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34
00837 837화
스미스의 집무실에서 나오자 역시나 데이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변신한 태수의 모습에 데이먼은 진한 미소를 내보였다.
“우리 병원 가운이 상당히 잘 어울리십니다.”
“원래 의사 가운이면 다 잘 어울리는 얼굴입니다.”
“하하하. 그보다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스미스 박사님이 그러시던데요. 전부 닥터 데이먼에게 물어보면 된다고요.”
태수가 찡긋거리며 말하자 데이먼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게요. 제가 전담하기로 했으니 저에게 잘 보이셔야 할 거 같은데요.”
“어떻게 잘 보여야 할까요?”
“당장 뭘 써 먹으려고 해도 그 꺼먼 안색으로는 안 될 거 같으니까, 일단 숙소부터 안내해 드리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잠시였다.
장난이 끝난 순간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선 태수를 안내해 준 곳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특급 호텔이다.
페타스코강이 한눈에 보이는 풍경 좋은 스위트룸이다.
방에 들어선 태수는 부담감이 먼저 엄습했다.
“제가 묵기에는 과분한 곳 같습니다만.”
“스미스 박사님의 지인이면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경비는 병원에서 일체 지불하니까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병원에서요?”
“테스트를 위한 거지만 엄연히 수술을 하러 온 의사입니다. 그런 의사를 아무 곳에나 머물게 할 정도로 우리 병원 인심이 박하지는 않습니다.”
존스홉킨스병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데이먼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자부심이 떠올랐다.
태수는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자신도 신속대응센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데이먼과 똑같은 모습일 터였다.
태수는 자부심 가득한 데이먼을 향해 물었다.
“그럼 룸서비스 많이 먹어도 됩니까?”
“글쎄요. 여기 비싼데…….”
“역시 좀 그렇죠?”
“적당히 드세요.”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의 눈빛이 자꾸만 흔들렸고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리고 곧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푸하하.”
틈만 나면 농담을 나누는 서로의 모습이 웃긴 모양이었다.
한바탕 웃고 난 후 데이먼이 먼저 말했다.
“아무런 걱정 마시고 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드시고, 충분히 쉬십시오.”
“배려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죠.”
“그보다 환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부터 할까요?”
태수가 먼저 묻자 데이먼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닥터 최의 컨디션부터 좋아지면 시작하죠.”
“푹 쉬고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데이먼은 천천히 뒤돌아 호텔방을 나갔다.
첫 만남에서 데이먼은 태수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태수 때문에 스미스가 한국으로 가야 했던 탓이다.
그러나 태수가 어시스던트한 조서영의 수술을 참관한 후부터 크게 변했다.
의술이 뛰어나면 존중해 준다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아마 그가 초곡리에 왔을 때부터 태수가 친절하게 대해 준 게 더욱 큰 것 같았다.
다시 혼자가 되자 호텔방은 적막했다.
태수는 거실을 지나 테라스로 나가자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장시간 비행의 피로감은 가득했지만 색다른 풍경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어딘지 모르게 삭막했던 LA와 달리 볼티모어는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태수는 잠들기 전 우선 한국 시간을 확인하고 주미성에게 전화했다.
호텔 전화라 수신 감도가 무척이나 좋았다.
“여보세요?”
“뭐 하고 있었어.”
“삼촌! 도착하셨어요?”
태수의 목소리에 주미성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아졌다. 그 밝은 목소리가 태수를 더욱 기분 좋게 했다.
“그래. 조금 전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 풀고 전화하는 거야.”
“거기는 어때요? 미국은 진짜 좋은 곳이라던데요.”
“강도 보이고 높은 건물들도 많고. 다음에 같이 여행 오고 싶을 정도야.”
“멋있겠다.”
“사진 찍어서 보내 줄게. 그보다 밥은?”
태수가 묻자 주미성이 대답했다.
“조금 전에 먹었어요. 삼촌은 피곤하지 않으세요?”
“약간. 학교는 잘 다녀왔고?”
“네. 삼촌이 주신 용돈으로 애들하고 떡볶이 사 먹었어요.”
“잘했다. 그보다 영수는?”
“잔다고 들어갔는데요. 깨울까요?”
주미성이 머뭇거리자 태수가 얼른 이야기했다.
“나중에 통화하면 되지. 이 간호사님 옆에 계셔?”
“잠시만요.”
주미성의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곧 이선정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이제는 저한테 전화도 안 하시네요.”
“조카 목소리가 먼저 듣고 싶은 삼촌이라서요.”
“그러시면 안 돼요. 제가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태수가 넉살 좋게 대답할 때였다.
이선정 간호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선생님, 차 보험사가 어디예요?”
“혹시…….”
“제가 실수로 그만.”
“음. 일단 말씀해 보세요.”
태수가 울컥한 마음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자 순간 이선정 간호사의 목소리가 밝게 변했다.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보험사는 혹시 모르니까 알아 두려고요.”
“정말입니까?”
“조금 전에 울컥하셨죠? 사고 낸 줄 알고 걱정하셨죠?”
“아닙니다. 몸 괜찮으신지 여쭤 보려고 했습니다.”
태수가 얼른 핑계를 댔지만 이선정 간호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제가 선생님 목소리 하루 이틀 듣나요. 발끈하시려다 억지로 참으신 거 같던데.”
“좌우간 보험사는 휴대폰 메신저로 보내 드리고요. 전 무지하게 피곤해서 이만 끊습니다.”
“큭큭. 안녕히 주무세요.”
이선정 간호사는 태수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통화를 마친 태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놀림을 받은 게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잠깐 긴장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풀렸다.
“아싸.”
푹신한 침대에 누운 태수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잠들었다.
장시간의 비행이 정말 피곤한 탓이었다.
다음 날 오전.
숙면으로 비행의 피로를 털어 낸 태수는 객실에 데이먼과 함께 있었다.
널찍한 소파 테이블에는 어제 스미스에게서 받아 온 얇은 서류철 하나가 놓여 있었다.
태수가 먼저 말했다.
“여기까지 모셔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갑갑한 병원에서 벗어나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의견을 나누는 게 더 좋죠.”
“제 생각을 정확하게 읽으셨네요. 그럼 어디 좀 볼까요?”
태수는 넉살 좋게 대답하고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사락.
첫 장부터 차분하게 넘겼다.
태수가 서류를 확인하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데이먼은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서 기다렸다.
가장 지루한 시간이지만 나름대로 알차게 보내는 것 같았다.
태수가 데이먼을 호텔로 부른 건 사실 이런 이유 탓이었다. 자신도 경험상 다른 사람이 의료 차트를 확인할 때가 가장 지루했다.
그 지루함을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며 조금이나마 줄여 줄 생각이었다.
물론 태수가 느긋하게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서 선택한 이유가 가장 컸다.
무엇보다 의무적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기에 구태여 병원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태수는 이런저런 이유로 편안하고 꼼꼼하게 환자의 진료 기록을 확인했다.
30여 분 만에 처음으로 서류에서 시선을 뗀 태수가 데이먼을 바라봤다.
“푸휴휴.”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콧소리를 내며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이라도 떠 와야 하나.
생각하던 태수가 몸을 일으켰다.
부스럭.
필연적으로 소파 소리가 나자 귀를 꿈틀거린 데이먼이 화들짝 깨어났다.
“음, 잠깐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피곤하신 거죠.”
“어제 오랜만에 푹 잤는데도 이러네요.”
“진찰 좀 해 드릴까요?”
태수가 농담으로 묻자 데이먼도 장난으로 화답했다.
“존스홉킨스에 닥터 데이먼이라는 명의가 있어서, 그 사람에게 진찰받을까 합니다.”
“기회가 되면 저도 한번 받아 봐야겠네요.”
“진료비만 해도 너무 비싼 의사인데요.”
“진짜 명의인가 보네요.”
태수가 넉살 좋게 받아 주자 데이먼은 적당한 선에서 장난을 멈췄다.
“좌우간 닥터 최는 못 당하겠습니다. 그보다 확인은 다 하셨습니까?”
“dilated cardiomyopathy(확장성 심장근육병증)이더군요.”
“그렇죠.”
“그 외에 기존의 검사 내역들을 모두 확인해 봤는데…….”
태수가 말꼬리를 길게 끌자 데이먼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요?”
“한 번 더 검사를 해 봐야 확실하게 수술 방법을 결정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글쎄요.”
데이먼의 말투가 거슬린 태수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문제가 있습니까?”
“아마 그 환자에게 그만한 여력은 없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이번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 수술관계상 무료로 수술해주는 형편이 아주 어려운 환자입니다. 생활수준이나 급여 수준으로 봐선 다른 수술은 불가능합니다.”
데이먼의 말인즉, 돈이 없는 환자란 뜻이었다.
데이먼의 표정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담담했다. 이런 일을 비일비재로 겪어 본 듯했다.
사고방식이 그쪽으로 굳어져 있고, 병원 시스템 또한 똑같으니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라는 걸 알기에 태수는 화도 나진 않았다.
다만.
“수술 전날 마지막 검사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중간 검사만 생략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현재까지 얻어 놓은 데이터로 이후의 변화도 예측하면서 수술 방법을 의논해야겠네요.”
태수의 말에 데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한국하고 병원 시스템이 많이 다르죠?”
데이먼이 먼저 묻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알죠.”
“저도 가끔은 아픈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도 합니다.”
“…….”
“이게 핑계일진 모르지만, 병원을 바꿀 수 없어서 전 제 나름대로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야 최소한 그들이 지불하는 비용을 억울하게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요.”
데이먼의 말에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미국 의사라고 모두 돈만 밝히는 속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태수는 이틀 동안 데이먼과 환자의 변화에 대해 예측하며 수술 방법을 의논했다.
확실한 데이터가 없기에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대화가 이어질수록 데이먼은 태수에게 여러 번 놀랐다.
“그것도 알고 계십니까?”
“그러게요.”
“외과 전문의라는 한국 기사를 봤는데, 혹시 흉부외과 전문의 아닙니까?”
“번역기가 그렇게 오타를 내면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죠.”
태수는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데이먼은 믿을 수 없단 눈치였다.
“이건 저희 병원 흉부외과 전문의들도 상당수 실천하기 어려운 방법들입니다.”
“제 경험이 남들과는 다르잖습니까.”
“그거야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데이먼은 믿을 수 없단 표정이었다.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태수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카프레네의 지식이다. 흉부외과 전문의가 아닌 박사 이상의 이론이란 뜻이다.
이론뿐만이 아니라 의견을 낸 수술을 집도할 역량도 충분했다.
수년 동안 다양한 곳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한 태수였기에 이론을 실행에 옮길 실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데이먼은 태수의 이력을 듣긴 했어도 이게 가능할지는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태수는 그런 데이먼의 놀라움에도 태연하게 다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스미스는 데이먼을 통해 태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알았네. 나가 봐.”
데이먼이 나가고 스미스는 창밖을 바라봤다.
전망이 좋은 위치였지만 빼곡하게 솟아난 빌딩 숲 때문에 그리 시원한 느낌은 없었다.
“카프레네 작품일까, 아니면 제임스 작품일까.”
태수가 어떻게 그렇게 심도 깊은 흉부외과 지식을 알고 있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수술이 끝날 때까지는 만날 생각이 없었다.
괜히 알려지면 나중에 공정성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수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