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445
선전포고 (6)
“메리님.”
전등이 꺼진 세계수의 방 안.
조심스레 문을 연 닉이 흙바닥에 앉아 있는 메리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내일은… 생도들의 피드백 시간입니다. 슬슬 움직여야 될 것 같습니다.”
담당 세계수로서 숲지기 선발전을 이끌어나갈 의무가 있었지만, 메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갈라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았다.
“…메리님.”
숙연한 공기. 이시헌의 사망은 결국 밝혀질 일이었다.
수목의 무수한 담당자들은 메리에게 이시헌의 이단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메리가 이시헌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행여 그게 메리의 성장을 방해할까 봐, 원망을 받을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언급을 꺼렸다.
어쩌면 사실을 전달해야한다는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겼던 것일 수도 있었다.
“닉.”
메리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둘은 벌써 수년이나 함께한 친한 사이다.
메리가 태도를 바꾸고 난 이후에는, 서로 농담을 던질 정도의 우정이 둘 사이에 싹트기도 하였었다.
“왜…나한테 말 안 했어?”
원망섞인 목소리에 닉이 숨을 삼켰다. 오늘따라 넥타이가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든 메리의 얼굴이 어두웠다.
이마 아래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 사이에 크나큰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눈물 자국이 보였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시바의 옆에 앉아 있던 소녀의 말을 한낱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하고 있다가, 몇 시간 뒤에 요람의 관계자에게 사실을 전달받았다.
이시헌이 3년 전에 이단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메리님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닉은 죄책감과 책임감에 입을 열었다.
메리는 고장난 인형처럼 고개를 툭 떨궜다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성장에 방해될까 봐. 전달하지 않았다.
이보다 절망적인 말이 어디 있을까.
자신은 별을 보고 쭉 달려왔는데, 정작 그 길잡이를 잃어버리다니.
“…그랬구나.”
메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이 처량해 닉은 도저히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일개 관리자인 그는 일정을 조정하지 못한다.
메리는 생도들의 관리를 위해 내일 당장 밖을 나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저 상태로 일정을 수행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어쩔 수 없었던 거…구나.”
방에 틀어박힌 지 지나온 3일.
그 동안 머리의 잎사귀는 변색되어 전부 떨어져 버렸다.
메리는 자신이 앉아 있는 흙 한 줌을 쥐었다. 항상 비료를 갈아주던 손길. 그때는 성질이 나빠서, 그게 당연한 건 줄로만 알았다.
소중함을 모르는 시절, 소중함을 일깨워준 사람.
그녀의 눈망울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이제… 못 봐?”
나무도 인간과 같다.
아니, 짧은 기억은 빨리 잊게 되는 인간에 반해.
세계수는 소중한 기억의 체감 시간을 더 강하게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메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한 평생보다 이시헌에게 깊은 인상이 있었다.
그녀도 감정을 느낄 줄 안다. 책임을 가지면서도, 내심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어리광이 있다.
메리의 어깨가 다시 떨렸다.
“불쌍해서… 어떻게 해?”
울지는 않았지만, 공허하다.
길었던 메리의 인생에 마음 속 깊게 남아버릴 정도로 좋은 기억.
스쳐 지나간 인연을 가볍게 넘기는 인간과 달리, 수목은 수천년을 살아가면서도 잊지 않는다.
요즘같이 흉흉한 세상에서는 거론되지 아니하지만,
과거의 서적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수목의 감정은 잘 움직이지 않지만, 변화를 준 이에겐 깊은 애착을 느낀다.
수목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다.
다른 사람이 볼 땐 잠깐의 시간이어도 메리에게만큼은 달랐다는 의미이다.
“닉.”
“네.”
“…닉. 나, 있잖아.”
“네. 메리님.”
불안한 숨을 고르던 메리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여기가 엄청 아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
닉은 눈을 감았다.
아직 메리의 정신은 다른 나무에 비해 어렸다.
누군가와 헤어질 때 느낄 감정은, 인간보다 더 극심하다.
“…엄청 아파서, 울 것 같아.”
메리의 머릿속에 이시헌의 얼굴이 스쳤다.
-난 세계수가 못 되는 걸…. 가지도 작고, 키도 작아서… 뿌, 뿌리도 얕아서 세계수가 못 되는 걸.
-그래서 다 무시한다?
참 이상하다.
정말 짧은 만남이었는데.
-힘들었겠네.
왜 이렇게 가슴이 뻥 뚫린 듯 아플까.
인간과는 조금 다른 구조로 이루어진, 그게 수목의 감정이라는 걸, 메리는 꺠닫지 못했다.
“나 엄청… 컸는데.”
그래도 짧았던 인연이라고.
펑펑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보고싶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삐비비빅.
그 순간 닉의 허릿춤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받아야 할까. 고민한 닉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네. 수목 담당자 021번 닉입니다. 조금 뒤에 연락할 수 있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네, 네.”
닉은 몇 번을 대답하더니, 곧이어 창백해진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이 핸드폰의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닉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얼어붙은 메리를 다시 확인했고,
“메리님.”
“……응.”
“지금 도망치셔야 합니다.”
그대로 비상을 알렸다.
* * * * * * * * *
한 번 온 힘을 다해 지켰던 장소를, 이번에는 습격하려 한다.
-휘릭!
겨우살이, 동청으로 이루어진 검을 검집도 뽑지 않은 채 손에 들어 힘을 준다.
-휘이잉!
불어온 새벽 바람에 입고 있던 흑룡포 자락이 휘날렸다.
풀이 꺾이고, 주변을 감시하던 경비가 인기척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
“발 소리가 들렸는데.”
셋이서 조를 이루어 움직이는 세 사람은 아마 이런 일에는 도가 텄을 것이 분명했다.
느껴지는 마력을 보나, 들고 있는 검으로 보나 완숙한 전사라는 게 느껴졌다.
손등에 그려진 나무 문양을 보니 아무래도 교단의 관리자인 모양.
-저벅.
나는 풀숲 사이를 헤쳐 모습을 보였다.
“거기 누구-”
빠르게 이루어진 소통과 전투 태세.
경비를 서는 인물이 마력을 뽑아내는 순간 재단 내부에 비상이 울린다.
구태여 연락을 따로 취할 필요가 없는, 까다로운 보안 구조.
하지만 경비를 서는 사제의 몸에서 마력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후욱!
다가가서, 뽑아내려는 검집에 왼손을 얹는다.
흐르는 마력의 기원은 단전. 힘 조절에 따라 마력을 쓰지 않고도 상대의 원천을 제압할 수 있다.
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로 상대의 턱을 후려쳤다.
-퍽!
“읍!”
동시에 오직 내게만 울리는 희미한 총성.
-탕, 탕.
화약 터지는 소리조차 소음기에 가려져 이들은 들을 수 없다.
내 공격을 맞아 무너진 사제의 양 옆에 서 있던 경비가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됐어?”
찰칵- 총을 장전한 구슬이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며 내게 다가왔다.
구슬은 총을 맞은 경비를 보며 쓰러진 놈의 자켓에 서린 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독이 치사량까지는 아닌데,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말한다고 그게 들려?”
“아니, 그냥 하는 말인데.”
총기에 관한 구슬의 지식과 감은 전문가 수준이다.
많은 마력을 쓸 필요도 없이 일반인도 초인의 능력을 가진 헌터들을 제압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저런 총기를 구슬밖에 만들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던전 보상 중에 고유 능력을 주는 서적이 있었어. 오래전이긴 한데 익혀뒀거든.”
하며 피식, 장난기 많은 웃음을 걸친 구슬이 등에 신호를 보냈다.
“끝났어~”
-타닥, 타닥!
바로 등 뒤에서 울려오는 조그만 발소리.
다가온 위키가 깡충깡충 사제들에게 다가가 마력을 집어넣었다.
탄에 맞은 사제의 몸에서 피가 꽤 많이 흘렀음에도, 위키는 어떠한 감정도 내색하지 않았다.
위키의 손에 하얀 마력이 휘감기더니, 곧 세 경비의 몸을 마력으로 휘어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뗀 위키가 동그란 눈으로 날 봤다.
“끊었어요.”
끊었다는 말은 즉슨, 사제의 몸에 연결된 어떠한 아티펙트의 연결을 제거했다는 소리.
경비의 신체에 동작이 끊기면, 마력과 마찬가지로 재단의 경비실에 알람이 울린다.
위키는 우리가 쓰러뜨린 경비 때문에 알람이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제부터 30분 정도에요.”
“아직 문도 안땄는데 30분? 빡세네.”
위키의 말에 구슬이 땀을 삐질 흘렸다.
까딱하단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땀을 흘리는 것에서 그친 것도 대단하다.
아무튼 처음 가져야 했을 불안 요소들은 모두 제거됐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
방식은 간단하다.
‘빨리 가서, 빨리 털고 나온다.’
그야말로 단순무식한 방법.
재단을 수호하는 이들 중에는 실력자가 있을 테지만, 3년 전이었다면 위협적이었을 녀석들도 지금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흑단아. 배낭 챙겼어?”
“….”
내 물음에 위키를 따라온 흑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
뭘 하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왜 이런 일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직 덜 친해서 그런 걸까.
마음은 이미 먹었는지, 흑단의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솟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오케이. 내가 준 역할을 잘 수행하면 스승티커를 두 개 주지.”
“…!”
“스승티커?”
흑단의 눈에 약간의 의지가 생기고, 구슬이 관심을 보였다.
“있어 그런 게.”
아무튼 시간이 급하다.
재단의 벽면을 어루만진 나는 그 입구까지의 거리를 대충 파악하고, 발을 굴렸다.
소리 없이 일직선으로.
세 명을 두고 앞서 나갔다.
-파앙!
재단의 벽면을 따라 쭉 이어가니 자라난 풀들은 사라지고 곧 거대한 성문에 다다랐다.
어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재단 입구를 수호하는 녀석들의 뒤를 점해 하나하나씩 정리해 나가니, 수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파아악!
감이 좋은 한 전투 사제가 손에 마력을 둘렀지만, 경비가 아닌 이상 아티펙트를 장비하고 있지는 않다.
사제는 휘두른 검집에 얻아맞아 뒤로 넘어갔다.
발을 구르고, 하늘을 난다.
분명 눈으로는 꽤 굴러먹던 녀석들이라고 판단이 서는데.
어린아이의 손목을 꺾는 것만큼 간단하다.
무궁이나 천마가 오래전의 나를 볼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걸까.
‘오른 쪽에 하나, 왼쪽에 둘.’
힘을 들일 필요도 없이, 손아귀를 뻗어 바람을 일으켰다.
-파앙!
마력 없이 퍼져나간 충격파가 공기를 두드렸다.
장장 스물에 달했던 사제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드러누웠고, 나는 쓰러진 이들 사이에서 아직 덜 풀린 손을 꺾었다.
뒤늦게 쫓아온 셋이 나를 보았다.
구슬은 어이없다는 듯. 위키는 눈을 반짝이고 있고, 흑단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다.
평소였다면 아빠 미소를 지으면서 위키한테 자랑이나 했을 텐데.
지금은 실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된다.
“가자.”
* * * * * * * *
사는 세계가 다르다.
자연법칙이란 걸 혼자만 받지 않는지, 유유히 공기의 흐름을 타는 이시헌이 빠르게 주변을 정리했다.
실력이 꽤 있어보이는 사제들조차 5합 이내로 의식을 잃었다.
‘…미친놈.’
일선에 선 남자는 어떠한 부담도 없이 상대를 정리해갔다.
경지를 넘은 존재의 싸움.
‘전성기 때, 그 노친네도 이정도였을까.’
무궁이나 천마. 하지만 구슬은 곧 머리를 스친 생각 하나를 뭉개 없앴다.
땀을 쥔 손을 움직여 총기로 뒤에서 지원을 한다.
-!%@%!!
쾅, 쾅!
떠들썩해지는 것도 한 순간, 순식간에 정리되는 다음 현장.
위키는 문을 열었고, 이시헌은 길을 뚫었으며, 구슬과 흑단은 주변을 잠시 감시하며 찾아온 이들을 쓰러뜨렸다.
간단하다.
“…기사단이 잠시 몇 세계수의 호위로 빠졌거든요.”
문의 잠금을 푸는 위키가 무감히 중얼거렸다.
어린 소녀가 습격 일자를 3일이나 미룬 이유.
“지금이 제일 적기였어요.”
그 정보는 대체 또 어떻게 얻어냈는지.
위키가 아니었다면 재단 전체를 때려 부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슬슬 제대로 된 놈들이 오겠는데.’
습격을 알아챈 재단이 움직일 때가 됐다.
-덜컥!
마침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무수한 모판들.
새하얗고 넓은 하우스가 펼쳐진다.
싹을 틔운 어린 나무들이 모종처럼 일정한 공간을 두고 수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위키는 바닥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빠르게 포탈을 만들어냈다.
이시헌은 이미 작전대로 성장의 세계수가 있는 방을 찾으러 간 상태.
‘급하다 급해.’
구슬은 모판이 있는 곳을 보더니 총을 홀더에 내려꽂았다.
저 순수하기 짝이 없는 귀여운 새싹들.
속수무책으로 당한 재단이 이제 막 병력을 끌고 올 것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중국 지역을 되살리기 위해선 저 어린 수목들의 힘이 필요했다.
조용히 이시헌의 활약을 멍하니 지켜보던 흑단의 어깨를 구슬이 두드렸다.
“자, 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