는 그대로 다시 사다리를 올라 위층으로 향했다.
상자에서 누군가가 일어나는 게 보일락말락 했는데···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
“···.”
“···.”
“가는 동안 죽지는 않았겠지?”
“설마 그랬을 리가··· 그렇지 않소?”
왕들이 불안해하며 자신을 쳐다보자, 메넬라오스는 차분하게 그들을 진정시킨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혹시 몰라 식량과 식수도 넣어두었고, 다른 것보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나팔도 넣어두었습니다.
어떻게든 갇혀 있다 하더라도 배가 통째로 침몰하지 않는 한 트로이아인들은 헬레네 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크흠.”
“그렇다면야 다행이고···.”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그런 사소한 걱정이 아닙니다.”
-쾅!!!!
문이 열리고 한 시종이 들어온다. 메넬라오스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크, 큰일입니다!! 헬레네 님께서 보이지를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침묵입니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무슨 일인가!”
“헤, 헤, 헬레네 님께서 궁전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셔서···.”
“침착하게. 미케네의 시내까지 한번 뒤져보지. 시민들에게 수배도 해 보고.”
공황 상태에 빠진 시종의 어깨를 쥐고서, 메넬라오스는 말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왕궁 내 사람들의 증언부터 확보해두도록 하는 게 좋겠네. 부인이 어디로 갔는지 가장 먼저 봤을 이들이 아닌가. 못 하겠나?”
“아, 아닙니다. 명령해 놓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같이 가서 거들지.”
메넬라오스는 시종을 앞서 보낸 뒤 방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한번 뒤돌아보았다.
필록테테스, 디오메데스, 이도메네우스, 그리고 다른 수많은 도시의 왕들.
공범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시작이었다.
메넬라오스가 결연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다니는 와중에도 수많은 시종들과 하인들이 목이 찢어지도록 여왕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혹시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아니면 기절하거나 위독한 상태일지도 모를 여왕을 찾기 위해서 샅샅이들 뒤졌다.
누군가는 시내로 사람들을 풀었다. 곧 성문이 봉쇄되고 집집마다 병사들이 들이닥쳐 여왕의 소재를 파악하려 들 것이다.
누군가는 헬레네 주위의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 그녀의 마지막 행방들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지난날의 전차 경주에서 빠져나간 뒤부터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밝혀졌다.
그 뒤로 지난 며칠동안 여왕이 보이지 않았었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지는 않았다.
여왕은 공공연하게는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다 알려졌고, 보다 은밀하게는 남편에게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져 있었으니.
추격 이후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싶었을 때쯤, 메넬라오스는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어느 시녀가 나타나,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헬레네 님을 섬기던 시녀입니다. 여왕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잘 압니다.”
그녀의 상처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지금껏 두려워서 숲속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정해진 대사들을 읊어라.’
메넬라오스가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본 시녀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무엇이 두려워서 숨어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누가 정해준 대로, 협박이 두려웠다고 말했다.
누구의 협박이었냐고 사람들은 다시 되물었고.
“파, 파리스 님··· 파리스 님께서 헬레네 님을 데리고 가시면서···.”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싱겁고도 간단한 사랑 이야기.
그렇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분명한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
뭐, 설득력도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계기일 뿐이니까. 이미 이전부터 호승심에 들썩거리던 욕망덩어리들을 톡, 하고 살짝 밀어줄 작은 계기일 뿐이니까.
만일 거짓임이 밝혀지더라도 전쟁을 향한 전진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이미 거짓임을 아는 공모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 허술한 장난에 맞장구쳐주는 저들은 순진한 바보가 아니다.
이제는 신조차 막을 수 없다.
아카이아의 탐욕스러운 늑대들은, 지금 이 순간만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으니.
기름 위에 불붙듯이, 왕들의 탐심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일어나리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파도가 트로이아를 덮치리라.
메넬라오스는 결연한 얼굴로 광장에 올랐다. 아직 떠나지 않은 타지의 왕과 귀족들, 미케네의 시민들이 그를 지켜보았다.
기대감에 찬 눈들이 그를 향한다.
메넬라오스가 입을 열어 말한다.
“손님이 되어 주인을 모욕한 자, 신들 앞에서 단죄받을 것입니다.”
“진실로 그러하오!!!!”
“사람이 되어 다른 이의 반려를 강탈한 자, 정의로서 응징될 것입니다!”
“옳소!!!!”
“거짓 맹세한 이들을 신들께서는 미워하십니다.”
그렇다면 신들은 나를 얼마나 미워하실 것인가.
“가장 서글픈 시간에, 가장 더럽고도 추악한 일을 벌였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도 거대한 모욕을 느낍니다!
나 자신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장례식을 더럽힘당한 형님에 대한 모욕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메넬라오스는 죽은 형님의 왕홀을 들어올린다. 그 금칠 되어 묵직한 막대의 감촉을 느끼며, 메넬라오스는 죽은 형님의 잔상을 본다.
그분께서 내 곁에 서 계신다.
나를 지켜보신다. 나와 함께하신다.
“신들이여!! 분노와 복수를!!!!!”
“우와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서 메넬라오스는 광장을 벗어난다. 왕궁으로 돌아오자 광장에 나가 있지 않던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의 방 문 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
알아챘군.
***
“괜찮습니까?”
“괘, 괜찮···”
“···.”
“괜찮지는··· 않군요.”
헥토르는 참을성 있게 눈앞의 여인을 지켜보았다.
며칠 동안 씻거나 움직이지 못한 몸은 더럽게 때가 묻어있었고, 배 위에서는 제대로 씻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머리칼과 눈과 턱과 목과 손 모두가.
과연 수많은 영웅들이 구애할 만했다.
아름다움의 여신께서 동생을 위한 선물로 택할 만한 사람이었다.
헥토르는 굳이 그녀를 몰아세우거나 재촉하지 않고서 끈기 있게 기다렸다. 지난 아가멤논 왕의 장례식 중에 그도 들은 소식들이 많았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네 사이의 파탄 난 관계, 정치적 혈투, 그리고 여러 왕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이라든가.
그 모든 것의 귀결이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상자 속의 헬레네를 처음 보았을 때는 깔끔한 마무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헥토르는 헬레네에게 굳이 사정을 듣지 않고도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전쟁을 바라고 있군요.”
묘책이다.
분명 연회에서는 수동적인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방법을 생각해내고 결국 실현시키다니 보통 사람의 과단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