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22
“⋯⋯사묵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한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 드러났던 갈등은 점차 사라지고 고통이 차올랐다. 허나 그 이면에는 결연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난 네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선택으로 인해 그간 입은 모든 은혜를 저버리고 싶지도 않다! 사랑은 내게서 떼어낼 수 없는 고통이며 내 평생 추구해온 것이다. 허나 내 삶에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수록 한제의 눈에는 결연함이 차올랐다.
“사묵자처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도 존중한다. 허나 나는 내게 은혜를 베푼 모든 이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아. 그런 상황에서는 모완과 이평이 살아난다 해도 모두 꼭두각시에 불과할 터. 네 스승이 정말로 내 아내를 되살릴 수도 있겠지. 허나 그가 할 수 있다면 나 역시 해낼 수 있다! 이 이한제의 아내는 나 이한제의 손으로 직접 살려낼 것이야!”
한제는 고개를 번쩍 쳐들어 저 멀리 서 있는 장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곧장 몸을 돌려 긴 빛을 그리며 멀어져갔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
‘모완아, 평아… 이런 결정을 내린 나를 원망하느냐⋯⋯.’
화작족 성지의 붕괴로 인한 충격과 화염은 화작족 절반을 파괴하고도 멈추지 않았다.
콰쾅!
우주를 진동시키는 폭발음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제는 정신이 반쯤 다른 세계에 걸쳐 있는 듯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의 지독한 통증에 잠식된 상태로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부상이 심각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지게 될 지경이었다. 그나마 고신의 육신 덕에 비정상적인 회복력을 보이는 것이 다행이었다.
“모완, 나는 반드시 직접 너를 살릴 것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평이와 함께 누구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게야. 평아, 너에게는 나무를 조각하는 법을 전수해주마.”
한제는 문득 고향이 매우 그리워졌다. 이 넓은 태고 성신, 어디에서도 소속감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 여기저기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했지만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짙은 외로움과 차가움뿐이었다.
한제에게 외로움이란 습관과도 같았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외로움은 수천 년간의 외로운 삶에서 자연스레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표정 또한 무뚝뚝함과 냉랭함뿐이었다. 간혹, 드물게 웃을 때에도 눈 속 깊은 곳의 떼어낼 수 없는 슬픔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해 어느 폐허가 된 수련성에 들어섰다.
까마득한 과거에는 찬란했을지도 수많은 수련자를 배출해냈을지도 모르는 수련성이었으나 지금은 온통 모래와 자갈뿐, 영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 같은 수련성이었다. 그나마 동쪽에는 나무도 있었으나, 그조차도 늦가을 날씨에 낙엽들이 노인 얼굴의 검버섯처럼 황량하게 뒹굴었다.
바람에 날리는 누런 낙엽 너머 구불구불 흐르는 강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제는 그 강 옆에 묵묵히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날렸는지, 누군가가 떨어뜨렸는지 강물에는 낙엽들이 둥둥 떠 있다가 물에 흠뻑 젖어 저 멀리로 흘러갔다.
뿌리로 돌아갔어야 할 낙엽이지만 바람에 날려 강으로 보내진 뒤에는 물살에 휩쓸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이르게 될 수도 한참이 지나 결국 강바닥 진흙의 일부로 변할지도 모른다. 낙엽들에 혼이 있다면 혼만이라도 강물에서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갈까?
수면에 비친 한제의 모습은 창백했고 냉랭했으며, 슬퍼 보였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군.”
한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봉계의 진을 통할 수도 있고 운해 9급 성역 균열에서 나타난 신비의 여인이 준 옥패를 이용할 수도 있다. 여인은 계외에서 그 옥패를 활성화하면 봉계의 진을 통하지 않고도 계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이후 옥패를 연구한 끝에 한제는 그 안에 수많은 금제가 들어 있음을 파악했다. 그중 일부는 금제에 통달한 그조차도 꿰뚫어볼 수가 없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금제들인 듯했다. 허나 그럼에도 한제는 이 옥패에 대한 그녀의 말에 7할 이상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허나 한제는 옥패를 활성화하지 않고 저물공간에 넣었다. 옥패의 금제를 활성화하려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정상이 아닌 상태로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확신할 수 없는 그 여인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다.
한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한데… 그는 과연 정말 장존이었을까?”
일곱 빛깔 화염 속 사내는 분명 자신이 장존이라고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는 매우 강력했다. 주작의 원령에도 대항할 수 있었고 정중로월이라는 어마어마한 신통술뿐만 아니라 사대개공이라는 술법을 사용하기 했다. 그런가 하면 사묵자의 일과 한제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화염 수련자였고 일곱 빛깔 주작을 소환하기도 했으니 배신자인 3대 주작인 건 맞다. 한데… 그가 장존이라고?”
한제는 사실 3대 주작이 장존일 거라 예측하긴 했다. 이는 태고 성신에서 장존의 내력이 매우 비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어느 부족 사람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요령의 땅에서 만났던 한 사람은 후에 장존의 제자였음이 밝혀졌는데 그도 화염의 술법을 발휘한 바 있다. 그것도 보통의 수련자가 수련한다고 해서 발휘할 수 있는 술법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들을 토대로 한제는 3대 주작이 곧 장존일 거라고 추측했다. 게다가 그렇게 본다면 장존회에서 타락의 땅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된다.
하지만 장존을 직접 만나본 후로 한제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청림이 그랬지. 장존이 익힌 본원은 태초의 힘이라고. 허나 그는 태초의 힘과 관련된 신통술을 발휘하지 않았어. 게다가 장존은 수만 년간 수련해온, 매우 교활하고 음험한 자임이 틀림없어. 한데 좀 전의 그자는 그 정도로 강하고 야심찬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수준의 강력한 존재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지.”
한제는 한참을 더 고민했지만 결국 답을 얻지는 못했기에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을 접었다. 대신 저물공간에서 단약을 꺼내 한입에 털어 넣고는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시작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사이, 한제의 몸은 조금씩 흐릿해지더니 주위 환경에 녹아들었다. 누구라도 육안으로는 한제를 발견하지 못할 터였다.
눈 깜짝할 사이 사흘이 지나갔다. 원신은 비록 호전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악화되지도 않았고 육신은 절반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무려 장존이라 칭한 자와 맞붙고 도망쳤으니 지금쯤 태고 성신에서는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을 터였다. 심지어 그전에도 추살령이 내려진 상태였으니 그들의 추격도 다시 시작됐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떠나왔을 때 타락의 땅은 누군가가 봉인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돌아갈 수도 없다. 지금 그곳은 나를 붙잡기 위한 덫과 다르지 않겠지. 결국 어떻게든 빨리 회복하는 수밖에 없겠군.’
한데 그때, 한제가 두 눈을 번득 떴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강력한 수련자일수록 직감도 정확하기 마련.
“뭔가 이상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던 한제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스쳤다.
사방은 고요했다. 가볍게 불던 가을바람도 멈춘 상태였다.
허나 하늘에 휘영청 뜬 달빛을 통해 한제는 강물 수면에 이는 미세한 파문을 볼 수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던 나뭇잎 역시 파문에 휘말려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제는 곧장 한 걸음 나서며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더니 세상에 녹아들려 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하늘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는데 숨 막힐 듯한 위압감이 퍼져 나가면서 균열 안에서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늑대의 울음 같은 그 음산한 소리에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균열에서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나더니 그를 잡아채려 했다. 한제의 축지성촌을 방해한 것부터 손바닥이 강림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듯했다.
거대한 손에서는 향불의 힘이 깃든 기운이 발산됐다. 누군지 몰라도 상대는 분명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였다. 사묵자와 같은 공열기 초기 수준의 기운이 느껴졌다.
포악한 기운이 한제를 덮쳐왔다.
한제는 망설임 없이 몸을 틀더니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새카만 손톱 하나가 소환됐다. 대황상인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손톱에서는 음산한 기운과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한제는 곧장 오른손을 홱 휘둘렀다. 손톱은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눈 깜짝할 사이 손바닥과 충돌했다.
콰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을 관통한 손톱은 펑 하고 무너져 내렸다. 허나 거대한 손바닥 또한 바르르 떨다가 검은 재가 되어 가을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이 손톱이 이토록 강력할 줄이야!’
한제가 손톱의 위력에 놀라는 사이 손바닥이 붕괴되면서 일어난 광기 어린 기운이 사방을 휩쓸었다.
“크흑!”
한제는 충격에 피를 토해냈으나, 곧바로 또다시 오른손을 휘둘렀다. 이번에 소환된 것은 고식엽으로 곧장 하늘의 균열을 향해 돌진했다.
“봉인!”
순식간에 1만 척으로 불어난 고식엽이 균열을 그대로 봉인해버렸다.
“아우우우!”
균열에서 늑대의 포효와 같은 낮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한제는 곧장 한 걸음 나서며 축지성촌을 발휘했다. 그렇게 그가 떠나가고 잠시 후에야 균열을 봉인했던 고식엽은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태고 성신의 우주 속. 한제는 진중한 얼굴로 결인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낙엽귀근(落葉歸根)!”
순간 허공이 번쩍이더니 고식엽으로 변해 그의 손으로 떨어졌다. 한제는 그제야 눈빛을 번득이며 또다시 축지성촌을 발휘해 모습을 감추었다.
“장존회의 추격이 다시 시작됐지만 상관없다. 평생을 위험과 함께해온 내가 아닌가! 태고 성신의 추살령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따르건, 얼마나 위력적이건, 나는 그 추격을 따돌리면서 수준까지 회복시키겠다!”
한제는 차게 내뱉었다.
한편 폐허가 된 수련성 하늘의 균열에서는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키가 30척에 달하는 거인의 사내였다. 상의를 입지 않은 그의 얼굴은 무척 험악했고 눈빛은 한없이 무정했다. 미간에는 푸른 늑대 머리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장존회 휘하의 4대 태고 흉족(凶族) 중 봉천랑족(奉天狼族)의 낙인이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깨에는 붉은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앉아 있었었다. 새초롬한 표정의 소녀는 매우 아름다워 손짓 한 번만으로도 뭇 남성의 심신을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미간에도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한제에게 낯이 익은 이 기이한 문양은 태고 성신 내에서도 매우 신비로운 봉멸족의 것이었다.
한제는 칠채계에서 봉멸족 노인을 만나 생사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제는 그 노인이 발휘했던 도술을 생생히 기억했다.
아직 세 번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세 번째 천쇠에 이른 소녀의 손에는 나침반이 하나 들려 있었다. 나침반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동쪽, 19만 7845리! 하지만 네 오른팔은 독에 감염됐으니 전투력이 3할은 떨어졌어. 내 도움이 없으면 그 독을 빼내기는 쉽지 않을 걸?”
거구의 사내는 소녀의 말에 차게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날렸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진동하면서 폐허가 된 수련성은 그대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봉천랑(奉天狼)
수련성이 완전히 무너졌을 무렵, 사내는 이미 허공으로 떠오른 상태였다. 대대적인 붕괴로 인한 충격이 다가오기도 전에 사내는 손을 휘둘러 모은 힘으로 빛의 공을 형성하더니 휙 내던졌다.
콰르릉!
빛의 공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왜곡을 일으키다가 이내 검은 구멍을 하나 생성했다. 사내는 곧장 그 구멍으로 들어섰다.
축지성촌을 연달아 발휘해 멀어지던 한제는 어느 순간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고식엽이 나타나 순식간에 후방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후방의 허공에 회오리와 함께 검은 구멍이 나타났고 그 너머로 봉천랑족 사내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검은 구멍은 나타나자마자 고식엽에 뒤덮였다.
“봉인!”
찰나의 순간 냉랭하게 외치는 한제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거대한 사내의 어깨 위에 앉은 소녀의 미간에 새겨진 낙인을 본 것이다. 허나 그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