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44
한제가 황궁 정전에서 1천여 명의 도고 일맥에게 둘러싸인 채 돌진하다가 하늘에서 울려 퍼진 현라의 한숨 소리를 듣기 직전, 도고 황성 밖의 어느 민둥산에서는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산봉우리는 안이 텅 비어 있었지만 대천존의 신식으로도 산 밖에서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에는 거대한 진이 하나 있었는데 어찌나 복잡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핑핑 돌 정도였다.
하얀 빛을 발하면서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이 진은 매우 기이했고 중앙에는 흐릿한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일곱 색채로 뒤덮인 인영은 쉬지 않고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이따금 진을 두들겼다.
그가 또 하나의 결인을 그려 진을 두들긴 순간, 거대한 진의 위로 도고 황궁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듯한 허상이 하나 떠올랐다.
이 황궁의 허상에는 수많은 흑백 점이 있었다. 검은 점만 해도 수만 개에 달했지만 하얀 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얀 점은 황궁 허상을 거의 가득 메운 상태였고 심지어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특히 광장과 정전 사이에는 하얀 점 1천 개가 빽빽하게 모여, 가운데 있는 붉은 점을 둘러싸고 있는 상태였다.
“검은 점은 죽은 영혼을 하얀 점은 생기를 의미하지. 그리고 저 붉은 점은⋯⋯ 한제야, 우리는 이렇게 또 만나는구나! 크하하하!”
일곱 색채의 빛 속에서 흐릿한 인영은 거친 목소리로 웃었다.
“난 당시 그녀의 잔혼을 뽑아다 도고 황존에게 넘겨주었다. 그자는 내 예상대로 그 잔혼과 어울리는 육신을 찾아 융합시킨 뒤 황후로 삼으려 했지. 너 역시 내 예측대로 도고 황궁으로 찾아왔구나. 죽이고 또 죽여라. 네가 많은 자를 죽일수록 나는 큰 이득을 얻을 터이니!”
일곱 색채의 빛으로 이루어진 인영은 말끝에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오른손을 들어 하얀 빛을 왼손을 들어 검은 빛을 소환했다.
두 가지 빛은 인영을 에워싼 일곱 색채의 빛에 섞여들었다. 이제 이 인영은 총 아홉 색채의 빛에 둘러싸이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나타난 한 줄기 회색빛 역시 주위를 맴돌다가 섞여들어 인영은 총 열 가지 색채의 빛에 뒤덮이게 됐다.
“이건 동부계에서 응집된 회색 분신이다. 드디어 완성됐지.”
흐릿한 인영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 섞여든 회색 빛은 한제가 동부계를 떠났을 당시 현라 대천존도 모르는 사이에 나타났던 어스름한 빛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난 한계에 봉착해⋯⋯ 이한제의 살육으로 생성된 죽음의 기운만⋯⋯ 흡수할 수 있을 뿐. 그렇지 않았다면 내 직접 살육을 벌여 필요한 죽음의 기운을 모두 마련했을 것을⋯⋯.”
인영의 말은 두어 번 정도 끊겼다. 마치 무언가의 제한을 받고 있는 것처럼, 죽음의 기운을 충분히 모아서 달성할 목표는 그 자신조차 두려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라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는 것처럼⋯⋯.
“이한제가 동부계에서 행했던 살육은 참으로 만족스러웠어. 허나 선강 대륙으로 온 이후 선족 구역에서는 좀처럼 살육을 저지르지 않았지. 그곳에서도 살육을 벌였더라면 난 이미 필요한 죽음의 기운을 모두 모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니 도고 일맥을 이용하는 수밖에⋯⋯. 미리 그녀의 잔혼을 뽑아 충분한 준비를 해뒀으니 망정이지.”
또 다시 ‘그녀’를 언급할 때 목소리를 떨던 인영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두 눈을 서늘하게 번득였다.
“이미 결정을 내린 마당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기껏해야 지능과 이성을 잃을 뿐. 반면 성공만 한다면⋯⋯?”
흐릿한 인영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왔으니 실패할 리는 없다. 일단 황궁의 죽은 영혼부터 뽑아내자!”
인영은 이내 오른손을 들어 지면의 거대한 진 위, 황궁의 허상을 가리켰다. 그러자 황궁의 허상에 나타난 검은 점들이 경련하듯 떨더니 흐릿해졌다. 마치 거대하고 복잡한 진에 흡수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진의 힘이 모종의 힘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흡수되던 검은 점들이 바깥쪽으로 맹렬히 튕겨 나오면서 다시금 또렷해졌다. 진은 그 점을 흡수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듯했다.
“그들이⋯⋯.”
열 가지 색채의 빛에 휩싸인 인영은 순간 급변한 표정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 ★ ★
도고 황성의 황궁 안 정전 광장. 하늘에서 들려온 한숨 소리에 한제는 자신이 지금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도 주위에서 36살이 달려들고 있다는 것도 수만 척 앞에 도고 황존이 있다는 것도 잊은 듯 우뚝 멈추었다.
두 눈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은 점차 흩어져 사라졌고 광기와 포악함 역시 조금씩 물러났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씁쓸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반드시 자신을 저지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현라가 오기 전에 도고 황존을 죽이고 이모완을 데리고 떠나기 위해 별다른 설명 없이 곧장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한제는 일찍이 대혼문 선조가 남긴 옥패를 통해 점술로 도고 황존의 생각과 행동을 똑똑히 확인한 상태였다. 심지어 도고 황존이 침상에 누운 송세정을 바라보며 했던 혼잣말까지도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을 조합했을 때, 도고 황존이 송세정에게 한제와 함께 술을 마시도록 명한 것은 한제의 슬픔을 느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송세정과 융합한 잔혼이 한제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어쩌면 둘이 부부였다는 사실을 예측했기에 송세정을 앞세워 그를 자극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한제로서는 도고 황존 엽도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한제에게 이모완이라는 존재는 역린과도 같았다. 역린을 건드려도 참을 수 있다면 역린이 아닐 것이다.
그 와중에도 황존을 몰래 기습해 암살하는 쪽을 택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이성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제의 수준과 지위를 감안한다면 궁에 난입하여 대놓고 황존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분노로 인한 우발적인 행동이라고 치부할 여지가 있으나, 암살은 다르다. 이는 냉정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일 수밖에 없는 만큼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의 스승인 현라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터였다.
“스승님⋯⋯.”
한제는 포권을 하더니 하늘에서 나타난 상대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사방에서 달려들던 36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살기를 번득이며 단숨에 한제와의 거리를 좁혔다.
하늘에 나타나 한제를 보고 있는, 전보다 훨씬 더 늙은 듯 보이는 현라가 아래로 뻗은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36살은 단번에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들뿐만 아니라 한제를 포위한 도고 일맥 사람들은 광풍에 떠밀렸다. 이제 한제를 중심으로 반경 1만 척에는 오직 그만이 남게 됐다.
“현존, 이한제 저자가 내 궁에 쳐들어와 황후를 강탈하려 했네. 극악무도한 대역죄를 저질렀단 말일세! 제자가 이런 짓을 꾀했으니 현존이 직접⋯⋯.”
도고 황존은 따지듯 으르렁거리며 몇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 떠 있던 현라가 고개를 홱 돌렸다.
“황제께서는 물러나 계시게!”
그 순간, 도고 황존은 몸을 바르르 떨며 피를 토하더니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현라가 감히 자신을 다치게 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따지려 들었지만 현라의 두 눈에 담긴 살기와 분노를 보고는 찬 숨을 헉 들이켜며 입을 꾹 다물었다.
“현라 대천존⋯⋯.”
오른팔을 잃은 황포 차림의 노인, 도고 황존의 아비가 무거운 표정으로 절을 올렸다.
“저자는 황권을 무시했고 우리 도고 일맥의 강자 수만을 죽였네. 결코 용서할 수 없어! 우리 도고 일맥의 수호자인 현라 대천존이 도리에 맞게 처리해줄 것을 믿네.”
현임 도고 황존보다 훨씬 지혜로운 노인이 강조한 것은 한제가 죽인 수많은 도고 일맥 강자들이었다.
극도의 분노 (6)
말없이 한제를 내려다보는 현라의 눈에는 고통과 슬픔, 혼란이 어렸다. 자신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는 제자를 보며 한참이나 입술만 달싹거리던 그는 한참 후에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제 역시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복잡한 눈으로 현라를 바라보았다. 그간 현라가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해만 끼치게 생겼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스승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한제는 손을 들어 올려 가슴팍을 두드리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이어서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가 뱉어낸 피는 광장 바닥에 고인 피와 융합해 강력한 붉은 빛을 발산했다. 그러자 광장에 고여 있던 대량의 피는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응집돼 수많은 몸뚱이를 이루었다. 방금 전 한제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의 것이었다.
당시 엽막은 몇 움큼의 피로 동부계 내의 고신과 고요, 고마를 만들어낸 바 있다. 고조의 혼혈을 가진 한제 역시 혼혈과 함께 얻은 유산 속 비술을 활용해 이러한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의 엽막이 발휘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신통술이었다.
응집된 몸뚱이는 무려 수만 개에 달했다. 빠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의 몸이 완전히 응집되면서 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전부 사라지자 한제는 창백한 얼굴로 양손을 휘둘러 그들의 영혼을 날려 보냈다. 영혼들은 각자의 육신을 찾아 돌아갔다.
이들은 분명 한제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사실 그가 죽여 없앤 것은 그들의 육신에 불과했다.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모두 그대로 거두어놓은 상태였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스승인 현라에게 반하는 짓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전에 죽었던 수만 명이 다시 살아나자 정전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던 1천여 명의 도고 일맥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도고 황존 역시 흠칫 놀랐고 안색은 전보다 한층 어두워졌다.
도고 황존의 아버지인 노인은 찬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한제가 살육을 벌이면서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제의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뜻이기에 노인은 상대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됐다.
되살아난 수만 명의 멍했던 눈동자가 곧 또렷해졌다. 다만 그들의 시선은 생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 한제가 발휘한 신통술이 아무리 강력하고 신비롭다 해도 이렇게 많은 이들을 되살리면서 본래 가지고 있던 고족의 힘까지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제가 지닌 혼혈의 힘 덕분에 수십 년 정도 수련을 거친다면 잃었던 고족의 힘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이들은 서서히 상황을 깨달았으나 한제를 향한 눈빛은 복잡했다.
특히 현라 휘하의 아홉 사람은 심경이 복잡했다. 이들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살아남았음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한편, 한제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혼혈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이런 비술에는 큰 대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현라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사실 황궁에 쳐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계획했던 바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든 그러지 못하든, 자신이 죽인 모든 도고 일맥의 혼을 거둬두었다가 현라가 오면 되살릴 생각이었다.
이 상황에 현라는 감동한 모습이었다. 그는 한제가 이러한 비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혼혈 덕분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족 구역에서는 대대로 혼혈 세 방울로 새로운 고족 일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문이 전해 내려왔다.
“스승님, 저는 고족 일맥 중 단 한 사람도 진정으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한제는 창백한 얼굴로 현라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도고 일맥의 전력을 약화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아닌가! 또한 궁에 쳐들어와 황권을 욕보인 것도 사실이지! 이 일은 머지않아 시고 일맥과 극고 일맥으로도 퍼져 나가게 될 터! 그럼 우리 도고 일맥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겠지! 저자는 죽어 마땅하네!”
도고 황존은 살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며 불쑥 외쳤다.
“한제야,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이유를 말해보아라.”
현라는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유일한 제자를 위해 스승으로서 해줘야 할 모든 것을 베풀었고 심지어 제자를 위해 고도 대천존에 맞서기도 했다. 더구나 방금 전까지 제자에게 줄 법보를 제련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데 그 제자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수호해 왔던 도고 일맥 사람들의 피로 황궁을 물들였다. 이러한 참상 앞에 그는 고통과 실망을 넘어 큰 슬픔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한제는 큰 대가를 들여 혼혈의 힘을 활용해 자신이 죽였던 모든 이들을 되살렸다. 더욱이 영혼을 거두어 두었던 것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저들을 완전히 죽일 생각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이는 틀림없이 스승인 현라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한제가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게야.’
현라의 두 눈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제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는 어지간해서는 이토록 잔인하고 포악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현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이유를 어렴풋이 추측해 나갔다.
“저 여인의 체내에 제 아내의 혼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가져가야겠습니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허락하지 않은 도고 황존을 죽일 생각입니다!”
한제는 확고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의 체내에 네 아내의 혼이 들어 있다고? 헛소리! 그런 우습지도 않은 말로 황후를 빼앗아가겠다는 것을 내 어찌 허락하겠느냐?”
도고 황존은 급변한 얼굴로 소리쳤다.
“또한 넌 황궁에 난입해 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달려들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믿을 것 같으냐!”
도고 황존은 냉소했지만 그 마음은 덜덜 떨려왔다.
“이유를 설명했으니 이제 그녀를 데려가겠다!”
한제는 1천 명에 달하는 도고 일맥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서늘한 눈으로 도고 황존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네 말을 어찌 믿느냐! 그런 말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 이 여인은 전생에도 내 비였다! 자 이제 어쩌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