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ogenous Zone RAW novel - Chapter 8
08.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재연은 차창에 비친 최시백만 보고 있었다. 말없이 운전을 하는 그는 간간이 우회전을 하느라 사이드미러만 힐끗거릴 뿐, 먼저 말을 건네지도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었다.
죄는 같이 지었는데 저쪽은 여자가 일방적이었고, 이쪽은 어쨌든 손바닥이 마주쳤으니 손뼉을 친 셈이었다. 자신의 의지야 어찌 됐든 현재와 입을 맞댔다. 그러려고 그랬다는 게 아니라는 말은 어차피 해 봤자 소용이 없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는 나와 있었고, 주현재가 먼저 다가와 피할 틈도 없었다고 변명한다 해 서로 마음 풀고 끝낼 일도 아니었다.
그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최시백이 마음이 없다 한들, 소은서와 키스했다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목이 졸리는 기분. 저쪽에서 속 시원히 말을 해주지 않으니 몹쓸 상상만 더해 간다. 가슴이 갈가리 찢긴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생각만으로도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이 자꾸만 뚜렷해진다.
색이 바래기는커녕 더 뚜렷하게 더 선명하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재연은 어떻게든 이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 소리 없이 가슴을 죽이려 애썼다. 해 봐서 좋을 게 있고, 해 봤자 결과가 뻔한 게 있다. 최시백을 사랑하는 일은 후자였다.
상처만 받다 끝날 일. 재연은 어두운 차창 밖을 소리 없이 응시하며 제 심장을 치고 박는 갖가지 감정들을 숨기느라 애썼다.
딴 남자랑 바람난 와이프라면 그 관계를 제 손으로 끝내도 한참 전에 끝냈을 남자가 이번엔 인내한다. 자신이 회장 조카라고 해서 참고 넘어갈 사람은 애초에 아니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이혼하면 다 끝날 거 한번 눈 감고 넘기지, 뭐 그런 건가. 뭐든 좋은 방향으로 눈감는 건 아닐 게 분명했다.
하긴, 정황 증거 몇 개 있다고 당장에 이혼 서류 내밀 남자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치밀하고 영악하게 움직여서 자신을 엿 먹일 남자지. 이를테면 주현재와 어떻게든 호텔 방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사진을 찍어서 기사로 뿌린다든가. 어쩌면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방법들로, 범인인 자신은 예상치도 못한 그런 저질스럽고 더러운 방법들로.
조금은 가라앉은 숨이 무겁게 차체를 떠돌았다.
그에게 전화가 와 조금은 짜증 섞인 통화가 이어졌을 뿐이었다.
“웬만큼 정리해서 뒀으니까 그 정도는 네 선에서 처리 좀 해.”
묘한 빈정거림에도 재연은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그거까지 일일이 말해야 해?”
간간이 흩어지는 한숨과 냉랭하게 이어지는 드라이한 답, 전화를 끊은 이후에는 다시 내내 정적이었다. 어떠한 말도 없었지만 그의 얼굴에 냉기 섞인 짜증이 비쳤다.
집으로 돌아온 재연은 그가 없을 때 거실에서 벌여 놓았던 흔적들을 정리했다. 내일 최시백이 돌아오면 함께 식사나 하며 아이에 대해 차분히 얘기를 꺼내려 했는데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문제인지 근본적인 것들을 찾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기분이었다. 도쿄에서 하루 일찍 돌아온 남자는 그 이후로도 통화를 두어 번 더 이어 갔다. 재연은 그가 길게 빼 소파 위로 아무렇게나 올려 둔 넥타이를 정리할 생각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세탁 맡길 것들이라 벗은 겉옷 위로 넥타이를 얹는데 그가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다 말고 진한 한숨을 쉰다. 귀찮게 굴고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한 염증, 미미하지만 분명하게 내비치는 권태,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인지 수화기 너머 상대를 향한 것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맞출만큼 다 맞췄는데 무슨 조율을 얼마큼 더 한다는 거야.”
그는 여전히 귓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답을 하며 제 손목을 붙잡았다.
폐로운 심사를 숨길 생각도 없이 뇌까리며.
재연은 다소 피로감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보며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할 말이 뭐냐는 그녀의 눈짓에 그가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느슨하게 푼다. 재연은 곧 전화를 끊겠다는 그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 이상 필요한 건 형님 통해서 오더해. 불필요한 건 네 선에서 쳐 내고.”
그는 상대의 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상대가 차건주나 김종섭, 그 두 사람 중 하나 같긴 한데. 궁금함은 거기까지였다. 재연은 의미 없이 제 하얀 양말 끝만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할 말 있다며.”
“네?”
아. 넋 놓고 있다 뒤늦게야 느리게 굴러가던 사고를 정지시켰다.
할 말이 있다고 했고, 내일 돌아오거든 곧장 와 줄 수 있냐고 했던 건 자신이었다.
어쩌면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배 속에 든 아이가 이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 결정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자 속 깊이 서글픔이 밀려왔다.
마음이 쓰라렸다. 그와의 이혼을 고대하다가도 실은 이렇게라도 옆에 있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도 부정해 온 속마음이 자꾸만 수면 위로 넘실거려 괴로웠다.
자신이야말로 그와 뭘 하고 싶었던 건지, 자꾸만 알 것 같아서.
아이가 생겼다고 없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쇼윈도 부부가 여느 평범한 부부가 되는 것도 아닌데, 기대를 품을수록 상처받는 건 이쪽이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꾸만 저 남자의 건조한 눈빛 속 내재된 뜨거운 마음을 바라게 된다.
사시사철이 건기인 이 남자 옆에서 가슴 넘치도록 채워 줄 사랑을 원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바람인지 알면서. 애정으로 찰랑거릴 은물결을 바란다.
제 이 마음을 최시백이 알게 되면 얼마나 냉소적인 낯으로 비웃을지.
‘너도 똑같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 여자나 너나.’
그가 무미건조한 눈으로 제게 할 말도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가 이 결혼을 택한 데에는 자신이 그에게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거다. 영영 마음을 주지 않을 정도로 이 바닥의 퇴폐한 섭리를 빠삭하게 알아서. 깡패새끼한테 마음을 주는 게 쉽지 않을 거라. 그런 여자라.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철없는 투정을 부릴 여자가 아니라.
결혼했다 이혼해도 뒤가 깔끔할 여자라.
최시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는 남자라는 것도.
“아니에요.”
내일 병원에 갔다가 확실해지면 전해도 늦지 않겠지. 만약 문제가 있는 거라면 최대한 혼자 정리하고 싶었다. 실은 그의 반응이 조금은 겁이 났다. 그 역시 이 결혼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할까 봐. 하지만 재연은 짐작하고 있었다. 이 결혼은 어차피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끝은 이미 정해져 있을 뿐, 조금 미루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 하루 차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기껏 시간 내어 왔는데 제게 할 말이 고작 그게 다냐고 묻는 눈 속에 조금의 올곧잖음이 비친 것 같았지만 그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애써 할애한 시간이 쓰레기통에 처박히듯 했지만 그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이토록 고민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에 가슴이 멍들었는지 그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연했다. 애정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그것들을 그가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다시 오는 전화를 받았다. 허리춤에 한 손을 얹고 전화 속 누군가에게 집중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가 그의 등 위에서 근육을 따라 오르내린다. 재연은 어느새 떠나가 버린 그의 관심 밖에서 한참 동안 남자의 등을 보며 서 있었다.
세탁물을 들고 런더리 룸에 들어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차도 한 잔 내리고, 분주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집 안을 오고 다니는 동안 그는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도쿄에 간 사이, 서재에서 업무를 봤던 재연은 놓고 온 서류들을 가지러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고개를 내미니 책상 앞에 그녀가 둔 종이 더미들로 시선을 내린다. 숨이 막히도록 적요해 수화기 너머 상대의 낮은 목소리가 언뜻 들리는 듯도 했다. 그는 커프스 버튼 하나 풀지 못해 정갈하게 단을 세워 놓은 소매 그대로 종이 더미를 내밀었다.
내미는 종이를 받아 돌아서려는데 그가 자신을 불렀다. 서재연. 그 혀끝에 오른 자신의 이름에 여태까지 해온 단념이 무색하게도 온 신경이 그에게로 돌아섰다.
아직 상대는 전화를 끊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때부터 인정이라곤 담아본 적이 없는 눈으로,
“정말 할 말 없어?”
시백은 다소 피곤한 눈으로 물었다. 이 여자 때문에 하루 일찍 오느라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 자신이 일찍 출국함으로써 벌어진 뒷일을 수습하고 있자니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보다는 서재연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더 우선이었다.
이유 없이 그런 전화를 할 여자가 아니었다. 흔한 안부 전화 하나가 더딘 서재연이. 임신 문제라면 굳이 말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그보다 더한 일이라면 서재연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알았을 터였다. 결론은 별것도 아닌 일이라는 건데. 그 별거 아닌 일 때문에 이 여자가 먼저 전화까지 해 가며 그를 붙들진 않았을 거였다. 이래저래 명확하게 떨어지는 답이 없자 은근히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시백은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를 붙잡고 늘어지며 이유를 추궁할 여유도 없었고, 딱히 그럴 이유도 없었다. 뭔가가 필요하다 해 먼저 말을 할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등신처럼 그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일에 입을 다물고 있을 여자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더는 서재연을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답에 다시 전화 속 상대에게 집중하자 그녀가 나가 버린다.
시백은 그 강파른 뒷모습에 미약한 한숨이 샜다.
재연은 화장대에 앉아 세럼을 골고루 바르며 토닥이다 말고 부은 입술을 더듬었다.
왜 입술이 부었지. 원체 잘 붓는 체질이긴 했지만 입술이 부어 탱글탱글한 얼굴을 보자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슬립으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향하는데 순간 아차 했다.
거의 뛰다시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최시백이 서재에 있길 바라며, 제발, 제발.
그렇지만 제 바람과 달리 침대로 막 몸을 파묻은 듯한 그가 등에 손을 넣어 걸리는 것을 빼냈다.
그의 손을 따라 자신의 붉은색 브라가 허물처럼 끌려 나왔다. 최시백의 표정이 순간 모호해졌다. 묘하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일순 삐딱해지는 눈썹께가 있을 이유가 없는 공간에 떡하니 널브러져 딸려 나오는 브라를 응시했다.
그가 없는 동안 딱 하루 그의 침대에서 잔 적이 있는데, 그때 대충 빼 던져 놨던 게.
재연은 빠르게 다가가 그의 손끝에 걸린 속옷을 낚아챘다.
최시백이 없는 동안 그의 빈자리가 그리워, 저 남자 몰래 최시백에게 사랑을 표현하느라 몹시도 애가 달았던 어느 날 밤을 들켜 버린 것 같아 재연은 뼛속까지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상기된 얼굴로 도둑놈처럼 들어와 브라를 앗아 가는 서재연을 바라보는 최시백의 미묘한 시선이 느릿하게 닿아 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요동치는 눈동자로.
“아… 그… 제가 빨래를 두고 갔었어요. 그럼 쉬세요.”
재연은 제발 그가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남자의 방에서 나와 문 앞에서 브라 컵을 요상하게 움켜쥔 채 꼭 끌어안고 서 있었다. 하지만 저 영민한 남자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재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주방으로 걸어갔다. 미지근한 물을 컵 가득 받아 마시며 널뛰는 가슴을 다독이고 있는데 등 뒤로 와 선 최시백이 주방 선반을 열어 약통을 꺼낸다.
하얀 타원형의 약. 잘은 모르지만 그가 극도로 피로할 때 한 알씩 먹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물도 없이 약 한 알을 삼키곤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 있었다.
재연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그의 인기척이 느껴져 괜히 물 한 컵을 더 마시곤 그를 스쳐 지나갔다.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놓고, 그를 의식한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부자연스럽게 시선 처리를 했다. 슬리퍼를 끌고 가는 그 모습을 소리 없이 눈에 담던 그가 자신을 부른다.
“서재연.”
재연은 심장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에 급브레이크를 걸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최시백이 서재연을 부르는데 외면하고 돌아설 담은 없었다. 천천히 뒤돌아서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시백의 요요한 눈매가 묘하게 가늘어진 게 보였다. 그의 눈이 언뜻 제 입술로 향해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시선이 꽉 짜인 직물처럼 맞물렸다.
재연은 부기가 가시지 않은 입술을 깨물며 불안함과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 말을 돌리거나 듣기 좋게 에둘러 표현할 남자가 아니었다.
“주현재랑 상간질이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재연은 그의 입 밖으로 쏟아지는 매서운 말을 피부 거죽에 아로새기듯 듣고 있었다. 왜 이렇게 최시백이 하는 말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곱씹게 되는지. 최시백이 하는 말이라면 뼈라도 바르듯 샅샅이 반추하는 게 습관이 됐다. 슬프게도.
“나를 좋아하는 거야.”
재연은 순간 허탈한 웃음이 샜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을 거다.
자신이 그에게 정략적인 목적 그 이상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를 좋아한단 걸 들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비참해질까, 알아봤자 누구 하나 좋을 게 없는 마음이라 몰랐으면 했던 바람. 어림셈해 보던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나 부서진다. 처참하게 쏟아져 내리는 잔해들을 그는 자비 없이 지르밟았다.
그간 그를 좋아하면서 아닌 척해 왔던 자신을 보며 얼마나 웃겼을까. 그도 아니면 좋아하지도 않는 척하며 그에게 안겨 신음을 흘려 대던 자신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을지.
“그게 뭐. 내 마음 같은 거 관심이나 있었어요? 어차피 우리 이혼하면 내가 주현재랑 상간질을 하든 재혼을 하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어떤 감정부터 먼저 다듬어 흘려야 좋은지 모르겠다. 미움, 사랑, 원망, 그도 아니면 실은 최시백에게 한순간도 빠짐없이 줄곧 느껴왔었던 갈망.
재연은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쓰고 아린 마음을 어떻게든 구겨 접어두는 건 자신이 감당할 몫이었다. 그래, 그와의 사랑을 그려보며 평범한 부부 생활이란 걸 바랐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미련 없이 끝내주겠다, 최시백 당신을 보란 듯이 마음에서 도려내 버리겠다고.
저 역시 이 관계를 의무감 하나만으로 대하겠다고.
재연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몸을 뒤척였다. 배가 아팠다. 단순히 잠깐 아팠다가 그칠 통증이 아니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불씨가 서서히 번져 어느새 위장 너머까지 올라간다. 배에서 그치지 않는 통증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몸을 뒤집었다.
식은땀이 나 손으로 얼굴을 만지면 손바닥 가득 물기가 흥건하게 묻어났다.
재연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간신히 손을 더듬어 침실 램프를 켰다.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꾸 몸이 침실 밖을 나가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후으….”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드리워진 램프 불빛을 따라 발을 내디디면서도 재연은 입구로 다 다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픈 배를 꾹 움켜쥐었다.
거의 기어가다시피 문을 열고 나가 최시백의 침실로 향했다.
어떻게든 살아 보려 숨을 내쉴 때마다 자궁이 뒤틀리며 쥐어짜이는 것만 같았다.
“여, 여보… 최시, 아.”
부스럭거리며 내는 소리에 예민한 그가 깬 건지 눈을 뜬 남자가 그녀를 발견했다.
“…서재연.”
힘이 풀려 털썩 쓰러지자 놀란 시백이 다가와 뜨거운 몸을 품에 안았다. 정신은 들어 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했다. 몸은 열이 끓는데 추웠다. 한기가 밀려들어 자꾸만 몸이 떨렸다.
“서재연!”
“여보, 나, 사실 임신….”
“가만히 있어.”
창백한 얼굴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필사적으로 쏟아 내려 한다.
시백은 제 품에 쏙 들어오는 불덩이를 단단하게 안아 들고서 전화를 걸었다. 노글노글한 얼굴엔 섬약한 열꽃이 포만했다. 몹시도 고통스러운 몰골이었다.
쏟아지듯 넘어지는 몸이 지나치게 떨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고 여린 몸에 열이 드글드글했다.
재연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마치 자신 혼자만 둥둥 떠 있는 기분으로 통화를 하는 최시백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본다. 저문 새벽처럼 납빛이 일렁거리는 눈동자. 당황도 하는구나, 당신. 최시백 좋아해. 그런데 이젠 다 끝인가 봐. 나 당신 안 잡을 거야. 다 잊을 거야. 너랑도 이제 이 비참한 짓도 다 끝낼 거야.
“나 임신, 임신했어요.”
“…N병원 응급실. 빨리 와.”
전화를 끊은 시백이 그녀의 몸 위로 그의 셔츠를 빠르게 입혀 여몄다. 어깨 위로 두르는 겉옷은 최시백의 카디건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놓을 듯 말 듯 눈을 가물거리는 그녀를 안고 집을 나섰다. 열린 문을 팔로 쳐내 공간을 만들었다.
재연은 좁아진 남자의 미간과 그 아래로 차분함이 내려앉은 콧날, 온아함이 맺힌 턱선을 차례로 쳐다보다 덜덜 떨리는 턱을 앙다물었다. 팔 한쪽이 힘없이 떨어지자 자신을 안고 걷던 남자가 빠르게 뛰다시피 한다.
처음 보았다. 그가 뜀박질에 가까운 걸음을 하는 건. 발걸음 한 번을 경하게 두지 않는 남자가 새벽의 주차장엔 최시백의 구두 소리만 울렸다.
“최시백….”
“그만 말해. 너 하혈하는 건 알아?”
“최시백.”
“알았으니까….”
“여보.”
좋아해.
재연은 자신을 조수석에 태우곤 거칠게 운전대를 잡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사실은 당신이 출장 가 있는 동안 내내 보고 싶었어. 매일 당신 생각만 했어.
터트릴 수 없는 말을 힘겹게 삼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