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486
01489 1489화
감동의 여운이 가신 후였다.
얼마나 치열한 수술이었는지 수술복 안쪽 곳곳에도 핏자국이 있었고, 땀으로 인해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수술 팀원들은 알지 못할 끈끈함을 또 한 번 느꼈다.
정겨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에게 말했다.
“병원장님이 수술 대기실에서 기다리세요.”
“가 봐야겠네요. 다른 분들은 의국으로 돌아가서 좀 쉬고 계세요. 이 간호사님도 지금은 한 팀입니다.”
태수가 여유롭게 한마디 하자 이선정 간호사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저만 따로 가라고 하면 엄청 화낼 뻔했다고요.”
“제가 어떻게 그렇게 섭섭하게 해 드리겠습니까. 그럼 이따가 다시 뵙고요. 박 선배, 선배는 이쪽입니다.”
태수가 찾자 이미 뒤돌아 슬쩍 자리를 벗어나려던 박성민이 멈칫했다.
굳은 그의 모습에 김혁권이 한 소리 했다.
“뭐 해요? 찾잖아요.”
“나요?”
“그럼 날 찾을까. 얼른 가 봐요.”
“에이씨. 피곤한데.”
“투덜거리지 말고. 자, 자!”
김혁권은 아예 박성민의 어깨를 잡아 돌려 태수 쪽으로 밀어 버렸다.
터덕.
떠밀려서 태수의 앞에 도착한 박성민이 축 처진 얼굴에 애써 미소를 그려 보였다.
“우리 가, 갈까?”
“왜 또 빼십니까? 수술실에서는 다 해 놓고 빠진다고 화내셨던 분이 말입니다.”
“나 병원장님하고 별로 안 친해.”
“이젠 친해져야죠. 가시죠.”
태수가 앞서자 박성민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뒤를 따랐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다들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치사한 사람들.”
“선배.”
“간다고. 가고 있다니까.”
박성민은 뚱한 얼굴로 태수를 따라 걸어갔다.
곧 태수와 박성민은 수술 대기실에 도착했다.
드륵.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이었다.
소파 상석에 앉은 황석찬 병원장의 환한 미소가 먼저 보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였다.
와락!
좌우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태수와 박성민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놀란 태수가 상대를 확인하고 더 크게 놀랐다.
“누구……. 부원장님?”
“최 팀장. 최태수 팀장.”
태수를 부르는 석재봉 부원장의 목소리가 크게 떨리고 있었다.
격한 그의 표현 속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담겨 있었다.
태수도 그를 밀어내지 않고 같이 부둥켜안았다.
바로 옆에선 정용철 전무이사가 박성민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 사람.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니, 저도 아는데, 조금만 떨어져 주시……. 으윽! 아아, 아파요. 살살, 살살 다뤄 주세요.”
박성민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정용철 전무이사를 밀어내진 못했다.
잠깐 격정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황석찬 병원장의 좌우에 태수와 박성민이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석재봉 부원장과 정용철 전무이사가 자리했다.
“…….”
좌우를 번갈아 둘러보던 황석찬 병원장은 말없이 태수와 박성민의 손을 잡았다.
그저 손만 잡은 채 진한 눈빛을 보냈다.
태수와 박성민의 얼굴에도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눈빛과 표정으로 감사함을 대신한 후였다.
황석찬 병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수고했어. 힘들지는 않고?”
“죽겠습니다.”
“죽겠지. 진짜 죽을 맛일 거야. 우리 얘기만 끝나면 돌아가서 쉬도록 하고.”
“그 전에 수술이 먼저 끝나야죠.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태수의 말에 황석찬 병원장이 TV를 눈짓했다.
“정 염려되면 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말을 마친 태수가 고개를 반대로 돌려 대형 TV에 시선을 주었다.
닥터 헤인즈와 수술팀은 석정현 이사장의 몸을 정말 세세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심장부터 시작해 대동맥궁, 경동맥까지 수술한 모든 부위를 다방면으로 점검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들고 있는 수술 도구는 포셉이나 리트렉터, 알렌코커, 뱁콕 등 수술 보조를 위한 도구들이 주를 이뤘다.
엄청나게 커다란 TV 화면이라 그런 세세함 수술 도구까지 확인이 가능했다.
그걸 관찰하던 중 황석찬 병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째고 꿰매는 수술 도구는 한 번도 손에 쥔 적이 없어. 말 그대로 확인만 하는 중이란 말이야.”
“…….”
“정말 고생했다. 대단해.”
“미국에 다녀온 게 수포로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태수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낮췄다.
그런 모습이 불만인지 박성민이 한 소리 했다.
“최소한 잘했냐고 물어라도 봐라. 저건 소심한 것도 아닌데 결정적일 땐 꼭 저런다니까.”
“저런 모습이 또 최 팀장다운 거 아닌가.”
석재봉의 편드는 모습에 박성민이 발끈했다.
“부원장님, 저 녀석이랑 일 안 해 보셨죠? 수술 몇 번 하신 게 전부라면서요. 같이 일해 보지 않고는 말씀을 하지 마시라니까요.”
“평소에는 도대체 어떤데 그래?”
석재봉 부원장의 물음에 박성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럼 하지 마.”
“……병원장님이 조용히 하라고 하시니 여기까지. 지퍼 쫙!”
박성민은 입을 채우는 행동을 하며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무겁기만 했던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지자 태수가 황석찬 병원장을 보며 말했다.
“수술 과정을 지켜보셨겠지만 회복할 때 유념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말해 봐.”
“우선 좌우 심실의 크기가 달라져서 혈압이 올라가면 심장이 힘들어합니다. 저희도 수술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고요.”
“음, 그렇지.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태수는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황석찬 병원장은 주의사항들을 들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는 태수의 표정이 밝았다.
황석찬 병원장, 석재봉 부원장, 정용철 전무이사까지.
이번 수술이 잘못되었다면 가장 불편하게 얼굴을 마주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편안한 얼굴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태수는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부담감이 훨씬 덜어졌다.
주의사항을 이야기한 후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다들 수술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약간의 간식을 먹고 음료를 마셨지만 졸거나 늘어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엄청 피곤할 터였다.
안색은 꺼멓게 죽었고, 팔다리도 후들거렸다.
그런데도 태수와 박성민은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모든 수술이 마무리되었다.
석정현 이사장은 화이트엔젤 전용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가장 먼저 황석찬 병원장과 석재봉 부원장이 다가갔다.
태수와 박성민도 그 뒤를 따랐고, 닥터 헤인즈가 같이 자리했다.
안타깝게도 의사가 아닌 정용철 전무이사는 밖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중환자실을 볼 수 있는 의국에선 자리하고 있던 모든 의료진들이 빼곡하게 서서 내부 상황을 주시했다.
황석찬 병원장은 청진기를 동원해 최대한 자세하게 석정현 이사장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미소 짓고 있던 태수와 박성민도 이 순간 다시 긴장했다. 마치 숙제 검사를 받는 느낌이었다.
자신들의 수술이 앞서 말한 대로 잘 마무리되었는지 평가받는 시간이기도 했기에 자연히 떠오른 긴장감에 가슴이 묵직하게 변했다.
주변 상황은 개의치 않은 채 황석찬 병원장은 신중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 시간이 길어졌지만 누구 하나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진지하게 지켜봤다.
총 수술 시간은 14시간.
예상한 10시간에 비해 4시간이나 지체되었다.
태수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 바로 그거였다.
지체된 시간이 너무 길어져 수술이 온전히 끝났다고 해도 환자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초조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억지로 밀어붙인 수술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수술이었고, 역량을 벗어난 수술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숙제 검사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불안해서였다.
그렇지만 자리를 벗어날 순 없었다.
이 자리를 피한다는 건 자신이 벌여 놓은 일을 두고 도망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그건 스스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다.
아직도 황석찬 병원장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감이 커져 가던 태수의 눈빛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탁.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옆을 돌아보자 석재봉 부원장이 모든 걸 이해한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감을 가져야지.”
“지금은 쉽지 않네요.”
“난 자네를 믿어.”
“…….”
“그래. 분명 좋은 말씀들만 해 주실 거야.”
태수는 석재봉 부원장의 위로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가장 초조하고 긴장될 그가 오히려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 긴장감은 어깨에 올려진 팔이 가늘게 떨리는 걸로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안정시켰다.
진짜 그릇이 달랐다.
예전에는 사람의 그릇이란 말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을 보다 보니 점점 실감하게 됐다.
그릇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의 차이를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어느 쪽일까.
태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털어 지워 버렸다.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황석찬 병원장의 진단 결과를 기다릴 때였다.
곧 황석찬 병원장이 석정현 이사장의 몸에서 청진기를 뗐다.
“흠.”
가볍게 숨을 내쉬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모든 의사들이 긴장했다.
태수는 덜컥 겁까지 났다.
저 한숨의 의미가 뭘까?
태수의 머릿속에 수술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지만 혹시 놓치거나 잘못된 수술이 있었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 봤다.
그건 옆에 선 박성민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황석찬 병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때 황석찬 병원장이 태수와 박성민을 바라봤다.
태수와 박성민이 멈칫하는 찰나 황석찬 병원장이 먼저 불렀다.
“최 팀장.”
“네, 병원장님.”
“수술 중에 폐의 부종은 발견하지 못했나?”
“알고 있었습니다.”
태수가 대답하자 황석찬 병원장이 더욱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수술하지 않았지?”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그래. 솔직하게 말해 봐.”
“부종의 크기가 작고, 곳곳에서 발견되어 폐렴 초기까지 의심됐습니다. 그런데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태수의 말이 잠시 끊어지자 황석찬 병원장이 깊은 눈빛으로 이어서 물었다.
“왜 알면서도 건드릴 수 없다고 판단했나?”
“수술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술보다는 회복하는 과정에서 병원장님이 해결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아까 수술 대기실에서 왜 말하지 않았지?”
“그땐 닥터 헤인즈가 수술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황석찬 병원장은 닥터 헤인즈에게 물었다.
“그럼 닥터 헤인즈는 왜 폐를 수술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닥터 최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닥터 황이라면 충분히 내과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말투가 바뀌…… 저에 대해 아십니까?”
“수술 과정을 지켜보던 중, 스미스 박사님과 통화하며 듣게 됐습니다. 먼저 결례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닥터 헤인즈는 정중한 말투와 몸짓으로 황석찬 병원장을 대우했다.
그 모습에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황석찬 병원장의 이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의사란 태수와 석재봉 부원장 정도뿐이었다.
닥터 헤인즈의 명성은 누구나 안다.
그런 그가 고개를 숙인다?
“…….”
“…….”
장소와 상황이 여의치 않은 만큼 목소리를 낸 의사들은 없었지만 다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황석찬 병원장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닥터 최, 닥터 헤인즈, 두 사람의 판단이…… 옳습니다. 폐를 수술했다면 문제가 너무 커졌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닥터 헤인즈가 마무리를 잘해 줘서 참 고맙습니다. 깨어나는 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회복엔 큰 문제가 없을 거 같습니다.”
황석찬 병원장의 말에 닥터 헤인즈는 옅게 미소 지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명의에게 인정받았단 사실이 기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