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286
에덴 (4)
어색한 침묵이 방 속을 감돈다.
창문도 없어 꽉 막힌 이곳은, 희미하게 빛나는 노란색 전등의 불빛만이 텅 빈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불을 킬 수 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전파가 통하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고. 마로니에도 제 나름 시간을 때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
자기 몸집만한 베개를 끌어안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마로니에.
침대의 위치가 마주보고 있어 그 시선이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다.
“야.”
따분해하는 목소리.
“뭐 해?”
“핸드폰.”
“그건 보면 안다구.”
내 대답이 흡족하지 못한지 투덜거리며 베개를 더 강하게 끌어안는다.
할 말도 없는데 저녁이라도 먹을까.
그 생각도 해보았는데 산수유만 빼고 먹었다간, 뒷감당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
최근 들어 겨우 끌어올려 놓은 산수유의 호감도다.
저번처럼 수련회에서 소통이 단절되서 잠시 관계가 소홀해지는 일은 있으면 안된다.
산수유. 내 인생의 빛.
보고 있기만 해도 피로가 풀리는.
“야아.”
“왜 그래?”
마로니에의 말에 도중에 생각이 끊겼다.
핸드폰을 베개 옆에 내려두고 눈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슨 일인데 자꾸 불러?”
다소 공격적이진 않은 어투로.
얘도 당하고 싶어서 예속을 당한 건 아니지 않은가.
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마로니에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나를 흘겼다.
꼼지락꼼지락, 이불 밖에 내놓은 열 발가락이 벌어졌다 조였다를 반복했다.
“……재밌는 이야기 해줘.”
“너는 내가 썰 풀이 머신으로 보이는 거니?”
던전 안에서도 그렇고, 미팅 때도 그렇다.
둘이 남을 때면 자꾸만 서민 이야기를 해달라는 마로니에다.
이쯤 되면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나한테 서민 이야기를 청하는 게 아닐까.
“그치만 심심한 걸.”
“책 봐.”
“너무 흥미로운 게 많아서 뭐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무거나 하나 골라 집어서 보면 되는 거 아니야?”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눈이 가늘어진다.
거 참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다.
마로니에는 베개를 내버려 두고 이불로 자기 몸을 감싼 뒤, 머리만 내밀어 나에게 중얼 거렸다.
프랑스어가 아닌 한국어로 어눌하게.
“…바보.”
담긴 감정이 무시하기 힘들다.
‘그새 한국어를 배워?’
나는 이불 안에 돌돌 감싸인 마로니에 김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감정 통제를 당한 녀석을 상대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애초에 예속에 걸리긴 한 건지.’
태양은 예속에 걸리면 어떤 행동을 하든 나를 위해 움직인다고 하였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오직 나를 위해서만 양 손을 쓴다고.
마로니에는 내 말은 잘 들으면서도 또 어떤 부분으로는 굉장히 나를 귀찮게 했다.
컴퓨터로 롤 한 판 돌리고 있는데 무릎 위에 올라오는 고양이같은 느낌이다.
예속을 확인하는 건 직접 명령해보는 수밖에 없는데.
“마로니에.”
“왜.”
퉁명스레 대답해온다.
나는 슬쩍 내 침대 옆을 비켜주었다.
“이리로 와 봐.”
예속이 걸려 있다면 알아서 들어올 것이다.
그 계산을 포함한 생각이었다.
“…시, 싫어.”
잠시 놀랐다가, 이불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은 채 거부하는 마로니에.
나는 입을 다시며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예속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새 풀린 건가?
‘호감도창을 한 번 볼까.’
속으로 상태창을 불러보니 왜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모든 게 단절된 장소. 상태창 역시 반응이 없는 게 당연했다.
호감도 보기를 포기하고 다시 마로니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불에 고개를 집어넣고 동그랗게 말아서 요동도 않는 마로니에.
“흠.”
고민하는 신음을 내뱉자 새하얀 마로니에 덩어리가 크게 흔들렸다.
저대로 내버려둬도 괜찮을 것 같다.
나 역시 벌러덩 드러누워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산수유는 왜 안오지?’
검술학에 푹 빠졌다고 마로니에에게는 들었는데.
시간이 벌써 9시다.
책 몇 권은 다 읽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도중에 현자에게 잡히기라도 했나.
한 번쯤 들릴만 한데 올 기미가 안 보인다.
현자가 나를 불러온 것에 이유가 있는 만큼, 마로니에와 산수유를 데려온 이유도 분명 있을진데.
-스륵.
그때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
조용한 방 안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발 소리.
가벼운 무언가가 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이불을 비켜 확인하니, 마로니에가 올라와 있었다.
“안 온다며?”
내 물음에 마로니에는 화끈거리는 볼을 숙이며 시선을 피해왔다.
“…왜 불렀는데.”
이건 예속에 걸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단순 마로니에의 변덕이라고 보는 게 맞는 걸까?
싫다고 소리치던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
침대에 엎드린 마로니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올라온 이후는 딱히 아무 생각도 안했는데.
“야.”
어쩔 수 없이 돌직구로 한 번 물었다.
“너 나 좋아하냐?”
어중간하게 예속이 걸려있는 거라면, 자기 감정을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간을 봐가면서 시간을 들이기에는 내가 신경쓸 게 너무 많다.
그래서 대놓고 물었다.
“……응?”
어두운 방 안에서도 보이는 새빨게진 마로니에의 얼굴.
볼은 물론이고 귀와 코, 이마와 눈가까지 빨개져 있다.
“…머라고 했서?”
“너 나 좋아하냐고.”
대답을 회피할 수 없게 몸을 일으켜 마로니에게 다가갔다.
뒤늦게 뒤로 물러서지만 내 손이 마로니에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가까워질 짬은 하나도 없다.
물론 몸을 섞는 것만큼 좋은 계기가 없기는 했지만.
그건 반강제였던 행위라서 뭐라 칭하기 애매하다.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 쪽에서 한 게 아니다.
코 끝에 풍겨오는 부드러운 향기.
분내는 아니지만, 향긋한 목인의 살내음.
입을 에- 벌린 마로니에는 자신의 송곳니를 꽉 깨물며 양손으로 내 가슴팍을 밀쳤다.
돌발적인 행위였지만 힘이 너무 약해서 밀려나지도 않았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투닥투닥 가슴을 때려도.
“국, 국목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어….”
약해서 맞은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놔….”
슬쩍 팔을 당기자 아무런 저항 없이 내 품에 들어왔다.
“앗….”
참 지나치게 가벼운 녀석이다. 여러모로.
이젠 어버버. 말도 하지 못한다.
너무 심했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져서인지, 마로니에는 날 보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수줍게 살짝 내미는 입술.
기대 했나.
존나 미안해 죽겠다.
나는 팔에 힘을 풀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마로니에가 그대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미안.”
몽롱한 눈으로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꿈을 꾸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마로니에.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는지 손으로 자신의 가랑이를 가리며 마로니에가 뒤로 물러섰다.
“으, 아…, 아. 아아앗!”
너무 물러서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내가 손을 뻗어 마로니에를 받아냈다.
“히끅.”
가까워진 얼굴. 다시 들려오는 딸꾹질 소리.
내가 한 행동이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워서,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다.
“괜찮아?”
“네가, 네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너 때문에….”
울상으로 나를 쏘아붙여왔다.
“왜 갑자기 좋아하냐고 물어선.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내가. 내가 자꾸만… 으, 으으으. 몰라.”
쥐구멍에 들어갈 것만 같은 겁쟁이의 음성이다.
“몰라. 몰라몰라몰라…. 몰라! 네가 나빠.”
“아니 그게, 그럴만한 이유가.”
말 실수 했다.
내가 벙찌자, 마로니에는 양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버렸다.
“…나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정말 예속이라면 지금 이런 내적 갈등도 있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일단 완전히 예속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겨우 진정하고 마로니에를 확인했다.
이건, 내가 직접 밝히는 편이 마로니에가 예속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감정이 너무 복잡해 보였다.
“마로니에. 오해는 말고 잘 들어.”
“…….”
“내 고유 능력이 하나 있거든?”
-끄덕.
“아마도 그게 지금 너한테 걸린 것 같아.”
나는 마로니에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세뇌까지는 아닌데. 그 비슷한 거야. 던전 안에서 내가 정신이 없었을 때. 의식이 없던 상태라 나도 모르게 능력을 쓴 것 같거든?”
“…뭐라고?”
충격적인 사실에 눈을 크게 뜨는 마로니에.
“그래서…. 그런 거야?”
“아마도, 문제는 이게 내 의지로 풀 수 있는 게 아니야. 이해하겠어?”
국목이라 그런지 사태 파악은 빠르다.
패닉에 빠진 마로니에가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숨을 골랐다.
“…그러면 그때 일이 아직까지도 내 몸에 남아있는 거네?”
“그건… 근데 사실 잘 모르겠어.”
“뭐야. 제대로 말해 줘. 이건, 이건…. 심각한 일이잖아.”
“말했잖아. 내가 풀 수는 없다고.”
예속이 걸린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여운이나 여파는 남아있는 모양이고.
그건 마로니에의 정신력에 따라 금방 치유될 수 있다.
차근차근 이를 설명해주었다.
마로니에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40분 정도 뒤의 일이었다.
“그럼, 아까 나한테 그거 물어본 건?”
“확인하려고. 걸린 게 맞는지.”
“침대에 오라고 한 건?”
“그것도.”
“네가 나한테 무슨 짓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거야.”
어딘가 상심에 빠진 듯 고개를 숙이는 마로니에.
“……지금 이게, 내가 품은 감정이 아니라 이 말이지?”
“응.”
“그럼 솔직히 말해도 돼?”
“그래도 될 것 같아.”
“…너 엄청 때리고 싶어.”
굉장히 실망한 얼굴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려라.”
-짝!
망설임없이 후려치는 뺨.
근데, 진짜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아파.”
오히려 자기 손을 부여잡은 마로니에가 제 손에 입을 대고 호호 불었다.
그래도 전처럼 복잡해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앞으로의 고된 일상을 견뎌야만 한다는 막막함에, 어지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전의 괴로운 모습은 조금 사라졌다.
“얼마 안 가서 없어질 테니 괜찮아.”
내 말에 마로니에가 격하게 반응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그럼 지금은, 지금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계속, 너만…. 네 생각만 나는데. 같은 방 쓴다는 생각에 오늘 낮에도 책도 못 읽었다고…. 잘 때도, 일어날 때도, 항상, 항상 그러는데 나 보고 어떻게 견뎌!”
“……그랬구나.”
자기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밝히는 것도 시원시원하구나.
마로니에는 자기가 한 말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다시 아까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으, 으으으….”
참지 못한 마로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라!”
-드르륵.
그때 열린 문.
산수유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언?”
“어, 왔어?”
“둘이 거기서 뭐해?”
약간 어두운 표정의 산수유가 우리 둘을 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로니에는 씩씩대다가 산수유를 보더니, 나를 한 번 째려보곤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