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48
00351 351화
사락.
노트를 또 한 장 넘겨 빈 종이에 핵심적인 내용들을 정리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많이 적었는지 넘긴 종이가 상당히 많았다.
카프레네의 임상 경험을 이어받은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대부분은 기억하고 있다지만 핵심뿐이다.
신장이식의 경우에도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하는지는 기억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태수가 고심하는 부분들도 그런 부분들이다.
신장이식은 충분히 어시스던트할 수 있다.
하나 정작 수술에 들어갔을 때 어떤 부분부터 확인하고 어떻게 어시스던트를 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건 오롯이 태수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태수는 최고의 임상 경험을 가지고도 이렇게 스스로 공부를 해야 했다.
물론 태수는 이런 시간이 행복했다.
자신의 노력을 통해 깨달은 지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책을 통해 얻는 죽은 지식이 아니다.
생생히 살아 있는 지식이었다.
그리고 한 번 물고를 터놓으면 카프레네의 임상 경험이 뒷받침된다.
태수가 하는 노력에 두 배, 세 배가 넘는 지식들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반대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카프레네의 임상 경험은 절대 많은 걸 알려주지 않았다.
여태까지 태수가 외국에서 경험한 건 대부분 응급환자들이다.
태수가 유독 응급에 강한 것도 경험을 쌓는 만큼 카프레네의 임상 경험이 도움을 준 덕분이다.
남들이 하나를 배워갈 때 태수는 같은 노력으로 둘 혹은 셋을 얻는다.
불공평한 일은 아니다.
태수는 지금까지의 임상 경험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치료해야 했고, 또 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태수도 그런 자신을 알기에 다른 의사를 경시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우쭐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다른 의사들의 노력을 존중했다.
그게 지금까지 태수를 지탱해 준 원동력이었다.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며 공부하던 태수가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아, 벌써 시간이…….”
6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슬슬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다.
꼬르륵.
배도 아우성이다.
일단 지금까지 공부한 걸 호텔에 돌아가 식사부터 하고 제임스와 다시 이야기해 봐야 할 거 같았다.
혼자 공부하는 건 여기까지다.
만족할 만큼의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신장이식에 대해 아는 게 너무도 부족하고 시간도 없었다.
그나마 개념을 잡고, 기초를 다지는 정도였다.
거기까지만 생각한 태수는 소회의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호텔에 돌아가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제임스와 수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았다.
깔끔하게 정리한 소회의실을 벗어난 태수는 곧장 승강기로 향했다.
태수가 승강기 앞에 서서 기다리던 중이다.
곧 승강기가 도착했다.
땡.
도착 음과 동시에 승강기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태수가 자연스럽게 올라 1층을 눌렀다.
문이 닫힌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사이에도 태수의 머릿속에는 수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일단 신동맥과 신정맥을 차단하고…….”
가장 기초부터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태수가 그렇게 생각이 팔려 있는 사이에도 승강기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던 중이다.
띵!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서서히 멈춰 섰다.
힐끔 층수를 확인하니 아직 1층이 아니었다.
그것만 확인한 태수는 다시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강기의 문이 서서히 양쪽으로 벌어졌다.
승강기 앞에는 양복을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확인한 태수가 멈칫했다.
그 중년인은 다름 아닌 흉부외과장인 이추명 과장이었다.
태수는 안다.
저런 후덕한 생김과 달리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이추명 과장에게 찍혀서 인턴 생활이 고달파지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박성민에게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태수의 서울 레지던트 면접을 막은 사람도 이추명 과장이었다.
그로 인해 고생한 걸 생각하니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여기서 보네.’
태수의 눈빛이 조금은 차갑게 식었다.
시간상 퇴근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태수가 잠깐 생각하는 사이 이추명 과장도 상대를 확인했다.
그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추명 과장은 천천히 승강기에 올랐다.
그르릉.
두 사람만 올라탄 승강기 문이 서서히 닫혔다.
동시에 태수는 생각했다.
만약 여기서 흥분한다면?
쫓겨나듯이 인턴을 수료한 그때를 기억하는 옹졸한 의사가 될 뿐이다.
먼저 흥분하고 날카롭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낮에 옥상에서 서강재가 말했다.
의사는 혀가 아닌 메스로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태수도 그 말을 절대적으로 인정했다.
그런 생각들이 태수의 분노를 서서히 가라앉혔다.
어렵사리 안정을 되찾은 태수가 먼저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음. 오랜만이군. 왔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잘 지냈나?”
이추명 과장 또한 태수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했다.
예전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다.
이추명 과장 나이가 오십에 가까웠다.
사회생활을 그만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쉽게 속마음을 내보일 만큼 경솔하지 않았다.
그런 자연스러운 인사에 태수도 똑같이 응대했다.
“어찌저찌 지내고 있습니다. 그보다 몇 층 가십니까?”
“1층 가는 거 같은데, 같이 내리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태수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니 승강기 속은 금방이라도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깬 건 의외로 이추명 과장이었다.
“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던데. 맞나?”
“네. 올해 초에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오래 있었다니, 그건 좀 의외군.”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태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추명 과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까. 좋은 경험이었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도 못 드린 거 같습니다.”
“감사 인사라…….”
“여러 가지 신세 진 게 많죠. 지금이라도 인사 받아주시겠습니까?”
태수가 정중하게 말했다.
고마운 건 사실이다.
태수가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했고, 그 전에는 연성에서 쫓아내듯이 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태수도 없었다.
태수의 의도는 순수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은 꼭 그렇진 않은 거 같았다.
그 증거로 이추명 과장의 안면근육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온 이추명 과장이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군.”
“감사합니다.”
태수는 그렇게 대화를 마쳤다.
이추명 과장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잠깐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끝내 그는 태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또다시 침묵.
지금은 이런 장면이 차라리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만 태운 승강기는 1층까지 곧장 내려갔다.
땡.
도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이추명 과장이 먼저 승강기를 나섰다.
태수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 모두 방향이 현관이다.
이추명 과장도, 태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갈 길만 걸어갈 뿐이었다.
“과장님, 퇴근하십니까.”
“조심히 돌아가세요.”
주변에서 같이 퇴근하는 의료인들이 이추명 과장을 향해 인사했다.
고개를 끄떡인다든지, 손을 들며 인사를 받은 이추명 과장은 현관으로 직행했다.
조금 뒤에 태수가 따르고 있다.
하나 의료인들은 태수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진 않았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현관에 도착할 즈음이다.
그르릉.
커다란 회전문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 회전문을 다섯 명의 남녀가 차례로 통과했다.
가장 선두에 선 건 제임스였고, 그 뒤로 조나단과 브레드 김, 루미에와 캐서린 간호사까지도 함께였다.
“제임스 박사님이다.”
“안녕하십니까!”
퇴근하던 의료진들이 제임스를 알아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다들 좋은 밤 되세요.”
제임스는 사람 좋은 얼굴로 화답했다.
동시에 이추명 과장의 얼굴이 돌변하더니 얼른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은 서툰 듯한 영어 발음으로 제임스에게 아는 척했다.
“박사님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오, 흉부외과장님 아니십니까.”
제임스가 인사를 했다.
그때 뒤쫓아 오던 브레드 김이 이추명 과장 뒤에서 다가오는 태수를 발견했다.
“닥터 최!”
“아!”
태수도 그제야 제임스 일행을 알아봤다.
그때였다.
이추명 과장이 제임스에게 정중하게 초대했다.
“박사님, 혹시 식사 전이시면 다들 같이 가시죠. 한국 전통 음식들을 잘 하는 곳을 압니다.”
“죄송해서 어쩝니까.”
“혹시 선약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저 뒤에서 절 애타게 기다리는 젊은 의사가 있네요. 그럼 다음에 또.”
제임스는 차분하게 대답한 후 이추명 과장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런 제임스는 태수에게 시선을 돌리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닥터 최. 밥 먹었나?”
“아니요. 그런데 호텔에 계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오늘 하루 놀겠다고 큰소리 쳐 놓고 지금까지 환자 데이터를 살펴보고 있을 누군가가 생각나서 말이야. 아닌가?”
제임스가 콕 집어서 말하자 태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여기 준비해 왔지.”
제임스는 브레드 김이 들고 있는 하얀 비닐봉투를 가리켰다.
그러자 브레드 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걸 높이 들어 보이며 말했다.
“김밥하고 쫄면이야. 김밥은 먹기 편하고, 쫄면은 매콤한 파스타 맛이라고 엄청 좋아하시거든.”
“쫄면 면발이 좀 쫄깃하긴 하죠.”
“자, 올라가서 먹자고.”
“올라가신다고요?”
태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중이기에 제임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우리의 밤은 이제부터 아닌가? 나한테 궁금한 것도 많을 거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도 질문할 게 한 보따리입니다.”
“그럴 줄 알고 왔어. 좁은 호텔방 보다는 넓은 소회의장이 나으니까. 자, 가자고.”
제임스가 다가와 태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이기에 태수도 이내 뒤돌아 다시 승강기로 향했다.
어느새 조나단과 브레드 김. 그리고 간호사들도 태수 주변에 모여들어 같이 이동했다.
현관 근처에 멀뚱히 서 있던 이추명 과장의 얼굴에 처음으로 불쾌감이 떠올랐다.
자신은 서울 유명 대학병원 과장.
태수는 고작 지방 종합병원의 레지던트다.
그런데 두 사람을 대하는 제임스의 태도는 상반됐다.
그게 이추명 과장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승강기에 올라 모습을 감춘 후에야 이추명 과장도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지금 흉부외과장님이 저 젊은 친구한테 밀린 거지?”
“쉿! 들려.”
“음음.”
조금 전 상황을 모두 지켜본 의료진들이 속삭이며 얼른 멀어져갔다.
그 모습이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과 같았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이 상황을 지켜본 이추명 과장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완전히 닭 쫒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다.
자존심이 사정없이 뭉개진 기분이 되자 갑자기 술이 강하게 당겨왔다.
이추명 과장은 불쾌함을 애써 억누른 걸음걸이로 현관을 벗어났다.
얼마 후.
소회의장 테이블에는 김밥과 쫄면의 잔재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누구도 그걸 치우지 않았다.
아니, 치울 겨를이 없단 말이 정답이다.
각자 음료수를 든 채 소회의장 한 쪽 벽면에 떠오른 검사 영상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빔 프로젝트와 노트북을 조작하는 건 역시 브레드 김의 몫이다.
브레드 김은 브리핑까지 이어갔다.
“어제 호텔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브레드 김의 브리핑 내용은 그렇게 특별한 건 없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다들 이미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고, 눈이 빠지도록 확인한 부분들이기도 했다.
그만큼 철두철미하다고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