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213
03217 3217화
최근 바빠서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다.
사실 연말 연초 시즌이라 이슈가 많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긴 아쉬웠다.
그런 두 사람은 어느새 근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벤치에 앉았다.
치직.
가볍게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후 박성민이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이제 좀 한숨 돌리겠네. 새해가 밝자마자 빠지고, 추가 되고, 바뀌고……. 너무 부산했다고.”
“뭐랄 순 없죠. 4개 병원에서 동시에 진행한 일이니까요.”
태수 대답에 박성민이 고개부터 저었다.
“인간들 참 우직하지가 못해.”
“왜요?”
태수 말에 박성민이 속마음을 꺼냈다.
“특히 이번에 다른 병원으로 간 녀석들 말이야. 몇몇 녀석들이야 이유가 있었지만, 나머지는…….”
“자의로 옮긴 의사들은 몇 명 안 됩니다.”
“하긴 나머지는 부상자였지.”
박성민이 수긍하자 태수가 피식 웃었다.
“아시잖습니까.”
“특히 레지던트들, 얼마나 빨빨거리고 다녔으면 무릎하고 발목 인대가 말썽이야?”
박성민은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안쓰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손목 인대가 말썽인 경우도 있었죠.”
“그건 우리 외과 계열이고, 내과 계열은 과로가 많다며?”
“24시간 긴장해야 되잖습니까.”
“하긴 누가 편하고 누가 안 편하겠냐. 다 똑같지……. 아차차, 신속대응센터에 오늘 출근하기로 한 전문의가 있다던데?”
박성민이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조금 전과 말이 달랐다.
잊고 있다가 마침 자리한 위치가 신속대응센터 입구 근처라서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요? 전 처음 듣습니다만.”
“부센터장 직위를 만든다고 했잖아. 센터장님 과로로 쓰러지기 전에 업무 분담한다고 말이야.”
“그건 들었죠. 그런데 아직 내정된 의사가……. 그럼 결정됐답니까?”
“그래. 그래서 출근하기로 했는데, 조용한 거 보니까 아직 안 온 모양이야.”
“그건 무슨 똥배짱이랍니까?”
태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출근하지 않았단 건 눈살이 찌푸려질 일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출근 약속 하나 못 지키는 인물이라면 썩 반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태수가 직접 나설 건 아니었다.
희망병원의 업무 강도를 생각하면 그런 마인드로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
그런 대화가 슬슬 마무리되어 갈 때였다.
부웅.
입구 쪽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올라온 검은색 자동차는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태수와 박성민도 그걸 봤다.
하지만 워낙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태수가 말했다.
“선배, 이제 일어나시죠.”
“아이고, 누굴 찾으시는 건지……. 여기 선배 없습니다만.”
“친애하는 신임 흉부외과장님.”
“응? 태수야, 나 불렀어?”
빙긋.
박성민이 해맑은 얼굴로 대답하자 태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흉부외과가 참…….”
“뒷말 잘 붙여라.”
“올해도 많은 발전을 이룰 거 같다고요.”
“당근이지! 자, 그럼 슬슬 우리 애들 쥐 잡듯이 잡으러 출격해 보실까나?”
벌떡.
박성민이 기운차게 일어났다.
이어서 태수와 박성민은 나란히 현관으로 향했다.
끼익.
현관문을 연 태수가 정중하게 안내했다.
“흉부외과장님, 들어오시죠.”
“어흠, 그래 볼까나.”
둘이 장단 맞춰 농담을 주고받을 때였다.
타다닥!
주차장 쪽에서 양복을 입은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깔끔하고 두툼한 양복 차림에 서류 가방도 들고 있었다.
그에 비해 피부는 일부러 태닝을 했는지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태수와 박성민은 장난하느라 남자가 다가오는 걸 못 본 듯했다.
문이 닫히려 하자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최 팀장, 헉헉, 문 좀, 헉헉, 잡고 있어!”
아는 사람?
태수와 박성민이 동시에 뛰어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 순간 태수가 눈을 크게 떴다.
“누구……. 어?”
“어어?”
박성민도 반응이 똑같았다.
그때 열린 문 틈으로 그 남자가 쏜살같이 지나가며 말했다.
“둘 다 반가워. 헉헉!”
“아니……”
“비행기 연착에, 집에 세워 둔 차는 시동도 안 걸리고, 헉헉, 어쨌든 병원장님부터 뵙고……. 이따 보자고!”
마지막 말은 저만치 멀어진 후에 들려왔다.
그런데 태수와 박성민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못했다.
쩍!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며 놀라고 있었다.
먼저 이성을 되찾은 태수가 박성민에게 물었다.
“선배, 제가 지금 누구를 본 겁니까?”
“잠깐만, 내가 먼저 물으려고 했거든? 지금 내가 누굴 본 거야?”
“그럼 진짜 제가 본 의사가…… 확실한 겁니까?”
“맞는 거 같아. 그런데 저쪽도 우리를 본 거지?”
박성민이 이상한 질문을 했지만 태수는 타당하단 목소리로 답했다.
“알아보고 간 게 맞긴 한데, 오랜만에 봐서 신기하긴 하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난 눈 감고 뛰는 줄 알았어.”
“…….”
태수의 입이 순간 꾹 다물어졌다.
방금 지나간 인물.
분명히 신창용의 얼굴이었다.
르완다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에 있을까?
너무 놀라 얼떨떨했지만 정신이 드니 신창용과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났다.
태수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변했다.
그 변화에 박성민이 멈칫했다.
“너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저 인간이 제 앞에 나타났네요.”
“그런데? 아……. 음, 네가 나서면 분위기 이상해진다.”
“상황 보고요.”
태수는 확답하지 않았다.
이선정 간호팀장과 관련된 일이라 절대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박성민도 친남매처럼 지내는 두 사람을 알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태수도 조용했다.
각자 의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다시 묵직해졌다.
시간이 흘러 오후 일과 시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태수도 가볍게 목을 풀며 일정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태수는 바로 답했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신창용의 얼굴이었다.
가느다란 눈매와 미소는 역시 여전했다.
태수는 비서실 핫라인인 주미성에게 대충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부센터장님.”
“최 팀장, 이렇게 차갑게 대할 건 없잖아. 내가 신속 부센터장으로 온 이유를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
태수는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서 술 마실 때 그랬다.
재성병원장에 오르고, 그 임기가 다하면 한국에 오겠다고 말이다.
그때 그가 보여 준 각오는 바로 신념이었다.
이루고 말겠단 절대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희망병원 신속대응센터 부센터장 자리에 앉은 걸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태수의 침묵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창용 부센터장도 뭔가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탁.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온 그가 말했다.
“나 완전히 한국 들어온 거야.”
“…….”
“왜 들어왔냐고 묻고 싶지? 그때 보여 줬던 각오가 겨우 이거였냐고도 묻고 싶고.”
“……네.”
태수는 짧게 답했다.
그때였다.
스윽.
신창용 부센터장이 느닷없이 와이셔츠를 들어 올렸다.
의아하게 바라보던 태수의 눈이 순간 가늘게 흔들렸다.
신창용 부센터장 복부 곳곳에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는 분명히 없었다.
수술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수술 끝나고 같이 샤워하고, 심지어 같이 목욕탕을 간 적도 있다.
그래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 저 상처의 모양이나 위치, 깊이가 너무도 익숙했다.
태수가 잘 알고 있는 상처다.
그에 대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유탄에 얻어맞은 상처네요.”
“역시 최 팀장은 첫눈에 알아챌 줄 알았어.”
“직격탄은 아니지만 꽤 근거리……. 휴, 출혈이 엄청나셨겠습니다.”
“맞아. 죽기 직전에만 볼 수 있다던 파노라마 인생사까지 봤으면 말 다 했지.”
신창용 부센터장이 한쪽 입꼬리를 쓰게 올리며 답했다.
그때 기억이 좋을 리 없을 터였다.
그런데 태수는 조금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건 왜 보여 주십니까?”
“이게 내가 돌아온 이유라서.”
“다시 죽을 수 있단 공포 때문이라면 그럴 수 있죠.”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뻔한 몸을 이끌고 또 내전 지역을 전전하는 건 못할 짓이다.
스스로 경험해 본 태수라 절대적으로 이해가 됐다.
그런데 신창용 부센터장은 더욱 쓰게 미소 지었다.
“맞아. 그런데 다른 이유도 있었어.”
“……뭡니까?”
“선정이.”
“…….”
태수는 침묵한 채 바라만 봤다.
신창용 부센터장은 가느다란 눈에 가득 힘을 주며 말했다.
“죽는단 느낌을 받았을 때 여러 생각이 들더라. 그동안 이룬 것들 말이야.”
“…….”
“올해 부원장 승진 얘기도 오가는 중이었고, 지역사회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기도 했고.”
“얼추 들었습니다.”
“그래. 이 나이에 부원장으로 승진해도 엄청난 특진 케이스니까 반은 이뤘다고 생각했어. 병원장이 손만 뻗으면 닿을 상황인 건 아쉬웠지만.”
“…….”
끄덕.
태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신창용 부센터장의 말은 옳았다.
재성종합병원은 르완다 최대 규모의 병원이다.
사실 한국 의료진들이 있지만 르완다 의사들은 몇 배나 더 많았다.
그 경쟁을 뚫고 부원장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실력은 두말할 나위 없고, 인지도 또한 압도적이란 소식도 들었다.
그런 기반을 닦기까지 고생은 안 들어도 알만했다.
엄청난 출동과 수술을 진행하느라 잠을 쪼개며 노력했단 일화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신창용 부센터장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가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부원장 승진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원장 취임 후 임기 동안 별문제 없으면 자동으로 병원장 자리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은 케이스였다.
한마디로 보장된 성공 가도가 펼쳐져 있었다.
목적지까지 자동으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였다.
신창용 부센터장은 박성민보다 고작 2살 많았다.
그런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급 승진 케이스였다.
태수의 고갯짓엔 그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걸 본 신창용 부센터장이 이어서 말했다.
“그 파노라마 인생사의 마지막에 선정이가 보였어.”
“음.”
“이탈리아에서 친구로 지내잔 말을 할 때…… 서로 이해하자며 웃으며 울었던 그 모습 말이야.”
“그랬군요.”
태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신창용 부센터장은 아랫입술을 한 번 진하게 깨물고 이어서 말했다.
“그걸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그래서 악착같이 이겨 내셨단 거네요.”
“그래. 수술 내용 들어 보니까 진짜 악착같이 이겨 냈다더라.”
“어느 정도로요?”
태수의 물음에 신창용 부센터장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툭툭 내뱉었다.
“뭘 듣고 싶은 거야? 에잇! 그래, 뭐…… 심정지 세 번, 부정맥 다섯 번, 뭐 더 말해?”
“그걸 이겨 낼 수 있었던 게 선정이 누나 때문이라고요?”
둘만 자리하고 있던 터라 태수는 편안하게 호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