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89
교랑의경 289화
격앙된 북소리가 쉼 없이 울렸다.
“죽여라!”
“지켜야 할 가족과 백성들이 전부 성안에 있다. 형제들이여! 저 오랑캐들이 안으로 쳐들어가게 둬선 안 된다!”
성벽 위에 있던 이삼십 명의 병사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성으로 쳐들어오려는 오랑캐 백여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병사들과 깃발들이 쓰러지면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안 되는 건가. 이러다가는 정말로, 계속 버틸 수가······.
“지휘관님, 저길 보십시오!”
누군가가 갑자기 외쳤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들 사이에서 그 외침은 꽤나 귀에 거슬렸다.
이 난장판에 어딜 쳐다볼 겨를이 어디 있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병사들은 일제히 흠칫 놀랐다. 흠칫한 대가로 누군가는 오랑캐가 쏘아 올린 화살에 어깨를 맞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 병사는 어깨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기만 했다. 심지어 성벽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먼 곳에서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희미하게 반짝였다. 얼핏 보면 족히 수십 명은 되는 사람이 구불구불 줄지어 오고 있는 듯했다.
“원군이 오고 있습니다! 원군이 오고 있어요!”
먼 곳을 응시하던 이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은 채로 미친 듯이 외쳐댔다. 그의 외침이 들리기라도 하는 듯,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요란스러운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선두에 있는 기마병일 거야!
“에라이, 빌어먹을. 내 평생 이런 망신은 또 처음이네!”
유규가 말을 걷어차며 외쳤다. 그는 말꼬리에 마른 나뭇가지를 한 묶음 묶어 질질 끌면서 달렸다. 바닥에 끌리는 나뭇가지 끝에는 불이 붙어있어서 지나가는 곳마다 불길을 남겼다.
“망신?”
앞쪽에서 달리고 있던 서무수가 유규의 말을 듣고는 외쳤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적을 죽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진짜 망신이지요!”
서무수가 화살을 뽑아 들어 앞쪽을 향해 힘껏 활시위를 당기며 말했다. 그는 쉬지 않고 적군을 향해 한 발 한 발 화살을 날렸다.
불빛에 비친 서무수의 활을 쏘는 모습은 번개처럼 빨랐다. 매서운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만약 누가 서무수의 반대편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면, 마치 화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 폭포와 같은 화살들은 모두 서무수 혼자서 쏘아낸 것들이었다.
일당십(一當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서무수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대단한 놈이로구나. 활 쏘는 실력이 대단해!”
유규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는 자신도 질 수 없다는 듯이 화살을 뽑아 들었다.
후방에서 기습한 오랑캐 부대가 입고 있던 갑옷은 견고하지 않았다. 서무수 일행이 각자 손에 쥐고 있던 삼석궁으로 쏜 화살들은 오랑캐들의 몸을 가볍게 관통했다. 그들이 쏜 화살은 한 발 한 발이 가히 치명적이었기에, 뒤쪽에 있던 오랑캐들은 겁에 질려 허둥지둥 흩어지기 시작했다. 갈 곳을 잃은 오랑캐들은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급습을 당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급습하려던 자들이 되레 급습에 당하면 더욱 공황상태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성을 공격하던 오랑캐들이 갑자기 어찌할 바 몰라 하자, 성벽 위의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있는 힘을 다해 오랑캐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후문 앞에 있던 오랑캐 삼백 명은 뒤쪽 진영이 무너진 상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불빛까지 점점 가까워지자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소식은 노장이 있는 앞쪽 성벽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원군이 왔습니다! 후문은 막아냈답니다! 후문은 막아냈어요!”
전령병이 있는 힘껏 이 소식을 외치면서 모든 사람에게 전했다.
원군이 왔다고?
가을바람에 상반신을 드러낸 노장은 소식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가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노장은 손에 쥐고 있던 전고를 더욱 세게 두드렸다.
기쁜 소식과 사기를 돋우는 전고 소리가 합쳐지자, 전의를 상실했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성벽 위에서 대열을 재정비했다. 그들은 손에 움켜쥔 칼과 창으로 성벽을 오르려는 오랑캐들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손이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던 후문 위의 궁수들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활시위를 당기며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다.
성벽을 올랐던 오랑캐들은 하나둘씩 성벽 아래로 떨어졌고, 성벽 아래의 오랑캐들도 용곡성의 마지막 수비선을 끝끝내 뚫지 못하면서 공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노장의 팔뚝에는 점점 감각이 사라져 갔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앞쪽을 향해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후문 쪽에 가 있었다.
원군은? 원군이 왔다며? 왜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거지?
아니, 사실은, 애초에 원군이 없었던 거 아닐까. 이번에는 정말로, 성문이 뚫리겠구나.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로 노장의 얼굴이 반짝였다. 주변에 쓰러져가는 병사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전쟁 깃발을 쥐고 있던 잡부들까지 맨몸으로 맞서 싸웠다.
필승! 필승!
노장은 머나먼 하늘 끝자락에서 희미한 구령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번에는 구령뿐만 아니라 정말로, 수만 마리 말들의 말굽 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원군이 왔습니다! 원군이 왔어요!”
전령병이 좀 전과 다르게 흥분한 얼굴로 외치면서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뒤쪽은 무수히 많은 횃불의 불빛이 밤하늘의 반쪽을 덮고 있었다.
필승! 필승!
뒤에서부터 성벽까지 전해오는 구령 소리와 전고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성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적군은 드디어 퇴각 명령을 알리는 호각을 불었고, 성벽에 붙어있던 서쪽 오랑캐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물러났다.
퇴각했어, 퇴각! 지켜냈어, 지켜냈다고!
사십 년간 종군했던 나 주사(朱四)가 또 한 번, 욕되지 않게 사명을 완수했구나!
노장은 일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전고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천만다행이로구나! 천만다행!
여기저기 꺼지지 않은 불씨와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시체들을 본 주육낭은 용곡성 성문 앞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 아래 열일곱 소년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지옥 같은 처참함과 공기 중에 떠다니는 피비린내. 연무장에서의 주육낭이라면 평생 경험하지 못할 광경이었다.
이런 게 바로 전선이고, 전장이다. 이게 바로 목숨을 건 싸움이고, 하늘이 정해준 무장의 운명일 터!
주육낭은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포효했다. 그러고는 활을 뽑아 들어 하늘을 향해 화살 여러 발을 쏘아 올렸다.
“우리를 구해 준 이가 누굽니까?”
성문이 열리자 감격스러워하는 장병과 백성들은 노장의 외침과 함께 행렬을 맞이했다. 소년은 잠시 주춤했다.
저들을 구한 자는 누구인가?
그야 물론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달려온 우리 장병들이지. 맹렬한 기세로 전고를 울리고 횃불을 흔들며 달려온 우리 백 명의 장병들이 말이야. 그런데 그 장병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원래대로라면, 이 장병들은 수십 리 밖에서 모닥불 앞에 한가롭게 앉아 술을 마시고 농담이나 하면서 다음 날 행군을 준비했을 것이다.
성 하나를 구해내다니.
사실 이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장거리를 질주할 수 있었던 말 일곱 필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말 일곱 필. 아니지, 지금은 다섯 필밖에 남지 않았어. 한 마리는 소식을 전하러 돌아오는 도중에 쓰러졌고, 다른 한 마리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만약 그 말들이 없었더라면······.
만약 그 말들이 배반한 번인을 쫓아가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소식을 전하러 되돌아올 수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말이 여러분을 구했소.”
주육낭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워낙 시끌벅적한 분위기였기에 주육낭의 중얼거림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머나먼 동쪽 하늘을 내다보았다.
말 일곱 필로, 성 하나를 구해 내다니. 그 여인은,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말을 선물한 것이었을까?
* * *
하늘이 맑게 갰다. 전투의 잔해가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성 안팎은 얼추 정리가 다 되어 갔다.
어젯밤 성에 들어온 서무수 등의 소속 부대 외에 서쪽 오랑캐의 계략에 넘어가 병사를 이끌고 용곡성을 떠났던 대군도 성으로 복귀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장병들은 포로로 잡아들인 오랑캐들을 일일이 확인했고, 군관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번 전투에 대해 논의했다.
새벽녘에는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서북 감찰사와 병마 부총관이 용곡성에 도착했다. 더 이상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시점이었기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상급 장수들의 몫이었다.
한창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서무수 형제 등은 병영으로 보내져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잡부 두 명이 나무로 만든 큰 목욕통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천막 안으로 들고 왔다.
“여기 따뜻한 물을 받아두었으니, 편하게 씻으십시오.”
두 잡부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돈주머니 하나를 그들에게 휙 던져주었다. 두 사람은 흥분한 얼굴로 돈주머니를 받들고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올렸다.
어젯밤 이 호걸들은 고작 몇 명이서 활을 들고 족히 수백 명은 되는 적군의 진영에 돌진하여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 주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서쪽 오랑캐들을 겁에 질리게 했던 이 사내들이야말로 진정한 호걸로 보였다.
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 사내들이 돈까지 많다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서봉추의 외침이 들렸다.
“뜨거운 물 더 있소? 뜨거운 물?”
잡부 두 명이 앞다투어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다른 잡부 두 명보다 한발 늦었다.
“거, 상도덕 좀 지킵시다. 이쪽은 우리 형제가 맡는 곳이오.”
좀 전의 잡부 둘이 성난 목소리로 다른 둘을 노려보며 외쳤다. 서봉추 가까이 서 있던 두 잡부 역시 눈앞에 놓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땅에 침을 퉤 뱉었다.
“뭐라고? 정작 할 일이 있을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만!”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인 네 사람을 보고 서봉추는 귀찮다는 듯 돈주머니를 던지면서 재촉했다.
“에라이,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 지금 나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네 사람은 서봉추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는, 우선 이 사내의 시중부터 들고 보자는 생각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정말 신기하네. 딱 보아도 돈 한 푼 없는 졸병같이 생겨서는 돈이 저렇게나 많다니.”
“돈이 저렇게나 많은데 뭣 하러 군에 들어갔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들이야.”
네 사람은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고는 빠르게 천막 안으로 나무통을 옮겼다. 이들이 뜨거운 물을 긷는 동안, 서봉추는 천막 밖에서 다른 장병들의 부러움 섞인 눈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인네도 아닌데 목욕은 뭣 하려고 해.”
누군가가 시기 섞인 말투로 말하자 서봉추는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집에서 항상 씻어 버릇하다 보니까, 바깥에 나왔다고 해도 버릇이 바로 고쳐지질 않네.”
이때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병졸 하나가 갑자기 서봉추를 보면서 외쳤다.
“엇, 자네 혹시 개석보(介石堡)의 서봉추 아닌가?”
서봉추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정말로 아는 얼굴이 보였다.
“봉추, 자네들은 그때 도망가지 않았나?”
익숙한 얼굴이 하필 서봉추가 제일 싫어하는 도망이라는 단어를 써 가며 물었다.
“도망은 무슨. 우리는 그 누명을 벗으려고 경성까지 갔다 왔어. 조정에서 사건을 재조사한 뒤에 우리가 누명을 쓴 거라는 조서도 내렸다고.”
서봉추를 알아봤던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놀란 얼굴로 서봉추 가까이 다가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좀 전에 누가 여기 돈 많은 군졸 나리가 있다고 하더니만, 그게 자네들이었어? 봉추, 자네들 돈벼락을 맞은 거야?”
서봉추가 득의양양하게 어깨에 힘을 주고 대답하려던 찰나, 그의 뒤에서 풍덩 소리가 들려왔다. 서봉추가 깜짝 놀라서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그의 목욕통에 유규가 알몸으로 들어가 편하다는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저, 저 뻔뻔한 놈이! 거기서 당장 나오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