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3)
3화
* * *
약을 먹고 밥 먹고 의원에게 진료받고 치료받고 다시 약 먹고 자고 약 먹고.
세상의 온갖 귀한 약은 다 먹은 것 같았다.
팔뚝만 한 산삼을 본 적 있나?
난 봤다. 지금은 내 배 속에 있지만.
나는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치료받다가······ 잠들었네.’
몸을 일으키자 침상 곁엔 가문의원만이 침을 정리하고 있었다.
난 의원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는요?”
지금껏 아버지는 치료 내내 늘 내 곁을 지켰다.
저번 생은 그걸 감시라고 여겼고, 이번에는 날 걱정해서라는 걸 알았다.
“4공자님도 참, 쓸모없는 짓은.”
“······?”
날 힐끔 바라본 의원이 혀를 차며 방을 휙 나갔다.
몸을 일으켜 처소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의원은 모습을 감춘 후였다.
“뭐지?”
안뜰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나와 아버지의 처소는 백리 세가 장원에서도 서쪽 끝, 제일 구석에 있었다. 가문 직계의 처소라기엔 외지고 수수했다.
‘뭐, 나는 다른 친척들을 마주칠 일이 적어 좋지만.’
원래 아버지의 처소는 다른 곳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입적하자 할아버지가 꼴도 보기 싫다며 여기로 내쫓았다.
나는 꾸미지 않아 휑한 안뜰을 지나 하인들이 머무는 건물로 향했다.
아버지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럼 그렇지.’
아무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던 이유였다.
하인들은 아버지가 처소에 없으면 재빠르게 쉬러 갔다.
‘어디 가신 거지?’
그냥 여기서 기다릴까, 처소를 나가 아버지를 찾아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다들 빨리빨리 와!”
건물 뒤편 하얀 담벼락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모습을 감췄던 처소 하인들이었다.
계급이 높아 보이는 하인이 그들을 재촉했다.
“빨리, 빨리빨리 움직여! 다 모였어?”
“아, 잘 자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기에 그래.”
“으이그. 낮잠이나 퍼져 자니 모르지. 좀 전에 가주님 돌아오셨어!”
“뭐? 가주님이?”
“오늘 저녁에 연회를 열 거니까 주인마님이 처소에 반만 남고 나머지 반은 다 본당으로 오라고 하셨어. 누가 올 거야?”
가만히 대화를 듣던 나도 눈을 크게 떴다.
백리 세가의 가주인 내 할아버지는 도통 속을 알 수 없이 특이한 분이셨다.
그저 그런 가문이던 백리 세가를 단숨에 10대 세가 중 하나로 올려놓는 수완가였지만, 수련한다고 1년 내내 틀어박히거나 나와도 곧장 바람 쐰다며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의 조력자 포지션이긴 했지만, 애초에 자주 등장하진 않는다. 두세 번 정도 나와 ‘천하십일강’ 다운 강력한 무위를 보여 주는 정도였다.
‘심지어 나도 몇 번 못 뵀지.’
같은 집에서 몇 년을 같이 지내면서도 마주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가 주화입마에 빠졌을 때도 할아버지는 여행 중이셨다. 그런데 돌아오셨다는 건······.
눈을 부릅뜬 난 황급히 처소를 뛰쳐나갔다.
‘젠장, 오늘이었어!’
오늘이었다. 바로 오늘이 아버지와 내가 할아버지께 제대로 찍히는 날이었다!
* * *
애초에 주인공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소설에서 나 같은 찌끄레기 악역의 어린 시절은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꽤 개연성 있는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그 개연성을 더해 주고 있었고!
‘막아야 해.’
만약 내가 정말 여섯 살이라면 아버지가 어디 있을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거침없이 걸어갔다.
가는 길에 마주친 하인이나 무사들이 묘한 얼굴을 하며 수군거렸다.
도착했을 땐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등허리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문 앞을 지키던 나이 든 종복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아기씨?”
창백한 안색에 파리한 입술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여, 노복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고 대답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기침이 터졌다.
그 모습에 노복은 백리연이 주화입마에 걸려서 쓰러졌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걸 떠올렸다.
눈빛에 순식간에 동정이 서렸다.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하아, 하아,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시······”
겨우 꺼낸 말을 다 하기도 전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라!”
안에서 벼락같은 노성이 터졌다.
“의강! 계속 그런 식으로 나를 실망하게 할 거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대체······!”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노복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4공자님을 찾아오셨군요. 다만, 그······ 아기씨도 들으셨다시피 말을 전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방은 할아버지가 출입을 허락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가문 내에서 요직을 맡거나 인정받은 직계들.
난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 때였다.
“뭐야, 백리연?”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노복이 내 뒤를 향해 고개 숙였다.
“의란 아가씨, 오셨습니까.”
백리의란.
아버지의 이복누이로 내겐 고모가 됐다.
고모가 노복을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애가 왜 여기 있어? 설마 의강이 데려온 거야?”
“아니요. 혼자 오셨습니다.”
“······혼자?”
문과 나를 번갈아 본 고모가 코웃음 쳤다.
“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와? 여긴 네가 발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모 뒤편의 두 여종 또한 대놓고 날 비웃었다.
난 가만히 그들을 바라봤다.
과거 이 시절의 나는 고모와 마주치는 걸 무척 두려워했다. 고모가 어쩌다 나와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갖은 트집을 잡아댔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치면 감히 자기와 마주쳤다, 숙이면 자길 보려도 들지 않는다, 인사하면 네가 뭔데 인사하냐, 안 하면 무시했다······
무슨 행동을 하든 창조적인 구박을 해냈다.
그런 식으로 점차 폭언의 수위가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매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백리 세가를 너 같은 버러지가 더럽히다니······!”
그럼 나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잔뜩 움츠리고 일단 죄송하다고 빌었다.
물론 고모는 날 용의주도하게 괴롭혔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눈에 띄지 않을 곳만 괴롭혔다. 특히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게 무척 조심했다.
초반에는 아버지가 집에 계시질 않았고, 나중엔 사이가 나빠져 말하지 못했다.
‘멍청했지.’
과거의 나는 고모가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백리세가 사람이면서 무공도 못 쓰는 폐인이니까.
하지만 아버지 장례식에서 듣고 말았다.
“의강 그 자식 검 좀 휘두른다고 잘난 척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꼴좋다!”
고모는 내 아버지를 질투하고 있었다.
고모는 내 아버지의 실력, 명성을 시기했으나 아버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딸이 가문 내 입지도 없고 무공도 못 쓰는 데다가 어리숙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그런 나는 고모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뭘 그렇게 보고만 있어?
지금 네 아버지 돌아오셨다고 날 무시하는 거야?”
아버지가 오시니 자신을 무시한다는 교묘한 언행. 누군가 듣는다면 내가 거만하다고 여길 것이었다.
난 서둘러 인사했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뵈어요, 고모님.”
그러곤 정말 면목 없다는 듯 덧붙였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인사도 드리질 못했어요.”
시의적절하게 멈췄던 기침까지 터지자 고모의 얼굴이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이 묘했다.
만나자마자 아픈 조카를 구박하는 모습이 되었으니까.
고모는 뭔가 더 쏘아붙이고 싶지만, 주변의 보는 눈이 있어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 기침이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겨우 기침이 잦아들자 고모는 언제 구박했냐는 듯 서둘러 나긋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혼자 온 걸 보면 몸은 꽤 괜찮아진 모양이구나.”
여기서 이제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고모는 잔소리 조금 한 정도가 되고, 아프다고 하면 당장 처소로 쫓아낼 것이다.
“아······ 그게······.”
내가 우물쭈물하자 고모가 말했다.
“괜찮다. 편히 말하렴.”
“······처소에 아무도 없어서요. 둘러봐도 다들 어디 갔는지 바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올 수밖에 없었어요.”
“······ !”
고모가 눈을 부릅떴다.
집안 일과 하인 관리는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 즉 고모의 친어머니 담당이었다.
처소의 하인을 찾았는데 아무도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모의 뒤에만 해도 여종이 둘이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버지 처소 하인들이 나태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특히 내 앞에서는 숨기지도 않았다. 모두 둘째 할머니의 묵인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귀에 안 들어가면 된다 이거지. 하지만 이걸 어째?’
어느새 방 안의 고함도 멈춰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꼽히는 고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그들은 집중하면 떨어진 거리의 대화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들었겠지.’
더욱이 고작 문 하나, 그것도 바로 앞에서 나눈 대화는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다 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고모가 아버지 돌아오셨다고 무시하느냐며 내가 거만한 것처럼 몰아간 것부터가 그런 의도였다.
‘이런 얘기가 나올 줄 몰랐겠지만.’
고모가 입술을 파르르 떨다 서둘러 말했다.
“네가 뭐 착각한 게 아니냐? 하인들이 그럴 리가. 헛소리 말고 어서 돌아······”
그러나 고모의 말을 할아버지의 성난 목소리가 잘랐다.
“의란! 당장 들어오거라!
백리연,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