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307)
307화 원탁 (1)
차분해지는 나무 향이 그윽한 서재.
‘딱히 변한 곳은 없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내 시야로 한 가지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가면.
내가 지난번 방문에 썼던 바로 그 하얀 가면이 텅 빈 벽에 걸려 있다.
‘쓰고 나오라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가면을 썼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복도 저 멀리에서 노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우릴 가비스.
어쩌면 내 모든 의문의 해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인물이자…….
“허허, 자네 왔는가. 기다렸다네.”
‘오리지널 클리어’를 했다는 말에 감정을 감출 생각조차 못하고 기뻐했던 노인.
“그동안 별 탈은 없었나? 그날 그렇게 자네를 보낸 다음에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내 얼마나 불안하던지.”
저렇게 시작부터 껄껄 웃으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며 정겹게 인사말을 건넨들, 방심할 수 없다.
지난날, 나는 봤으니까.
오르큘리스의 단장, 파멸학자 등.
어딜 가도 꿇리지 않을 강자들이 이 노인네 말에 꼼짝도 못하고 눈치만 살살 보던 것을.
“난 잘 지냈다. 근데 그때 그들은 어떻게 됐지?”
“응? 그들?”
“마지막에 규칙을 또 어겼다며 날 내보내고 갔지 않나.”
그제야 아우릴 가비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실패작들을 말하는 거였군.”
실패작이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은 그 단어를 통해 나는 본격적인 수 싸움이 시작됐음을 인지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노인네가 내가 경계할 만한, ‘실패작’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쓴 의도야 뻔하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나한테 질질 끌려다니던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일종의 채찍과 당근 변형판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채찍을 대상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휘두른다는 것뿐.
“실패작들이라면 그 방에 모여 있을 테니 걱정 말게 이번에도 소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는 그날 톡톡히 보여 줬으니.”
다른 자들에겐 가차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며 위엄을 세우는 반면.
대상에겐 한없이 따뜻한 모습만을 보인다.
그래, 이런 식으로.
“크흠, 그나저나 내가 배려가 없었군. 자네가 듣기에는 조금 그랬겠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자네가 그들과 다르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좀 전의 차가움과 대비되는 호의.
그 호의를 받은 대상은 생각하고 만다.
이 사람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저 호의에 나도 부응해야 한다.
그런 심리가 자연스레 무의식에 생기는 것이다.
뭐, 나야 이런 비열한 화술에는 면역이지만.
“자네는 특별하네. 그렇지 않나?”
노인네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모르겠는데.”
“응?”
“같잖은 수작은 집어치워라.”
나는 당근이 딱 질색이라서 말이지.
“……수작이라니, 말을 심하게 하는군?”
내 도발적인 말에 노인네도 표정을 달리하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저릿한 살기는 없었지만, 눈빛과 분위기에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야 이런 상대에게는 사전에 알려 줘야 하거든.
난 너랑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게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걸.
“당신이랑 이런 얘기나 나누러 온 게 아니다.”
“응……?”
“됐고, 이런 잡담이나 할 거라면 돌려보내 줘라. 아니, 아예 다음부터는 이곳에 오지 않게 알아서 잘 처리까지 해줬으면 좋겠는데.”
노인네는 짐짓 당황하더니, 억울하단 듯 외쳤다.
“자, 잡담이라니!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본 건 자네였지 않은가!”
아… 그것도 그렇긴 하네.
조금 상황이 웃기게 됐다.
근데 자기가 뭐 어쩔 거야.
“그럼 이게 다 내 탓이라는 건가?”
아무 데서나 뿡빵뿡빵 방귀를 뀌는 바바리안을 보며 나는 믿음의 중요성을 배웠다.
자기 자신을 향한 강한 신뢰.
그 굳건한 마음이 자신감을 형성하며 어떤 난관을 마주하고도 주눅 들지 않고 나아가게 해준다.
따라서…….
“아니, 자네 탓이라는 게 아니라…….”
“사과해라.”
당당히 요구한다.
“잠깐만, 진정해 보게.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리 예민하게—”
그것이 설령 억지일지라도.
지금 내가 바바리안의 몸이 아니라 이한수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사과하지 않겠다는 건가?”
“……허허, 나도 참 너무 우습게 보였나 보군.”
거듭된 요구에 늙은이가 정색했다.
아까와 달리 주변 공간까지 일렁거리는 것이 매우 심상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존나 무서웠다.
하지만…….
“사과해라.”
변하는 건 없다.
자기가 정색하면 뭐 어쩔 건데?
‘오리지널 클리어 유저’를 내쫓을 거야 뭐야.
“후우… 자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이내 늙은이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느새 주변 공간이 일렁이던 것도 멈춰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딱 봐도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빡친 척을 한 게 훤히 보였거든.
아, 화가 났던 건 진짜이려나?
“왜 자꾸 나를 도발하는 건가? 지난번엔 이렇게 예의를 모르는 친구가 아니었을 텐데.”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습게 보냐고? 날 우습게 본 건 당신이 먼저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습게 봤다니—”
“실패작이니 뭐니 말하고서 배려가 없었다느니 그러면 내가 굽신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
“…….”
의외로 늙은이는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실수였다느니, 그럴 의도는 없었다느니.
변명할 말이야 이것저것 많이 있었을 텐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네는 확실히 다른 자들과 다르군…….”
“……?”
“사과하겠네. 실패작이라 여겨졌던 원본을 깬 자네가 평범한 자일 리 없는데도 내가 자네를 너무 쉽게 대했네. 앞으로는 주의하지.”
어, 이렇게까지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빈말로 사과하면 대충 받아주고서 이후 대화에서 조금이나마 더 주도권을 가질 계획이었던 나로서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이것까지 의도한 걸 수도.’
“……그렇게 말하니, 나도 넘어가지.”
원래 말뿐인 사과는 받지 않는 주의지만, 여기서 더 바바리안질을 했다간 정말로 관계 자체가 파탄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받아주었다.
그렇게 조금은 부드러워진 분위기.
“자,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저쪽 방에서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나 나누세. 아, 혹시 원하는 차 종류가 있나?”
뭘 당연한 걸 물어.
“사이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
크으, 이거지.
원래라면 이런 생각을 해야 했을 타이밍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어야 했다.
한데…….
‘왜 이렇게 밍밍한 거 같지?’
얼음을 넣어달라 해서 그런가?
덜그럭.
얼음만 남은 잔을 탁상에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량감이 없는 건 아닌데 탄산이 약해진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전에 먹었을 때보다 뚜렷하게 맛이 없어졌다.
‘설마 이 늙은이가 앙심을 품고……?’
그나마 그럴듯한 이유가 떠올라 흘기듯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아우릴 가비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하는데 말일세…….”
조금 웃기긴 했다.
사실 어디를 보나 나 같은 조무래기 눈치나 살살 살피고 있을 양반이 아닌데.
‘그만큼 내가 이 늙은이한테는 중요하단 거겠지.’
내 노력이 어느 정도 들어가기는 했으나, 내 대우가 좋아질수록 경계심은 올라간다.
이 세상에 목적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없으니.
나도 청량감에 대한 고민은 접고,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대체 오리지널 클리어 유저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걸까.’
음, 글쎄. 나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다른 플레이어보다 게임 지식이 풍부한 것?
그건 맞지만,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여기 내 앞에 있는 늙은이는 아우릴 가비스. 즉, 게임 제작자니까.
내가 아는 지식은 당연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며, 지식을 가진 플레이어가 필요한 거라면 그저 그걸 나눠주면 그만.
그런데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 걸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크흠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하! 이 나를 앞에 두고 말인가!”
아우릴 가비스는 스스로도 이 상황이 어이없는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아, 물론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후, 설마 또 시작인 건가.”
“아, 아닐세. 난 단지 이런 상황이 오랜만이라 신선하다는 뜻이었네.”
“아, 그렇군. 잘못하면 오해할 뻔했지 않나.”
“……자네, 혹시 바바리안인가?”
어?
씁, 너무 티냈나?
내심 찔리긴 했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당황하지 않고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는 듯 흘려넘겼다.
“그딴 게 질문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농담이었네.”
표정을 보니 진짜 농담을 했던 거 같은데, 이제 좀 조심해야지.
“아무튼 질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괜찮으니, 눈치 보지 말고 해봐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노인네가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에 형평성에 관한 대화를 나눴지 않나. 내가 그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고심해—”
“짧게, 핵심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었네.”
그래,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잖아.
“흐음, 물건?”
“이걸세.”
아우릴 가비스는 길게 말하는 대신 안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보석 하나를 꺼냈다.
내게 있어서 굉장히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건…….”
위로 보나, 옆으로 보나 틀림없다.
원탁 중심부에 박혀 있던 그 보석이다.
허, 설마 이런 사연을 통해서 만들어졌을 줄은 몰랐는데.
그럼 역시 이 늙은이가 마스터?
“……혹시 뭔지는 알고 그런 반응을 하는 겐가?”
“아니, 그냥 비싸 보여서.”
“비싸다라…… 허허! 이건 그런 현실의 재화 따위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물건……. 크흠, 또 얘기가 딴 길로 샐 뻔했군.”
몇 번의 학습을 통해 자기 스스로 주접을 멈춘 아우릴 가비스는 신속하게 물건에 대해 설명했다.
“이 영적 공간에 존재하는 내 권한 중 몇 가지를 오브젝트화 해서 만든 물건일세.”
원리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애초에 그런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을뿐더러…….
원래 잘 모르겠을 땐 가만히 있는 게 최고인 법.
“작동법은 실로 간단하네. 이 보석 앞에서 진실을 말하면 녹색 빛이 켜지고, 거짓을 말하면 적색 빛이 켜지지. 한번 시험해 보겠나?”
사실 저게 등장한 순간부터 가짜일 거라는 생각은 버렸지만, 굳이 티내진 않았다.
그야 공짜 질문 기회를 준 셈 아닌가.
“아우릴 가비스, 당신 나이는 300살이 넘나?”
일부러 기준이 있게 말했다.
몇 살이냐고 물었다가 1살이라고 답하면 보석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끝일 테니까.
“……넘지 않네.”
아우릴 가비스는 내 의도를 알면서도 넘어가 주겠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솨아아아.
보석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거짓이라는 뜻일세.”
와, 그럼 300살이 넘는다고?
균열총해록 제작연도가 150년 전이라, 그냥 대충 던져 본 건데…….
무슨 이런 괴물이 다 있지?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티는 내지 않았다.
“어때, 이거면 서로 질문을 하나씩 해도 형평성에 어긋날 일은 없지 않겠나?”
“흠, 근데 이거로는 좀 그렇지 않나? 당신이 만든 물건이니 보석에서 어떤 빛이 나오게 할지 당신 맘대로 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너무나도 타당한 의견 제시.
놀랍게도 아우릴 가비스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런 건 불가능하네.”
맹세라…….
내게 있어서는 꽤 그리운 단어였다.
맹세한다 해놓고 뒤통수를 오죽 쳤어야지.
“그런 거로는 믿기 어렵다. 부모님이라도 걸고 맹세한다면 모를까.”
“부, 부모를……?”
“못하겠는 걸 보니 역시 거짓말이었던 거군.”
“그럴 리가 있나! 단지… 너무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 당황했을 뿐일세. 이미 이 세상에도 없는 분들을 어떻게 걸겠나.”
자기 이름을 건 맹세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줄은 몰랐을까?
아우릴 가비스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믿고 말고는 자네 결정이겠지만, 그래도 일단 말은 해두겠네. 방금 전 내 맹세는 사실이며, 이제 나는 이 물건이 없으면 자네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네.”
“응?”
고개를 갸웃하던 때 초록불이 떴다.
“아까 말했지 않은가. 내 권한 중 상당 부분을 이 물건 하나 제작하는 데 썼다고. 나는 이제 자네의 영혼 총량조차 읽지 못하네.”
“영혼 총량……?”
“자네가 몇 등급 정수를 가졌는지 읽을 수 없단 소리였네.”
또 초록불이 떴다.
근데 이 늙은이는 알까?
그럴수록 내가 갖고 있던 믿음이 사라지고 있단걸.
‘자기 입으로 그렇게 약점을 말하니까 더 수상해지는데…….’
진짜 조작 같은 거 해둔 거 아냐?
그렇게 늙은이를 보는 내 눈빛이 노골적으로 변해갈 때였다.
“그날 봤던 그자들은 기억하는가?”
“아까 당신이 실패작이라고 불렀던?”
“맞네. 사실 아까 말은 그리했지만, 어딜 가든 이름과 능력 하나만으로도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자들이지.”
“이름과 능력이면 두 개인데.”
“……말이 그렇단 거였네.”
“아무튼,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가?”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대화를 나눠 보는 방법은 어떨까 싶네. 그들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을 때, 이를 눈치채고 이의를 달 능력은 충분하니.”
“…뭐?”
듣자마자 진심으로 멍해졌다.
이게 무슨 원탁 데모 버전도 아니고.
Any updates? I know it’s on a break but still some more chapters r out!