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17
17. 보고 싶어서
“자아, 한번 둘러보세요.”
부동산 중개인이 현관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수연이 한 발 나서기도 전에 정윤이 덥석 안으로 들어갔다.
“와, 잘해 놨네요. 요즘 오피스텔도 진짜 좋다. 아니, 도생이지. 도생.”
‘도시형 생활 주택’의 줄임말을 하며 정윤은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수돗물도 틀어 보고 두 개로 나뉜 방도 들여다본다.
“여기는 침실하고, 저기는 드레스룸하면 딱이겠다. 요기에 소파 넣고 TV는 이쪽에. 나도 혼자 살고 싶네. 주인은 뭐 하는 사람이랬죠?”
“대전에서 사업한대요. 사무실로 쓰려고 분양받았는데 세종으로 못 오게 되어서 세놓아 달라고요. 임대 사업자 등록도 되어 있어서 세도 저렴해요. 지난번에 살던 사람은 아파트 분양받아 나갔고요. 기운이 좋은 곳인가 봐.”
중개인의 말을 들으며 수연도 곳곳을 살펴보았다. 지어지는 건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서울에 비하면 시설은 훨씬 좋고 월세는 한참 낮았다.
“청사 다니기도 딱 좋죠?”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변기의 물을 내려 보았다. 전 세입자가 깔끔하게 쓰고 나갔는지 먼지가 조금 뒹구는 것을 빼면 새집 같았다.
“여기로 할게요.”
“엥? 더 안 보고?”
“비슷비슷하겠지 뭐. 크기랑 위치랑 가격이랑 다 마음에 들어.”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도 보고, 도시형 생활 주택도 세 번째 집이다. 수연의 말에 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더 보면 뭐 하니. 발만 아프지. 얼른 가계약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
정윤이 창가에 서서 밖을 보는 동안 수연은 집주인에게 계약금의 일부를 입금했다.
“입주는 2주 후 하신댔죠?”
“네.”
수연이 대답하자 중개인이 핸드폰을 보며 물었다.
“계약은 언제 할까요? 주인분은 주중 오전이 좋으시다고 하시네요. 목요일 11시쯤 어떠세요?”
“괜찮아요.”
시간 약속을 잡은 뒤 중개인과 헤어지고 건물 1층에 있는 로스터리 카페로 들어갔다.
“여기는 아인슈페너가 맛있지.”
“그럼 나도 그거 마셔야겠다.”
정윤의 말에 두 잔을 시키고 구석의 편한 자리에 앉았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내려왔는데 몇 집 보는 사이 해가 저무는 시간이 되었다.
“저녁은 뭐 먹을까?”
커피를 받아 온 정윤이 한 모금을 마시고는 바로 물었다. 수연은 하얗게 올라온 크림에 살짝 입술을 댔다가 떼면서 대답했다.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먹고 싶은 거 사 줄게.”
“그래? 그럼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을까? 막국수랑 수육도 땡기고, 상큼하게 월남쌈도 괜찮을 것 같고. 아, 뭐 먹지.”
정윤이 진지하고도 행복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한 번은 월남쌈을, 또 한 번은 막국수를 묘사하며 먹는 시늉까지 해 본다.
“좋아쓰. 오늘은 월남쌈. 쌀국수도 하나 시켜서!”
“오케이.”
메뉴가 정해졌다. 정윤은 소고기 등심을 먹을까 하다가 가난한 공무원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메뉴를 정한 거라고 했다. 그리고는 집에 두고 나온 나진과 영상 통화를 한 번 하고, 아직까지 목욕도 안 시키고 뭐 하냐는 거냐며 남편에게 잔소리도 하더니 핸드폰을 덮으며 묻는다.
“그래서, 뭐 새로운 일은 없고?”
정윤의 목소리에 수연은 통으로 된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남아 있던 노을이 넘어가고, 거리마다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 주말의 한적한 도로와 산책을 나온 가족들이 보였다.
“뭐지. 이 미묘한 침묵은.”
정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연은 정윤을 보며 흐리게 웃었다.
“있구먼. 있어. 있는 거지?”
정윤의 재촉에 수연은 가만히 정윤을 보다가 대답을 했다.
“있지.”
“으아아아. 아직 말하지 마. 킵해 놔. 월남쌈 먹으면서 본격적으로 들어줄 테니. 다 불어라. 안 그럼 너 오늘 집에 못 갈 줄 알아.”
정윤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서 나가자며 커피를 훌떡 마신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등으로 세차게 닦고는 수연의 등을 떠밀었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수연의 말에 정윤이 제안을 했다. 자신이 질문을 하면 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잔다. 라이스페이퍼를 뜨거운 물에 적시며 정윤이 물었다.
“남자입니까?”
“네.”
“어오어오어오! 넘 좋다! 나 완전 흥분돼! 나이는 몇 살?”
“동갑.”
“으어어어어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보름 전쯤에. 우리 집에서. 저수지 공사하러 왔대.”
“웬일이니, 웬일이니. 그 산골짝에, 남자가 제 발로!”
젓가락을 쥔 채로 정윤은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겠다며 머리를 쓱쓱 넘긴 다음, 신중하게 야채를 넣어 쌈을 싸고는 다시 물었다.
“진도는?”
수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기요, 질문이 뭔가 많이 건너뛴 것 같은데요?”
“뭐가?”
“이름이나 뭐 그런 거.”
“그게 뭐가 중요해. 그래서 진도는?”
수연이 대답을 하지 않자, 정윤이 다시 말했다.
“1, 손을 잡았다. 2, 키스를 했다. 3, 흐흐흐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정윤을 보며 수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크오오오 정윤이 뒤로 넘어가면서 기괴한 소리를 냈다. 입에 함박웃음을 물고는 수연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뭐냐, 뭐냐! 키스할 때까지 말도 안 해 주고! 요 내숭아.”
“너한테 질려서 그런다.”
수연이 말했다. 정윤의 남편인 정훈은 수연이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구남친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긴 것에 충격을 받은 정윤이 소개팅을 해 달라 난리를 쳐서 연수원 동기인 선배에게 부탁을 했었다.
그 이후로 수연은 정윤의 이야기를 1부터 10까지 다 들어야 했었다. 정윤이 소개팅에 늦었던 이야기부터 몰디브의 작열하는 햇살에 피부가 민감한 정훈이 화상을 입어 신혼 첫날밤을 아무 일 없이 보냈다는 이야기까지, 너무 많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왜 말을 안 했냐면.”
수연은 잠깐 뜸을 들였다. 정윤이 숨을 죽여 기다린다.
“전에 잠깐 만났던 사이라서.”
히이이익. 정윤의 숨이 넘어간다. 실토를 한 뒤 수연은 왠지 민망한 마음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웬일이니, 웬일이니를 반복하던 정윤은 팔을 걷어붙이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전에 언제? 네 연애사는 내가 다 아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몇 살에?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말 안 한 거야?”
“아니야. 그냥 대학 때, 잠깐.”
“왐마. 대학 때? 대학 때면 언제적 일이야. 야, 근데 너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서로 다른 대학으로 진학했어도 수시로 전화를 하며 시시콜콜 보고하는 사이였다. 대체 언제 남자를 만난 것이냐며 정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할 것도 없었어. 그냥 아주 잠깐.”
말을 하다 말고 수연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이라는 말로 축약하기엔 너무 긴 마음이었다. 정윤이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호오. 요거 요거 좀 미묘하네. 전에 만났던 사이라 이거지. 그땐 왜 끝났는데?”
왜 끝났냐면…….
“그땐 내가 너무 어렸거든.”
한 번도 상처받지 않고 자랐었다. 주변에서는 공부를 잘한다 칭찬만 해 주었고, 부모님에게도 넘치도록 사랑만 받았었다. 일이든 공부든 버겁고 부족한 실력일 때는 있었지만,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존재 자체로 모자라거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니었다. 태산의 어머니는 특별히 상처 주는 말도 하지 않았었다.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고서 앞으로도 태산과 친구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을 뿐이다.
지금 같으면, 자존심 같은 것 다치지 않았을 텐데. 네, 하고 대답 잘해 놓고 너희 어머니가 친구로 잘 지내래, 말을 전하고는 우리 정말 친구로만 지낼까? 약 올리면서 태산을 놀릴 텐데.
수연은 라이스페이퍼를 물에 담갔다. 말랑말랑해진 피에 야채를 올리다 말고 정윤을 바라보았다.
“정윤아.”
“어.”
“나이가 들긴 했나봐.”
“뭐가?”
“겁이 나.”
“겁?”
“응. 겁나.”
사랑을 안다. 사람을 파고드는 그 깊고도 뜨거운 감정을 안다. 찬란한 기쁨이었다가 더없는 슬픔이 되는 감정을 안다. 파도에 휩쓸렸다가 내동댕이쳐졌을 땐, 아무것도 남지 않았었다.
“연애 첨도 아닌데 뭐가 겁나냐.”
정윤이 말했다.
“처음이 아니니까. 이젠 다 아니까.”
차라리 모르면 겁 없이 덤벼 보기나 할 텐데, 이젠 무모함의 결과를 너무 잘 아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좋아도 나중에 후폭풍이 셀 것 같은 사람은 그냥 피해 가고 싶어지는 거 있잖아.”
“그치. 언제부터인가는 아무리 좋아도 내 인생이 먼저더라. 그런데 그 정도야?”
수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고민은 그뿐만이 아니다.
“나이도 나이라서. 가뜩이나 주변에서 난리인데.”
정윤이 알 것 같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수연 역시 결혼 적령기의 남녀에게 가해지는 걱정과 간섭, 참견을 견디며 살고 있다.
철부지 학생이었을 때도 두 사람의 환경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아프도록 느꼈는데, 나이가 든 지금은 어떠할는지.
“그렇다고 무책임한 불장난은 저지르고 싶지 않고.”
그럴 만한 성격이 못 되기도 했다. 수연의 말에 정윤이 피식 웃는다.
“우리도 이제 어른이 된 거지.”
“이리저리 시달리느니 그냥 이렇게 있고 싶은 거. 잠깐이라도 이대로 좋다가.”
어느 날 어느 시간에 각자의 사정으로 헤어진다 해도, 크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사이로. 참 좋았던 시간을 보냈던 조금은 아쉬운 사이로. 그렇게 남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만두게?”
수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만두려면 지금이어야 했다. 태산이 더 깊이 들어오기 전에, 오래 기다리기 전에, 추억이 쌓이기 전에, 하루라도 더 빨리.
“근데 그게 그냥 다 핑계였어.”
수연의 말에 정윤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실은 그만두기가 싫은 거지. 좋으니까. 좋아하니까. 헤어지면 이젠 진짜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시작은 못 하겠는데, 그만두기는 싫고. 애매한 태도로 자꾸만 시간을 벌면서 아직은 괜찮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저울질하는 척하면서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달라고. 마음은 이미 너에게로 흘러가 버렸는데.
“근데 있잖아.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 보니까 말이야.”
정윤이 수연의 앞접시에 야무지게 말린 쌈을 하나 올려 주면서 말했다.
“그게 다 별거 아니더라고. 아 뭐 연애가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적당히 놀다 헤어지면 어떻고, 죽을 만큼 아프면 또 어때. 그게 뭐 내 잘못이야? 인연이 그만큼인 걸 어쩌라고.”
정윤은 재빠른 손길로 쌈 하나를 더 말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 처음에 정훈이 별로 안 좋아했던 거 알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 그랬잖아. 구남친, 다른 말로 개새끼 그늘에서 찔찔 짜면서 말이야.”
수연은 피식 웃었다. 1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정윤이 똥차가 자기를 찼다며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그리고 다음 날 그 똥차가 너무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걸겠다고 울부짖었더랬다.
“근데 이상하게 얘랑은 뭐가 술술 풀리는 거야. 맛집엘 가도 그 똥차 새끼랑은 맨날 처기다려야 해서, 그놈이 이게 이렇게까지 해서 먹을 일이냐고 입이 댓발만큼 나오고. 너 알지? 나는 한 끼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한 거. 그걸 맨날 시비 거니까 그래서 또 싸우고, 맛집인데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고. 그래서 기분 나빠서 또 싸우고 그랬거든.”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가 나는지 정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데 정훈이랑은 그냥 한번 들려나 보자 싶어서 가면 희한하게 자리가 있다? 기다려도 10분을 안 넘겨. 그리고 두 번 정도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했었거든. 그때 정훈이가 그럼 자기가 거기 서 있겠다고, 나보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앉아서 쉬다가 오래.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해 주는데, 내가 그 지점에서 울컥했잖아.”
기억이 난다. 먹는 거 주는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라던 정윤은 그때 정훈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었다.
“있잖아, 정훈이는 맛있는 거 보면 내 생각난대. 아이구 저거 우리 정윤이가 좋아하는 건데, 우리 정윤이가 못 먹어 본 건데, 우리 정윤이가 좋아할 것 같은데, 그 생각에 자꾸 사게 된대. 나 만나러 올 땐 팔에 검은 봉지를 주렁주렁 걸고 오는 거야. 와…….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게 안 해 줬거든.”
정윤이 감동하는 표정을 짓더니 휙휙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암튼, 요점은 그게 아니라. 아무리 몸부림쳐도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이거지. 그리고 또, 그렇게 되는 놈이랑 만나서 결혼하면 뭐가 다르냐? 별거 없다 이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애 낳잖아? 남자고 뭐고 하나도 생각 안 납니다. 내 새끼 최고. 얘 낳으려고 이놈을 만났구먼, 그 생각밖에 안 든다니까.”
참사랑은 내 새끼뿐이라며, 정윤이 엄지를 척 올렸다. 사진첩을 열고는 나진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잘 보라며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거두어 가면서 묻는다.
“그 사람 이름이 뭐야?”
“장태산.”
“오, 장태산 씨. 뭔가 대륙적인 이름이다잉?”
정윤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사그라든 자리에 태산의 이름이 남는다. 수연은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윤을 아파트 앞에 내려 주고 수연은 내비게이션을 켰다. 목적지를 수연 가든으로 설정하고 주행 시작을 눌렀다. 어느새 깜깜해진 밤을 헤드라이트로 밝히며 천천히 운전했다. 사거리를 지나고, 터널을 지나고, 불이 환히 켜진 아파트를 지났다.
운전하는 내내 둥글고 커다란 달이 따라왔다. 어릴 적에 엄마에게 물어보던 생각이 난다.
엄마, 왜 자꾸 달이 나를 따라와? 하고 물으면 달님이 수연이가 좋아서 그러지, 라고 대답을 해 주었었다.
커다란 달이 자꾸만 쫓아와서, 가슴속에 둥근 달이 차는 것 같아서, 그 차오르는 달 때문에 자꾸만 숨 쉬는 것이 버거워져서, 수연은 자꾸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새 아파트는 사라지고 한적한 교외의 도로가 나왔다. 유난히 과속 방지턱이 많은 시골의 마을길을 지나자 조금 생뚱맞다 싶은 위치에 있는 지중해풍의 커피숍이 나왔다.
그리스. 커피와 차.
크게 써 놓은 간판을 보며 수연은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잠시 쉬어 가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 부모님께 잘 다녀왔다 인사를 하고, TV를 보며 하루를 보낸 이야기를 하는 일은 미루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고 싶었다.
수연은 하얀 외벽에 전구를 주렁주렁 걸어 놓은 커피숍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지나면서 겉으로만 보았을 땐 크지 않아 보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마당이 제법 컸다. 넓은 데크가 있고 야외 좌석도 꽤 많이 보였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바깥의 자리에 앉았다. 오렌지빛 조명이 둥글게 테이블을 비추는 자리였다. 의자에 놓인 담요를 무릎에 덮고 머그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하늘의 달이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오늘이 보름이던가, 엄마에게 묻던 아빠의 목소리가 기억나고, 세호야, 깨끗한 수건 좀, 하고 말하던 태산의 목소리도 기억이 났다.
충분히 망설이고 오래 고민하라던 목소리도, 입꼬리 한끝만 올리며 웃는 미소도, 수연아, 부르며 바라보던 눈빛도. 전부 다 생각이 나서. 그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서. 태산이 자꾸만 달처럼 따라와서.
수연은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세 번이 가기 전에 태산은 전화를 받았다. 수연아, 하고 이름을 부르며 받아 수연의 마음이 저릿했다.
“응.”
– 무슨 일 있어?
“아니.”
– 어딘데?
“그리스.”
수화기 너머에서 태산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수연도 빙그레 웃었다.
– 멀리도 갔네.
“응.”
수연의 대답 이후로 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대화처럼 느껴졌다. 달칵, 달칵, 수화기 너머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방향 지시등의 소리 같았다.
태산에게는 어떤 소리가 들릴지 궁금했다. 휘잉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릴지, 낮게 흐르는 음악 소리가 들릴지 궁금해진다.
“그냥.”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고서 수연은 말했다.
“보고 싶어서.”
잠깐의 침묵 후에 태산이 답했다.
– 기다려. 갈게.
아마도 여기가 우리의 시작. 수연은 담담히 대답했다.
“응.”
크고 둥근 달이 뜬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