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5
Chapter 5
* * *
이상하게 아침 일찍 눈이 떠진 터. 파레사는 평소보다 이르게 입궁했다.
잘 먹고 잘 논 터라 걸음에 활력이 넘쳤다. 의욕도 넘쳤다.
‘황후 폐하도 그간 황제와 함께 지냈으니 기분 좋으시겠지?’
그러나 파레사의 예상은 완벽하게 비틀렸다.
황후궁에는 마치 장막을 내린 것처럼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햇빛이 밝게 비쳐드는 이른 아침인데도 황후궁에만큼은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운 듯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이상해.’
파레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황후궁에 들어서자 마침 지나고 있던 하급 시녀 레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파레사 님 오셨어요?”
눈 밑이 퀭했다. 잠을 못 잔 것 같은 얼굴이다.
하급 시녀들은 3교대로 근무한다. 행사가 있을 때 빼고는 널널한 직장이었다. 그런데 왜?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저, 그게. 황후 폐하께서…… 어젯밤 궁으로 돌아오신 이후, 심기가 편치 않으세요.”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부로 잡힌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어요.”
황태자와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면 황제와. 더 뭔가를 물으려는 찰나, 레나가 먼저 움직였다.
“저, 시종장님께 가는 길이라 이만 가보아야 합니다.”
“네.”
파레사는 의문을 안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러나 황후의 침소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어요.”
그건 깨어 있다는 소리고. 깨어 있지만,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지만 바깥에서 있었던 일이라 하급 시녀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휴가를 마치자마자 들이닥친 상황이 낯설었지만, 파레사는 차분하게 대처를 생각해냈다.
‘차를 한 잔 내와 볼까.’
차를 명목으로 문을 열고 대화를 나눠보는 거다.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이 나을 터였다. 파레사는 티룸 쪽으로 움직였다.
티룸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꼭 깨진 조각을 치우는 것 같은…….’
파레사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걸음이 방의 초입에서 저절로 뚝 멎었다.
“아니, 이게 무슨.”
믿기지 않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깨진 창문과 이리저리 쓰러진 가구들. 그리고 파레사가 고이 닦고 관리하던 도자기들이 바닥에 떨어진 채 박살 나 있었다.
찻잎이 엉망으로 쏟아져 카펫 위로 얼룩진 방 안은 그야말로 초토화였다.
‘이게 대체 얼마인데!’
그 생각부터 들었다.
파레사의 1년 치 연봉을 몰수한다고 해도 갚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재화가 티룸에서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도둑이라도 든 걸까?
그렇다면 자신은 무죄다. 휴가를 갔으니, 자신에겐 변상의 책임이 돌아오진 않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 파레사 님. 오셨어요?”
파편을 쓸어모으고 있던 하급 시녀 두 명이 일어나 파레사를 맞이했다.
야간 근무하는 인원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시중인들이 아직 출근하기 전이었다.
얼추 치워내긴 했으나, 두 사람이서 다 정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만큼 방의 상태가 심각했다.
“어떻게 된 거지요?”
그 말에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황후 폐하께서.”
“예?”
도둑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파레사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황후가 이랬다고?’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지만, 황후는 분풀이로 베개나 두들기는 타입 아니었던가.
그 가는 손목으로 이런 파괴극을 벌였다고?
운동은커녕 맨날 책상 앞에서 자리 물림 하는 게 일이면서 이토록 힘이 넘치다니.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은 핀트가 여러모로 어긋나 있었지만 파레사는 자신이 분석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실은 황태자가 때려 부수고 갔다든지. 하지만 그건 더 이상했다. 능력 여하를 떠나 그럴 사람이 아니다.
두 하급 시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외쳤다.
“간밤에 귀가하시자마자 티룸에 들어오셔서 문을 닫으시더니. 내내 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그리고 날 밝으실 때 되어서 침소로 돌아가셨답니다. 어찌나 살벌하던지!”
장시간에 걸친 소행이라면 그나마 이해가 갔다.
두 하급 시녀의 증언을 들으며 파레사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전에도 그러신 적이 있던가요?”
“예전에는 종종 벌어졌던 일이라고 해요. 너는 겪어본 적 있지?”
“응, 3년 전인가? 최근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으셨는데.”
“……아무도 말릴 생각을 안 한 건가?”
이렇게나 힘껏 때려 부쉈으니 황후의 몸도 상했을지 모른다.
‘파편이 튀면서 그 고운 피부에 생채기가 남았을지도.’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파레사는 문득 자신이 황후의 미모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건 황후가 파레사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파레사는 그 상호성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랬군, 그래서 내가 황후한테 유독 너그러웠던 거구나.’
황후는 제가 너그럽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두 하급 시녀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간 목을 치라고 명하시면 어쩌려고요!”
“다들 얼씬도 하지 말라고 외치셨는걸요! 저희는 죽기 싫어요.”
“누군가를 죽이거나 목을 치라고 하신 적은 있고?”
“없……지만?”
“그러게요?”
두 시녀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
파레사는 어처구니없는 듯이 그녀들을 봤다.
황후궁에서 일하는 이들조차 그들 눈으로 본 황후가 아닌 악소문에 휘말리고 있다니.
황후가 빽빽대며 소리는 질러도 누굴 죽이지는 못할 성격이라는 것을 알 만도 하지 않나.
‘근무 태만이로군.’
일단 황후가 무슨 짓을 했든 이들도 방관만 한 것은 문제였다. 시중인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파레사의 표정이 자연히 냉랭해졌다.
그녀는 상관이 두렵다 하여, 할 일을 제쳐놓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파레사의 상관은 정말로 누군가의 목을 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황후 폐하를 찾아뵈어야겠군요. 서두르지요.”
“예.”
“알겠습니다.”
은근한 압력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어쩐지 위축된 두 하급 시녀가 조용히 답했다.
저희보다 훨씬 나이도 어린 귀족 아가씨에게 왜 자신들이 위축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은 시종장을 앞에 둔 것처럼 긴장하며 서둘러 움직였다.
‘월급대비 노동 강도가 낮다고 했는데.’
어디가 낮다는 거지? 반파된 티룸을 치우면서 파레사는 시름에 잠겼다.
세 사람이 적극적으로 방을 치우니 두어 시간 만에 정리가 끝났다.
쓰레기가 잔뜩이었다. 바닥에는 새로운 카펫이 깔리고 진열장은 텅텅 비었다.
“찻잔은 남아나는 게 이것뿐이군.”
3세트. 파레사는 서랍장 아래에 자리하여 온전할 수 있었던 찻잔 세트를 어루만졌다.
황후는 눈에 띄는 곳에 있는 모든 도자기를 남김없이 깨부쉈다. 마치 누군가의 씨를 말리고 싶은 것처럼.
제가 가진 재물을 금쪽같이 아끼는 황후답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찻잔들은 알뜰살뜰 아낀 궁내 예산으로 사 모은 수집품은 아닐지라도, 티타임을 즐기는 황후의 품격에 어울리는 상등품이다.
얼마나 그녀의 심정적 격동이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황후가 아래까지 들여다볼 정도로 꼼꼼하진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공들여 관리한 찻잔들이 와장창 박살 난 꼴을 보니 파레사도 속이 쓰렸다.
남은 찻잔은 구석에 처박힐 만큼 오래되고 태가 뛰어나지 않은 것들이었다. 황후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새로 찻잔 세트를 주문하여 가져올 때까진 이것들을 써야 한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돼.’
파레사는 단호히 생각했다. 황후도 지금쯤 진정이 되었을 터.
아니, 잠들었을까.
후자라면 다음 기회를 보고, 깨어 있다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파레사는 방침을 착착 결정했다.
‘어젯밤에 황제 폐하와 함께, 본궁에 계셨다고 했는데.’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직접 알아봐야겠다.
파레사는 티룸을 떠나 황후의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난감한 얼굴의 시종장이 거기 서 있었다.
파레사를 보자마자 그가 당황한 얼굴로 변명해댔다.
“그,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닐세. 그냥 가끔…….”
파레사가 때려치운다는 소리를 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또한 못마땅했다.
시종장씩이나 되는 자가 우선순위를 분별하지 못하다니. 그가 걱정해야 할 건 황후의 안위가 아닌가.
파레사는 턱을 쳐들고 물었다.
“압니다, 들어가실 건가요?”
시종장은 바로 기겁했다.
“아니! 자네도 그러지 않는 게 좋겠네. 기분이 좋지 않으실 테니까!”
황후의 히스테리를 마주할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파레사가 차분히 대답했다.
“손을 다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 괜찮을 걸세. 몸을 아끼시는 분이니.”
요령껏 때려 부쉈을 거라는 거군.
그 말은 황후의 상태가 어떨지 짐작만 할 뿐 그도 모른다는 뜻이다.
파레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저 이 앞에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고만 계실 모양이로군요. 시종장님이 그러겠다고 하시면 제가 뭐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저는 전속 시녀이므로,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파레사는 성큼 앞으로 걸어나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들었나?
파레사는 좀 전보다 세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제야 안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내가 혼자 있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묻어 있지 않았다.
“파레사입니다. 티룸에 가 보았습니다만, 엉망이 되어 있더군요.”
황후의 목소리에 분기가 솟구쳤다.
“그래, 내가 부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그래도 원하신다면 티타임은 가지실 수 있으니, 준비해 둘까요?”
“필요 없어! 귀찮게 굴지 말고 가버리렴!”
그거 좋은데?
지금 퇴궁하면 일도 안 하고 돈을 버니까 파레사에게는 잘된 일이다.
잠깐 혹한 파레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간 너무 느슨해졌다. 임무에 소홀해 본 적 없는 파레사다.
‘하지만 어쩐지…… 피하고 싶군.’
두려워서 아니다. 이 방으로 들어서는 건, 예상치 못한 어떤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이한 기분이다.
거리를 지키고 선 흐름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러나 파레사는 움직여야만 했다.
“손을 다치셨을지 모르니 살펴봐야 해요.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빠르게 내뱉은 파레사가 냉큼 문부터 열었다.
벌컥.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 잠겨 있어도 아무도 들어서지 못하니까 굳이 잠글 필요가 없는 거다.
뒤늦게 황후의 고함이 떨어졌다.
“누구 맘대로 내 침소에 허락 없이 발을 들여? 네가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안으로부터 뭔가가 날아들었다. 파레사는 제게 날아든 쿠션을 가볍게 잡아챘다.
아직 기운이 남아 있다. 이걸 여기까지 던지다니.
파레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던지려면 옆에 있는 꽃병을 던지시지요. 이런 것으로는 아무도 제지하지 못합니다.”
“뭐, 무슨.”
분노한 황후조차 당황하게 만들며 파레사는 침대로 다가서서 쿠션을 놓았다.
암막이 쳐진 방안은 어둑어둑했다. 낯선 공간. 황후는 부지런한 여인이었기에, 파레사가 출근할 무렵에는 늘 깨어 있었다.
그 때문에 파레사가 그녀의 침소까지 발 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 때문이 아닌가.
‘아마도 이곳은 황후의 안식처……겠지.’
홀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그 때문에 침입자에게는 공격적으로 나온다.
파레사는 어둠 속에서 황후를 발견했다. 침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켜 엎드린 그녀는 안광이 일만치 사납게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도 맹수와 같은 과다.
‘불을 켜면 꺼버릴 테니 커튼을 걷는 게 낫겠어.’
“커튼을 좀 걷겠습니다.”
파레사는 말하자마자 행동에 들어섰다.
“하지 마!”
촤악! 빛이 안으로 들이비침과 동시에 황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왜 내 말을 듣질 않니!”
파레사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다가섰다. 대처하기 전에 행동한다. 파레사의 전략은 유효했다.
고개를 수그리는 황후의 손을 파레사가 재빨리 잡아챘다.
“커튼은 다시 치겠습니다. 상처만 살피고요.”
역시. 팔과 손에 자잘하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파레사는 침대 옆의 서랍장을 열어 비상용 치료 도구를 꺼냈다.
그녀는 바로 그것을 꺼내 들고 치료를 시작했다.
마법약이니 금세 상처가 나을 것이다.
파레사는 꼼꼼히 약을 바르며 말했다.
“조심하셔야지요.”
얼굴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황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목을 치라고는 하지는 않아도 넌 해고라고 선언할 수는 있는 황후였다.
‘그래도 해고는 안 할 테지.’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고작 한 달. 그러나 황후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다. 그것이 파레사를 움직이게 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네가 알 것 없다! 너는 휴가랍시고 좋다며 떠나지 않았더냐.”
독기가 배어나는 목소리였다. 황후의 고개가 치들렸다.
늘 화사하고 깔끔하게 단장하던 얼굴에는 채 지우지 않은 화장기가 얼룩져 있었다.
눈시울은 붉었으나, 의외로 눈물기는 없었다.
새하얀 낯빛을 배경으로 충혈된 눈동자가 도드라졌다. 어쩐지 숨 막히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아.’
파레사는 여관에서 제게 다가왔던 두 귀부인을 떠올렸다.
황후에게는 적이 있었다. 그게 누군지, 몇 명이나 될지도 알 수 없지만. 세력과 권력, 재력을 모두 다 가진 만만치 않은 적.
아마 그 적과 관련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으리라.
황후를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하고도 남을 만한 사건이.
치료를 마친 파레사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휴가를 허락해주신 덕분에 마음껏 즐기다 왔지요.”
그래, 좀도둑도 잡아서 현상금도 벌고, 아름다우신 황태자 님도 보고 선물도 받고, 신나는 휴가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파레사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버럭 성을 내던 황후가 고개를 휙 돌렸다.
“다 끝났으면 커튼 닫고 나가 봐!”
그것은 마치, 마음의 문을 닫는 외침처럼 들렸다. 그 황폐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파레사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저는 듣지 못했어요. 하여 황후 폐하의 상심이 얼마나 크실지 감히 짐작하지 못합니다.”
입바른 말이나 섣부른 위로, 그 모두 아니었다. 날카롭지는 않으나 단단한 충고. 흡사 받쳐 세우는 듯이.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겠군요. 황후 폐하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그 사람은 기뻐할 테지요.”
황후의 눈빛이 다시 파레사에게 돌아들었다. 그녀의 두 눈이 선연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울음을 삼키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이내 물었다.
“너는 그게…… 누구인지 아느냐?”
쫓기는 듯한 어린 짐승처럼. 두려움과 노여움, 그리고 증오가 말린 장밋빛 눈동자 속에서 성마르게 교차 되었다.
그녀가 가진 감정은, 그녀가 겪어온 그것들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홀로 안은 고통이며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한 견뎌내야 할 어떤 것.
황후는 그것을 견뎌내고 있었다. 찻잔을 부수고 방안에 틀어박히는 것은 그저, 무엇이든 발버둥 치고자 하는 몸부림에 불과하였을 뿐.
황후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가 올라선 산 정상은 빛이 쏟아져 눈부시나 휴식을 취할 그늘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 좁은 정상에서 그 어디에도 갈 곳은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서서 버텨내야 했다. 살아선 내려갈 수 없는 자리였기에.
많은 것을 내려두고, 많은 시도를 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그것이 단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아니, 또다시. 이는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그녀가 죽기 전에는.
그런 황후에게, 파레사가 말했다.
“저는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입니다.”
파레사의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 물빛 맑음에는, 어둡고 탁한 것들을 배척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황후의 적이 누구인지 자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황제라도.
아니, 황제면 좀 곤란하다. 제 봉급은 황제 소관이니까.
‘하여튼 마음에 들지 않아.’
파레사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 대해서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황제가.
황후는 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역경 속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모르거나 모른 척했다.
누구 하나 그녀의 편은 없었다.
오직 파레사 자신만을 제외하고는.
‘내가?’
파레사는 문득 떠올린 그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제국민도 아닌데.
심지어 자신은 뒤나미스에서 도망쳐온 몸이었다.
황후의 편이라니. 숨겨진 신분을 떳떳이 털어놓을 수조차 없는 자신이.
그러나 어딘지 그 말이, 깊은 곳 어딘가에서 파레사를 움직였다.
그르릉대는 울림이 온통 안으로 퍼져나갔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어, 고막이며 머리까지.
파레사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가진 것은 무언가를 베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검이었다.
사명이 움직였다.
무엇도 예측된 것은 없었다. 그저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듯이.
파레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당한가.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파레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냈다. 그렇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어떻게든.
그것이 뒤나미스의 권능을 가진 벨로나 나이트였다. 파레사는 자신이 짊어진 이름의 가치를 알았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데.”
황후가 헛웃음을 냈다. 너 따위가.
고작 전속 시녀 한 명이. 날 어떻게, 구해.
누구도…….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곁을 지켜주던 이조차 떠나갔는데.
회의와 불신이 몰아쳤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옅은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 어떤 기대를 품고서.
그 기대를 마주하며 파레사는 생각했다.
‘그래, 현재의 나는 그저 전속 시녀에 불과할 뿐이지.’
예전과 같은 어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이것은 검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다.
그러나 파레사는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또렷이 알았다.
“폐하의 편이 되겠습니다.”
“내…… 편이라고?”
“무너지지도 돌아서지도 않겠다고 약속드리지요.”
파레사는 웃었다. 눈치 없는 초보 시녀, 파레사가 처음으로 황후에게 지어 보이는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저는 강하니까요.”
“네가 강해 봤댔자…….”
항변의 말은 금세 먹혀들었다. 파레사의 두 눈이 황후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기에.
그 눈에는 뿌리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무엇이든 물러섬 없이 관철해온 눈이다.
“폐하께서 싸우실 마음이 있다면,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이곳 황궁에서, 자신에게 허락되는 마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파레사는 황후가 가여웠다.
‘시녀가 어떻게 황후를 가여워한단 말이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파레사는 그 마음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여기에 있었다.
파레사는 황후를 섬기는 전속 시녀였다. 의무를 다해야 한다.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적당히 봉급만을 받아먹으려는 마음은 사그라지고,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열의에 불이 붙었다.
“제가 떠난다면, 제 존재가 황후 폐하께 폐가 될 때겠지요. 그것만은 양해해 주시기를.”
파레사가 말을 마치자 황후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발칙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 누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나. 황제, 아니 남편조차도.
‘귀족들에게 신경 쓸 것 없소.’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오.’
그 방만한 말들. 때때로 벽을 느꼈었다. 황제는 정말로, 그녀가 나태하든 패악을 부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오롯이 그녀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 무언가가 이 황후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하이디가 떠난 이후로 처음으로, 네 편이 되겠다 말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저 무던하고 무심하여, 도리어 편할 수 있었던 전속 시녀가 한 말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뭉클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쓰라렸다.
‘어째서, 이제야.’
이상하게도 파레사의 주위에 빛이 서린 듯 반짝였다. 황후는 이를 갈 듯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감히 나를 동정하느냐?”
“지금 굉장히, 불쌍해 보이시는 걸요.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누구나 그렇게 여길 겁니다.”
“그러게 누가 들어오랬어!”
황후는 바로 씩씩거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제 의무니까요.”
파레사의 대답은 평온했다.
그 평온함은 황후의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어쩌면 이 전속 시녀는, 조금 다를 줄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어딘지 처음부터 특별하게 여겨졌으니.
물론, 그건 생김새가 마음에 들어서겠지만.
“……일단, 분명히 말해두지만. 너는 아직 미흡한 데가 많다. 경험도 적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평생을 우등하게 살아온 인간.
자신이 미흡할 수도 있다는 평가가 완전히 와닿지는 않는 것이다.
어떤 소양이 조금 부족할 수는 있어도 모든 면을 합산하면 우등하니까.
파레사의 자신감 넘치는 기색에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교계에 나서면 수없이 두들겨 맞을 테지. 하지만 네 정신 만큼은 아주 튼튼한 것 같구나. 걱정할 필요 없겠어.”
그야 퍽 치면 죽을 약한 것들이 찡찡거려봤자 간지럽기만 하니까.
파레사의 평온함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포식자의 여유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난 너를 믿지 못하겠다. 애초에 너는 시골에서 왔다더니, 뒤나미스에서 왔다는 둥 신분을 속이지 않았느냐!”
예리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파레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뒤나미스는 제국 입장에서 시골이나 다름없지 않은지요.”
제국인들은 제국 중심주의니까.
“말은 잘도 하는구나. 여하간 내 편이 되고 싶다면, 우선 내게 믿음부터 줘 보거라.”
황후는 당당히 턱을 쳐들었다.
완전히 기력이 회복된 눈치였다.
밤을 새고 난동을 부렸고, 기분도 풀렸으니 이제는 잘 시간이다.
파레사는 그녀의 생체 흐름을 놓치지 않고 파악했다.
“그럼 차부터 내올까요? 마시고 우선 주무시지요.”
“그게 믿음과 무슨 상관이지?”
“전속 시녀로서 제가 충실히 일한다면, 믿음이 자라나지 않으시겠는지요.”
“……일리는 있다만.”
나를 믿으라고 한다고 당장 떡하니 믿어질 리도 없지 않을까. 믿음을 주는 방법은 실은 간단했다.
벨로나 나이트의 맹세. 파레사가 검을 꺼내 보인다면, 누군들 진의를 의심할까.
하지만 쓸 수 없는 방법이고, 그런 식으로 믿음을 사는 것은 파레사의 방식이 아니었다.
진정한 믿음은 충실함으로 얻어지는 것이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말을 남긴 파레사는 냉큼 방을 나섰다.
어떻게 충실할지 생각은 좀 해야 할 것 같다. 문 앞에는 몇몇 하급 시녀들과 시종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멀쩡한 모습으로 나온 파레사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언성이 좀 높아지는 것 같던데, 그…….”
“그만둔다고 말할 거 아닙니다.”
시종장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파레사가 잘랐다.
이 자는 은근히 간이 작다. 늘 황후한테 한 소리를 들을까 겁내는 눈치였다.
“손을 다치셔서 치료해드렸습니다. 이제 안정을 찾으셔서 괜찮으세요. 저는 차를 내와야 하니, 이만.”
파레사는 짧은 보고를 마치고 휙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잠깐 얼어붙었던 시종장은 파레사의 말 속에서 숨겨진 가시를 찾아냈다.
시종장인 그는 괜찮을 거라 단언했었는데, 황후는 손을 다쳤다.
치료를 미루고 방관한 셈이 된다.
들어온 지 한 달 밖에 안되는 전속 시녀가 제 할 일을 잘도 하는 데다가 지적까지 해온다.
시종장은 당황스러웠다.
‘허참.’
내가 이번엔 사람을 제대로 뽑았구나.
파레사를 뽑은 자신의 안목에 감탄해야 하는지 갓 뽑은 자보다 못한 자신을 질책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질책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시종장은 큼큼, 헛기침하며 하급 시녀들에게 말했다.
“각자 움직여서, 궁 내부를 말끔히 해두도록. 황후 폐하께서 방에서 나오셨을 때 미흡함이 없어야 할 것이네.”
“예, 시종장님.”
곧 차를 가지고 온 파레사가 다시 한번 시종장을 지나쳤다.
똑똑 노크 뒤 문 안에 들어선 그녀에게 또다시 타박이 날아온 것은 필연이었다.
“찻잔이 이게 뭐니? 세상에, 샅샅이 뒤져도 이런 건 찾기 힘들겠다!”
“네, 못 찾으셨어요. 폐하께서 샅샅이 다 찾아내서 부수셨는데, 이건 남았더군요.”
파레사의 지적에 황후는 할 말이 없어졌다.
파레사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진정 효과가 있는 허브차였다. 딱 마시기 좋은 온도다.
“남은 것 중 가장 나은 찻잔을 가져 왔으니, 당분간은 그걸로 만족하시지요.”
“……다시 사면 그만 아니냐.”
“그렇겠지요. 아마 당분간 드레스와 보석 구매는 삼가셔야 할 것 같네요. 티룸을 다시 채워 넣으려면요.”
그것만은 싫었는지 황후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비워낸 그녀가 파레사를 향해 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네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 어찌 그리 불손한 게냐.”
“이제 기운을 차리셨나 보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주무셔야지요.”
파레사는 무심하게 지나쳤다. 하루를 꼬박 지새웠으니 빨리 재워야 피부가 상하지 않는다.
황후의 미모를 보존하는 것은 파레사의 중대한 임무였으니까.
파레사는 언제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도록 찻잔과 찻주전자를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나가면서 경고를 남겼다.
“이나마도 깨시면 더 형편없는 찻잔을 가지고 올 거예요.”
“……발칙한 것.”
“편히 쉬시길.”
방 밖으로 나온 파레사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기사, 시녀, 시종들 하나같이 경이로운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뒤나미스에서 익히 받았던 시선이다.
파레사는 담담히 그들을 지나쳐 티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조용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한가한 시간을 즐기면서.
황후의 일정이 사라지자 편해진 파레사였다.
구실은 있었다. 티룸을 정비해둬야 내일부터 황후가 다시 티타임을 즐길 수 있을 거다.
파레사는 파괴된 품목과 대조하여 새로 살 품목을 짜면서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제 돈이 아닌 황후궁의 예산을 펑펑 쓸 좋은 기회였다.
상점가를 거닐면서 슬쩍 봐놨던 값비싼 찻잔과 새로운 커튼을 모조리 구매하여 이곳을 호화롭게 장식할 테다.
파레사는 사적인 욕망을 불태웠다.
물론,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 황후의 드레스룸에 한동안 신상이 들어서지 않겠지만, 제가 알 바는 아니었다.
* * *
퇴궁하여 숙소로 돌아온 파레사는 익숙한 상황을 마주했다.
“파레사! 너 괜찮아?”
쪼르르 달려와 손을 덥썩 잡은 마리가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녀뿐만 아니라, 평소에 데면데면하던 다른 시녀들도 우르르 파레사에게 달려왔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이런 난리를 치러서야, 힘들어서 어떻게 견디겠어요? 한 달이나 버티다니 대단도 하지!”
“티룸이 아주 반파되었다면서요! 세상에 어쩜.”
그렇게 포악한 여자가 다 있을까.
시녀들의 동정심 어린 눈초리엔 비난이 섞여 있었다.
소문에 편승하는 비난이.
파레사는 그녀들이 보이는 동정심과 비난이 거슬렸다.
이제까지는 파레사는 알면서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반감을 사지 않고, 적당히 그들에게 섞여들기 위해서.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별일 없었어. 날 봐.”
두 손을 펼쳐 보이는 파레사의 시선에 묘한 압박이 담겼다.
그녀는 그 눈으로 저를 둘러싼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움찔. 바로 반응을 보인다.
파레사는 자신의 반응이, 그녀들이 기대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마리가 독촉하듯이 파레사에게 물었다.
“황후 폐하, 모시기 힘들지 않아?”
그렇다는 대답을 해.
요구하는 듯한 마리의 눈빛을 마주하며 파레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럭저럭 할 만한데. 알다시피 봉급을 많이 주잖아.”
“뭐, 그렇기는 하지.”
마리의 대답과 함께 파레사를 둘러싼 시녀들에게 수긍의 기색이 어렸다.
“그래 하기야.”
“전속 시녀는 수당이 높지요.”
‘돈만 보고 참는다는 소리는 아닌데.’
파레사는 생각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녀들이 말을 꺼냈다.
“그래도, 힘겨운 점이 많을 텐데 수당이라도 높아야지요!”
“그럼요! 모시는 분이 얼마나…… 그거라도 없으면 버티겠어요?”
“그렇지요, 파레사?”
파레사는 그녀들의 면면을 훑었다. 꼭 ‘황후는 나쁜 년이야!’라는 말에 너도 동조를 하라는 것처럼 보였다.
어설프게 넘어가지 말고 확실히 하라는 듯이.
‘그래, 확실히 해야겠지.’
파레사는 입을 열었다.
“편한 점도 많아요. 황후 폐하는 센스가 좋으셔서 드레스도 알아서 잘 고르시지요. 폐하를 섬기면서 배우는 것도 많아요. 인심이 후하셔서 드레스도 선물해 주셨고, 자그마치 황태자 전하와 춤도 추게 해주셨답니다.”
줄줄이 쏟아낸 파레사는 싱긋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미소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시녀들은 어설픈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발을 돌렸다.
“글쎄 참…… 묘한 일이네요.”
“어머, 그럼 저는 이만.”
우르르 사라져가는 시녀들의 뒷모습을 파레사는 냉담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홀로 남은 마리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화가 난 기색으로 말했다.
“넌 고립될 거야.”
“협박처럼 들리는데?”
“내가 그런다는 소리가 아니야! 그래서 기회를 줬잖아!”
약은 듯이 속 모르게 굴었던 마리가 드러낸 최초의 진심이었다. 파레사는 무표정하게 그것을 지켜봤다.
“공공의 적을 두고, 뒤에서 욕하면서 우애를 나눈다 이거지? 나도 합류하라고?”
“말하자면 그렇지. 그리고 그럴 만하잖아? 겪어봤을 것 아니야.”
“아니. 겪어봤지만 그렇지 않았어.”
솔직히 자신도 내심 황후를 비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싫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냥 불만이 있었을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질 법한 그런 불만. 까다로운 상관에 불만을 품지 않기도 어렵다.
“나는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야. 내가 섬기는 분을 욕되게 할 수는 없지.”
기사로서뿐만 아니라, 시녀로서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거다. 황실의 시중인답지 못하다.
“그분이 정말 악녀였으면, 너희들이 내게 함부로 떠들어댈 수조차 없었겠지.”
두려워하는 상대를 두고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는 법. 파레사의 눈빛은 냉정하기만 했다.
“걱정하지 마. 일러바치지는 않을 테니. 네가 무슨 의도이건 상관없지만…….”
파레사는 마리를 향해 또렷하게 선언했다.
“나는 내 생각대로 행동할 거야, 마리.”
“파레사.”
“그럼 안녕.”
파레사는 마리를 일별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앞으로 마리가 파레사에게 아는 척하지 않는대도 이상하지 않다. 다른 시녀들도 파레사를 피할 테니까.
‘뭐, 별문제는 아니지.’
이왕이면 사이좋게 지내는 쪽이 낫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파레사는 문득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아마 이 싸움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싸우기로 했으면, 승리해야지.’
물빛 눈동자에 예기가 스쳤다. 전투의 의지가 감도는 눈빛.
그건 파레사가 자신 있는 일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
“제가 계획을 준비해 보았어요.”
파레사는 진지한 기색으로 차를 마시는 황후를 마주 보았다.
어제 그런 꼴을 보였던 게 언제냐는 듯, 황후는 다시 고고한 태를 갖추고 벽면에 가득했던 찻잔이 텅텅 빈 티룸에 앉아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차를 마시던 테이블과 의자는 아주 튼튼하여 멀쩡했기에.
황후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말해 보아라.”
“황태자 전하와 친해지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당연한 듯이 황후는 난색을 표했…… 아니, 분노를 발했다.
챙강! 황후는 찻잔을 내리찍다시피 내려놓으며 사납게 외쳤다.
“내가 왜!”
그 말을 내뱉은 파레사의 목을 비틀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마주하는 파레사는 평온하기만 했다.
“누구도 황태자 전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과장되게 말하자면 고고한 귀부인들도 황태자 전하가 황후 폐하의 구두를 핥으라고 시키면 핥는 시늉도 할 걸요?”
“무슨 비유가 그따위니!”
“사실인 걸요. 보셨잖아요.”
권능을 가진 황제와 그 후계자는 제국에서 반신과 같은 존재.
특히나 인간 같지 않은 외형의 황태자는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하고 있었다.
이미 황태자는 자신의 위력을 무도회에서 입증해 보이지 않았나.
파레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도회의 기억을 치워버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와 가깝게 지내셔야 합니다. 그는 황후 폐하의 편이 되어줄 가장 큰 전력이에요.”
그리고 그만 손에 넣는다면 반쯤은 승리를 확보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파레사는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일종의 동맹이라는 거다. 무엇보다 황태자는 이쪽에 우호적이었다.
황후가 코웃음 쳤다.
“누가 누구한테 도움이 돼? 여태껏 가만히 있던 황태자가?”
“나이를 먹었으니 마음을 달리 먹을 만도 하지요. 어쨌든 황태자 전하는 그럴 의향이 있어 보이셨습니다.”
“네가 그 음흉한 녀석의 속내를 어찌 알아? 이제 보니, 네가 황태자한테 사심이 있었구나. 역시!”
의심병이 도진 황후가 또다시 눈매를 가늘게 좁혀다.
“의심 좀 그만하시지요. 저야말로 그분이 꺼려지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파레사는 이겨야 하고 황후를 도와야 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왜 네가 황태자를 꺼려? 아름답다느니 할 땐 언제고.”
“불편해서요.”
“불편? 그래, 그 녀석이 불편하기는 하지.”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납득한 황후는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파레사는 그녀 앞으로 책자를 슥 내밀었다.
“새 찻잔 세트를 주문해야 하니까, 카탈로그를 보시고 선정해 주세요.”
일부러 값비싼 찻잔들 위주로 선별해서 보내진 맞춤형 카탈로그였다.
황후가 기존에 쓰던 찻잔들도 하나같이 특등품 도자기였지만, 대개는 원래 있었거나 선물 받은 것이라 황후가 산 건 거의 없었다.
그녀는 남는 예산을 거의 액세서리와 드레스를 구입하는 데 집중하여 썼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 지출하게 된 황후가 미간을 구겼다.
“뭐가 이리 비싸단 말이냐, 고작 이깟 찻잔 따위가. 그저 불에 구운 흙덩이에 불과한 것을!”
“황후 폐하가 입고 계신 드레스도 그렇게 치자면, 벌레에서 나온 실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 무슨 징그러운 소리를!”
황후가 성을 내며 손을 내젓는 통에 과일을 담은 접시가 떨어질 뻔했다.
파레사는 능숙하게 접시를 잡아내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조심하세요. 깨진 접시를 보충하려면, 또 예산을 쓰셔야 할 테니까요. 예산이 근소하게 모자라, 여름 드레스 한 벌을 덜 맞추게 되실지도 몰라요.”
파레사는 단단히 엄포를 놨다. 또다시 깨진 접시를 치우느라 고생하게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기물 파손은 나쁜 습관이다. 전속 시녀로서 시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소문나면 교양 없다는 소리 듣기 딱 좋으니, 앞으로 기물 파손은 삼가 주셨으면 하군요.”
안 그래도 소문이 나쁜데, 행동까지 포악하면 반박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이미 이 찻잔 세트 몇 개를 구입하는 예산 때문에 여러 벌을 못 사게 될 거란다!”
“아무도 황후 폐하께 그 비싼 찻잔들을 깨트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자신이 출근해 있었으면 말렸겠지만. 휴가를 안 갔어도 휴일에 일어난 일이다. 도리가 없었다.
황후가 카탈로그에서 찻잔 세트를 몇 개 골라서 파레사에게 넘겼다.
의도한 대로, 파레사가 빨간색으로 표시해놓은 것들이었다. 사욕을 채운 파레사는 흡족한 기분이 되었다.
입맛이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황후가 시선을 내리깐 채 말했다.
“아무튼 나는 황태자와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다.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그런데 실은,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걸 보내오셔서요.”
파레사는 오늘 아침에 발견하여 빼돌린 편지를 때맞춰 슥 내밀었다.
황태자로부터 온 초청장이었다. 이걸 주기 전에 사전 작업을 해두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날벼락을 맞은 양 황후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불태워버려!”
“황태자 전하의 편지를 시중인이 함부로 다루는 것은 중죄입니다. 열어 보시지요.”
파레사는 사뿐히 초청장을 황후의 손에 쥐여 줬다.
황후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편지를 대충 읽은 그녀가 종잇장을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찻잔 위로 떨어진 황태자의 편지는 볼품없이 찻물에 물들었다.
언제 황태자의 친필 서한이 이런 수모를 당해 보았겠는가.
황후가 느닷없이 내뱉었다.
“네가 다녀 오거라.”
“예? 어디로요.”
“황태자가 시간 되는 대로, 날더러 황태자 궁에 방문해 달라더구나!”
“그런데 왜 제가 가는지?”
“너는 내 전속 시녀이지 않니! 전속 시녀는 황후를 대리한다. 하여 너는 나를 대신하여 가는 것이다.”
‘불편하다고 했지? 마음껏 불편함을 겪어보려무나!’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예산을 털린 황후의 보복 심리가 느껴졌다.
파레사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사고는 황후가 쳤는데, 잘못을 지적한 제게 피해가 돌아온다.
“……꼭 저한테 떠넘기셔야겠는지요.”
“꼭 떠넘겨야겠다.”
황후는 단호했고, 이어 덧붙이기까지 했다.
“명령이다. 다녀와, 당장!”
“예.”
* * *
한 시간 후, 파레사는 황태자 궁을 앞두고 서 있었다.
황태자 궁은 척 보기에도 우아한 느낌을 주는 황후궁과는 외관이 가져다주는 느낌이 달랐다.
차분한 적색 지붕 아래로 네모반듯한 건물이 지상으로부터 수직으로 몸을 세우고 있었다.
창틀이며 기둥머리 부분에 화려한 금장식으로 강조점을 두었으나 전체적인 느낌이 화려하다기보다는 묵직하고 웅장했다.
궁전의 앞뒤로는 두 개의 연못이 있고,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온실과 화원을 두어 색색이 화려한 황후궁과는 달리 관목이 다듬어진 나무로 가득하여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었다.
여름철에 피어나는 장미로 오로지 한 철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풍길 것이다.
‘황태자와 여름 장미라니, 어울리지 않아.’
그는 겨울처럼 싸늘하지는 않으나, 미온에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온화한 봄이나 서늘한 가을과 어울렸다.
‘……없으면 대충 바쁘신 듯하여 돌아섰다고 말하면 되겠지?’
파레사는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는 바쁜 몸이다. 그러니 이 시간에, 황태자 궁에 남아 있을 리 없……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황태자궁에 도착하여 기별을 알리자, 중년의 시녀장이 나와서 파레사에게 말했다.
황후궁에서 온 그녀가 마땅치 않은지 깍듯하나 호의적인 눈길은 아니었다.
“따라오십시오.”
시녀장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파레사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시녀, 시종, 심지어 기사까지 모두 다. 단순히 황후의 전속 시녀라 하여 이리 주목받을 리 없다.
‘역시 이게 다 황태자와 춤을 춰서…….’
라고 생각했지만, 이유가 달랐다. 사람들이 유명인사를 보듯이 수군거렸다.
“소문의 전속 시녀로군.”
“그 왜, 대낮에 강도를 때려잡았다는.”
“10대 1이었다면서? 상대가 칼도 들고 있었다지?”
“그 정도면 토벌 아니야?”
“일방적으로 토벌하고, 현상금도 두둑이 챙겼다는데.”
“황실 기사로 스카웃 했는데, 봉급이 낮다고 거절했대. 전속 시녀가 그렇게 봉급이 높은가?”
“무력 때문에 일반 전속 시녀의 두 배를 받는대!”
다소 사실과 어긋나는 소문들이 퍼져나가고 있는 현장이었다.
‘대체 이게 뭔 소리야.’
파레사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특히나 두 배를 받는다는 항목을 몹시 부인하고 싶었다. 자신도 두 배를 받고 싶건만.
“유언비어입니다.”
파레사는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10명 이상이었나 봐.”
“두 배가 아니라 세 배인가?”
……점점 더 심각해져 가는 헛소문을 뒤로 한 채로.
“파레사 양이로군요.”
시녀장이 먼저 들어선 황태자의 방 앞에서 낯익은 기사들이 그녀를 맞았다.
며칠 전 상가 거리에서 마주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소문의 원흉들.
눈인사를 건네는 그들이 몹시 밉상으로 보였다. 파레사는 냉담하게 말했다.
“이상한 소문 내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명예로운 소문 아닙니까.”
“명예를 훼손하는 소문이겠지요.”
파레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런 소문이 계속 퍼져나간다면, 후에 책임을 묻겠습니다.”
근위 기사들이 움찔했다. 한 명이 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파레사는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들어서기까지 찰나의 시간 동안, 오는 내내 하고 있었던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탁.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방 안은 환했다. 커튼이 걷힌 창가에는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상단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어우러져 오묘하게 뒤섞인 색색의 빛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거기에 황태자가 앉아 있었다.
무료한 듯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어 앉은 채 빛을 받는 그의 모습은, 흡사 성자의 조각상처럼 보였다.
‘어두컴컴한 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형평성에 맞지 않을까. 빛이란 장식이 그에게 허용되면 마법과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니까.
파레사는 예를 표했다.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 파레사.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온화하게 내리깔려 있던 눈매가 사뿐히 들렸다. 녹청색 눈동자가 파레사에게로 꽂혔다.
“어머님께서는.”
“몸이 편치 않으셔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셨습니다. 대신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황태자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새삼 의문이 들었으나, 파레사는 의문을 접었다.
칩거한 황후에게 부러 초청장을 보내어 스트레스를 줄 만큼 그가 나쁜 성격은 아닐 터였다.
“용건은 제게 말씀하시지요.”
어차피 다과나 들자고 불렀겠지. 별다른 용건이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작게 혀를 찼다.
“어머님이 계셔야 도움이 될 것을.”
황후가 그에게 도움을 줄 만한 일이 있던가.
상관을 무시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떠올리며 의아해하는 파레사였다.
그가 저편으로 손가락질했다.
“저것을 보거라.”
파레사는 몸을 돌렸다. 방 한쪽에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캔버스 위로는 어설프게 물감이 칠해져 있었다.
보아하니 방 안에 놓인 화병을 그린 것 같다. 궁정 화가가 그렸다기엔 너무나 초보의 솜씨였다. 설마?
“최근에 그림을 시작했지.”
“그러셨군요.”
파레사는 황태자가 바쁠 거라는 생각을 수정했다.
그는 새로운 취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한 듯하다.
“어머님께서 그림을 잘 그리신다고 들었다. 보여드릴까 했는데.”
그림에 조예가 있느냐고 묻는 듯이 황태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림에는 별로 조예가 없었지만, 대답은 할 수 있었다.
“기초부터 쌓으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황후도 비슷한 대답을 할 거다. 그러자 황태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궁정 화가가 처음치고는 잘 그렸다고 말했다. 내게 화가의 자질이 보인다던데?”
“그는 황실에서 봉급을 받고 있으니까요.”
노골적인 직설에 시녀장이 숨을 헉 들이켰다.
그녀는 파레사를 경악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어찌 황태자에게 이런 불손한 소리를!
못 그려도 잘 그렸다고 하고 재능 있다고 포장해줘야 한다. 그것이 시중인의 미덕이거늘!
하지만 파레사는 황후의 전속 시녀이지 황태자의 시중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게 황후의 뜻을 대리할 것이다. 그녀는 통쾌해 할 테니까.
‘기분 나쁘다고 다시는 날 보내오지 말라고 해줬으면.’
벌 받지 않을 선상에서 계산한 발언이었다.
황태자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내가 불만이 있는가? 어쩐지 공격적이로군.”
“그렇게 느껴졌다면, 송구합니다만. 워낙 성격이 솔직하여.”
솔직한 평가이지 절대 사감으로 한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엄연히 객관적인 평가인데 말이야.’
황태자는 파레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집요하게 느껴질 만치, 뚫어지는 듯한 시선.
그는 예상대로 파레사를 책하지 않았다. 대신, 시녀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시녀장.”
“예, 황태자 전하.”
“저 그림을 내다 버리게.”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그러나 특유의 온화함은 어딘지 씻은 듯이 가시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예? 아깝지 않습니까!”
시녀장이 기겁하며 외쳤다.
“전하의 그림이라면 경매에 부쳐져도 족할 것입니다. 내다 버리라니요?”
그의 추종자들이 재산을 털어서라도 구하고 싶어 할 물건이다. 실제로 선대 황제의 물건들도 후대에 경매로 부쳐지곤 했다.
그렇게 판매된 금액은 빈민가에 기부되거나, 궁전을 보수하는 등 큰일에 써졌다.
황태자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불사르게.”
“황태자 전하.”
시녀장이 어쩔 수 없이 그림 쪽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분명히, 파레사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던지리라. 파레사가 얼른 나섰다.
“미흡하게 느껴질지라도 처음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간직해두시고 나중에 그려진 것과 비교해보시며 솜씨가 느는 것을 체감해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차분하게 만류하며 파레사는 황태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고단수다. 자신에게 압박을 주려는 의도라면 성공했으니.
속이 참 좁기도 하시지. 파레사는 황태자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황태자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올라앉았다.
“그 말이 옳아. 시녀장, 그림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겠어. 내 조악한 솜씨를 그대로 전시해 두어야, 나아지고자 하는 의욕이 샘솟을 테니까.”
그리 말하는 황태자에서, 어쩐지 검은 기운이 풀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그의 미소는 늘 눈부시게 시야를 밝혔건만 반대의 효과였다.
이런 건 또 처음이다.
시녀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말조심하라는 듯이 파레사에게 눈총이 돌아온 건 덤이었다.
“향이 좋은 차를 가져오도록.”
황태자의 명령에 시녀장이 서둘러 물러났다. 이제 방 안에는 황태자와 파레사 둘만이 남았다. 기피하고 싶은 순간은, 늘 그렇게 찾아든다.
“용건을 마치셨으면, 이만 물러가도 되겠는지요.”
“기다려라. 차를 마시며 천천히 생각해 보지. 너를 보내고 난 뒤 어머님께 드릴 말씀이 생각날지 모르니.”
“……예, 알겠습니다.”
황태자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햇빛을 받아 자라나는 나무처럼 그의 녹청색 눈동자가 기다란 은빛 속눈썹 아래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파레사는 그의 모습을 티 나게 감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림을 그릴 것 없이, 그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응, 그런데?’
황태자가 황후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걸 알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황후 폐하께서 그림에 소양이 있으신 건 어떻게 아셨는지요.”
황후의 장점은 발견하는 이가 드물었으며, 소문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아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황태자가 선선히 대답했다.
“예전에, 벽에 걸린 그림을 본 적 있다. 서명이 없기에 누구의 것인지 물었는데, 황후 폐하께서 그리신 것이라 하더군.”
황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7년 가까이 지났다.
아마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의 그림은 황후궁 이곳저곳에 걸려 있었다.
궁정 화가의 그림이 주로 걸리는 장소지만, 황후의 그림이 걸려도 손색이 없었다.
“전하께서 왜 그리 관심을 가지는지 황후 폐하는 모르실 겁니다.”
왠지 측은해졌으나, 그 관심의 저의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황후가 말했듯이 황태자는 음흉, 아니 좀 의뭉스러운 인물이었다.
황태자는 미온의 인간이었지만, 그가 품고 있는 건 온기가 아니었다.
그에게선 체온보다 낮은,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따스한 햇빛이 내리비춰 반짝이는 호수가 온화한 푸른 빛을 띠고 있어도 수면 아래 물속은 차가운 것처럼.
그는 타고나길 그러한 인간이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인간이 아니었으며, 또한 타인에게 이유 없이 호감을 가질 인물도 아니었다.
그의 너그러움조차도 다스림을 위한 군주의 풍모일 뿐이며, 또한 무관심이 좋게 해석된 것에 불과하니까.
파레사는 뒤나미스에서 지배계층에 있었다. 황태자와 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속성을 지닌 자들을 꽤 보았다.
짐작할 수는 있었다.
‘두 배다른 동생을 낳은 계모라…….’
황가의 권능은 거의 일인 전승 식으로 계승된다.
형제 중 한 명이 권능을 발현하면 다른 형제 중에서 권능을 발현하는 자가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특히나 황태자의 권능은 유독 강하기로 소문나 있지 않나.
황태자가 존재하는 한, 그의 두 동생이 권능을 발현하더라도 위협이 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약한 위험성마저도 거슬리게 만드는 게 권력이니.
‘왜일까.’
황태자를 다른 이들처럼 우러러보지 않는 파레사는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가능성을 하나 떠올렸다.
황태자는 아마, 22세. 황후와는 8살 차이였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차이.
‘설마?’
이거야말로 입 밖에 내어놓으면 황실 모독이다. 쫓겨날 뿐만 아니라 감옥에 처넣어져도 할 말이 없는.
‘황후를…… 그런 건 아니겠지.’
그래, 황후는 무척 젊고 아름답지. 자신도 그녀를 본 순간 입에서 감탄이 튀어나오지 않았나.
황후를 보는 낙에 전속 시녀로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니 막장극같지만,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황태자가 그녀에게 매혹되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허나 완전히 틀렸어. 무엇보다…….”
파레사를 돌아본 황태자가 하,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불쾌하구나.”
불쾌하다니.
광휘를 휘감은 미인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자 ‘넌 바퀴벌레야!’ 같은 선언을 들은 듯한 충격이 닥쳤다.
심지어 황태자가 그토록 적나라한 표현을 쓰는 것은 처음 보았다.
파레사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께 할 말은 되었다. 이만 가보도록.”
일그러지던 입매가 단호하게 다 잡혔다.
축객령을 받고 나가던 파레사는 찻잔을 가지고 들어오던 시녀장과 마주쳤다.
그녀는 탓하는 듯한 눈으로 파레사에게 말했다.
“말씀을 조심하세요. 시중인의 미덕은 황족의 심기를 살피는 것이랍니다.”
“……예.”
황후궁으로 걸음을 옮기던 파레사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오면서 보았던 황태자궁의 웅장한 경관이 시야에 잡혔다.
“네가……. 라고?”
무엇보다, 네가. 그 미묘한 특정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뭘까.
원하는 대로 축객령을 받아내 돌아가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불쾌하다고 했으니, 이제 당분간 황후 폐하를 초청하지는 않겠지?’
계산대로였다.
어차피 황후가 파레사를 보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 황태자는 더 이상 초청장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계산은 오산이었다. 파레사는 다음날 바로 그것을 깨닫게 된다.
* * *
“또 초청장이야? 이 녀석은 요새 한가한가. 왜 자꾸 나를 불러대는 거라니?”
황후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심기는 황태자의 초청장 껍데기만 봐도 바닥을 쳤다.
파레사 역시도 저조해지는 기분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내 계산이 빗나갔다니!
“글쎄요, 제가 황태자 전하의 일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지만.”
황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그걸 황태자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황후 폐하께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셨다는 걸 아셔서가 아닐지요.”
그렇다. 황후는 오늘부로 사흘째 황후궁에 박혀서 놀고 있었다.
새로 주문한 찻잔 세트가 배송되어 다시 진열장을 장식하기 시작한 터, 파레사는 황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주의했다.
“내가 일정을 취소해도, 자기 일정이 있을 거 아니야!”
“그 일정은 황태자 전하께서 정하시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 황태자는 황후를 만나기로 일정을 정했다는 게 되는 걸까.
황후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며?
‘대체 이유가 뭐지?’
황후의 정신을 건드리려는 목적이라면 성공했다.
황후는 파레사에게 초청장을 건넸다.
“가져가서 불태워라.”
“이대로 무시하실 건가요? 거절의 답변이라도 보내는 게 어떠신지요.”
황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누가 거절한다더냐? 네가 가야지.”
“또요?”
그럴 줄 알았지만, 예측대로 이루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초청장을 보낼 때마다 너를 보낼 거다. 그러다 보면 포기하겠지.”
‘안 포기할 것 같은데.’
왠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파레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대리인 신세였다.
파레사는 부러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야말로 황태자가 자리를 비웠기를 바라면서.
파레사는 조금 전 마주한 황후의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어제보다는 나아지신 것 같군.’
나날이 나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회복기였다. 방 밖으로는 나왔다고는 하나, 황후는 바깥 활동을 꺼렸다.
마치, 누군가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대체 어떤 일을 겪으셨기에.’
그토록 대단한 충격에 사로잡히셨던 걸까.
궁금했지만 파레사는 묻지 않고 그녀가 말해주기만을 기다렸다.
때로는 입 밖에 낼 준비가 필요한, 되살리기도 싫은 일도 있으니까.
하지만 황후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놈의 믿음이 문제였다. 그녀는 아직 파레사를 믿지 않았다.
파레사는 황후를 대신하여 황태자를 방문함으로써 그 믿음을 배양하기로 했다.
불편하다고 했는데, 시키는 대로 순순히 찾아가고 있으니 황후도 그녀의 인내를 알아줄 것이다.
‘알아주겠지?’
입 밖으로 푹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어느덧 파레사는 또다시 황태자 궁 앞에 서 있었다.
“황후 폐하를 대신하여 왔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말을 건네자, 안으로 들어갔던 시녀장은 어제와 똑같은 대답을 가지고 파레사를 맞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어제보다 더 쌀쌀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파레사는 흔쾌히 그녀를 따라 들었다. 어제보다 더 늦은 시각이었다.
한층 강렬한 햇빛이 안으로 쏟아지는 창가에서 황태자는 캔버스를 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순은을 길게 뽑아낸 것 같은 그의 머리카락이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태양은 그의 아름다운 외형을 낱낱이 드러나게 해주는 최고의 조명이었다.
황태자는 어제도 오늘도 가장 찬연한 상태로 파레사를 맞이했다.
“전속 시녀 파레사, 황후 폐하를 대리하여 찾아뵈었습니다.”
가슴께로 자르르하게 찾아드는, 절대적인 미에 대한 감탄은 숨길 수 없었다.
‘꼭 과시하려는 것 같은데?’
늘 최상의 모습인 게 수상하다.
뭘 입어도 잘 소화하는 황태자에게 빛보다 더한 장식은 없었다. 혹시?
“아름다우시군요.”
칭찬을 바라서인가. 하지만 황태자는 파레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연한 말을.”
기뻐하는 것 같진 않은데. 붓을 들고 있는, 황태자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붓질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지함과 달리 캔버스에 떠오른 형상은 썩 그럴듯하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손장난한 것처럼 뭉개진 물감이 어떤 형체를 가까스로 그려내는 중이었다.
잠시 뒤에야, 파레사는 그가 맞은 편에 놓인 의자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이번엔 꽃이 담긴 화병보다는 그리기 쉬운 대상을 골랐다.
‘발전의 가능성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달리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황후를 대신하여 형식상으로 온 것이다. 황태자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그의 인내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깊었다.
뭔가를 못한다는 지적을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았을 법한데, 이렇게 자신을 불러낸 걸 보면.
“기다려.”
짤막하게 말한 황태자가 붓놀림에 집중했다.
어쨌든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가까스로 의자로는 보이는 형체가 캔버스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레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빛이 쏟아지는 자리에서는, 색감을 제대로 보시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림을 그려본 적 있는가.”
“흙바닥에 뭔가를 끄적여 본 적은 있는 것 같군요.”
아마 목검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진검의 검집이었을지도.
“그렇다면 안목을 신뢰할 수 없겠군.”
작업을 마친 황태자가 붓을 내려놓았다. 파레사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이래 봬도 보는 눈은 있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지 않는가.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파레사는 다른 쪽으로도 안목이 있다고 자부했다.
적어도, 황후가 그림을 잘 그리고, 황태자의 솜씨가 형편없다는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황태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사뿐히 날아와 박혔다.
“어머님은?”
“어제와 같은 이유로,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몸이 편치 않아. 뻔하고도 편리한 사유다.
황태자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그렇다면 큰일이로군. 마땅히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나.”
“마음의 병이라,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테지요.”
굳이 돌려 말하지도 않는 뼈 있는 소리였다.
황태자가 왔다 가면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는 황후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르니까.
최소한 화병으로 앓아눕거나 또 티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릴지 몰랐다.
‘그런 사태는 미연에 방지해야 해.’
결심하는 파레사를 향해, 황태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림으로는 턱도 없는가.”
“턱도 없다니요.”
그의 그림 실력이 궁정 화가 수준에 이르려면 턱도 없기는 하다.
“비슷한 취미로 우애를 나누는 편이 좋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안목이 까다로우니, 달가워하실 것 같지는 않군.”
그래서 그림을 시작했다는 건가. 황후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황태자는 나름 파레사의 지적을 새겨둔 모양이었다.
열심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황태자가 그림을 보여주며 친목을 도모한다면 어이없어하거나, ‘내가 잘하니 저도 잘할 수 있다는 거야?’라며 분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닌데.’
“그렇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우애를 나누실 마음이 없는걸요?”
말한 파레사가 슬쩍 눈치를 봤다. 본인이 그리 티 내더라도, 상관의 속내를 제가 단언하는 건 시녀의 도리가 아니다.
황태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 나는 어려운 상대겠지.”
그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적통의 황태자,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배다른 아들.
하지만 파레사는 미묘하게 재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나를 어려워하는 게 당연하다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
‘그야 사실이긴 한데.’
위축되는 감은 있어도 그렇게 싫다는 기분을 팍팍 드러내는 걸 보면 막 어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황후가 황태자를 싫어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의 신분이나 지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파레사가 말하기 힘든, 유치한 이유. 파레사는 빤히 황태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얼굴이 문제야.’
황후에게도, 자신에게도.
“그 마음이 호의라면 상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황태자의 마음이 정말 호의일지는 모르겠다.
비천한 출신의 새어머니마저 포용해야 한다는 후계자로서의 의무감. 그쪽에 더 가까워 보이니까.
그가 황후를 챙기는 건, 남들에게 번듯한 이미지로 비치기에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악의가 아니니, 호의이지 않을까.”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으니까요.”
설령 본인은 호의라 생각하더라도, 당사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
황태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어머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사실 상관없어.”
그가 지그시 파레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다른 이유거든.”
그 파고드는 듯한 눈빛. 어둠을 덧댄 듯, 진해진 녹청색 눈동자가 의미심장했다.
‘그 다른 이유가 혹시 나는 아니겠지?’
파레사가 제대로 해석한 드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해석을 방어적으로 부인했다.
‘아니겠지.’
아무리 출신을 숨기고 뒤나미스에서 온 수상쩍은 시녀더라도. 거기다가 홀로 다수의 좀도둑을 때려잡기까지 했어도.
황태자가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존재……는 아닌 것 같은걸. 제가 봐도 수상하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이만 가 보아도 될지요.”
“또 보게 될 것 같군.”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황후가 그의 부름에 자신을 보내리란 건 정해진 사실이었다.
파레사는 황태자를 뒤로 한 채로 돌아섰다.
불길한 예감을 안은 채로.
* * *
다음날은 황태자의 경고와는 달리, 날아든 초청장은 없었다. 조용한 하루가 이어졌다.
비어 있던 티룸은 조금이나마 다시 채워졌고, 황후도 밖으로 나가 화원을 둘러보았다.
6시에 때맞춰 퇴궁한 파레사는 몰랐지만, 어젯밤에 황제가 찾아들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기분이 나아진 거라면, 아마 황제는 그 사건의 원흉이 아니었나 보다.
‘황제씩이나 되면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건가?’
무능하군.
하지만 황제는 모를 수 있었다. 황후가 파레사에게도 숨겼듯이, 황제에게도 숨겼다면.
의아한 일이다.
그들은 부부였고, 심지어 사이도 좋아 보였다.
헌데 황후가 정신적인 고통을 안고 있는데 황제는 거기서 방관자라니.
‘알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파레사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황후는 아직 파레사에게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꼭 허락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기다려야 할 때다. 그리고 지금은, 이쪽이 문제인데.
‘또 보게 될 것 같다면서?’
예고를 던져 놓고 막상 소식이 없으니 시원섭섭한 것이 미묘한 기분이었다.
파레사는 황태자를 꺼렸지만, 그가 싫어서 꺼리는 건 아니었다.
‘그와 마주하면 내 눈이 황홀하다고 외치니 문제지.’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것 같다.
‘그래, 황태자도 바쁜데 설마 매일 불러내려고.’
그도 이틀간 시간을 비우기 힘들었을 터.
당분간은 업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파레사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유예를 가졌던 것뿐이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바로 다음 날 오전, 초청장 대신해서 황후궁으로 찾아든 이가 있었다.
“편찮으시다기에 황태자 전하께서 무척 걱정하시며 황후 폐하의 안위를 확인하고 오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공손히 말하며 고개를 수그리는 그는, 황태자의 호위를 맡은 근위 기사였다.
얼마 전 파레사에게 현상금을 전달한 바로 그 기사.
말끔한 얼굴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가 정중하게 예를 취해 보였다.
“제 이름은 클로드 로렌입니다.”
로렌. 유명한 성이다. 제국 출신이 아닌 파레사도 알고 있을 만큼.
‘공작 가문이잖아.’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이름을 바로 밝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황후가 홀대할 수 없는 신분의 소유자. 그것까지 계산하여 그를 보내왔을 황태자의 속내가 검어 보였다.
‘역시 황후의 평가가 맞았어.’
이래 봬도 안목이 있는 황후다.
마침 정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황후는 빼도 박도 못하게 건강해 보였다.
“편찮으시다더니.”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황한 황후가 부인했다.
“화, 황태자가 초청장을 보냈을 때는 편찮았소. 지금은 나아졌을 뿐이오.”
“그렇군요. 장미가 만발한 듯이 아름다우신 모습을 보아, 많이 나아지신 것 같습니다.”
칭송을 들어 좋아할 줄 알았건만, 황후의 눈꼬리가 치켜 들렸다.
“그 조건부의 화법은 황태자와 똑같군.”
황태자에게 좀 더 속내를 드러내게 된 황후였다.
그리고 공작가 출신이라고 하나, 황태자의 부하에게도 못 그럴 것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편찮으셔도 처연한 한 떨기 수선화처럼 아름다우시겠지만요.”
으윽, 느끼해. 파레사는 속으로 몸부림쳤다. 그래도 이자,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파레사가 황후의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용건은 그뿐인가요.”
클로드가 움찔거렸다. 그는 파레사의 무력을 목격한 인물.
청순한 쪽에 가까운 외모의 파레사에게선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니요, 황후 폐하의 상태를 직접 살피고 초대의 말씀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초청장만 보내는 것은 모자 간에 좀 박정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황태자에게 박정한 황후의 표정이 실룩거렸다. 클로드는 웃는 얼굴로 꿋꿋이 제 할 말을 다 해냈다.
“혹여 굳이, 초대에 응하시기 어려우시다면 직접 찾아뵙고자 하십니다.”
“둘 다 사양한다면요?”
그 말을 한 것은 파레사였다. 근위 기사가 와서 압박하는 상황이니 황후가 내키지 않으면서도 승낙할지도 모르니까.
클로드 로렌은 황태자의 호위를 맡고 있지만, 근위 기사란 원래 황제와 직결된 존재다.
그 점을 황후는 의식할 수밖에 없으리라.
“글쎄요, 사양하실 다른 이유가 있을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무엇보다도 황제 폐하의 뜻에 충실하고자 하십니다만…….”
그 황태자에 그 부하라고, 황제를 들먹이는 뉘앙스가 의미심장했다. 그 말을 무시할 수 없는 황후였다.
그녀는 파레사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되었다. 어차피 계속 초청장을 보낼 것이 아니냐. 세 번 중 한 번은 응해야겠지.”
집요한 바퀴벌레 같으니라고. 황후의 눈빛에 살기 비슷한 것이 번뜩였다.
악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눈빛이었다.
“언제를 말하더냐.”
“이틀 후가 어떠하신지요.”
“좋다.”
황후는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리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클로드가 돌아서자, 파레사는 황후의 표정을 살폈다. 불쾌해 보이기는 했으나 제법 담담했다.
역시, 그녀가 충격을 받은 건 황태자와는 무관한 문제였던 것 같다.
‘그래도 황태자와 마주할 만큼 회복된 모양이야.’
그 하나는 다행이었다. 파레사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저는 내일 궁에 남아 있어도 괜찮겠는지요?”
이틀 동안 줄창 홀로 황태자와 마주했다. 이번엔 황후 혼자 가도 괜찮잖아?
그러나 바라는 대답을 줄 리 없는 황후였다.
“턱도 없는 소리. 어디서 전속 시녀가 그런 태만함을 보이는 것이냐!”
호령을 떨어트린 황후가 팩 몸을 돌렸다. 파레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다시 보게 되겠군.’
그러나 그를 다시 본 황태자궁에는 의외의 인물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황후도 파레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 * *
이틀 후. 모처럼의 외출이라 황후는 몸단장에 공을 들였다.
그 난리통을 치르고 난 뒤, 하급 시녀들은 황후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듯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모두의 말수가 확연히 적어진 탓에 황후궁 내에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정작 황후는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음에도.
‘파문이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하급 시녀들은 황후가 찻잔을 그들의 얼굴에 던진다고 해도, 저항하지 못할 처지다.
황후에게 그럴 의향이 있건 없건, 그저 눈에 보인 분풀이만으로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황후의 악명은, 황후가 왜 그리 행동했는가에 대한 원인을 알아볼 것도 없게 만들었다.
황후가 괴롭건 충격을 받았건 이유는 중요치 않다.
소문에는 애당초 황후가 나쁜 년이어서 난동을 부리는 거라고 자연스레 해석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수틀리면 언제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칠 것처럼 말이지.’
적은 교활했고, 효과적으로 황후를 고립시켰다.
파레사는 단 한 번도 황후가 누군가와 친근하고도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저 너머에 도사린 악의가 느껴졌다. 적의 실체를 알게 되기까지 그리 멀지는 않은 것 같다.
“준비가 끝나셨습니다.”
하급 시녀들이 손을 거두자,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사 문양이 새겨진 하얀 비단 드레스를 입은 황후는 그야말로 황후다웠다.
뒷머리를 틀어 올려 블루다이아몬드가 가운데 자리한 티아라를 머리 위에 올린 태가 기품이 넘쳤다.
옆머리를 조금 내어 옆으로 흘러내리게 하자, 더욱 자연스럽고 우아했다.
톤다운 된 핑크색 입술은 단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늘은 강렬함이 아니라 기품으로 승부를 보시려나.’
파레사는 황후의 콘셉트를 단박에 이해했다.
귀와 목에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목걸이를 끼자, 자연스러운 강조점이 생겼다.
팔뚝까지 오는 반투명한 레이스장갑을 끼고, 부채까지 쥐니 황태자를 만나러 간다기보다는, 행사에 가는 차림이 되었다.
딱 그만큼의 거리감이었다. 황태자는 황후가 치러내야 할 행사에 불과한 존재였으니까.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실까.”
“정말로 우아하게 잘 어울리세요.”
“이대로 무도회에 나가셔도 손색이 없겠어요.”
하급 시녀들도 한결 긴장이 풀린 얼굴로 황후에게 칭송을 퍼부었다.
절대적인 미는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법이다.
“이만 가자꾸나.”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 돌아본 황후가 도도하게 말했다. 파레사는 바로 대답하며 앞서 나섰다.
“예, 황후 폐하.”
* * *
“지긋지긋한 녀석, 결국 날 여기까지 불러내다니.”
황태자궁을 앞두고 황후가 내뱉었다. 그녀는 가긴 가지만, 황태자가 없으면 바로 돌아온다는 방침을 정했다.
제가 불러놓고 없는 걸 어쩌겠어? 돌아가야지.
그래서 약속된 것보다 이른 시간에, 황태자궁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황태자가 늦는 건 문제지만, 황후가 이르게 가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웃어른은 좀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고 보니 너, 이전에 찾아갔을 때 황태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말하려고 해도 듣기 싫다고 하더니. 이제야 궁금해졌나 보다.
황후는 황태자와 취미가 같아졌다는 이유로 그림을 때려 치우고도 남을 성질머리였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던 파레사는 흔쾌히 대답했다.
“새로 시작한 취미 생활을 제게 선보여 주시더군요.”
“취미? 황태자란 녀석이 취미 같은 걸 즐길 궁리를 하고 있어. 뼈가 빠지도록 나랏일을 하진 못할망정.”
황태자가 한가해 보인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왠지 토를 달고 싶었다.
“황후이시면서 궁 안에만 계시는 분도 있는데요.”
“시끄럽다! 지금 네가 황태자를 편드는 것이야?”
너, 누구 전속 시녀야. 네 봉급 누가 주지?
황후의 얼굴에 표독스러운 기가 스쳤다. 파레사는 굴하지 않고 차분히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고 그저 생각나서요.”
그래도 오늘 여기까지 왔으니 발전이 있었다. 어제 황태자가 초청장을 보내지 않은 건, 오늘을 위한 유예였나 보다.
결국 황후의 걸음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파레사는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그 수완에.
“너, 날 대신하여 요 며칠 황태자를 봤다고 그에게 혹한 건 아니겠지?”
단 한 번만 봐도 혹할 만한 황태자이기는 하다만은, 파레사의 대답은 간결했다.
“불편하다니까요.”
하지만 황후는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황태자한테 홀려 봤자 소용없다. 그는 너 같은 걸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 그 녀석이 눈이 얼마나 높은데.”
황태자의 취향에 대해서 단언한 황후는 성큼 황태자 궁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어서 안으로 들자꾸나. 시녀장! 내가 왔다고 알려라.”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파레사는 의문에 잠겼다.
‘아니,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
황후씩이나 되는 분의 마음에도 들었는데.
괜스레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쓸어본 파레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따랐다.
오늘 또 무슨 일이 펼쳐질지 기대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드는 시점이었다.
* * *
“예까지 날 오게 하다니, 정말.”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서 황후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궁에 그 녀석이 오는 것보다 방문하는 게 낫기는 하구나.”
침입자를 맞는 것보다야 불편한 초대가 낫다는 뜻인 듯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녀장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황태자의 처소와 떨어진 방향이었다.
그새 황태자 궁의 구조를 파악한 파레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쪽으로 왔지?
지난 두 번은 황태자의 처소 쪽이었다. 그림을 보여주려고 부른 게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곧 거기서 의외의 인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당황한 듯 급히 고개를 숙이는 귀부인의 태가 낯익었다.
눈을 가늘게 뜬 황후가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부셰 백작 부인? 그대가 왜 여기에 있지?”
미망인도 아니고 유부녀가 미혼의 황태자와 한방에. 의심을 떠나서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게다가 그녀가 여기 있을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황태자가 나섰다.
“제가 그림을 보아달라 불렀습니다.”
“그림을?”
황후의 시선이 황태자의 뒤편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예의 그 의자와 꽃병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 엉성한 솜씨를 본 황후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구의 그림이지? 꼭 서너 살 아이가 붓을 놀려댄 느낌이로군.”
부셰 백작 부인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파레사가 넌지시 말했다.
“예술의 세계는 다채로우니까요. 새로운 표현 방식일지도요.”
황후가 콧방귀를 끼었다.
“새로운 표현 방식은 무슨, 예술이 아무 데나 붙이는 단어인 줄 아니? 내가 발가락으로 그려도 저보단 낫겠구나.”
부셰 백작 부인의 시선이 바로 황태자에게로 돌아갔다. 황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 혹시.”
“예……. 비록 어머님의 발가락보다 못한 손을 가지고 있는 제가 그린 그림입니다.”
화사한 미소가 방 안을 밝히고 있었지만, 어쩐지 싸늘했다.
방 온도가 그대로 수직 하강하는 것처럼. 당황한 황후가 파레사를 돌아봤다.
‘제대로 말해 줬어야지!’
‘그러게 눈치를 줬잖아요.’
눈빛으로 소통하며 파레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약간은 의도한 것이기도 한데……. 황후의 언사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파레사도 움찔할 수밖에 없을 만큼.
황태자는 어쩐지 반짝반짝한 눈웃음을 흩뿌리며 말했다.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어머님은 솔직한 분이시니, 분명히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이야기하신 것이겠지요.”
술술 말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어두운 기색이 서린 듯한 느낌은 왜일까.
“으흠! 뭐, 처음치고는…… 괜찮은 그림 같기는 하군요.”
입발림 소리로 수습하는 황후의 표정은 과연 어색했다. 황태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가운데 낀 부셰 백작 부인이 당황하며 나섰다.
“어머, 그럼요. 처음이신데, 이만하면 대단한 솜씨지요. 금방 실력이 느실 거예요.”
“그렇군요.”
일순 압박적인 분위기가 싹 거둬졌다.
황태자는 한 호흡만에 감정을 추스르고, 보석처럼 감정이 사라진 눈동자로 파레사 쪽에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찔끔한 파레사는 시선을 피했다. 황후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헌데 부셰 백작 부인은 어째서 이 자리에?”
황태자 성격에 밀회는 아닐 테고, 황후가 보기에도 부셰 백작 부인은 황태자의 안목에 부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 그녀는……. 얼마 전에 무도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린 황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음흉한 황태자라면 분명히 의도를 갖고 행한 일일 터.
황태자는 능숙하게 설명했다.
“부셰 백작 부인은 그림에 훌륭한 소양을 가졌다고 알려졌지요. 궁정 화가가 되어도 나무랄 데 없는 실력을 가졌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제 그림을 보아달라 요청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뿐입니다.”
부셰 백작 부인이 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본 황후가 물었다.
“궁정 화가는 어쩌고요?”
“궁정 화가는 궁내 보수작업에 투입되어, 벽화를 그리느라 바쁩니다. 또한 객관적인 안목으로는 제 그림이 어떨지 궁금하더군요.”
하지만 정작 객관적인 평가는 황후가 한 것으로 보였다.
부셰 백작 부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럼, 황후 폐하와의 약속이 있으신 듯하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봐 주겠다고 하지 않았는지.”
“저어, 그러면 황후 폐하는…….”
불러다 놓고 볼일을 보자는 것인가. 부셰 백작 부인의 표정에 혼란이 드러났다.
아직 제도로 온 지 오래되지 않아 그리 때 묻지 않은 여인이었다.
황태자는 단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황후를 돌아보았다.
“어머님도 그림에 소양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계시지요.”
파레사가 얼른 추임새를 넣었다.
“파레사. 내가 황족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은 예가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지적하면서도 어쩐지 가느다랗게 높아진 목소리였다.
“어머, 황후께서 그림에 소양이 있으셨군요.”
부셰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그림이란 취미를 가진 지 오래되었으니까.”
태연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입꼬리가 슬쩍 위로 들려 있다.
“그렇다면, 함께 그림을 그려보는 건 어떨까요. 두 분이 펼쳐내는 솜씨를 보고 싶군요.”
모두가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 둘이 거절할 새도 없이, 황태자가 사뿐히 손을 들었다.
“여기 창문을 열고, 이 앞에 캔버스와 의자를 가져 오거라.”
순식간에 방 안에 세 개의 캔버스와 의자가 나란히 놓였다.
떨떠름한 표정의 황후가 윗사람답게 가운데 앉고, 양옆으로 황태자와 부셰 백작 부인이 앉았다.
두 황족과 함께 앉은 그녀는 어젯밤 먹은 게 얹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 방에서 보는 경관이 좋습니다. 바깥의 풍경을 그려보지요.”
과연 창 너머로는 바라보는 경관은 근사했다.
물이 맑은 연못 가운데는 정교한 대리석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었고, 분수가 치솟아 햇빛에 부서지듯이 반짝였다.
그리고 고즈넉한 돌길을 따라 에워싸듯이 반듯한 정원이 푸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황태자의 권능, 풍요를 연상케 하는 흐드러지는 녹음의 정원.
그림을 그리는 이라면 누구라도 혹하여 붓을 들고픈 광경이었다.
황후와 부셰 백작 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은 홀린 듯이 붓을 들었다.
“펜이든 물감이든 필요하면 제게 말씀하시기를.”
시녀장의 공손한 말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내리깔렸다.
두 귀부인이 열정적으로 붓을 놀리기 시작하는 가운데, 황태자도 느릿하게 붓으로 손을 가져갔다.
초보인 그에게는 그리기 어려운 풍경이었으나, 이는 함께하는 시간을 위한 구색에 불과할 뿐이다.
‘이거 정말 계획적인데?’
한쪽에 가만히 선 파레사는 감탄했다. 황태자의 수법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후를 초대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황태자와 황후, 달랑 둘만 있으면 어색할 게 뻔하다.
단란한 친애의 시간 따위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황태자의 형편 없는 그림 솜씨를 곁에서 지켜보며 칭찬을 해줘야 하는 황후는 모욕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파레사야 시중인이니 대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없다.
그러니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줄, 대화가 되는 다른 한 명을 끼워 넣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만드는 것이다.
대화의 장이 펼쳐져야 할 곳에 회화 경연이 펼쳐지고 있는 게 사소한 문제였지만, 퍽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초대한 게 하필 부셰 백작 부인인 건.’
단지 그녀가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만은 아닐 터. 무도회에서 황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리라.
황태자는 그 개별적인 이유를 엮어 하나의 판을 짰다.
일회성의 이유인지, 아니면 그 너머를 바라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탁월한 계획이었다.
그 하루의 유예는 부셰 백작 부인을 초대하기 위함이었나 보다.
‘다시 보게 될 거라면서.’
하지만 딱히 나에게 초점을 둔 말은 아니었을까.
역시, 황태자가 나에게 그리 특별한 관심을 가질 리 없지. 파레사는 미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아쉬움에 경각심을 느꼈다.
‘내가 어째서.’
그야 황태자는 아름답고 선물도 줬다. 호감을 품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선율 같은 긴장감이, 그 적당한 거리감과 낭랑하며 은근한 말소리가.
어딘지 줄곧 신경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파레사, 정신 차리자.’
파레사는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황태자가 후자라는 것은 명확했다. 날카로운 이성이 언제나 그렇게 속삭이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파레사는 문득 황태자의 얼굴 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비스듬한 옆얼굴뿐.
그러나 집중하듯 진지한 눈빛으로 붓을 움직이고 있는 자태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송구하게도, 한껏 꾸미고 온 황후조차도 그의 휘황한 외견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황태자의 미모에 가장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인 황후와는 달리, 부셰 백작 부인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그를 의식하게 되었다.
자꾸만 손이 멈추고 눈이 옆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림에 대한 열정과 황태자에게 시선이 가는 본능 앞에서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와 황태자 사이에 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뭘 그리 보는 거지?”
부셰 백작 부인의 시선은 자연히 황후를 거치게 된다. 시선을 느낀 황후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간 사교계에 부지런히 드나든 보람이 있는지, 순발력 있게 핑계가 튀어나왔다.
“아아, 아니요. 저, 오늘 입으신 드레스가 무척 눈에 띄어서. 황후 폐하의 우아함을 한층 더 살려주는 듯합니다.”
황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셰 백작 부인이라면 황후의 드레스를 따라 샀던 여인이라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잘 넘긴 그녀가 안심하고 물었다.
“저, 그 또한 베누스 자작부인의 의상실에서 구매한 것인지요?”
“아니, 다른 의상실이야. 요새 들어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베누스 자작부인의 의상실을 찾으니, 그녀의 드레스가 모두의 드레스가 되게 생겼다더군. 황후인 나라면 조금 더 특별한 드레스를 입어야 하지 않겠나.”
베누스 자작부인이 들었으면 땅을 칠 소리였다. 그녀라면 황후의 독점 공급 요구도 받아들일 테니까.
하지만 황후의 말은 사실이다. 주문이 많아 드레스 양산 체제가 되면서 생겨난 문제였다.
베누스 자작부인 홀로 짧은 시간에 많은 드레스를 고안하게 되니, 창의성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의상실을 방문하는 모두가 황후와 비슷한, 혹은 파레사가 입은 것과 비슷한 드레스를 찾으니까.
그전에도 슬쩍 황후를 따라 입는 귀부인들도 있었지만 대놓고는 못 했다.
하지만 파레사라는 새로운 모델이 드레스를 선보인 그 날 이후로 선이 흐려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베누스 자작부인의 의상실에 주문을 넣었던 것이다.
파레사의 다시 떠올리기 싫은 데뷔 무도회는 적어도 한 의상실을 번영케 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부셰 백작 부인이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황후 폐하가 입으시면, 다시 유행이 될 텐데요.”
황후의 입매가 더 깊어졌다.
“그러면 또 다른 의상실을 찾아보지.”
“지금 것도 정말 잘 어울리는데…… 아쉬우면서도 기대가 되네요.”
황후와 부셰 백작 부인은 금세 친근해졌다.
그 둘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열정을 불태웠던 게 언제냐는 듯 한결 느릿해진 속도였다.
반면 황후와 친목을 다져야 할 황태자는 도리어 그림 그리기에 열심이었다.
그는 옆에서 나누는 대화가 들리지 않는 듯, 바깥 풍경과 캔버스에 바삐 시선을 오가며 붓을 놀리고 있었다.
‘취미라더니.’
정말 재밌어서 취미로 둔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재능은 별로 없어 보였다.
두꺼비 같은 녹색의 뭔가가 캔버스 위에서 뭉개지고 있었으니까.
하긴 황태자야 아무 그림이나 그려내도 갖은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경매에 부쳐질 것을.
그로부터 한 시간가량 흐른 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완성되었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부셰 백작 부인이 말을 받았다.
“저도 완성되었어요.”
“그럼 서로의 그림을 한 번 보죠.”
세 개의 캔버스가 나란히 세워졌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레사는 캔버스의 위치를 바꿔놓아도 어떤 게 황태자가 그린 그림인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화가의 솜씨로 그려진 양옆 두 그림과는 달리, 가운데 있는 그림이 유독 조악했으니까.
부셰 백작 부인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굉장히…… 인상적인 그림이로군요.”
뒤엉킨 녹색은 나무고, 퍼런 칠은 하늘이며 호수다.
호수 가운데 하얀 물감이 대충 칠해져 있었는데, 아마도 햇빛의 난반사를 표현한 듯했다.
어쨌든 뭐가 뭔지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풍경화다웠다.
그 조악한 풍경화는 앞에 선 황태자의 화려한 외모와 대조되니 희극적인 기분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네요,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요.”
황후는 황태자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황태자도 못하는 게 있어야 공평하지 않은가.
“그리고 황후 폐하의 그림은…… 무척 놀랐습니다. 홀로 그리신 건가요?”
“처음 몇 달간은, 궁정 화가에게 배웠지. 그 이후에는 홀로 그렸다네. 황궁에 워낙 회화작품이 가득하다 보니.”
“하기야 그렇지요. 그래서 자연히 실력이 높아지신 거로군요. 어떻게 이런 사실이 여태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림이란 게 떠들썩한 취미는 아니지 않겠는가.”
황후와 부셰 백작 부인 사이에는 금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무래도 취미나 취향이 비슷한 데다가, 연령대도 비슷하다.
부셰 백작 부인이 황후보다 두어 살 많다고 했다. 황태자는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함께 차를 들며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리고 차까지 마신 뒤에야, 부셰 백작 부인은 시간이 늦었다며 돌아갔다.
황후가 황태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생각인가요, 황태자.”
“부셰 백작은 중히 쓰일 인재입니다. 백작 부인과 친분을 맺어두어도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황후가 의아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다운 화법은 아니었다. 그리고 파레사도 놀랐다.
‘제 화법을 황후가 재수 없어 한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았나.’
시녀치고는 불손한 생각을 하면서 파레사는 뒤편에서 물러난 채 그들을 주시했다.
황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와 친교를 나누든 황태자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어머님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앞섰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틀렸어! 황후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파레사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황후가 코웃음 쳤다.
“알다시피 내가 너그러움과는 거리가 멀어서.”
“글쎄요, 저는 어머님을 세간의 평판과는 달리 생각하여서.”
그 말에 황후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미소를 떠올린 채, 황태자는 매끈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어머님께 호의적이고 우군이 필요한 어머님께 적합한 상대입니다.”
“내게 처음부터 우군이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우군이 사라져갔는지, 황후는 알고 있었다.
말린 장밋빛 눈동자에 어두운 그늘이 서렸다.
그러나 그것은 황태자의 찬연함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앞으로를 위해서입니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곧고 힘이 담긴 목소리. 거기에는 직관과 독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황후는 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황태자가 내 앞으로를 그리 생각해주는 줄 몰랐군요. 황태자의 앞으로를 위해서가 아닐지요?”
말끝에 날카롭게 꼬리가 섰다.
“제 의도를 무어라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이용하시면 됩니다.”
천진한 듯이 보여도 귀족이다. 그녀는 황태자가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뒤늦게라도 짐작하게 되리라.
말을 꺼낸 뒤, 눈치를 보긴 했으나 그녀는 무도회에서도 대놓고 황후의 안목을 칭찬했다.
그 정도 말을 어렵게나마 꺼낼 수 있는 위치였기에.
부셰 백작 부인은 은연중에 자신이 사교계의 대세와는 다른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걸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리고 베누스 자작부인의 의상실을 찾은 귀부인들도 어쩌면.
이렇게 한 명, 두 명……. 어느 순간에는 세가 확장되는데 속도가 붙으리라.
황태자는 그 첫걸음을 만들어줬다.
단지 그가 만들어준 무엇도 황후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황태자를 한 번 흘겨보았을 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쪽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림을 배울 맘이 있다면, 입발림 소리를 하는 궁중 화가들보다는 혹독한 스승이 필요할 것 같군요.”
척 보기에도 혹독한 스승이 있어야만 발전이 있을 만한 재능이었다.
“그저 취미일 뿐이니, 그리 시간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황태자의 여유로운 대답에 도리어 황후의 기분만 나빠졌을 뿐이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에 대고 황태자가 물었다.
“어머님께선 아시는지.”
“무엇을 말이지요?”
황태자의 시선이 황후의 곁에 선 파레사를 향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은근한 눈짓에 파레사는 움찔거렸다.
하지만 황태자는 곧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없는 소리를.”
황후는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황태자궁을 벗어났다.
* * *
황후궁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각, 파레사가 슬쩍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황후 폐하.”
황후는 티룸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또다시 베개를 두들기며 분노를 표출하고도 남았을 황후이건만, 그 고요한 반응이 기묘했다.
차라리 평소처럼 행동했다면 안심했을 터.
최근에 난동을 부린 적 있는 황후의 저 모습은, 태풍 전의 고요일지도 몰랐다.
“왜 저러지?”
파레사는 순간, 그 말이 제 입에서 나온 줄 알았다. 그러나 말한 것은 황후였다.
“왜 갑자기 저러느냔 말이야. 제가 언제부터 날 신경 썼다고. 죽을 때가 되었나?”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는 악랄한 눈빛이 황후에게 스치고 지나갔다.
파레사는 황태자가 독살당한다면, 황후가 바로 범인으로 지목되리란 걸 의심치 않았다.
‘독살당할 인물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이전에는 그리 신경 쓰는 편이 아니셨나 봐요.”
“이런 식으로, 이 정도로는 아니었지. 유난해졌어, 갑자기. 그냥 평범하게 예의 바르되 거리 있는 조카 같았는데.”
“그래도 예의는 발랐군요.”
“어렸을 적부터 그랬어. 꼴에 칭송받는 황태자이니, 소문이 안 좋은 계모라도 감싸 안아야겠다는 포부가 있었을 테지.”
“……어릴 적부터 싫어하셨나요.”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황후가 황제와 결혼한 건, 황태자가 열두 살이었을 때였을 터.
열두 살인 황태자를 두고 나보다 예쁘다고 싫어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 녀석이 어릴 적에는 별로 본 적이 없어. 그 녀석은 아카데미에 다녔거든.”
파레사는 시기를 가늠했다. 황후가 막 결혼하여 귀족들의 공세에 시달렸을 시기에, 황태자는 자리를 비웠던 게 된다.
아카데미는 18세에 졸업이고, 졸업한 후 그는 황태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터였다.
파레사는 무도회에서 괜스레 황태자를 탓한 게 미안해졌다.
생각해 보니 그도 어렸건만. 현재의 모습이 하도 번듯하여 그의 나이를 잊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로지 황제로군.’
파레사는 혐의의 반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남은 반은 그 악의적인 적. 이 흐름대로면 곧 확인하게 되겠지만…….
파레사는 문득 물었다.
“부셰 백작 부인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부셰 백작 부인? 뭐 그럭저럭. 취미나 취향이 맞는 듯하구나.”
“그렇다면 초청장을 준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왕 잘 맞는 거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아니, 그럴 것 없다.”
황후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어두웠다.
“오늘 나와 어울린 것도 황태자의 의지이지 그녀의 의지겠느냐. 그녀도 자신이 어떤 꼴을 당할 줄 안다면 물러날 것이다.”
믿음을 주고 가까이하느니, 믿지 않고 멀리하는 편이 나았다. 자신에게든 상대에게든.
지난 10년간 황후가 겪어온 삶은 어김 없이 그러했다.
“황태자 전하도 자길 이용하라는데, 백작 부인도 이용하면 뭐 어떤가요. 그녀도 나름대로 얻는 것이 있겠지요.”
“……귀족다운 소리로구나. 그래, 네가 내 아래 있으며 따박따박 봉급을 받아가는 것처럼 말이지.”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많아,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네 처음 봤을 때는 아둔한 듯했는데, 이제 보니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듯해.”
“첫인상이 잘못된 것이로군요. 제 머리는 늘 잘 돌아갔는데.”
파레사는 당당했다. 그녀의 자신감에 황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 첫인상은 정확하다. 네가 뻔뻔스러운 것 하나는 확실히 알아봤으니.”
“강하고 무던하다고 표현해주시지요.”
“너무 올려치는 표현 아니냐, 헌데…….”
황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황태자가 말한 게 무슨 소리냐.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니?”
그냥 넘어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예리하기도 하시지.
잠깐 갈등한 파레사가 순순히 실토했다.
“그게 실은…….”
“네가 황태자한테 선물은 왜 받아!”
파레사의 설명이 끝나자, 황후의 고함이 이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좀도둑을 잡았으니까요……?”
“남자한테 함부로 선물을 받는 게 아니란 걸 몰랐더냐!”
“남자가 아니라 상관입니다.”
“네 상관은 황태자가 아니라 나야!”
“그렇지만, 일개 시녀가 어떻게 황태자의 선물을 거절하지요?”
잠깐 말문이 막힌 듯,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황후는 곧 버럭 고함을 토했다.
“당장 팔아버려!”
마찬가지의 이유로 파레사는 감히 황태자의 선물을 팔아버릴 수 없다는 현실을 그녀에게 납득시켰다.
“제가 황태자 전하에게 밉보이면 지켜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는 황후도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분한 표정을 지은 황후는 다른 곳으로 초점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거만한 녀석! 저는 바쁜 황태자씩이나 되니까 취미 따위는 공들여 배울 필요가 없다 이거야?”
성을 내는 황후에게, 파레사는 그 정도면 피해의식이라고 지적해주려다가 말았다.
‘다행히 시간이…… 다 되어가는구나.’
곧 퇴궁할 시간이 되어 파레사는 황후의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저 없다고 또 찻잔 깨지 마세요.”
라는 경고를 남기고서.
* * *
그로부터 며칠 후.
파레사는 고립이 뭘 의미하는지 실감하고 있었다.
평소에 인사라도 나누던 숙소의 시녀들이 그녀를 못 본 척하며 지나쳤기 때문에.
어차피 그리 어울리지 않았던 터라,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뒤나미스 출신인 그녀는 제국에 연고가 없었으니까.
그저 동정심에서 적의로 시선이 바뀐 것뿐이다.
‘그 조직적인 움직임이 수상하긴 하지만.’
황궁 시녀들에게 낱낱이 영향을 미치는 황후의 적은 누굴까. 새삼 의문이 일었다.
“안녕.”
손만 흔들고 누가 볼세라 지나치는 마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그 외에는 평소와 같은 아침이다.
몇 시간 뒤, 파레사는 황태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게 평범하게 느껴지다니.’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안구를 쪼는 듯한 빛 반사가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위험한 눈부심이었다. 이러다가 시력을 상실하게 될 것 같다.
황태자는 황후에게 봄을 맞이하여 황실 미술관에서 궁정 화가들의 그림 전시가 이루어질 거라고 알렸다.
그러니 오후에, 함께 그림을 관람하며 감상을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초대해 왔다.
패턴이 조금 바뀌었다. 이번엔 장소가 황태자 궁이 아니니.
그러나 황후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내가 왜 그 녀석과 나란히 그림을 보니! 이 녀석은 어쩜 하루가 멀다 하고 불러낸담? 일부러 괴롭히려는 짓이 틀림없어.”
“다른 이들 앞에서 황태자 전하와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도움이 될 테지요.”
그러나 파레사의 냉정한 충고는 단번에 묵살 당했다.
“네가 가거라.”
“예?”
“가서, 그 그림 전시인지 뭔지 가서 보라고. 난 황태자가 곁에 있다면 아무리 멋진 그림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어질 테니. 너와 황태자가 수준이 딱 맞을 테지. 함께 감상이나 나누고 오렴.”
“이래 봬도 제가 안목이 높은데요.”
“그 녀석도 손재주는 형편없어도 안목은 높을 게다.”
그리하여 파레사는 예술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가 황실 미술관에서 황태자와 마주하게 된 이유였다.
‘결국 황후를 대신해서.’
그것이 전속 시녀의 업무이기는 했다.
“오랜만에 뵙는 듯합니다.”
파레사는 뼈 있는 인사말을 던졌다. 매일 보거나 하루 건너보던 것에 비하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더 반가운가?”
미소를 머금고 던진 그 말에, 파레사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녀는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눈이 전하를 반가워하네요.”
“나보다는 못하지만, 괜찮은 볼거리가 있으니 둘러 보지.”
황태자의 표정은 여전히 잔잔했다. 자신감을 표출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파레사는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정말이지, 부정할 수가 없잖아.
미술관 한쪽에는 봄을 주제로 한 궁정 화가들의 그림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새로운 그림이 반, 예전 그림이 반이었다. 하나같이 색채가 화사하며 환히 빛이 내리비치는 정경이라 마음이 저절로 밝아지는 듯했다.
“이 그림은 어떤 것 같은가.”
황태자가 어떤 그림 앞에서 멈춰 서서 물었다.
꽃나무가 우거진 황후궁을 그려낸 봄 풍경이었다. 그 그림을 유심히 보며 파레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현실과 많이 다르군요. 일단 저 나무들은 저렇게 건물에 가까이 있지도 가지가 창문 쪽으로 나 있지 않아요. 창문을 타고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세심하게 가지치기를 해두죠.”
“……인상 깊은 감상이로군.”
어쩐지 떨떠름한 대답이었다.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저 그림은 어떻지.”
그것은 다과회의 한 장면으로 보였다.
왼편으로 황궁 건물이 비치고 꽃밭이 흐드러진 정원 배경이었다.
나무 그늘이 진 곳에 찻잔과 스콘과 잼, 과일이 그득한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 맨 안쪽에 앉아 있는 것은 지체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귀부인 한 명.
그리고 양옆으로 앳된 얼굴의 영애들이 주르륵 앉은 채였다. 차림새도 제각각에 그중에는 아예 10대 초반의 어린아이도 있었다.
파레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르침을 내리는 광경인가요.”
이상한 느낌이기는 한데, 뭐라고 꼬집어 잡아낼 수는 없었다. 그림을 유심히 훑은 황태자는 나직이 설명했다.
“화가의 대외적인 의도는 그것이겠지. 그렇게 읽히기를 바라여 그렸을 테니까. 보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화가의 진의에 이를 수도 있을 테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황태자는 그 후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전시는 꽤 컸고, 3분의 2가량 둘러보았을 무렵 그가 물었다.
“전시는 어떤 것 같지? 볼 만한가.”
“궁정 화가들의 새로운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황후 폐하께도 전시에 대해서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보는 것을 좋아하는 황후이니, 기분 전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황태자의 눈썹이 치켜들렸다.
“어머님께 신경을 많이 쓰는군.”
“전속 시녀니까요?”
“더 나은 조건에 소속을 옮길 수 있다면, 그리할 텐가.”
“더 나은 조건이라면요?”
“두 배의 봉급이라던가.”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파레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황태자의 반질거리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구실을 대서 액세서리를 선물하지 않나 자꾸만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파레사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저는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봉급이야 몇 달 후에 협상을 하면 올려줄 것 같으니까.
‘게다가…….’
파레사는 의심을 떠올렸다. 자신이 워낙 유능한 인재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황태자의 태도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어차피 황태자궁이나 황제궁은 안 돼.’
봉급을 올려준다면 그 두 곳이 가능성이 높은데, 파레사는 자신의 비밀을 잊지 않았다.
제국의 권력에 가까워지는 것은 뒤나미스에서는 반역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저 조용히, 황후의 전속 시녀로서 지내는 것이 옳았다.
‘조용히 지내는 건 이미 글러 먹었지만 앞으로라도.’
파레사의 단호한 거절에 잠시 굳어 있던 황태자가 뒤늦게야 대꾸했다.
“새로운 기분이야.”
“어떤 점에서요?”
“이토록 계속 거절을 당하는 것.”
태어나서 한 번도 거절을 당해본 적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들려 있었다. 마치 이 상황조차 재미있다는 듯이.
“……예.”
딱히 마음 상해 하지 않는 그 여유만만함이 왠지 떨떠름했다.
황후가 그를 재수 없어 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자주 봐서 그런가.’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적응이 되는 것 같다. 어느 샌가부터 그가 낯설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친숙해져 가는 듯했다.
황태자에게 친숙함을 느끼는 상황이라니.
‘엄청나게 잘못된 상황이로군.’
경각심을 느낀 파레사가 빨리 전시를 마저 보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때였다.
저편에서 따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궁 미술관은 오로지 귀족들이나 황궁에서 일하는 관료 및 그 가족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
특히 이 구역은 아직 그림을 설치해둔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공개 전시로 전환하기 전이었다.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황족밖에 없었다.
“황태자 전하?”
가느다란 목소리가 뒷목에 파고드는 듯이 꽂혔다.
기이하게도 소름이 이는 감각이었다.
파레사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한 우아한 귀부인이었다.
봄바람처럼 부드러우면서 온화한 분위기의 여인은 서 있는 태에 품위가 넘쳐났다.
황태자를 향해 미소 지은 얼굴은 따사로웠다.
그녀의 눈빛, 말, 행동 그 하나하나가 미풍이 스며들 듯 그렇게 상대에게 부드럽게 스며들리라.
위엄 넘치지는 않으나 설득적이며 또한 매혹적이었다. 그것이 파레사가 받은 첫인상.
아마 그녀는, 주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일 테지.
그래, 사교계의 중심에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고모님.”
그쪽으로 몇 걸음 다가간 황태자가 고개를 슬쩍 움직여 인사를 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선득한 기운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이 여자구나.’
파레사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저 알 것 같았다.
‘에레스 공작 부인.’
황제의 여동생이자, 황태자의 고모.
그리고…… 황후의 적.
날카로운 감각이 전율로 흘렀다.
‘황족일 거라고 예상했지.’
황후를 고립시킬 만한 힘을 가지려면, 그만한 신분의 소유자여야 하니까.
그리고 본 순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경계심이 절로 일어서는 상대.
자연스레 예를 취해 보인 파레사는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의 신경은 파레사에게 미치지 않았다. 오직 황태자만 보이는 것처럼.
그녀는 입가를 가리며 상냥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요.”
“얼마 전,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황태자의 정중한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래요, 그 때문에 식사나 한번 들자고 내 저택으로 초대했는데 바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바쁘다고? 누가. 파레사는 의아해졌다.
황태자는 태연스럽게 응답했다.
“황궁 미술관 또한 제 소관이니. 정식으로 열기 전 검토하고자 찾았습니다.”
“황궁 미술관까지도요? 황태자의 임무가 너무도 과중한 게 아닌가요.”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래라면 이는 황후의 임무였으리라.
하지만 현 황후의 권한과 임무는 고작 황후궁 안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제도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가로운 몸이랍니다. 원한다면 내가 황태자의 짐을 조금이나마 나누어지고 싶군요.”
공작 부인의 다정스러운 권유에 돌아온 것은 깍듯한 대답이었다.
“고모님의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깍듯하나,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거절이었다.
“조만간 어머님께 돌려드릴 임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어머님? 아…….”
공작 부인이 말꼬리를 끌었다. 그 호칭이 낯설다는 것처럼.
그러나 그녀의 입가엔 여전히 가느다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동요 한 점 드러나지 않는 표정에서 어쩐지 한기가 느껴졌다.
“황후 폐하와 그간 사이가 돈독해지셨나 봐요. 제도로 돌아온 뒤, 이런저런 소문을 들었답니다.”
“모자간의 사이가 돈독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요.”
황태자는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고모님도 그림 전시를 보러 오신 건지요. 편히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황태자와 나누고 싶은 말이 많답니다. 하지만 그래요,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공작 부인의 시선이 흐르듯이 움직였다.
황태자의 등 뒤에 있는 파레사가 그녀의 시야에 고스란히 담겼다.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부러 배제하고 있었다는 듯한 느낌.
그녀는 파레사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가볍게 훑었다.
“전속 시녀라…….”
이제야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에레스 공작 부인.”
파레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작 부인은 부드러이 웃었다.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소문의 그 전속 시녀인가요?”
아름답다니. 파레사는 그 형용사가 낯설었다. 그 칭찬은 약간 옆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다.
황태자가 담담히 답했다.
“제 초청에 응하여, 어머님께서 대신 보내셨습니다.”
“그랬군요, 어느 가문의 아가씨인지? 제도 출신인가요?”
시골에서 왔다며 파레사의 입술이 움직이려던 순간, 황태자가 가로막았다.
“신원이 검증된 영애이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도로 물은 게 아닐 텐데 잘도 돌려버린다.
공작 부인은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렇군요. 참, 최근에 폐하께서 전하의 혼처를 알아보고 있다고 들었어요.”
표정과는 달리 직설적인 말이었다.
황태자와 자신의 사이를 오해한 걸까? 제 소속도 아닌 시녀와 둘이서 전시를 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파레사는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부디 황태자의 신분에 어울리는 좋은 짝을 맞이했으면 좋겠군요. 황가의 일원으로써 상대를 살피는데 기꺼이 도움을 드릴 의향이 있답니다.”
그리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만들어진 가면을 쓴 듯이 완벽했다. 자애로운 공작 부인의 전형처럼.
“전하의 ‘어머님’도 그걸 바라실 테지요.”
의미심장한 맺음말.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둘러보시기를.”
황태자는 파레사를 향해 턱짓하고 먼저 공작 부인을 지나쳤다.
어딘지 선이 분명하여 차가운 태도였다.
그를 따라나서려던 파레사를 향해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파레사……라는 이름이던가요.”
파레사는 흠칫 공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린 듯이 상냥하게 휘어진 눈매 속에서 밝은색의 눈동자는 어딘지 어둡게 느껴졌다.
“귀족 영애들을 내 저택에 종종 초대하고 있어요. 혹시, 후에 초대가 닿는다면 내 부름에 응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말투는 차분하나 어딘지 묘한 압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파레사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휴가 중이면 초대에 응할 수 있을지도요. 저도 일정이 있어서.”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보지 않고 황태자를 얼른 뒤따랐다.
곧바로 그곳을 빠져나온 그들이 향한 곳은 건물 밖의 정원이었다.
인적 드문 장소에 이르자, 황태자가 파레사를 돌아보았다.
“불쾌했나?”
“아니요.”
단박에 대답이 나왔다.
왜 불쾌해야 하지? 그녀는 맞는 말만 한 것 같은데.
‘그래, 하지만 유쾌하지는 않았지.’
파레사는 또렷한 눈빛으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감상을 간단히 정리했다.
“공작 부인은 황후 폐하와는 반대의 타입이시로군요.”
그녀는 파레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파레사에 대한 제반 정보도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잘도 모른 척 흥미를 드러낸다.
태연하고도 능숙한 말투, 미소 짓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표정.
‘음흉하다는 표현이 어울려.’
고위 귀족 중 제법 흔한 부류다. 파레사는 뒤나미스에서 이미 그런 이들을 접해 보았다.
기사인 그녀가 좋아하지 않은 타입이다.
그중에서도 공작 부인은 가장 능숙하고 교활한 부류.
머리 꼭대기에 서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며 은근한 말과 몸짓만으로도 그들을 제 뜻에 맞게 사용하리라.
황태자는 나직이 읊조렸다.
“평생을 황족으로 자라오셨고, 공작 부인으로서 흠 잡을 데 없다고 평가받는 분이니.”
황후와 공작 부인 중 누구를 좋게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파레사는 그 모호함에서 유사성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와 비슷한 분이신 것 같아요.”
황태자의 눈썹이 치켜들렸다.
“그건 모욕인가?”
욕이냐고 묻는다는 건, 공작 부인을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동족 혐오인가?
그의 태도에 거리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럼 황후 폐하는 좋게 생각한다는 거네?’
반대의 타입이라는 데 동의했으니까. 나쁜 쪽의 반대는 좋은 쪽이다.
파레사는 모른 척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황태자 전하도 황족다우신 분이라는 뜻인걸요.”
“황족이라는 건 아는 데 내 신분이 실감 나지는 않는 모양이야?”
황태자가 이젠 조금 친숙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토록 할 말을 다 하게 되는 것을 보면.
평온한, 그리하여 더욱 자신감 넘치게 느껴지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대체 불가능한 전속 시녀의 여유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황후에게는 자신이 필요하다. 황태자도 그것을 안다. 그런 뜻이었다.
적어도 파레사의 불손함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리 속 좁은 성격은 아니었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파레사는 태연하게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황태자는 조용했다. 그는 눈을 찡그린 채 파레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희한한 것을 보듯이.
이내 고개를 돌린 그에게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대체 불가능……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왜 저런담.’
알 수 없는 반응이다. 파레사는 형식적인 말을 던졌다.
“아무튼 공작 부인은 전하를 많이 생각해주시는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이 별로 친해 보이지는 않는다만 황태자 혼자만 꺼리는 거겠지. 황태자처럼 예쁜 조카를 예뻐하지 않기도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황태자는 뜻 모를 말을 꺼냈다.
“고모님이 생각하는 게 나일지는 모르는 거지.”
“예?”
“때로는 산자를 능가하는 죽은 자도 있는 법이니.”
황태자는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정원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진지한 기색이었다. 뭔가를 고심하는 것처럼.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찜찜함을 남긴 채 파레사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녀의 뒤로 짤막한 말이 날아들었다.
“또 보지.”
나직하나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목소리. 그래, 이제 그들은 한 편이었다.
여태까지 보여진 모든 상황이 확신을 주었다. 그가 황후에게 아군이라는 확신.
‘내게도 아군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황태자와 자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리라.
또한 오늘 마주한 황후의 적, 에레스 공작 부인.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은 충분히 확인했다. 황후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상대.
‘제게 호의적인 황태자에게도 휘둘리니, 그토록 고단수의 상대가 악의를 보인다면야.’
차츰차츰 갉아 먹히다가 이내 무너지고도 남으리라.
이제 자신이 자리를 비운 때에 황후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볼 차례였다.
* * *
“그놈의 찻잔 세트인지 뭔지 또 새로 배달왔단다. 이김에 네가 사고 싶은 거 다 사는 게 아니냐?”
돌아오자마자 황후의 타박이 시작되었다. 물론 부당한 타박이었다.
제가 사고 싶은 것이긴 해도 결재는 다 받았으니까.
단지, 황후가 배부르고 졸릴 즈음에 슥 받은 것이기는 했지만.
파레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차피 황후 폐하의 물건이잖아요, 황후 폐하시면 자고로 최고의 것을 써야지요.”
제가 유독 비싼 것들을 골라오기는 했지만, 황후도 티타임 때마다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애초에 눈 높은 그녀이니, 만족감을 느끼려면 역치도 높은 게 당연하다.
황후는 그제야 누그러진 얼굴로 수긍했다.
“그건 그래.”
최고의 것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 눈치다. 파레사는 슬며시 덧붙였다.
“제가 떠나면 가져갈 것도 아닌데요. 두고두고 쓰시면 되는 게 아닌지요.”
“뭐? 왜 떠나?”
황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파레사는 간단하게 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절 포섭하려 하시더군요. 현재 봉급의 2배를 주겠다고 하셨어요.”
고자질하는 것치고는 사감 없이 담백한 말투였다. 황후가 발칵 성을 냈다.
“이 괘씸한 녀석이! 어머님 어머님 소릴 해놓고 내 전속 시녀를 가로채려고 들어!”
당장에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뺨을 갈겨줄 기세였지만, 막상 황태자 앞에 서면 저절로 내려질 손이라는 걸 안다.
“요는 제가 그 매력적인 조건을 단박에 거절했다는 거지요. 그만큼 제가 믿음직스럽고 충실한 전속 시녀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하군요.”
짧은 기간이지만 이만하면 충실함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믿음을 줄 때도 되지 않았나. 파레사의 어조는 분명했다.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생색을 내는 이유가 무엇이냐. 봉급을 올려달라는 거냐?”
그녀의 뇌리에서 파레사는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으려는 빈곤한 시녀였다. 파레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그건 급하지 않아요. 급한 것은…… 이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말씀해주셨으면 해서요.”
자연히 입 열기를 기다렸지만, 황후는 아무래도 말해주기 싫은 모양이다.
때때로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괴로운 기억도 있다.
티룸을 박살 낸 황후에게 그것은 아마, 그런 종류의 기억일 터.
그것을 묻는 파레사의 기분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들어야만 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황후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쫓기는 듯이 두 눈이 떨리고, 안색이 희게 질렸다.
파레사는 그 변화를 똑똑히 주시했다. 황후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빠르게 뒤이은 말.
“그것은 묻지 말아다오.”
단호했다. 황후는 바로 돌아섰다. 파레사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황궁 미술관에서 누군가를 봤어요. 어떤 지체 높은 귀부인이었지요.”
황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누군가는 저를 알고 있더군요. 그리고 제게…… 적대적이었지요.”
처음에는 티 나지 않게 아래로 깔아보는 듯한 태도였으나 무심함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신이 마지막에 한 방 날렸으니 적대적으로 돌변했으리라.
“그래서 저는 알아야겠어요.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황후 폐하와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내 파레사는 그 이름을 꺼냈다.
“에레스 공작 부인.”
바로 움찔거리며 얼어붙은 뒷모습을 보면서 파레사는 확신했다.
‘맞아, 그 여자야.’
황후가 맞서 싸워야 할 상대.
황제의 여동생이자 에레스 공작가의 안주인, 그리고 황녀.
황제의 여동생쯤 되니까. 총애받는 황후를 몰아붙일 수 있었으리라.
황제의 총애에 권력이 따르는 것은 당연할진대, 온 사교계가 단합한 듯이 황후에게서 돌아선 이 상황.
그것을 주도한 이가 그만큼 대단한 인물, 즉 황녀가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지.’
파레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의 적은 제게도 적이에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그제야 황후가 다시 몸을 돌렸다.
파레사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 말을 돌이키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황후의 표정이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도한 듯 참혹했기 때문에. 황후의 입술이 느리게 떨어졌다.
“그 여자는……. 지독하지.”
힘들면 말하지 말라고 할 뻔했다. 파레사는 인내하며 물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요.”
황후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아무 일도. 그래, 그 여자에게는…… 그렇겠지. 나와 마주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겠지.”
그날, 황후는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황제는 잠시 자리를 비운 터.
바람은 산산했고 달콤한 꽃향기가 폐부를 가득 메웠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여자가 정원 너머에서 모습을 보였을 때. 바람이 멎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름다운 꽃들이 일순 무덤 위에 놓인 꽃다발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황후를 향해, 그녀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제가 황후인 것처럼 당당하게.
제도가 그리웠다느니 최근에 조용히 돌아왔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황후는 그저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지만, 공작 부인의 태도는 친근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들은 퍽 사이좋아 보였으리라.
조금만 흐트러트리면 그 속이 낱낱이 드러날 얕은 장막.
그러나 공작 부인은 그 장막을 누구도 헤치게 놔두지 않았다.
에레스 공작 부인이자 황녀 니시아나는, 평생을 남의 눈을 가리며 살아온 여자였다.
그녀의 오만도 긍지도 잔인함도. 그 온화하고 상냥한 눈매와 미소 속에 감춘 채로.
관조하는 듯이 굴었던 그녀의 은근한 악의를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황후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의심해야만 했다.
확신에 이르기까지 수년간을.
제 발아래가 모두 허물어져 내리고, 오해가 악명을 빚어내, 말과 눈빛의 가시가 저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야 황후는 확신했다.
니시아나의 본심을.
그때에는 너무 늦었다.
저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눈빛 속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여전히 황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안다.
‘니시아나는 나를 싫어해.’
싫어한다는 표현이 약하게 느껴질 만큼.
니시아나가 자신에게 품은 것은 진득하고 교묘한 악의. 그것은 서서히 황후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녀가 황후의 실수와 고립을 조장하고 유도해왔던 그 수많은 순간들.
결과적으로 사교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던 건 그녀였고, 제도를 떠난 후로도 그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뒤늦게 나타난 황제가 그들을 흡족하게 보며 말했다.
‘니시아나?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군. 함께 식사나 드는 것이 어떤가.’
황제는 그저 오랜만에 본 여동생에게 할 법한 제의를 한 것에 불과했다.
황후의 거절보다 공작 부인의 승낙이 빨랐다.
‘어머, 그럼요.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제게 큰 기쁨이겠지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 그녀는 몸을 돌려 완전히 황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소한 몸짓만으로도 황후를 배제하면서.
그래,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충격으로 얼얼해졌던 속에 참담함이 끌어 올려졌다. 그녀의 남편은 잊지 않고 물었다.
‘황후는?’
그 뒤늦은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황후로서 꺼내야 할 대답.
‘예, 저는…… 괜찮아요.’
어찌 괜찮을 수 있을까. 하지만 황후는 무력했다.
불편한 식사 자리였다. 니시아나는 자연스럽게 담소를 이끌어갔고, 그 부드러운 말씨 속에서 황후는 선연한 가시를 느꼈다.
‘황후께서는 여전히 그리 화려한 치장이 어울리시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젊은 영애들도 그만한 화려함을 소화하지는 못할 겁니다.’
‘황후 폐하의 드레스가 사교계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지요. 황후 폐하의 의상실이 얼마나 다채로울지 궁금합니다. 무도회에서 자주 참석하시면 모두가 기뻐할 텐데요.’
‘이번 봄 무도회가 유독 훌륭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후 폐하의 안목 덕이 아닐지요. 어머, 폐하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고요? 제가 착각했군요. 실례했어요.’
황후의 화려한 치장과 씀씀이, 그리고 박탈당한 권한을 지적하는 말들.
속이 불편하여 자리를 떠나겠다고 말한 황후에게 그녀가 눈을 휘며 말했다.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봐요. 이전처럼.’
이전처럼. 어떤 이전?
일순 떠오른 기억이 벅차도록 속을 가득 메웠다.
황후는 궁으로 돌아와 제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숨 막히는 무력함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무엇이라도 해서 풀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파레사가 본 그대로다.
“처음부터였단다. 에레스 공작 부인은…….”
니사아나는 처음부터 황후를 싫어했다.
반면 황후는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사교계의 중심이자 제국의 황녀.
누구나 그렇듯이 황후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눈이 어두웠는지도 모른다.
황후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윽고 그녀는 분통을 터뜨리며 외쳤다.
“그 사악한 년은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 틀림없어!”
화를 내는 것을 보니, 털어놓아 마음이 편해진 눈치였다.
파레사는 그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데 안도했다.
파레사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황후는 파레사를 자신의 편으로 완전히 놓아둔 듯했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졌다.
배신은 황후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의 무엇도 버텨낼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후는 어렵사리 파레사에게 믿음을 주었다. 파레사가 거기에 보답할 차례였다.
황후는 웃었다. 쓰라린 기미가 비치는 미소였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 것은 처음이야.”
끝까지 곁에서 지켜본 이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 황후가 된 이후로는.
파레사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우시지 않는군요.”
이 시녀는 속을 긁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다.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화로 탈바꿈했다. 황후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내가 울보인 줄 아느냐!”
“아니요,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제껏 단 한 번도, 황후의 눈물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흐느껴 우는 것보다 더한 얼굴을 하고서도. 아마 그것이 그녀를 견디게 한 자존심이리라.
그 연약함과 강인함.
‘인간은 모순의 존재라지만.’
그 양면이 파레사를 움직였다. 꼭 사로잡힌 것처럼.
파레사가 가진 것은 평온하여 정적이고 냉담한 심장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파레사의 심장으로부터 치미는 무언가를 이끌어 냈다.
제 기분 내킬 때면 매혹적으로 휘어지는 말린 장밋빛 눈동자든 간혹 비치는 절망 같은 쓸쓸함이든.
아이러니하게도, 불행은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혹이 된다.
파레사는 비극에 끌리는 인간의 속성에 제가 걸려들 줄은 몰랐다. 구원자라도 되고 싶은 걸까.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할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겠지만…….’
이유는 상관없다, 이젠. 결심했으니까.
그리고 파레사는 공주를 구해낼 만큼, 뛰어난 용사였다.
파레사는 가볍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분, 인상이 황태자 전하를 닮았더군요. 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싫어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황태자는 황후의 신경을 사로잡기에 좋은 구실이었다.
파레사의 말에, 황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눈꼬리를 치켜들었다.
“누가 누구를 닮아? 그 여자는 가식적이고 음흉한 인상이잖니. 황태자는 그래도 인상이…… 괜찮기는 하잖아.”
‘……어라?’
역시 그렇지, 하면서 쌍수를 들 줄 알았건만 의외의 태도다.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 황태자 전하를 좋게 보시는군요.”
“딱히 좋게 보고 있지는 않다만.”
“비교적?”
“그저 객관적으로도 볼 줄 알 뿐이야. 내 감정이 어떻든.”
감정은 안 좋지만, 제가 보기에 황태자가 흠잡을 곳은 없다는 소리다.
파레사는 피식 웃었다.
“그 황태자 전하는 에레스 공작 부인을 좋아하지 않던데요.”
공작 부인이 언급될 때마다 움찔하는 것은 여전하다.
황후는 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로구나. 그 녀석에게는 고모인데. 나와는 달리, 피가 섞인 황가의 일원이기도 하고.”
황가의 일원. 황후가 되고 나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 사실이었다.
파레사는 자신이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 폐하는, 에레스 공작 부인을 어떻게 생각하시죠?”
“하나뿐인 여동생. 나와……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지.”
“아끼시는가요?”
유독 사이가 좋아, 아내보다도 여동생이 우선이라든가. 하지만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구나. 평범한 사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
황제와 그 여동생의 관계에 있어서 평범하다는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적당히 데면데면하고 적당히 친근한 관계.
그리고 공작 부인은 황제가 포용해야 할 황가의 식솔이기도 했다. 황태자가 황후를 포용하려고 하듯이.
그러나.
“폐하를 감싸고 계시는군요. 언제나 그러셨어요.”
파레사는 그 점을 꼬집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 폐하의 모든 불행을 초래한 것이 그분이신데요.”
그 말에 파장이 퍼져나가듯 황후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충격으로 경직된 입을 열었다.
“그 무슨, 불경한.”
제국에서 황제는 반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누군들 감히 그 잘못을 지적할까.
하지만 파레사는 달랐다.
‘제국민도 아닌데 내가 알게 뭐야.’
그래도 상관이지만, 대체 불가능한 전속 시녀 파레사는 개의치 않고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파레사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황제 폐하는, 이 모든 사태에 방관만 하시지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허수아비 황제 따위가 아니다. 권력과 권위를 가진 황제다.
그가 선택하여 황후의 자리에 올린 여인에게, 어쩌면 이토록 무심할 수 있는가.
처음부터 이제까지 줄곧, 마음에 걸렸다.
황후가 겪는 부당한 현실이. 그리고 이 황실이.
‘어째서 이토록 상황이 기울어 있는지. 이렇게 되기까지 황제는 무엇을 했지?’
황후가 세차게 도리질 쳤다.
“……폐하는 모르신다. 내가 그녀와 어떤 사이인지. 그녀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은 하실지 몰라도 큰 문제는 아닐 거라 여기셨을 거야.”
그 변호는, 황제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이유든 상관없다.
파레사는 에레스 공작 부인과 그녀를 따르는 귀부인들만큼이나 황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점을 분명히 짚어야만 했다.
“아실 수도 있잖아요? 제가 오기 전에도 황후 폐하를 자주 찾으셨다면서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사이가 좋다면 애초에, 모를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황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랬지. 하지만 나는 폐하께…… 말씀드린 적이 없단다.”
“왜 말씀하시지 않았지요?”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서.”
“단지 그것뿐인가요?”
티룸을 그리 박살 낸 걸 보아선 황후가 남한테 폐 끼치는 걸 꺼리는 성미는 아닌데.
황후가 작게 도리질 쳤다.
“그조차 홀로 해내지 못하고, 폐하께 자꾸만 투정부리고 의존하면 내게 염증을 느끼시지 않겠니.”
“그토록 인내심 없는 분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도리어 황후와 함께 있는 황제는 꽤나 자상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보였다.
“내가 폐하의 다정함에 기대다가, 그분의 마음이 식고, 총애를 잃게 되면 내 두 아이는.”
황후가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뒷받침할 가문도 무엇도 없고, 평판까지 나쁜 어미를 둔 내 아이들은 어찌 되겠니?”
‘황후는 남편인 황제조차도 믿지 않는구나.’
파레사는 깨달았다. 그것은 골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일지라도 황제와 황후이기에 패어 있는 골.
한쪽의 권세가 지나치게 높고 한쪽의 권세가 지나치게 낮으니 황후로서는 황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일방적인 관계였다. 황후로서는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수많은 이들이 요녀처럼 순식간에 황제를 홀로, 황후의 자리를 꿰찬 그녀를 경계하여 속삭였을 터.
그런 사소한 일로 황제 폐하의 신경을 어지럽혀선 안 된다고.
황후가 되었으니, 그 정도는 혼자서 해내야 한다고.
어린애처럼 징징거려선 안 된다고.
황후는 무수한 깎아 내려짐 속에서 침묵하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괜찮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늘 그렇게 숨기고 연기해오신 건가요?”
“……그래.”
스무 살에 결혼한 황후는 자식을 둘 낳고도 이제 서른이었다.
스무 살의 그녀는 황제가 안겨주는 것들에 흠뻑 취했고, 황후로서의 나날이 마냥 행복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으레 직분 높은 자가 그렇듯 뻔하게 무심한 남자였다.
금은보화만 안겨주면 행복이 따라온다고 믿는. 그리고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 괜찮은 줄 아는.
그런 황제라는 것을 알기에 황후는 그의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뜻 말했을 때 나온 황제의 반응이 너무도 무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니.”
체념한 듯 말하는 말린 장밋빛 눈동자가 가랑잎 젖은 듯 축축한 색을 띠었다.
파레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그녀를 황후로 들인 것은 오롯한 황제의 의지건만 황제가 짊어져야 할 것은 없다시피 하다니. 이 얼마나 부당한지.
‘뒤나미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왕태녀라면 제짝에게 도전한 상대를 친히 짓밟고 무릎 꿇게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주어 사죄하게 했으리라. 황제는 그보다 더한 것을 할 수 있는 자였다.
파레사는 속내와는 반대로 냉담하게 내뱉었다.
“황제는, 정말 한심한 남편이로군요.”
저절로 존칭도 떼어졌다. 하지만 황후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리 말하지 말거라. 황제는 무치라 하였다.”
“무치는 황제로서 무치겠지요. 남편으로서는 태만하고 무정하여 형편없는 분입니다.”
이토록 흥분하여 누군가를 비난한 적이 있었던가.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제는 무책임했다.
세 낮은 가문의 어린 영애와 결혼해서 황후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녀가 힘들 거란 건 예상하지 못했나?
예상하지 못했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고도 모른 척했다면 이기적인 것이다.
황후란 자리에 올려뒀으니 마치 그것만으로도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뻔히 보이는 불행은 편하게 외면하며.
실상 황제에게는 본인의 만족만이 중요하기에. 그에게 필요한 건 인형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황후라서.
실상 애완동물 대하듯이 그녀를 대해왔던 게 아닌가.
“황제 폐하는 그저 자신의 편리를 위하여 눈을 감고 계신 것 아닌가요.”
감히 누가 제국에서 황제를 상대로 이런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하지만 파레사는 주저 없이 그 본질을 끄집어내 황후 앞에 널어놓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것 앞에서 황후는 눈 돌리지 못했다.
그녀 역시도 외면하고 있었을 뿐,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는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황후도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힘 빠진 어조로 말했다.
“세간에서는 내가 황제 폐하를 유혹하였다 말하지. 감히, 귀족이랄 것도 없는 천한 것이 신세를 바꿔보자 했다고.”
아래로 떨어진 황후의 시선이 가닥을 잡지 못한 채 텅 빈 바닥을 쓸었다.
“그러나 나는, 바라지 않았어. 단 한 번도 황제 폐하를 욕심내 본 적이 없었단다. 그분과 처음 마주친 날에도.”
거기엔 어떤 계획도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황후는 평범한 귀족 영애였고 무도회에서 지체 높은 귀족 남성과 맺어지길 고대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탁월한 아름다움으로 어린 시절부터 주목을 모았던 그녀이니.
그러나 그 무도회에 참석한 날, 황후의 운명은 바뀌어버렸다. 그녀가 사로잡은 것이 다름 아닌 황제였기에.
그가 황후에게 손을 내민 순간, 그 절대적인 운명에 사로잡혀 버린 건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젊고 잘생긴 권력자. 누군들 혹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후는 금세 사랑에 빠졌다.
여름밤처럼 들뜨고 꿈같은 나날들. 그러나 그 꿈이 악몽이 될 거라곤 그때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인 순간에도, 그녀가 느낀 것은 오로지 환희뿐이었다.
그 순간에 도취되어, 장밋빛 환몽에 사로잡혀, 제 발이 늪에 빠져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전신은 서서히 그 늪에 잠겨 들고 있었다. 이제 와선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하여, 그대로 가라앉아갈 뿐.
이야기를 다 들은 파레사가 핀잔을 던졌다.
“생각 좀 잘 하시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데, 황제와의 결혼 생활이 녹록할 리 없는 건 당연하다.
황후가 퉁명스레 물었다.
“그럼 그 어떤 귀족 영애가 감히 황제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다더냐.”
“저요.”
파레사는 단호했다.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사양이다.
세상에.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보통은 받아들일 거란 말이다!”
“보통이 아니신데, 왜 보통의 선택을 하셨어요?”
“……그러게.”
그녀의 눈빛에선 단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회한이 묻어나왔다.
순결한 백색이다가 빛바래 버린 잿빛.
돌이킬 수 없기에,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았다.
황제와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고. 황후가 된 것을 후회한다고. 누구에겐들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10여 년 전, 사랑에 빠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사랑이 불행을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황후의 눈빛에서 등잔의 그림자 같은 그늘이 일렁였다.
“평생…… 누구에게도 말 못할 거라 생각했다만. 이렇게 꺼내놓고 보니 마음만은 후련하구나.”
“친정에서는 어찌 말씀하시던가요.”
“……그분들은 단지 내 행복을 바라실 뿐이지.”
행복을 바라지만, 하급귀족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그 때문에 황후가 홀로 삼켜내야 했다는 것까지 파레사는 단박에 깨달았다.
“찻잔에는 그리 못되게 구시면서, 그런 데선 착하시군요.”
“네 말마따나 내 찻잔이지, 네 찻잔이더냐? 뭐 그리 불만이 많아.”
황후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착하게 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찻잔을 깬 게 문제라는 지적이란 것을.
‘눈치는 살아있는데?’
파레사는 냉큼 말을 이었다.
“이기려면 독해지셔야 하거든요.”
“모르느냐? 지금도 온 사방에 독하다 소문이 났다. 내가 정말 패악을 떨고 살았다면 폐위가 거론되었을 것이야.”
“패악은 티룸을 박살 내신 걸로 족합니다. 제 말은, 혼자 방에서 울고 그래선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잖습니까.”
“누가 울었대! 그리고 누구한테 말했어도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을 거다.”
“행동하기 전에는 어떤 결과가 낳아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네게 말했으니, 네가 해결해주겠단 뜻이냐?”
“아마도?”
하. 기가 찬 듯 콧소리를 낸 황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가 무슨 재주로?”
“이래 봬도 제가 능력이 있거든요. 머리가 잘 돌아가고요. 그러니 조금 기대해 보시지요.”
파레사는 냉큼 덧붙였다.
“물론 제가 매번 숟가락을 들어서 떠먹여 드리지는 못합니다만.”
황후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파레사의 근거 모를 자신감에 왠지 마음이 혹했다.
“그건 나더러 적극 협조하란 뜻이냐? 그럼 다 해결돼?”
너무 날로 먹으려는 심보다. 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신이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다른 건 몰라도, 오래된 마음의 상처는 그리 쉽게 낫게 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파레사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상처에 상처를 덧입히는 일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빛 눈동자를 잔잔히 빛내며 짓는 그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는, 어쩐지 말문 막히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면 내가 입은 상처만큼 되돌려준다든가. 저는 그쪽이 끌리는군요.”
슬며시 입꼬리가 깊어졌다.
내가 당한 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라면, 당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준다.
파레사는 누군가에게 당하고 산 적이 없어 갚아줄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당하지 않은 것은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뒤나미스에서의 파레사는 복수하고자 하는 상대를 고꾸라트려 짓밟을 수 있을 만큼 강했으니까.
황후도 그럴 수 있었다. 그녀는 황후이지 않은가. 제국에서 가장 드높은 지위의 여성.
다만 그녀에겐 그만한 강단과 독기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
그녀를 뒷받침해 줄 사람도 없었던 터다.
이제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파레사란 이름의 검이었다. 적을 절멸시키고도 남을 파괴력 있는 검.
황후는 제가 가진 게, 어떤 검인지도 심지어 검인지조차도 모르지만…….
‘이곳은 제국이고, 나는 기사가 아닌 시녀지.’
황후에게는 황후다운 방식이 있는 법.
사교계에 걸맞게 평화롭고도 우아하게. 그리고 그 선두에 자신이 설 것이다.
잠시 멍하니 파레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황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뒤나미스에서 무엇이었느냐.”
“예? 갑자기 무슨.”
“평범한 귀족 영애는 아니었을 것이다. 좀도둑도 때려잡았다지? 내 소문을 들어 보니 20대 1로 우락부락한 부랑배들을 상대했다더구나.”
“……6대 1입니다. 그중 한 명은 쓰러져 있었고요.”
소문이 와전되는 속도를 봐선, 100대 1의 전설도 찍게 생겼다.
문제는 자신이 정말로 100대 1로 싸워도 이길 만한 실력자라는 거다. 몹시 수상하지.
“검을 배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너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지. 황실 기사들조차 치마를 입고 5대 1로 싸워 일방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그것은 단순하게 검을 배웠다는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황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역시 좀 더 분명히 말해야 하나. 황후의 비밀을 들었으니, 나도 조금은 꺼내놓아야 할지도.
파레사는 잠시의 갈등 끝에 내뱉었다.
“저는 뒤나미스에서 기사였어요.”
“기사 지망생이 아니라, 기사였다고? 그러면 왜.”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도망쳐왔다고.”
황후의 눈동자가 허공에 초점을 두고 굴러갔다.
“……그랬지.”
그새 잊고 있었나. 그렇게 관심도 없으면서 잠시 휴가를 갔다 왔다고 탓한단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진 파레사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사로 살 수 없어, 시녀가 된 것이죠. 기사인 저는 추적당하기 쉬울 테니까요.”
“실력 좋은 기사였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아마 너를 쫓는 이는 대단한 권세가였을 테지. 뒤나미스도 참, 문제가 많구나.”
황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왠지 발끈하여 ‘그래도 황후를 내모는 제국보다 막장은 아닌데요’라고 반응할 뻔한 파레사는 말을 삼켰다. 곧 황후가 질문을 덧붙였다.
“하지만 황실 기사가 된다면 뒤나미스에서도 너를 어쩌지 못할 텐데? 굳이 숨기고 시녀로 살 이유가 무엇이냐.”
“그랬다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서요. 뒤나미스의 기사가 제국의 기사로 적을 옮기는 것은 도의의 문제가 있거든요. 숨기고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는 게 나아요.”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만.
파레사는 본명을 그대로 쓰고 있었고, 황후는 나쁜 의미로 유명인사니까.
자연히 황후의 새로운 전속 시녀에게도 이목이 쏠리게 된다. 언젠가는 바다 건너의 뒤나미스에까지 소식이 전해지리라.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아무리 담대한 파레사라도 미래에 들이닥칠 사태가 걱정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현재를 살고 있지.’
파레사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당장은 눈앞의 순간에 집중할 것이다.
황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서 시녀가 되었단 말이지? 참 내가 기사 출신 시녀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기껏 기사가 되었는데 시녀가 되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까. 가진 권한이 다르고, 올라갈 수 있는 위치가 다르다.
다만 전속 시녀라는 자리는 그중에서도 예외.
황족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자리. 상관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일이겠지만, 권력과 가까울수록 권세를 가지기 마련이다.
파레사는 묘한 자리에 올라앉았다. 권력과 가까우나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상관의 곁에.
파레사가 설핏 웃었다.
“저도 시녀가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도 하필 악녀로 소문난 황후의 전속 시녀가 될 줄은 몰랐지.
“그래서 싫다는 것이냐?”
“그건 아니고요. 나름 보람을 찾고 있지요.”
과거의 자신을 아는 이들이라면 놀라겠지만, 꽤나 적응을 잘하고 있는 듯하고.
그제야 뾰족해졌던 황후의 표정이 풀어졌다.
소녀처럼 천진하면서도 특유의 매혹이 묻어나오는 그 얼굴을, 파레사는 빤히 바라봤다.
‘역시 그래.’
고양이 같다. 아주 사랑스럽고 털이 보송보송한 핑크색 고양이.
그리고 자신은 그 고양이에게 선택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
파레사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앉았다.
“무엇이냐, 그 어린애 보는 듯한 눈빛은? 왠지 기분이 나쁘구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파레사의 시선이 위쪽으로 옮겨졌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뭐라고? 너.”
“그럼 편안히 쉬시기를.”
파레사는 황후의 눈총을 받으며 유유히 돌아섰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첫 발짝은 뗀 상태였다.
‘부셰 백작 부인.’
이미 황태자가 자리를 만들어주었으니까. 거기에 순순히 따르자니 찜찜한 기분이 들지만.
‘아군이라는 거지.’
자신이 황후에게 믿음을 주었듯, 황태자를 한편으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그는 이제껏 증명해왔으니까.
그리고 황태자는, 황제를 어려워하는 황후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를 어떻게 잘 활용할까?’
숙소로 항하는 파레사의 머릿속에서 착착 계획이 짜이고 있었다. 어쩐지 의욕적인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