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044
03048 3048화
“네. 늘 그렇듯이 응급환자가 찾아왔고, 저희는 수술한 거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순탄한 회복과 치료에 전념해야 합니다.”
“옳거니. 그 외에 일엔 신경 쓸 필요 없어. 그 부분은 이사장이 도움을 줄게야.”
석정현 회장이 은근히 말하자 정용철 이사장이 바로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길로 서울로 올라가서 돌아가는 상황에 맞춰 바로바로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민감할 필요 없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엄수찬 장관이 잠시 들러 한미 양국 정부도 이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고, 상벌 또한 공명정대하게 가린다고 했으니까.”
엄수찬 장관이 수술 끝난 소식을 듣고 잠깐 다녀간 모양이었다. 태수는 그 부분은 따로 전달 받은 게 있어 고개만 끄덕였다.
일부러 입을 열지 않는 건 혹시나 말실수 할까봐 자중하는 거였다.
‘절대로.’
비사로 묻혀야할 일이다.
아니, 자신조차도 없던 일로 치부했다.
그게 잡음을 지우기에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었다.
태수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던 중이었다.
반대편에 자리한 정용철 이사장이 엄수찬 장관에게 뭔가 언질을 들었는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저희가 잘못한 건……. 뛰어난 의료진들이 열심히 노력한 거 밖에 없습니다.”
“명백한 사실이고 그게 전부라지만 너무 긴장 놓진 않는 게 좋을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정용철 이사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석정현 회장은 이어서 유지혁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왕 내려온 거 이쪽에서 좀 머물 생각이니, 병원장에게도 그리 일러주고.”
“네. 알겠습니다.”
“그래. 고생 많은 하루였지만 다들 잘 했어.”
석정현 회장이 간단히 하루를 총평했다.
그 소리에 맞춰 태수와 정용철 이사장, 유지혁 비서실장이 동시에 화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 인사는 이쯤하고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도록 하지.”
석정현 회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같이 일어났다.
그렇게 회의 같은 티타임이 끝이 났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선 태수는 밖으로 향하며 벽걸이 시계의 시간부터 확인했다.
이런저런 일을 치루고 나니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정승휘가 안심하고 쉬라했지만, 병원에 있는데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슬슬 가봐야 할 시간이네.’
속으로 뇌까린 생각을 굳히려할 때였다.
때마침 석정현 회장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 팀장.”
“네. 회장님.”
“바로 집으로 내려가도록 해.”
마치 태수 생각을 읽은 듯한 말투였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정황상 피곤해 하는 말이란 판단이 섰다.
그래서 태수는 옅게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중환자실에 들린 후에 상태 확인하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내가 지금 말한 뜻이 알아듣기 어려웠나?”
“네? 그럼……. 곧장 내려가란 말씀이십니까?”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수술한 환자를 보고 내려가는 게 마땅한 순리였다. 그걸 석정현 회장이 막아서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의아함을 석정현 회장은 간단한 몇 마디로 이해시켜줬다.
“중환자실에 다 늙어 빠진 종이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을 게야.”
“종이호랑이……. 황 회장님이요?”
“후후. 아마 최 팀장을 보면 바로 잡아먹으려 들 터인데.”
“그게…….”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는가?”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황석찬 회장이 내려가 있는 모양이었다.
미리 그 사실을 말하는 걸 보니 회장들끼리 이미 의논하고 결정 내린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중환자실은 상당히 긴장된 분위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잠깐 생각해본 태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잘 생각했어. 우선 집으로 내려가서 한 숨 자고 다음 생각을 해도 늦지 않을 게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태수는 한 번 더 감사인사를 한 후 몸을 움직였다.
긴 하루의 끝이 보여서 그런지 무겁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이제 진짜 집에 간다.’
당연한 말인데 이상할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벌써부터 뜨뜻한 샤워와 아늑한 침대가 눈앞을 아른 거렸다.
뚜벅뚜벅.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태수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태수는 그 길로 병원을 떠나 집으로 직행했다.
거의 날다시피 집에 도착한 태수는 신발장에 서서 감격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집이다!”
오늘 하루 그토록 그리웠던 집이라 모든 게 사랑스러워보였다.
그렇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던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단 게 조금 의아했다.
“내가 불을 켜고 나갔던가?”
순간 무의미하게 소비됐을 전기세가 살짝 아까웠다.
그래도 껌껌한 집에 들어서면 뭔가 고독했는데, 불이라도 켜져 있으니 그런 느낌은 좀 덜 받았다.
그냥 그렇게 위안 삼았다.
그러면서 거실소파 앞에 도착한 태수는 웃옷부터 하나씩 벗어 내려놓았다.
툭, 툭.
세탁실까지 그리 멀지 않았지만 피곤하고 귀찮아서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상의를 탈의한 태수가 허리띠를 움켜쥘 때였다.
터덕, 터덕.
갑자기 2층 계단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집이다.
계단에서 소리가 난단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
멈칫한 태수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팀원들은 분명히 모두 집으로 갔다.
오늘은 올 사람이 없었다.
그럼 사람이 아닌가?
순간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스쳤다.
그런데 그때 태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인 탓이다.
“헉, 누구……. 어?”
기겁하던 태수가 멈칫했다.
자세히 보니 내려오는 걸음걸이부터 입고 있는 잠옷까지 너무도 익숙한 탓이다.
졸이던 마음을 툭 내려놓였다.
그와 동시에 태수는 살짝 날선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영수야. 올 거면 온다고 문자 한통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암. 삼촌 수술 들어가신 거……. 하암. 전 국민이 다 아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요.”
벅벅.
하품까지 찍찍하며 자다가 일어난 티를 팍팍 냈다.
그런데 태수는 뭘 봤는지 갑자기 빙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기다렸냐?”
“네? 뭘요……. 하암. 목말라서 일어난 건데요.”
“그런 녀석이 머리는 단정하고 잠옷은 구겨진 데가 없네?”
태수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 순간 멍한 눈빛이 또렷하게 바뀐 주영수가 깊게 탄식했다.
“아, 역시 삼촌한테는 안 통한다니까.”
“당연하지. 내가 인마, 초곡리 어른들하고 눈치 싸움 했던 삼촌이야. 얕은 수는 절대 통하지 않지. 후후.”
태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콧대를 높였다.
그렇게 주영수의 트릭을 밝혀낸 자신을 칭찬할 때였다.
끼익.
뭔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돌연 하이톤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삼촌, 제가 분명히 귀찮아도 빨래는 세탁실에 넣어두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어머, 양말 뒤집어 놓으신 거 봐. 이렇게 세탁기에 넣고 그냥 돌리면 잘 안 빨린다니까요.”
하이톤 목소리가 둘이나 됐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휙!
고개를 돌려본 태수의 앞엔 주미성과 윤사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 너희들은 어떻게 왔어. 영수가 데려온 거야?”
“아니요. 따로요. 그것도 제가 운전해서요!”
척.
주미성이 손으로 ‘V’를 내밀며 방글방글 미소 지었다. 한 달 전에 생애 첫 차를 손에 쥔 어엿한 오너드라이버였다.
매형과 주영수가 직접 고르고 수리한 튼튼한 중고차였다.
안전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운전이라는 게 나만 잘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운전할 때는 항상 방어 운전……. 음?”
태수가 안전에 대해 말하려다 멈칫했다.
스윽.
이상한 시선이 먼저 느껴져 그쪽을 바라보자 윤사라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수의 상체는 지금 아무것도 걸친 게 없었다.
그게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전에 워터파크에 같이 놀러간 적도 있고, 고향 집 마당에서 등목을 한 적도 많았다.
초곡리 앞바다에서 해수욕한 횟수는 손발 다 합쳐도 셀 수 없었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가리고 말고 할 건 없었다.
그런데 윤사라의 눈길이 뭔가 야릇했다.
그게 이상하다 생각될 무렵이었다.
윤사라가 태수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당당하게 엄지를 내밀며 칭찬했다.
척.
“우리 삼촌 근육은 역시 최고, 하나도 안 죽었네요!”
“……그런데 너무 빤히 보는 거 아니냐?”
“뭘 우리 사이에 또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러네요. 그리고 저 간호사거든요. 간호사는 다 괜찮아요.”
윤사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 순간 태수는 바로 정정부터 했다.
“아직 간호사 아니고, 간호사 실습생이야. 무엇보다 그 시선은 넣어줬으면 좋겠는데?”
“선정이 이모가 이렇게 봐야 남자들이 좋아한다고 그랬는데요.”
“그 분은 그래도 돼. 그런데 네가 벌써 같은 레벨이면 내가 참 곤란하지 않겠니?”
“아, 그렇겠네요. 그럼……. 꺄아. 어머어머 난 몰라.”
이해한 윤사라가 영혼 없는 얼굴로 호들갑을 짜냈다.
어이가 없어진 태수가 주미성에게 권했다.
“미성아. 사라 피곤하가보다, 데려가서 좀 재워……. 넌 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생각해보니까 부끄러워서요?”
“말끝은 왜 올라가는 건데?”
“그게……”
얼버무리는 주미성의 얼굴을 본 태수가 피식거렸다.
“그리고 부끄럽다면서 왜 손가락 사이로 나랑 눈이 마주치는데?”
“어머나, 꺄아아.”
주미성도 그제야 영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태수는 그저 황당했다.
“얘들 뭐야?”
“다분히 소녀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대학생 아줌마들이요.”
옆에서 들려온 주영수의 대답에 태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학생 아줌마들?”
“삼촌은 역시 잘 모르시네요.”
“내가 뭘 몰라?”
“저 누님들이 얼마나…….”
주영수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주미성과 윤사라가 정색하며 한 마디씩 으르렁거렸다.
“영수야, 태양을 영원히 피하고 싶니?”
“오늘도 병원 놀이할까. 복합 골절 환자 역할은 어때?”
듣기만 해도 살벌한 소리에 주영수는 흠칫하며 재빨리 2층으로 도망갔다.
타다닥.
“삼촌, 안녕히 주무세요!”
얼마나 빠른지 태수가 화답할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주영수가 사라진 후였다.
주미성과 윤사라는 언제 그랬냔 듯이 다시 티 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짓궂은 장난도 모두 지워져 있었다.
“삼촌. 헤헤.”
“히히.”
실없는 웃음소리 또한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참 객관적인 기준으로 봐도 아름다운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극히 주관적인 태수의 눈엔 주영수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강하게 와 닿고 있었다.
“대학생 아줌마들이라.”
“……삼촌!”
“아차차, 나 씻으러 이만 실례.”
태수도 날카로운 조카들의 눈빛엔 일단 자리부터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서둘러 샤워실로 향하는 태수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들어온 집에서, 이렇게 몰래 기다리고 있던 조카들이 반겨주니 행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태수가 거실로 나왔다.
태수의 얼굴엔 붉은 홍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깨끗하게 씻었지만 집에서 씻는 건 그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상쾌함 가득한 미소를 짓던 태수는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음? 이 냄새…….”
익숙한 음식 냄새에 이끌린 태수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엌에 들어선 태수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어느새 식탁에 정갈한 반찬들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반찬들 모두 태수의 눈에 생소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걸 보니 모두 새로 만든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