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383
산수유나무 (1)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원룸 안에서 산수유는 눈을 떴다.
계속되는 여름의 열대야.
후덥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시던 산수유가 마른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바람 없는 삶.
감정이나 의지랄 게 없다.
외부에서 비롯되는 세상의 모든 자극을 그녀는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장난 신체에 신경은 살아있지 않고.
뇌는 굳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보려 해도, 갈라진 입술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 같이 맥없는 소리일 뿐.
이를 제정신이라 부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넋을 잃어 말하지 못하는 유아가 되었다고 해도 이상함이 없었다.
모든 덕은 돌아오기 마련.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말은 산수유에게만은 사실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소중한 사람은 죽고 가문은 망했다. 이단 판정이 내려져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스륵.
그런 산수유의 얼굴에 자그마한 온기를 품은 살결이 맞닿았다.
“…아.”
“깼어?”
따스한 목소리. 길게 뻗어온 두 팔이 그녀의 품을 끌어안았다.
청소를 끝마쳐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
먼지 하나 어리지 않은 매트.
어떤 자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산수유는 단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로, 이 온기가 느껴질 때면 스스로 두 팔을 움직여 보였다.
“오늘은 좀 어땠어? 몸은 괜찮고?”
산수유가 눈앞 온기의 정체를 끌어안았다.
뒷머리를 쓰다듬던 남자는 산수유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웅웅!
뜨겁고 거친 녹색의 기운이 산수유의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시헌의 품을 감싼 산수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그런 행위는 살기 위함인지, 단순히 떨어지기 싫어서인지.
-으득.
뼈와 창자가 제 자리를 갖추어가며 산수유의 입가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아.”
오래전부터, 그녀가 유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고통.
치료의 통각에 손과 발이 마구 떨렸다. 이마와 쇄골에 땀이 흘러 나온다.
그럼에도 발버둥을 치기보단 오히려 상대를 더 끌어안으며 이 고통을 견디고자 했다.
“괜찮아. 가만히.”
덜덜-
그녀의 경련이 점차 멎어갔다.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와 산수유를 쓰다듬는 손.
속옷을 걸치지 않아 땀에 절여 훤히 비치는 가슴은 그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꽉 끌어안으니, 힘에 따라 찐빵처럼 뭉개진다.
차가운 산수유의 피부가 이전보다 더 따스해진 느낌이었다.
“자 이제 눕자.”
이시헌의 말에도 산수유는 팔을 떼지 않았다.
손수 팔을 잡고, 천천히 달래주지 않으면 손을 놓지 않는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놀이동산의 미아처럼 말이다.
이시헌은 산수유의 손짓에 주름이 가득 진 셔츠를 매만지며, 가볍게 그녀를 눕혔다.
“팔.”
산수유의 팔을 가져온 그가 주삿바늘을 집어넣었다.
“….”
영양제를 매달고 속도를 조절한다. 정맥 안으로 들어가는 영양제가 산수유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체를 배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마력이 있다면 혈관을 보는 것쯤이야 간단했으니까.
“죽을 끓여놓긴 했는데. 나중에 정신 차리면 그때 먹자.”
대답이 없음에도 대화를 이어나간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묵묵한 태도.
주방에서 적당한 조미료를 골라, 끓여둔 죽에 뿌려 입안에 넣었다.
이시헌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에나 보여주던 장난스런 면모나, 가끔 욱하던 감정적인 면모는 사라지고.
이런저런 과거와 현실을 돌이키는 방황하던 모습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수유의 눈은 여전히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유야.”
가깝지만 멀리서 들려온 그 말.
“큰 일은 아니니까. 그냥 듣고 있어.”
등을 돌린 이시헌은 스스로 자조하며 다시 죽을 한 입 떠먹었다.
“아무래도 얼마 안 가서 내가 죽을 수도 있는 모양이야.”
담담한 목소리에 고민은 없었다.
다시 한 입, 입안에 들어가는 죽. 무기질적으로 턱을 움직인 시헌은 한 차례 목넘김을 한 뒤. 산수유에게 말했다.
“그래서 고민해 봤는데.”
많디많은 죽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음에도, 이시헌은 남은 죽을 다시 그릇에 담았다.
그대로 식사를 이어간다.
“어떻게 너 하나만 살릴 방법은 없을까?”
텁텁한 죽이 목에 걸렸다가, 꾸역꾸역 넘어간다.
텅 비어버린 식기.
투명한 그릇에 비치는 얼굴을 보며, 이시헌은 양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가문의 문제에, 이단까지 받고. 아무래도 너도 나처럼 세상이 많이 싫어하나보다.”
“…….”
산수유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텅 빈 눈동자에 들어온 이시헌의 뒷모습. 축 처진 어깨와 중상에 가까운 신체.
무언가 판단할 수 없는 산수유의 몸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를 눈으로 훑었다.
“크게 걱정하지 마.”
이시헌의 눈이 어느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회색의 구겨진 신문에는 난잡한 단어들이 엮여 무수한 문장을 꾸며대고 있었으나. 그의 동공에는 단 세 단어밖에 비치지 않았다.
‘엘 아카데미’, ‘이시헌’, ‘이단’
떡 하니 적혀있는 자신의 이름은 이미 자신이 아는 누군가에게 퍼져나갔음이 분명했고.
“미안한 게 많다. 너한테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달그락.
식기를 씻어낸 이시헌이 수건에 손을 닦고, 산수유의 코앞에 다가가 앉았다.
시헌의 움직임에 따라 산수유의 고개가 따라갔다.
흐릿하게 뜬 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낸 이시헌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산수유의 팔이 올라갔다. 마치 안아달라는 것처럼, 두 팔을 번쩍.
말없이 그에 응해 껴안으니 산수유의 고개가 넘어가 이시헌의 어깨에 턱이 얹어졌다.
갈라진 입술이 그의 목에 닿는다.
-꽈악.
부러질 것처럼 남자를 끌어안았다.
졸음이 몰려오는지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약간이나마 심장에 뜨거운 고동이 울렸다.
* * * * * * * *
중국.
외딴 구석진 곳의 소 도시.
“상대는 빈사의 남성 한 명이다.”
가면도 쓰지 않고, 가벼운 누더기만을 입은 이시헌이 골목에 숨어들었다.
공간 마법의 사용자는 현자와 황도. 마로니에. 전 세계에서 끽해야 넷에서 다섯.
이시헌의 마법 수준은 파악되지 않은 지금. 그들의 신경은 오직 이 도시에 향해 있었다.
많은 헌터가 그를 포위했다.
코르너스 가문과 다른 점은 가문이 아닌 개인이 이단에 낙인찍혔다는 것.
이전과 같은 토벌대들이 편성되지 않는다. 무궁은 본 국으로 귀환했고, 백도는 사라졌다.
물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추적대들이 붙었으나. 잡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드르르르륵!
불을 뿜는 화기에 헌터들이 전진을 멈추고 마법을 발동했다.
다리에 무리가 갔는지 벽에 몸을 기대고 총기를 들어 올린 이시헌.
고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다른 헌터들이 그를 제압하기 위해 검을 빼 들었다.
“잡았-”
외친 목소리가 무색하게.
추적자들의 몸이 짓뭉개지며 터져나갔다.
“상대는 부상을 입어서 마력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애송이다! 더 밀어붙- 끄르릅!”
-서걱!
소리를 지르는 추적 대장의 목이 잘려나갔다.
많은 추적자들이 깜짝 놀라 무기를 빼놓고 도망가려하면, 그제야 이시헌은 골목에서 나와 그들을 쫓아 하나씩 정리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뱉으며 바닥에서 주워든 검을 던진다.
도망가던 이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질질 새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억지로 흔적을 남기려는 듯이.
“으, 으아아! 잠깐!”
“…….”
한 남성이 공포심에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다른 모두가 죽은 지금. 이시헌은 주먹을 올리기 직전 팔을 멈추었다.
“사, 살려줘.”
“…뭐?”
당혹한 목소리다.
“보상금만 받으려고… 왔는데. 주, 죽일 생각은 없었어! 너무 사는게 힘들어서… 딸 아이 먹여살리려고.”
말이라고 하는지. 논리에 어긋난다는 건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시헌의 손짓이 멈추자 남자는 더욱 처절한 목소리로 그에게 빌었다.
“내가 죽으면 딸은 어떻게 합니까. 살. 살려주세요. 도망갔다는 말은 누구한테도 안할 거니까.”
“……꺼져.”
“가, 감사합니다-”
허무하게 주먹을 내린 이시헌이 고개를 돌렸다.
지친 두 어깨에 가라앉은 돌덩이.
바닥에 누워있던 헌터는 다리를 절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주워들었다.
“윽, 으아아아!”
그 검이 이시헌의 등을 찌르려했다.
-뎅겅!
검면이 깨부숴지며, 헌터의 얼굴이 다시 한번 절망으로 점철되었다.
상대와 눈을 마주친 헌터는 입꼬리를 떨었다.
“살고 싶다면서.”
“으, 웃….”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드드득!
이시헌의 손에 잡힌 헌터의 몸이 뼈째로 으스러졌다.
게거품을 물며 흰자위를 보인 헌터가 힘없이 쓰러졌다.
어딘가 병적으로 서 있던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몸은 상처투성이. 권능을 쓰지 않으니 치료가 더뎠다.
그는 손톱이 갈라진 손으로 헌터의 품을 뒤졌다.
지갑을 펼쳐 현금을 빼내고, 사진을 보니 그려진 가정. 아직 어린아이.
“하…”
자그마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피어났다.
* * * * * * * *
엘 아카데미 이시헌. 코르너스 가문의 장녀 산수유와 결탁.
현재 중국에서 발견. 도주 중.
건조하게 써내려진 기사들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세상의 모든 비난 어린 화살들이 인터넷에 퍼져나갔고.
집단 광기의 무수한 폭력들이 날아들었다.
이시헌과 연관한 모든 사람들도 이에 대한 정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
마로니에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누…가?”
깊은 심해처럼 푸른 눈동자가 회오리치듯 떨렸다.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숨도 제대로 잘 쉬어지지 않는지 고개를 숙인 마로니에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양은 의자 팔걸이를 부러질 듯이 쥐면서, 자신을 다스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안하게 생겼어?”
“형님의 애인이시니까. 형님이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한 겁니다.”
“왜. 시, 시헌이가 뭘 했다고 그래.”
“글쎄요. 지금 이 과정에 선하고 악하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태양의 시선이 향한 곳에, 의체를 착용한 아오리가 잠들어 있었다.
아마 평생 싸움은커녕 서는 것조차 못할 몸이다.
“그런 걸 따지는 건, 이미 늦었어요. 형님은 항상 정치적인 요인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어떻게 못해? 나, 내가….”
마로니에는 망각하고 있었다.
꿈과도 같은 시간과 열정어린 사랑 속에서,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이제야 떠올렸다.
코르너스 가문에 대한 사실은 마로니에도 알고 있었다.
직접 연락을 취해보기까지 했지만. 돌아온 답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국목의 입장인 그녀의 모든 행위는 국가의 뜻과 같았기에, 그 이상의 행위는 용서되지 않았다.
태양은 사납게 뜬 눈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아무 짓도 하지 마세요.”
“……어?”
“형님이 부탁한 겁니다. 프랑스의 국목인 누님이 나설 곳은 없어요. 설령 나선다고 해도, 형님은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입니다.”
“국목이 문제라면… 여기서 내려올게. 그러면 도울 수 있는 거-”
“누님.”
지금 이 상황을 올곧이 뒤집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개개인이 들어와봤자. 이시헌의 짐이 늘어날 뿐.
태양이 머리를 숙였다.
“부탁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해.”
태양이 생각해도 살아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말을 건네줄 수는 없었고. 태양은 더욱 고개를 내렸다.
“흑, 읍. 흑.”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사랑을 전달할 수 있었고.
그런 사람이 고난을 맞닥뜨리고. 세상이 그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하니.
마로니에는 그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리를 비켜줄 때다.
“누님, 죄송합니다.”
태양은 즉시 방을 나왔다.
문 안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우는 마로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깝지만, 사실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산수유를 구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겪을 일.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낫다고는 하지만… 글쎄 그게 정말 맞을까.
-끼긱, 끼기긱.
휠체어를 손으로 끌며 태양을 따라붙은 아오리가 그에게 물었다.
“태양.”
“어.”
“왕님, 살 수 있을까?”
“나도 몰라.”
“아까는 안 죽는다며.”
그러길 바래야지.
태양의 얼굴에 짙게 깔린 그림자를 본 아오리는, 무언가를 생각해내곤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태양, 태양.”
“…나 그럴 기분 아니야.”
“이것 봐.”
“뭐.”
아티펙트로 겨우 되살린 두 팔을 번쩍 든 아오리가,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놀라울 속도로 복도를 뛰었다.
“야… 이 미친-”
-끼리리리릭!
그 상태로 보여주는 놀라운 드리프트!
“관성 아오리 드리프뜨!!!!”
다만 아직 몸 상태는 호전되지 않은지라.
-콰당 타당 탕!
“으아아아아악!!!”
미끄러진 휠체어가 넘어지며 공중에 뜬 아오리의 사지가 분해되어 데구르르 굴렀다.
“아니 이 미친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