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22
“선조의 머리는 가지고 가도 좋다. 허나 연도비는 두고 가라! 이에 대해서는 협상하지 않겠다. 난 이미 양보할 만큼 양보했다! 만약 네가 또다시 고집을 부려 연도비마저 데려가겠다고 한다면 난 저술로 인해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더라도 전력을 다해 너를 막을 것이다! 쌍자 자네도 마찬가지야. 이미 선황이 죽고 선조의 머리가 파괴된 지금 연도비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자네도 잘 알 것 아닌가!”
구제의 단호한 말에 한제의 두 눈동자는 살짝 졸아들었다.
그때, 잠시 고민하던 쌍자가 한제에게 말했다.
“이한제⋯⋯ 연도비를⋯⋯ 두고 가라.”
구제만의 이야기였다면 한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인을 구하기 위해 황궁에 온 그가 어찌 협박 하나로 목표를 포기하겠는가? 게다가 한제는 구제가 진짜로 저술의 위력을 개의치 않고 전력을 다 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허나 쌍자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미 쌍자에게 큰 빚을 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뭡니까?”
한참 뒤에야 어렵게 입을 뗀 한제는 구제가 아니라 쌍자 대천존을 향해 물었다.
“선황이 죽은 지금 연도비는 선족에 굉장히 중요해.”
쌍자 대천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제를 마주 보았다.
“이한제⋯⋯ 연도비는 두고 가야만 해.”
뒤를 이은 것은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해자 천존이었다.
“이곳 금궁은 이미 붕괴한 상태지만 스스로 회복이 가능해. 선족에게 금궁은 매우 중요한 장소야. 이곳에는 선조의 머리가 있었으니까. 선조의 머리는 선족 구역 72개 주에 묻힌 천외 흉수의 영혼을 제합하는 역할을 하지.
하지만 선조의 머리가 망가졌으니 그 흉수의 영혼들을 더 이상 제압할 수 없어. 이미 죽은 영혼들은 허무로 되돌아갈지 몰라. 그렇게 되면 선족 구역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게 될 거야.”
해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심각해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심지어는 각 대륙이 붕괴하고 흩어져 사라지면서 모든 선족 수련자가 엄청난 재난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어. 우리 도망족이 계획을 세웠을 때도 선족을 파괴할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한 사람을 이곳에 재워둠으로써 선조의 머리를 대신해 흉수들의 영혼을 제압하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지.”
해자의 말은 계속됐다.
“그렇게 택한 사람이 바로 연도비야. 그는 선조의 혈맥을 이었고 선조의 수준도 일부 전승했어. 게다가 오래 전 도망족은 그의 몸에 씨앗 하나를 심어서 천천히 키우고 있었어. 그것을 활성화하기만 한다면 연도비는 선조의 수준을 이어받아 대천존에 등극하게 되어 있지.
그렇게 얻은 대천존의 수준에 우리 도망족의 비술을 더하면 천외 흉수의 영혼을 제압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를 두고 가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나도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어.”
해자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그가 생명을 위협받는 일은 없을 거야. 그저 이곳에서 잠든 채 천외 흉수들의 영혼을 제압할 뿐이니까.”
쌍자 역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구제는 서늘한 눈으로 이를 지켜볼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때, 혼수상태에 빠진 채 누워 있는 광인을 힐끔 쳐다본 한제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선조의 머리를 놔두고 연도비를 데려가겠습니다!”
“소용없다. 선조의 머리로는 더 이상 흉수의 영혼들을 제압하지 못해! 이미 선황이 깨부순 탓에 그 안에 들어 있던 선조의 수준은 흩어져 버렸단 말이다!”
구제가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이에 한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눈빛이 흔들렸다. 구제의 말은 깊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사실임이 분명했다.
“이한제, 연도비를 두고 가라.”
쌍자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일단락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동안 한제의 마음속에서는 거친 파도가 몰아쳤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한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억지로 광인을 데려가려 한다면 구제는 물론 쌍자와 해자 역시 공격에 나설 것이다. 세 사람의 공격을 이겨내고 광인을 데려가기란 절대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만약 광인을 데리고 가버린다면 선족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터였다. 사실 한제는 그 문제에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이는 지금껏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쌍자 대천존에게 못할 짓이었다. 더구나 자양종 역시 소멸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한제는 결국 씁쓸한 눈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광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광인, 이 이한제가 다시 이곳 선족의 황궁으로 올 때, 그때 반드시 너를 구해주마! 맹세하지!’
한제는 이내 오른손을 들더니 선조의 머리를 내리쳐 저물공간에 챙겨 넣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구제, 굳이 나를 찾으려 할 필요 없다. 네가 날 찾지 않더라도 내가 돌아올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훌쩍 날렸다. 광인이 마음에 걸려 차마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이번에 황궁에 온 덕에 선조의 수준을 일부 전승하고 그 머리도 손에 넣은 데다가 대천존 태양의 윤곽까지 응집해내는 등 많은 이득을 얻었지만 끝내 광인을 구하지는 못했다.
이에 한제는 오히려 아쉬움이 더욱 컸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모든 이득을 포기하고라도 광인을 택했을 것이나, 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 결과였다.
‘도망족의 천재, 대혼문 선조는 선황의 영혼이 광인의 육체를 탈취하려 할 것까지 예측했는지도 몰라. 어쩌면 이 역시 계획을 일부였는데 내가 의도치 않게 그 계획을 망가뜨린 것인지도⋯⋯. 심지어 선황이 자폭을 통해 저술의 위력을 네 대천존이 분담한 것도 내다보았을 가능성이 커. 허나 그것을 알고도 미리 알리거나 저지하지 않았던 거지.’
한제는 광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해자를 위한 조치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도망족에 대한 내 분노를 달래기 위한 조치였을 수도 있겠군. 허나 대체 어떤 미래를 보았기에 내게 이렇게까지 큰 선물을 주는 거지? 설마⋯⋯ 그자에게는 내가 대천존보다 더 두려워할 만한 존재로 보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한제는 대혼문을 설립한 도망족의 천재가 남긴 말 속에 자신을 향한 존경과 공경의 뜻이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한편, 쌍자 대천존 역시 혼수상태에 빠진 연도비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훌쩍 날려 떠나갔다.
한제는 금궁의 파괴된 하늘을 떠나기 직전, 결국 참지 못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해자 천존이 도망족의 비술을 이용해 혼수상태에 빠진 광인의 몸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오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 금빛은 곧 태양을 형성해 광인을 뒤덮었고 이내 한제는 그로부터 대천존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윤곽만 드러났던 한제의 대천존 태양과는 다르게 완벽하게 응집된 태양의 빛 아래, 연도비는 선황을 이어 선족의 다섯 번째 대천존이 됐다. 허나 이 다섯 번째 대천존은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한제는 대천존에 등극한 뒤 금빛 태양에 휩싸인 채 천천히 하나의 산봉우리로 변해가는 광인을 바라보았다. 금빛으로 번득이는 산봉우리는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았다. 하지만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존재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오직 금색 산봉우리 하나만 외로이 솟아 있었다.
그 산봉우리가 생겨나자 파괴됐던 금궁의 대지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하늘 역시 점차 회복되다가 완벽한 원상태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금빛 산봉우리를 잠시 바라보던 한제는 이내 몸을 돌려 떠나갔다.
★ ★ ★
한제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선강 대륙 선족 구역 중주의 조성 황궁 안이었다. 폐허가 된 황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조각상 하나뿐이었다. 선조의 모습으로 조각된 이 석상은 마치 어떤 신통술을 발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한제가 말없이 그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의 옆쪽 허공에 파문이 일더니 그 안에서 쌍자 대천존이 걸어 나왔다.
“선조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어. 그의 비호도 곧 흩어져 사라지겠지. 앞으로 선족 내에서 더 이상 선황의 혈맥은 이어지지 않을 거야.”
쌍자 대천존 역시 조각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한제가 공손히 포권을 하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킨 것뿐이다. 많은 대가를 들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고맙다. 융합하기 전, 그저 철없는 두 소녀에 불과했던 나를 택해주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연도비를 데리고 가게 둘 수는 없었던 점, 이해해주길 바란다. 난 어쨌든 선족에 속해 있고 너는⋯⋯ 고족에 속해 있으니까.”
쌍자 대천존의 마지막 말에도 한제는 여전히 덤덤했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캐묻지도 사실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한제는 다시 한번 포권을 하며 쌍자 대천존에게 인사를 올렸다.
“난 선조의 두 눈을 얻었으니 이제 자양종으로 돌아가 폐관수련을 할 것이다. 너는 곧장 떠날 생각이냐? 아니면 나와 함께 자양종으로 돌아가겠느냐?”
“대혼문에 가보고 싶습니다. 그 후에는⋯⋯ 선족 구역을 떠날 생각입니다.”
한제의 시선이 동주 쪽으로 향했다.
쌍자 대천존은 잠시 그런 한제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도운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는 모르겠구나.”
이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이내 보라색 빛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두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 소녀들은 고개를 돌려 한제를 바라보며 천진하게 웃더니 손을 휘둘러 인사를 하고는 두 갈래 빛이 되어 하늘을 갈랐다.
“아가 돌아가서 좀 자야겠어. 너무 피곤해.”
“하영, 일단은 돌아가서 랑이가 말 잘 듣고 있었는지 확인부터 하고 쉬자.”
“그래, 그게 좋겠어.”
청아하고 앳된 목소리가 방울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한제는 멀어져 가는 두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포권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이내 감았던 눈을 번쩍 뜬 그는 몸을 훌쩍 날렸다. 그는 뒤편 폐허가 된 황궁 안에서 묵묵히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해자를 끝내 보지 못했다.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해자의 표정은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가자.”
해자의 뒤에서 피곤한 얼굴로 걸어 나온 구제 대천존이 말했다. 그의 몸도 점차 검은 기운으로 뒤덮이기 시작한 상태였다. 더 이상 저술의 위력을 억누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모양이었다.
“네가 저자를 막지 않았던 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저자는 비범하고⋯⋯ 난 늙었어. 도망족인 네가 저자와 좋은 연을 맺어둔다면 좋겠지.”
검은 기운으로 뒤덮인 구제는 자애로운 눈으로 해자를 바라보았다.
조성 황궁이 파괴되고 선황이 몰락했다는 이야기는 구제의 압박으로 인해 널리 퍼져 나가지 않았다. 폐허가 됐던 황궁 역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빠르게 원상복구 됐다.
선황은 다시 폐관수련에 돌입했다고 알려졌다. 연도진은 본래 거의 폐관수련을 해왔었기 때문에 선족 수련자들은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한편, 북주의 빙하로 돌아간 무봉은 스스로를 얼음으로 봉인한 채 그 안에서 체내로 스며든 저술의 위력을 몰아내는 데 집중했다. 한제와의 싸움에 나서지 않았던 그는 도일이나 구제에 비해 저술의 영향을 덜 받았기에 그만큼 수월하게 그 위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선조의 두 귀까지 손에 넣었으니 저술의 위력으로 이루어진 검은 기운을 모조리 몰아낸 뒤로는 수준을 대폭 상승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한편, 치욕감을 애써 억누르며 만신창이가 된 육신과 극심한 고통에 뒤덮인 심신을 이끌고 도일종으로 돌아온 도일도 곧장 폐관수련을 시작했다. 그의 체내에 스며든 저술의 위력은 완전히 활성화된 상태라 보통 방법으로는 절대 몰아낼 수가 없었다. 허나 그는 대천존이었다. 절대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쌍자가 그를 ‘가면’이라 부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수준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체내 저술을 몰아내기 위해 도일종 내 천존과 약천존, 그리고 여러 금존을 불러들인 뒤 그들이 이 저술의 영향을 분담하게 했다.
한데 선조가 남겨둔 저술의 위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금존은 그것을 접하자마자 죽음을 맞다. 천존 역시 온몸이 곧장 썩어 들어가며 비참한 비명을 내질렀고 금존보다는 꽤 오래 버텼으나 결국에는 모두 죽고 말았다. 오직 약천존들만이 그 강력한 수준으로 저술의 위력을 견뎌냈지만 치러야 할 대가는 굉장히 컸다.
휘하의 모든 천존과 약천존에게 저술의 위력을 분담시킨 도일은 나아가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많은 이에게 저술을 분담시킬수록 유리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 잔인한 분담 작업으로 인해 도일종은 거의 죽은 종파가 되어 버렸다.
해자를 데리고 제산으로 돌아온 구제 역시 곧장 폐관수련을 시작했다. 본디 선족 대천존 중 가장 강력했던 그는 검은 기운에 뒤덮여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힘으로 그 위력을 천천히 몰아낼 수 있었다. 여기에 도망족 술법을 활용한 해자의 도움까지 더해져 구제의 몸에 깃든 저술의 위력은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탐욕을 부리지 않았던 덕분에 저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천존, 쌍자는 자양종으로 돌아가자 폐관수련을 하면서 선조의 두 눈과 융합했다. 덕분에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 두 소녀는 환생 과정에서의 사고로 인해 약해졌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