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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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침공
엘리시온의 마을 풍경은 기본적으로 본래 이들이 사는 세계를 모티브로 하기 때문에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역시 지구인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이다 보니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많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들에게 가장 큰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옷차림이다. 대놓고 비키니 같은 걸 입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종아리를 넘어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짧은 치마나 핫팬츠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의 모습은 식구들로 하여금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크흠…”
바로 옆에 하마란이 버티고 서 있다 보니 오귀스트는 차마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차라리 형진처럼 대놓고 변태짓을 하고 다니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점잖은 신사 이미지를 가진 오귀스트는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가는 그날밤 바로 곡소리 날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형진에게 영단을 얻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잡혀 사는 모양이다.
“우, 우와아아아아…”
걸핏하면 방에 틀어박혀 여신과의 대화에 몰입하기에 바쁘던 할도 이번만큼은 자신을 불러내서 이런 지상천국에 데려다준 형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 감사하는 표정을 본 주위의 여자들 모두가 최소 서너걸음 이상 멀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뭐… 뭔가 여러모로 충격적이네요.”
“크흠… 저렇게 살을 드러내고 다니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형진 같은 늑대가 덤빌까봐 위험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피부 아래 심장이 위치한 가슴골이나 쇄골, 상완은 당연한 얘기고, 허벅지도 잘못 찔리거나 베이면 위험한 급소인 건 마찬가지. 허벅지 아래에는 대퇴 동맥이 있는데, 쉽게 끊어지기는 어렵지만 한번 끊어지면 크고 강한 근육들 속에 있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지혈조차 불가능하다.
딱 봐도 전투를 위한 무기나 방어구를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그런 급소는 그냥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다니. 그렇지 않아도 암살에 도통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저렇게 보여도 실제로는 안에 전부 갑옷으로 칭칭 감고 있는 거야. 허세와 망상의 권능 때문에 겉으로만 저렇게 보이는 거지.”
“허…”
“그런 일에 권능을 남발하다니.”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빙긋 웃고 있는 형진을 보며 크루그가 물었다.
“설마 우리들도 저런 모습을 해야 하는 겁니까?”
“물론. 일단 저들 속에 섞여야 뭘 해도 할 수 있을테니.”
“그건 좀…”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카트린이 저렇게 파렴치한 옷차림으로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크루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상태에서는 이미 늦어버렸다. 일의 주도권이 이미 형진에게 넘어와 있기 때문이다.
“공포와 죽음께서 명하신 일이야. 마음에 좀 안들어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도록.”
물론 공포와 죽음께서 저렇게 옷을 입고 다니라고 명한 적은 없다. 그저 허세와 망상이 만들어 놓은 이 거짓된 천국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일을 형진에게 일임했을 뿐.
하지만 식구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숨을 푸욱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형진을 너무나도 잘 아는 유아만이 그간의 학습 효과 때문인지 잔뜩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크흠. 그래서 말인데, 일단 모두들 소속된 지부를 변경해야겠어.”
“지부를요?”
“응. 이번 일을 위해 특별히 ‘거짓된 천국’ 지부가 생겼거든. 참고로 총괄 지부장은 바로 나야.”
“에엑.”
“헐. 단숨에 총괄 지부장이라니. 도대체 몇 단계를 건너 뛴 겁니까.”
식구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형진이 총괄 지부장까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포와 죽음이 이번 일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카트린과 하마란은 다른 신을 모시고 있긴 하지만, 일단 유아처럼 조력자 자격을 줄게.”
“조력자요?”
“응. 별 의미는 없지만 메시지라든가 필요한 기능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니까 받아들이도록.”
“네.”
그렇게 일단 카트린과 하마란에게 조력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을 마친 형진은 모여 있는 식구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원래는 좀 있다가 할 생각이었지만, 모처럼 이렇게 함께 왔으니 지금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뭘요?”
“길드 창설.”
“길드요?”
이들도 길드가 뭔지는 안다. 하지만 이들이 사는 세계에서의 길드란 대장장이나 상인들처럼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의 이익 단체를 말한다. 본래 지구에서의 역사를 따져 봐도 길드는 이런 식의 이익 단체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게임에서 쓰이게 되면 조금 다른 의미로 바뀐다. 아니, 어떻게 보면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모험가나 유저들이 모인 이익 단체라고 생각한다면 그뿐이니까.
사실 지금 여기 모인 이들은 식구라는 말 그대로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생활하는 공동체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서로 다른 교단에 속해 있으며 어떤 형태의 강제적인 구속력을 지닌 집단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만들어지는 길드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 형진이라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목적과 행동을 함께 하는 별개의 단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끼리도 그렇지만, 앞으로 이 세계를 평정해 나감에 있어서 이곳에 교단을 세우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려면 작게나마 기반이 필요해. 지금 만드는 길드는 그 첫 시발점이 되어줄 거야.”
“그럼 앞으로 이 거짓된 천국의 주민들도 참여하게 되겠군요.”
“뭐… 형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면 그렇게 하세요.”
“이거 참… 어째 진님 옆에 있으면 쉴 틈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혹시 교단 외의 독자적인 단체를 만든다는 것에 거부감을 지니는 이가 나올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모두들 간단하게 허락해 주었다. 맨날 변태라고 욕하면서도 의외로 꽤 신뢰를 받고 있었나 싶은 기분에 형진은 어쩐지 기분이 뿌듯해졌다.
“뻘짓 하면 공포와 죽음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까 상관없겠죠.”
“근데 이곳에서도 천벌 내려지는거 맞나요?”
“글쎄요.”
쳇. 그러면 그렇지. 결국 자신보다 공포와 죽음을 더 신뢰하고 있는 건가.
끙. 조용히 있다가 이럴 때만 나타나서 한 마디씩 비수를 꼽고 사라진다. 역시 암살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찔러오는 그 치명적인 일격은 비교할 바가 없구나.
어쨌든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길드 관리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꽈릉!
“켁!”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할이 갑자기 어디선가 떨어져 내린 번개에 맞아 천천히 고목나무 쓰러지듯 옆으로 넘어가 버린다.
“응?”
“기습?”
식구들은 급히 자세를 낮추며 주위를 돌아보았고, 길을 지나던 사람들도 갑작스런 벼락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형진은 할의 모습과 주위의 풍경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대번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끙… 이걸 깜빡했군.”
“무슨 일이죠?”
“강화.”
“네?”
“지나가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강화하고 있었다고.”
“아…”
그제서야 식구들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했다.
“할. 일어나. 언제까지 누워 있을 참이야.”
“끙…”
할은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울상이 되었다.
“다른 세상에 와서도 전 이 지긋지긋한 천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까.”
“그러게 누가 도박에 그렇게 미치래.”
“흑…”
“어떻게 할래? 일단 돌아갈 거면 그렇게 하고.”
형진의 말에 할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버텨볼랍니다.”
“그럼 그렇게 하던가. 다만 다른 사람한테 불똥 튀지 않게 조금 떨어져서 와라.”
“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일부러 할에게 번개를 맞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형진은 조심스럽게 강화하는 사람이 없는 길을 찾아서 길드 관리소로 향해야만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오셨는지요?”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의 노인 하나가 카운터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머리 위에 떡 하니 길드 관리소장이라는 글자를 달고서.
“…”
식구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이곳이 일반적인 세상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길드를 만들고자 왔습니다.”
“그렇군요. 금화 열 개입니다.”
“…”
참으로 일 잘하는 NPC다. 딱 필요한 요점만 딱 집어서 말하는 아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금화 열 개…”
옆에서 듣고 있던 유아의 입이 딱 벌어진다. 하기야 그녀는 주화 몇 개가 없어서 굶어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금화 열 개가 아무렇지 않게 오고가는 지금의 상황은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 그게…”
형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냥 당연히 공포와 죽음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으려다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저쪽 세계인 타나토스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써버리면 이쪽에서의 일이 제대로 진행되기도 전에 허세와 망상 또는 그 추종자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있다. 역으로 사교도 신전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그냥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공포와 죽음은 문제가 있다. 당장 이 자리에만도 신뢰와 헌신, 희망과 생명, 보호와 균형이라는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끙… 이거 골치 아프네.”
“‘끙… 이거 골치 아프네’로 정하시겠습니까?”
“아, 아니. 취소. 취소.”
“킥킥.”
형진이 당황스런 모습으로 얼른 취소하자 옆에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카트린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음, 뭔가 길드 이름으로 좋은 것이 없을까요?”
오귀스트에게 물었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군요. 그냥 ‘추종자’ 같은 것은 어떻겠습니까.”
“흠…”
요정들을 데리고 왔으면 아주 중2병스러운 이름을 마구 쏟아냈겠지만, 아쉽게도 형진은 이런 식의 작명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떠올리던 그는 문득 예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저승 세계를 탐험하는 내용의 그 소설 제목은 바로 타나토노트. 죽음을 뜻하는 타나토스와 항해자를 뜻하는 노트를 합쳐서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본래 이 길드의 창설자인 자신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식구들이 공포와 죽음의 신도이기도 하고, 또한 저쪽 세계의 이름부터가 타나토스이니 그곳으로부터 넘어온 여행자라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이만한 이름도 없을 것 같다.
“타나토노트. 길드 이름은 타나토노트로.”
형진은 아주 좋은 이름을 찾아냈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지만,
“타나토노트. 이미 있는 길드 이름입니다.”
“켁.”
길드 관리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대답을 내놓았다. 망할. 그러고 보니 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그러니 그럴 듯한 이름은 어지간하면 이미 선점되어 있을 수밖에.
“타나토노트1.”
“타나토노트1. 이미 있는 길드 이름입니다.”
“타나토노트2.”
“타나토노트2. 이미 있는…
그런 식으로 10까지 넘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있는 이름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망할.
“타나토노트10. 이 이름으로 하시겠습니까?”
“끙…”
뭔가 짝퉁 같은 느낌이 풀풀 풍기는 이름이라 형진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문득 카트린이 손가락을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
“음… 진 오빠랑, 크루그 오빠랑, 나랑, 유아 언니랑, 제랄딘 언니랑, 미엘 언니랑, 오귀스트 아저씨랑, 하마란 언니랑, 할 아저씨랑… 음… 여신님까지 하면 딱 열 명이네요.”
“그, 그런가.”
10명의 타나토노트. 뭐… 그럭저럭 구색은 맞춰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짝퉁 냄새 풀풀 풍기는 이름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럼 그걸로.”
길드 관리인은 형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말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축하드립니다. ‘타나토노트10’ 길드가 창설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