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2
00012 12화
카페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노년에 접어들어 흰머리가 가득한 건 놀랄 일이 아니지만 외국인이라는 점이 특별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곱다는 느낌이 먼저였다.
그녀를 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태수 손이 가운 주머니로 들어갔다.
반지 하나가 만져졌다.
카프레네가 아내가 찾아오면 주라던 그 반지다.
누군지 직감한 태수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옆에 남자가 따라오자 태수가 조용히 말했다.
“둘이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최 선생님이 저 분이 누군지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만.”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태수는 예의 바르게 한마디했다.
잠시 생각하던 남자가 먼저 카프레네 부인에게 다가가 뭐라고 얘기했다. 카프레네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조금 멀리 물러났다.
그제야 태수가 카프레네 부인에게 다가갔다. 어두운 얼굴로 카프레네 부인이 천천히 일어나 맞이했다.
“알렉산드라 카프레네에요.”
꾸미지 않았음에도 기품이 느껴지는 조용조용한 목소리였다.
태수도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최태수입니다.”
“일단 좀 앉을까요?”
카프레네 부인이 자리를 권했다.
듣고 싶은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말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레네 부인은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상황을 이끌어갔다.
태수도 그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던 남자가 커피를 가져다주고 나서야 첫 마디가 열렸다. 그제야 카프레네 부인이 살포시 미소졌다.
“더 좋은 걸 대접해야 하는데, 실례가 많네요.”
“아닙니다. 이게 지금 저에게는 최고입니다.”
“인턴이시라고요? 가장 힘드실 때네요.”
카프레네 부인이 묻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레지던트들 보니까 이제 시작인 거 같습니다.”
“그래도 태수씨는 잘 이겨낼 거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인사말은 아니에요. 내 눈으로 본 의사만 해도 수도 없이 많아요. 태수씨는 그 사람들보다 좋은 눈빛을 가지고 있어요.”
카프레네 부인은 우선 대화를 편안하게 유도했다.
사고사를 당한 남편의 소식을 들으러 온 부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차분함이었다.
덕분에 태수도 이야기를 꺼내기가 좋았다.
“잘 가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릉.
태수는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 깊게 고개 숙였다.
카프레네 부인에게 꼭 건네야할 사과라고 생각했다. 허나 카프레네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요. 태수씨가 아니었으면 고통 속에 혼자 생을 마감했을 거예요. 마지막을 지켜주셔서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카프레네 부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하지 않은 몸짓으로 허리를 굽혔다.
자그마한 키였지만 풍겨오는 느낌은 여왕과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쉽게 얘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태수는 전해야할 물건과 말이 있기에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전해달라고 하신 게 있습니다.”
“뭔가요?”
“우선 이거.”
태수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내밀었다. 마주 내미는 카프레네 부인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카프레네 부인이 격정을 억누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내 카프레네 부인이 반지를 받아들었다.
반지를 가슴에 깊이 품는 사이 태수가 유언을 전했다.
“부인의 미소가 그분에게는 전부였답니다.”
“…….”
카프레네 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에 모은 손등에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태수는 조용히 그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든 카프레네 부인이 억지 미소를 보였다.
“다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았나 보네요.”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만.”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모르는 척하자 카프레네 부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푸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카프레네 부인이 주머니에서 반지케이스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아닙니다. 제가 감히.”
“아니에요. 태수씨 거예요. 그이가 전해달라고 한 거고요.”
카프레네 부인의 말에 태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분께서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사실이에요.”
“아니, 어떻게요?”
태수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얼굴로 묻자 카프레네 부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예전에 그런 말을 했어요. 만약 자신이 죽을 때 제가 곁에 없으면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반지와 유언을 전달해달라고 할 거라고요.”
“…….”
“외국 출장이 많은 분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뭔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셨군요.”
태수가 조용히 말을 받자 카프레네 부인이 이어서 말했다.
“미국에서 도착한 시신을 확인했는데 반지가 없더군요. 그래서 찾아오게 됐고요.”
“꼭 찾아올 분이라고 하시더니.”
태수는 카프레네의 확신이 이제야 정확하게 이해가 됐다. 카프레네 부인이 애써 담담함을 보이며 천천히 말했다.
“그때 그 사람에게 이걸 전해 주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슬쩍 반지케이스를 다시 내밀었다.
그것도 고인의 유언 중 하나라는 데 마냥 거부만 할 순 없었다.
태수가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물었다.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태수씨 거예요.”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태수가 케이스를 열었다.
그 속에는 금빛 찬란한 반지 하나가 놓여 있고 양각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T.C.S
Thoracic and Cardiovascular Surgery.
즉, 흉부외과를 뜻하는 약자다.
태수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카프레네 부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60번째 생일을 맞는 날, WMA(World Medical Association. 세계의학협회)에서 받은 반지에요.”
“그냥 반지는 아닌 거 같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의학발전에 평생을 이바지한 그이에게 감사하다며 제작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반지죠.”
순간 태수 얼굴이 굳어졌다.
세계의 쟁쟁한 의사들이 만들어준 반지.
카프레네가 흉부외과분야에서 세계최고의 의사라는 걸 입증해주는 반지기도 했다.
“그렇게 의미 있는 반지를 제가 어떻게 받습니까.”
“그 이유는 앞서 얘기한 거 같은데요.”
차분한 카프레네 부인의 목소리 속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뭐라 할 말이 없는 태수가 반지케이스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소소했다.
30여분 동안 대화를 마친 태수와 카프레네 부인이 현관에 섰다.
태수는 카프레네 부인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입장이라 배웅을 못 갑니다.”
“아니에요. 저에게 제일 소중한 걸 돌려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태수가 재차 인사를 마칠 즈음이었다.
카프레네 부인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물었다.
“나중에 우리 그이 묘지에 인사하러 오실 건가요?”
“갈 겁니다. 그런데 그냥은 안 갑니다.”
“그러면요?”
“그 분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때, 그때 가겠습니다.”
태수의 말에 카프레네 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기다릴게요.”
“너무 오래 걸린다고 야단치진 말아주십시오.”
“전혀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럼 저도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태수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내 준비된 차에 오른 카프레네 부인이 멀어져갔다.
부웅.
차가 병원 정문을 나간 후에야 태수도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에 쥐어진 반지케이스로 향했다.
SICU로 돌아온 태수는 김석동의 부름부터 받았다.
김석동은 삐딱하게 서서 태수에게 물었다.
“누가 왔어?”
“아는 분입니다.”
어떤 관계라고 정의하기 힘들어 흘린 말이었지만 김석동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럼 모르는 분이 찾았을까?”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개인적인 일? 그런 일로 병원까지 찾아오게 하나?”
그런 일?
순간 태수의 눈빛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전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태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저에게 감정이 안 좋으시다는 건 알지만, 주변 사람까지 비하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뭐?”
“그리고 이거 드시고요.”
태수는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을 내밀었다.
태수의 강렬한 눈빛 때문인지 김석동은 주춤거리며 받아들었다.
태수는 그런 그와 시선을 한 번 더 마주한 후 돌아섰다.
임택진 환자에게로 향하는 태수의 등에서 더는 접근하지 말라는 아우라가 피어나오는 듯 했다.
태수는 곧 임택진 환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고 눈빛도 마주하려하지 않았다.
태수는 차라리 좋았다.
무거운 마음을 공연히 다른 곳에 분풀이 하고 싶지 않은 탓이다.
혼자가 된 태수는 반지케이스를 꺼내들었다.
탈칵.
케이스를 열자 빛나는 반지가 또다시 시야에 잡혔다.
태수가 그 반지를 꺼내 조심스럽게 살폈다.
카프레네가 소중하게 여긴 반지인지 광택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반지를 살피는 사이 태수의 머릿속은 조금 복잡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카프레네와의 인연이 깊어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환자를 대할 때마다 알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지식들도 카프레네를 만난 후에 일어난 변화다.
기억전이의 가능성?
현실적으로 아니 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겪고 있는 건 정반대 상황이다.
“머리 아프네.”
태수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그만큼 머리가 복잡하단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