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37
“홍접!”
숲에서 홍접이 걸어 나왔다. 홍접의 용모와 자태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두 눈만은 생기 없이 아득했다. 마치 목각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홍접이 가까이 다가오자 건풍은 맹렬히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눌렀다. 순간, 홍접의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고 생명력 역시 희미해져갔다. 반면 건풍의 안색은 갈수록 붉어졌다. 혼백의 폭발로 인해 입었던 내상이 빠르게 회복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손을 거두고 한제의 공격에 베인 손가락 끝의 상처를 살폈다. 그 상처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피가 배어나왔다.
“핥아!”
건풍은 손을 홍접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홍접은 작은 입을 벌려 건풍의 손가락을 입에 물고 혀를 내어 천천히 상처를 핥았다.
그러는 동안 건풍은 한제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한제, 감히 나를 다치게 하다니, 죽여 버리겠다. 스승께서 노망이 나신 것인가? 어찌 사매에게 네놈의 도심을 거두라 명하셨단 말인가? 네 경지는 나의 것이고 사매의 경지 역시 나의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바꾸지는 못한다. 흥, 스승의 경지 역시 언젠가 내가 삼켜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방금 전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나저나 존혼번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군. 둔천 늙은이도 미친 건가? 그 법보를 주작국에 헌납하지 않고 저 녀석에게 줘버리다니! 허나 이미 스승님은 존혼번을 손에 넣기로 마음먹으셨으니 네놈도 오래 가지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한편, 한제와 둔천은 순식간에 연혼종으로 돌아갔다. 연혼종은 그들이 떠났던 몇 개월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연혼종으로 돌아온 둔천은 쉴 새도 없이 한제를 데리고 뒷산의 금지 구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한제에게 저물대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안심하고 폐관수련을 통해 최대한 빨리 영변기에 이르게. 자네를 위해 보호 진을 쳐줄 테니,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자네를 방해하지는 못할 거야!”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둔천은 한제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고맙긴, 자네도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 약속하지 않았나.”
한제는 둔천의 두 눈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선배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둔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지 구역의 동굴 입구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후 선력을 펼쳐 보호 진을 배치했다. 그의 앞에 십억존혼번이 떠올랐다.
“저 녀석에게는 패기가 있어. 1억 개의 혼백을 자폭하게 하다니. 그 혼번이 허상인 분번이라 다행이지. 그 자폭에도 주번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나저나 주번을 가지고 그런 짓을 벌였다면 골치가 아팠겠지.”
둔천은 추억에 젖은 듯한 눈으로 혼번을 바라보았다.
“역대 선조님들, 후배 둔천의 수명이 끝에 달했습니다. 곧 뵈러 가겠습니다.”
둔천이 슬픔 어린 눈빛으로 마치 진짜 선배를 대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십억존혼번을 두드렸다. 그러자 신선의 풍모를 한 영변기 수준의 주요 혼백 하나가 나타나 자애로운 눈으로 둔천을 바라보았다.
둔천은 그 혼백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형, 존혼번을 천우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선유족이 쳐들어오고 있는 지금 연혼종을 무사히 보존하기는 어려워요. 천우가 후에 주작성을 떠나면 다른 수련성에 우리 연혼종의 흔적을 남길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형의 점괘가 품은 진정한 뜻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둔천은 자애로운 눈앞의 혼백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사람이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죽을 장소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연혼종의 역대 선조들께서는 모두 윤회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겸허하게 지능을 버린 뒤 주요 혼백이 되셨지요. 이 둔천 역시 뒤를 남기지 않겠습니다. 사형, 기다리십시오. 곧 뵈러 가겠습니다.”
한제는 가부좌를 튼 채 둔천이 준 저물대를 살피고는 흠칫 놀랐다. 이번 여정에서 빼앗은 선옥이 상당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양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내가 선계에서 가져온 것보다 수백 배는 많군. 연혼종이 수만 년 동안 그렇게 많은 영변기 수련자를 배출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어.”
한제는 숨을 고른 후 저물대를 흔들어 대량의 선옥을 꺼냈고 동굴은 금세 짙은 선기로 가득 찼다. 허나 이 역시 전체 선옥의 일부에 불과했다.
한제는 저물대를 잘 내려놓은 뒤 두 눈을 감고 호흡을 시작했다.
선력이 미친 듯이 그의 체내로 흡수되기 시작하더니 단전에 응집된 영력을 압박했다. 이 과정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반복한 바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영력은 갈수록 작게 응축되어 결국 주먹 크기의 구체가 되었다. 수련자들의 금단과 비슷했지만 그 힘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자 처음 꺼낸 선옥은 모두 회색으로 변하더니 가루가 되어버렸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또 다시 대량의 선옥을 꺼냈다. 체내로 맹렬히 들어온 선력이 경맥을 따라 움직이면서 영력을 응축시키는 동시에 피와 살, 경맥, 그리고 골격을 변화시켰다.
영변의 첫 번째 과정은 신체 변화였다. 이 과정을 통해 완전히 체질이 변한 수련자의 몸은 선력을 운용하기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어간다. 영변기에 이르는 데 대량의 선옥이 필요한 것은 이 과정 때문이기도 했다.
선력을 흡수하기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면 영변기의 첫 번째 단계를 완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과정은 원신을 실체화하여 허상을 실체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실체화된다고 해서 원신으로 육신을 대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허상일 때보다 몇 배는 강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힘도 가지게 된다.
원영을 갓난아이로 원신을 소년으로 빗댄다면 영변은 탈변이었다. 갓난아이를 장년으로 성장시키는 동시에 손에 무기를 쥐어준 셈이니 원신과 비교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문정기 수련자들은 사도환처럼 거대한 원영을 가지는데 문정기를 돌파하면 또 다른 변화를 맞는다.
하지만 그 단계는 지금 한제의 입장에서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저물대 안의 선옥 중 반 이상을 흡수하고 나니 주위는 가루로 변한 선옥들이 소복이 쌓였다.
한제 단전의 영력에서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생겼다. 그 순간, 그 균열로부터 엄청난 흡입력이 일어 눈 깜짝할 사이에 한제 체내의 모든 선력을 흡수했다. 심지어 방금 막 꺼내놓은 선옥들마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선력이 미친 듯이 한제의 몸으로 흡입되어 영력의 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점차 응결된 영력으로 만들어진 구체의 색이 천천히 바뀌어갔다. 처음에는 푸른색이었는데 이제 천천히 금빛이 돌고 있었다.
한제는 그 변화를 또렷이 느꼈으나 마음의 동요는 전혀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변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잔잔했다.
잠시 후, 모든 선력이 그 균열 안으로 흡수되자 영력 구체의 색은 완전히 금색이 되어 보통 사람이라면 금단과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그 금색 구체가 진동하더니 점점 더 많은 균열이 일었다. 그러더니 결국 쾅 소리와 함께 깨지면서 대량의 선력이 맹렬히 흘러나왔다. 한제의 원신은 순간 그 거대한 충격에 체내로부터 30척 정도 밀려났고 그 힘이 너무 강렬해 바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한제의 원신은 상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체내의 변화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금색 구체가 깨지면서 일으킨 기세에 체내의 경맥은 모두 가루가 되어 버렸고 몸은 마치 빈 상자처럼 텅 비어 버렸다. 그 안을 채운 것은 오직 선력뿐이었다.
모든 모공이 열리면서 수많은 선력이 흘러나오더니 사방을 맴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선력들은 칠공을 통해 다시 체내로 들어갔고 그렇게 들고나며 순환했다.
한제의 육신은 마치 수정처럼 점차 투명해져갔고 옷은 녹아내린 것처럼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 보이는 것이라고는 두 개의 저물대뿐이었다.
체내의 선력이 천천히 응결되어 한 가닥 한 가닥의 경맥을 이루었다. 오직 선력으로만 구성된 경맥으로 자연히 선력을 흐르게 하기에 적합했다.
그의 피와 살에도 변화가 일어 이제는 선력을 품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선 같았다.
이러한 변화가 며칠 동안 지속되었고 그동안 한제의 원신은 육신 위에 떠올라 있었다. 몇 번이나 육신으로 돌아가려 애를 써보았지만 매번 저지당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한제의 육신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겼다. 영물에게서 풍기는 듯한 유혹적인 향기였다.
주작
향기는 동굴 밖까지 퍼져나갔다. 그러자 동굴 밖에서 좌선을 하고 있던 둔천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감탄한 듯 내뱉었다.
“육신의 융화를 완수했군! 이제 두 번째 단계인 원신을 응결할 차례야.”
그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사방을 두드렸다. 순간 한 줄기 검은 빛이 번득이며 동굴을 감싸더니 주위를 밀폐했다. 그 향기가 밖으로 확산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향기는 마수들과 육신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된 혼백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연혼종은 혼백을 조종하는 종파다. 그 혼백들이 감히 방자하게 굴 수는 없지. 올 테면 와라. 이 존혼번으로 모두 흡수해주겠다.”
영변기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수련자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기에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특히 원신이 벗어난 육신은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수련자의 육신을 삼켜 신통력을 높이고 싶은 혼백과 마수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둔천의 보호를 받는 한제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다시 대량의 선옥을 꺼냈다. 짙게 피어오른 선력은 육신으로 흡수되지 않고 모두 원신 곁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편안하고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한제는 자신의 원신이 점점 커지고 또한 서서히 실체화되고 있음을 느꼈다.
순간, 그는 원신이 완전히 실체화된 후에야 육신과 합치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영변기에 이르는 데 성공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허나 원신을 실체화하는 데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둔천이 오른손을 휘두르자 혼번으로부터 주요 혼백 하나가 나타나 떠돌이 혼백 하나를 혼번 안으로 끌어들였다.
“벌써 19번째군. 모두 화신기 수준의 혼백이야. 영변기 수준의 혼백이 나타난다면 혼번의 주요 혼백이 하나 더 늘 텐데…”
둔천이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갑자기 보라색과 금색이 섞인 빛 한 줄기가 번쩍 하며 나타났다. 연혼종을 보호하고 있던 진은 그 빛을 막지 못했고 그대로 들어온 빛은 곧장 동굴 안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둔천은 두 눈을 번득였다. 그가 연혼종을 보호하는 진에 손을 써서 혼백을 막지 않도록 해두었기에 그 빛이 여기까지 들어온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잘 왔다.”
둔천은 두 눈을 번득이며 몸을 훌쩍 날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쥐어 달려들던 그 혼백을 사로잡으려 했다.
혼백은 그 자리에서 번쩍 하고 사라져 둔천의 손바닥을 피하더니 동굴을 향해 돌진했다. 이를 본 둔천은 재빨리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혼백 앞을 가로막았다.
“영변기의 경계에 이르러 있는 녀석이구나! 내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
그가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린 뒤 앞으로 손가락을 뻗자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이에 혼백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둔천이 훨씬 빨랐다.
“흡수!”
거대한 흡인력이 소용돌이에서 솟구쳐 오르더니 혼백이 곧 흡수되어 버렸다.
둔천은 흐뭇한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한데 그때, 연혼종을 보호하던 진에서 거대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온 진이 뒤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 충격에 연혼종의 세 개 봉우리가 흔들리면서 수많은 돌 조각이 떨어져 내렸고 산에는 쩌적 소리와 함께 균열이 일었다. 그 안에서 수련 중이었던 제자들이 놀라 뛰쳐나왔다.
하늘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운을 풍기고 있어 그 힘을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고 오직 그자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주작!”
둔천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곧바로 십억존혼번을 휘둘러 모든 혼백을 거둬들였다.
“둔천.”
주작은 노인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위엄으로 가득했다.
하늘은 색을 잃었고 모든 빛이 주작의 붉은 옷으로 몰려들면서 주작성 최강자의 기세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에게서는 조금의 영력이나 선력이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면 문정기 중기 수련자라 해도 나서서 달려들 수 없을 것이었다.
그가 바로 주작성 유일의 문정기 후기의 수련자이자 주작성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당시 주작국과 연혼종은 주작국이 위험한 순간 그 십억존혼번을 빌려주기로 약속한 바 있다. 오늘 나는 그 혼번을 빌리러 왔다. 내놔라, 둔천!”
주작은 덤덤한 말투로 느릿하게 말했다.
“헛소리!”
둔천은 십억존혼번을 꽉 쥐고 주작을 노려보았다.
“난 우리 연혼종과 주작국 사이에 그런 약속을 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니 더러운 변명은 집어치우고 가져가고 싶다면 어디 가져가봐라.”
주작은 둔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탄식했다.
“이는 1대 주작과 너희 연혼종의 시조가 협의한 일이다.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적에서 읽었지. 그러니 나는 약속대로 빌리러 온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